* 주의! 이 글에는 영화 <반도>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반도> 스틸 컷

영화 <반도> 스틸 컷 ⓒ (주)NEW


영화 <반도>의 막바지 한 장면. 엄마인 민정(이정현)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려 한다. 비장한 그 몇 초간 내 입에선 탄식이 흘러나왔다. 생존자인 이들을 구하러 온 군인은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엄마의 결정을 "상식적인 판단"이라며 아이들을 달랜다. "상식적"이라는 말에 나는 상처받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긴박했던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죽는 게 상식적이라고? 참혹히 죽은 엄마의 희생에 빚진 아이들이 구조된 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게 엄마의 상식이라고? 웃기지 마. 그건 세상의 상식이겠지.'
 
마침내 엄마가 방아쇠를 당겼다면 나는 영화관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상식을 배반하고 죽지 않았다. 그렇게 죽는 것은(사회는 이런 희생을 지극한 모성이라 칭하지만) 아이들을 살리는 일이 아니다. 죽음(포기) 대신 엄마는 그녀를 기다리는 아이들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뛴다. 그리고 살아남는다. 아이들과 함께. 이것이 "상식적인 판단"이다.
 
물론 민정의 가족이 구조되었다고 해서, 이들을 구조하러 온 군인의 말처럼,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게 될 거라 믿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답게 살아갈 것이다. 운이 좀 따라준다면 덜 고달픈 삶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엑소더스가 곧 불행 끝 행복 시작이 아님을, 이런 판타지가 디스토피아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부산행>, 디스토피아 이후
 
영화 <반도>는 연상호 감독의 전작 <부산행> 이후에 펼쳐진 디스토피아를 전격적으로 그려낸다. 좀비가 득실대는 한국, 이들과 대치하며 대형 쇼핑몰을 기지화해 살아가는 631부대와 이 부대에서 탈출해 간신히 삶을 유지해나가는 생존자 가족을 두 축으로, 영화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줄타기하는 인간의 모습을 극과 극으로 재현한다.
 
민간인을 구조하는 군인이었던 631부대원들은 이 디스토피아에서 누구도 구조될 수 없다는 진실에 봉착하자 인간성을 망실해간다. 이들은 마땅히 구조했어야 하는 민간인을 마치, 그 옛날 전쟁에서 전리품으로 노획한 포로처럼 노리개로 다루며 몰이성한 유희를 벌인다. 그들이 이런 야수로 변한 있는 것이 단지 희망을 잃었기 때문인 걸까? 있지도 않은 희망을 설정하고, 희망이 없으니 희망이 나를 버렸으니, 그에 대한 배반으로 인간성을 소거하겠다는 으름장을 부리는 631부대의 야만은, 어째 이미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인간이 자신을 용서하려 안달이 나 억지를 부리며 면죄부를 구하는 형상이다.
 
 영화 <반도> 스틸 컷

영화 <반도> 스틸 컷 ⓒ (주)NEW

 
이들이 절망에서 불러낸 광기와 달리, 민정(이정현)의 가족은 생존을 위한 하루하루의 위태로움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는다. 스스로 온기를 꺼버린다면, 꽁꽁 얼어붙은 얼음판 위를 가로지르면서도 그 밑을 얼지 않고 흐르는 물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빙하기 같은 절망의 세상에서도 녹아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열 줄 아는 아이들은, 이를 굳이 희망이라 부르지 않으면서도 깜냥껏 좀비들과 사는 법을 익히며 살아간다. 어른은 아니지만 큰딸 준이(이레)는 지프를 카레이서가 울고 갈 실력으로 몰며 좀비를 뚫고 나가고, 아직 천진해도 좋을 둘째 딸 유진(이예원)은 모형 미니카를 솜씨 좋게 다루며 좀비들을 유인한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로서 아이다움, 소녀다움을 탈각한 이들은 이미 아포칼립스의 전사로 거듭나 있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캐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 부재인 상태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있지도 않은 '희망 찾기'라는 고문으로 스스로를 갉아먹지 않으며,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다. 절망밖에 없는 이 세상을 준이가 "내가 알던 세상도 그리 나쁘진 않았다"고 담담히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반도>는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아래 <매드맥스>)에 종종 비유되곤 하는데, 영화를 보면 그 까닭을 알 수 있다. <매드맥스>의 차 추격전에 매혹됐다면, <반도>를 강추한다. 약 20분에 달하는 짜릿한 <반도>의 카체이싱 장면 또한 <매드맥스>의 전율에 부족함이 없다. <반도>의 추격전의 수훈은 단연 큰 딸 준이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녀의 드라이빙 솜씨는 당대 최고다. 그녀는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차체를 마치 쿠션 벽처럼 혹은 탄력 방패처럼 활용하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회전용 기어처럼 다루며 폭발적인 운전술을 발휘한다. 디스토피아의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제 몫을 해낸다. 어른의 시혜나 기다리며 순진무구한 아이로 살아가기에 이 디스토피아는 적당하지 않다.
 
