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은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첫 방송 1주년이었다. 하지만 같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2020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본다. 더 잊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편집자말]
삶의 일관성을 지킨다는 말은 칭찬 같지만, 함정이기도 하다. 어떤 어려움에도 자신의 신념을 지킨다는 의미로 쓰이면 칭찬이다. 하지만 하나의 믿음에 사로잡혀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 없이, 해오던 일만 답습한다면? 가끔 일관성으로 미화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삶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삶의 경로를 적극적으로 바꾸는 사람들에게 뭐라 함부로 이야기하기 힘들다.

그들은 신념에서 오는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껍질을 깨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 것인가. 때로는 일관성을 지키지 못한 걸로 보이는 행동이 의외로 가장 그 사람다운 행동일 때가 있고, 껍질을 깨고 진화했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사실은 비겁하고 뻔뻔한 야합일 때가 있다.

대통령 비서실장 한주승, 그리고 배우 허준호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한주승 비서실장을 연기한 배우 허준호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한주승 비서실장을 연기한 배우 허준호 ⓒ tvN


< 60일, 지정생존자 > 속 대통령 비서실장 한주승은 이 이야기에서 자신의 삶의 경로를 가장 극단적으로 여러 번 바꾼 사람이다. 사법고시에 붙고, 충실하고 유능한 후배로서 공안 검사로 승승장구한다. 그러다 취조실에서 만난 양진만에게 감화되어, 사표를 내고 인권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는다. 양진만의 최측근으로서 대통령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그의 비서실장이 된다. 양진만 대통령에게 향하는 정치적 공격, 테러의 위협을 막아내고 관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그리고…

허준호 선배에게 설명한 캐릭터의 주제는 두 가지였다. '한주승은 이 이야기의 등장인물 중에 삶의 방향을 가장 격렬하게 많이 바꾼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에게 있어, 실패한 연인의 서사입니다. 그는 삶의 시간 전체와 가족까지 모두 정치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 끝나려고 합니다...'

허준호 선배는 중후한 카리스마와 비감한 페이소스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배우다. 허 선배의 얼굴과 목소리는 범상치 않은 캐릭터의 삶의 굴곡을 있는 그대로 믿어지게끔 한다. 허 선배의 얼굴에 조명을 드리우고 있자면 어떻게 저리 엄격하면서도 인자하고, 무서우면서도 슬플까 생각했다. 그게 한주승이다. 

선배는 평소에 하회탈 같은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우리 현장에선 특히 한주승의 화를 내지 않는 모습을 닮고 싶다며,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을 유지하셨다. 그 와중에 차영진 비서실장 역의 손석구씨에게서 당신의 어릴 적 모습을 발견하신 것 같다. 이리저리 가벼운 농을 던지며 드라마 얘길 많이 하셨는데, 석구씨는 뭐라 대답할지 몰라했다. 차분하게 누르며 연기하는 준호 선배와 거침없이 치고 나가는 석구씨의 연기 톤의 조합과는 사뭇 대조되는 평소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 선배가 기본적으로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인 건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1회 엔딩, 박무진을 NSC로 밀어 넣으며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찍는데, 허 선배가 무표정으로 박무진을 바라보는 모습은 무척 위압감이 있었다. 아주 만족하여 OK를 내고는, 허 선배께 말씀드렸다.

"너무 좋았습니다. 엄청 무서웠어요!" 그러자 허 선배는 갑자기 당황하셨다. "어?… 난 무진을 응원한 건데…" 이에 나도 당황했다. "아, 근데 좋았는데, 네?…" 다시 돌려본 녹화된 테이크에는 허 선배의 섬세한 연기가 있었다. 박무진이 상대할 NSC사람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한 번 보내고, 이후에 조금 풀어진 격려의 눈빛을 박무진에게 보낸다. '맞네요, 제가 미처 캐치를 못 했네요'라고 말하려는 찰나, 허 선배가 선수를 친다. "에이, 내가 봐도 무섭다! 난 안 되겠다!!" 이어지는 하회탈 웃음.

연기와 연출은 꼭 협력형 보드게임 같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합참의장 이관묵을 연기한 배우 최재성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합참의장 이관묵을 연기한 배우 최재성 ⓒ tvN


최재성 선배는 최대치이자 오혜성이다. 어떤 세대에게는 잊히지 않는 이름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 왼쪽 눈의 흉터와 철조망 키스, 눈 밭의 라스트 씬. 그리고 영화 <외인구단>의 오혜성. 어린 시절의 내게 최재성 선배는 세계에서 제일 멋있는 사람이었다. 시대의 비극과 청춘의 아이콘이었던 최재성 선배가 박무진을 압박하는 가장 강력한 적, 합참의장 이관묵이라면? 그리고 박무진의 곁에서 그 공격을 막아내는 한주승이, 그간 매체에서 강렬한 악역을 많이 해왔던 허준호 선배라면?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입장이 이야기의 종막에 가서 교차된다면? 그것이 보여주고 싶었던 큰 그림이었다. 