<반도>가 <매드맥스>를 환기시키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인데, 운전자가 소년이 아니라 소녀라는 데 있다. 물론 <매드맥스>의 퓨리오사가 소녀는 아니지만, 그녀 역시 디스토피아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녀 시절부터 한 팔을 잃는 전투를 치르며 살아남은 전사이지 않은가. 남성에게 운전대를 내놓고 목숨을 담보하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디스토피아의 여성이 살아가는 법칙이 될 수 없다. <매드맥스>의 퓨리오사에게 경의를 표하는 이라면 역시, <반도>를 강추한다.
 
<반도>의 좀비는 더 이상 가상의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영화 <반도> 스틸 컷

영화 <반도> 스틸 컷 ⓒ (주)NEW


영화 <반도>에서 은유되는 좀비라는 불가항력의 존재는 코로나가 안긴 예측불허의 이 시기의 인류에게 생존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던진다. 좀비에 쫓겨 떠도는 난민 신세가 된 <반도>의 등장인물들이 마치 보균자라도 되는 양, "너희 나라로 꺼지라"는 혐오를 당하는 장면에서, 관객은 묘한 기시감이 들며 '코로나블루'로 전격 이입하게 되는데, 아마도 이들을 경유해 우리에게 도달한 위기의식이 더 이상 가상이 아닌 현실로 목전에 와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좀비보다 더 은밀하게 침투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이미 일격을 당한 인류에게, 좀비가 더 이상 가공된 판타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좀비를 피해 겨우 몸의 안전을 확보했지만 난민인 생존자들은 결코 생활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존재를 승인받지 못하는 곳에서 이방인이 되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좀비의 삶만큼이나 고독한 일일지 모른다. 고단한 난민 신세인 등장인물의 곤경은 제주도에 입도했던 예멘 난민들의 딱했던 처지와도 겹쳐진다. 당시 허무맹랑한 찌라시들, 이들이 실업난을 부추긴다는 둥, 이들 대부분이 범죄자이며 제주도에서 성폭행을 자행할 것이라는 둥 온갖 괴소문을 생산해내며 고달픈 처지의 난민들을 더 궁지로 몰지 않았던가. 마치 자신들은 난민이라는 처지로 몰릴 운명에 놓일 일이 절대 없는 면허증이라고 가지고 있는 양 말이다.
 
하지만 좀비처럼 가시화되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침공에 인류는 허망히 무너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외국에 가 있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지인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유사 난민으로 배척당하는 위기를 목도했고, 바이러스 감염의 위험으로 '자가격리'라는 초유의 사태를 의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했으며, 확진을 받아도 병원에 입원조차 할 수 없는 막막한 돌봄의 부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의 침공에 방어벽을 구축할 새도 없이 속절없이 당하고 말았다. 약자인 난민을 큰소리치며 을러대던 타자성에 요란한 경고의 알람이 울린 것이다. 안전이 부재한 위기에 몰린 사람이 나와 아무 상관 없는 타인이 아니며, 이 심대한 위기에 처한 인류가 바로 나라는 당사자성을 자각한 것이다.
 
작은 마을에 좀비가 생겨나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이웃 모두가 좀비가 돼가는 영화 <데드 돈 다이>(2019)에서는 내 이웃이었던 좀비를 무차별 살육해야만 하는 미친 상황에 직면한 마을 보안관들의 고뇌가 그려진다. 막을 수 없는 좀비화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보안관들은, 좀비가 되었어도 '비좀비' 때의 삶의 패턴을 유지하려는 좀비들을 즉각적으로 겨누기 어려운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이를테면, 매일 드나들던 카페의 커피 맛을 찾아 들어오는 노인 좀비가 있는가 하면, 즐기던 와인을 찾아 슈퍼마켓을 뒤지는 중년 좀비가 있고, 게임이 삶의 큰 부분이었던 아이가 "와이파이, 와이파이"를 중얼대며 게임키트를 찾아 상점을 헤매고 다닌다. 좀비 이전의 친근했던 주민들의 삶을 꿰고 있는 보안관들로서는 '비좀비' 때의 취향을 잊지 못하고 그것을 제공하던 곳에 출몰하는 '취향 좀비'들을 무조건 처단해야 할 악마로 상정하기 어렵다.

게다 유령처럼 떠도는 그들의 모습에서 곧 당도할 자신의 좀비성을 발견하게 되는 딜레마에까지 처하게 되는 것이다. 좀비는 내가 모르는 타자라고 설정했기에 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좀비는 태생이 좀비가 아니다. 나의 가족이었고 친구였고 이웃이었다.
 
보안관들의 딜레마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앓고 있는 작금의 인류에게도 외면할 수 없는 딜레마이지 않을까? 해서 이후의 좀비 서사는 좀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생명체만 진화한다고 믿는 인류에게는 좀비의 진화가 언어도단이겠지만, 코로나 바이러스가 진화할 것이란 가설은 매우 과학적으로 믿어지지 않는가. 지금껏 좀비를 쳐부수어야 할 적으로 상정하고 이들과 처절한 살육전을 벌였다면, 코로나 이후의 좀비 영화는 보다 진화된 서사를 준비해도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개인 브로그 게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