2회 NSC에서 한주승과 이관묵이 대치하는 씬은 내게 그래서 남다른 감흥을 주었다. 그 때는 두 선배의 기운도 남달랐다. 두 분은 1964년생 동갑내기에다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전력이 있다. 최근에는 주로 후배들과 연기하는 일이 많으셨을 터, 친구끼리 마주서자 서로 주고 받는 대사톤이 묘하게 젊어졌다. 자기보다 어린 주인공을 압박하는 유력자 역할을 넘어, 스스로의 신념을 토로하는 청춘의 얼굴들 같았다. '어른'을 연기하지 않고 '자기'의 현재를 연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기와 연출은 꼭 협력형 보드게임 같다. '연기 대결'이라는 말이 대중에게 와닿기 좋아 자주 쓰이곤 하지만 대결은 보이는 모양일 뿐, 사실은 치열한 협력의 에너지가 주고 받는 연기 속에 오간다. < 60일, 지정생존자 >를 연출하면서 즐거웠던 부분은 각 세대별로 여러 명이 등장하기에 인물들이 고립되지 않고 동 세대간 연기를 주고 받을 수 있어, 모든 인물들이 현재적으로 살고 있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굴 위해 누가 희생한다는 생각 없이, 전체 게임의 승리를 위해 나아가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서울시장 강상구를 연기한 배우 안내상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서울시장 강상구를 연기한 배우 안내상 ⓒ tvN

 
안내상 선배와 배종옥 선배 또한 1964년생 동갑이었다. 두 분은 대권 후보다. 안내상 선배가 풀어야할 숙제는 야당 대표 윤찬경의 배종옥 선배와는 또 달랐다. 삼선 서울 시장 강상구. 매우 세속적으로 보이면서도 매력 있어야 했고, 소인배로 보이면서도 대통령을 할만한 대인배적 면모도 있어야 했다. 음험한 권력가와 허당기가 동시에 있는 정치인이어야 했다. 난 이런 사람으로 안내상 선배가 아닌 다른 사람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안내상 선배는 대인배를 연기하면 매우 대인배 같고, 소인배를 연기하면 그렇게 소인배 같을 수가 없다. 

'한성별곡' 의 정조. 
'나의 신념은 현실에 조롱당하고 나의 꿈은 안타까운 희생을 키워가는데, 포기하지 않는 나는 과연 옳은 것이냐'.
 
그리고 '송곳'의 고구신.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오.'

이런 대사를 소화하는 캐릭터가, <하이킥>과 <조강지처 클럽>의 끝내주는 소인배도 해낸다. 안내상 선배는 0순위였고 감사히 수락해주셨다.

대본보다 더 인간적인 대통령 캐릭터 구축한 김갑수

NSC에서 대결한 육참총장 은희정 역의 이기영 선배와 안보실장 고영목 역의 박충선 선배도 그 나이대이시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다행히 현장 분위기가 살짝 동창회 느낌도 나면서 좋았다. 이기영 선배의 강렬한 눈빛과 발성, 그리고 박충선 선배의 피로한 목소리와 강단 있는 눈빛이 대결의 공기를 채워 넣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기 분야의 최고수인만큼, 배역의 표현에 들이는 선배님들의 에너지도 컸다. 

김갑수 선배와 우현 선배는 특별 출연이다. 원작과는 달리, 한국판에선 이 사회가 상실한 전임 대통령의 그림자가 드라마 전체를 지배한다. 그래서 구 체제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중요했다. 우현 선배는 의전 비서관으로서 대통령 양진만(김갑수 분)을 보좌한다. 두 사람은 정치적 실패 앞에서 품위있게 좌절하는 사람이다. 아니, 좌절을 품위있게 받아들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인간적으로는 좌절을 품위있게 받아들이는 것도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정치적 리더에겐 좌절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종의 결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 평화라는 일생의 신념을 향해 달리던 양진만 대통령은, 결국 그의 국회와 함께 테러로 사라진다. 양진만 대통령의 서사는 한주승이라는 오리지널 캐릭터와 함께, 한국판의 정체성을 결정 짓는다.  
 
최호전(우현 분)은 이 테러의 인간적 의미를 더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였다. 의전 행정관 박수교(박근록 분)가 느끼듯, 이 테러의 의미는 정치적 아이콘의 상실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각자의 정든 사람을 폭력적으로 빼앗아 간 거대한 사회적 재난이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양진만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 김갑수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양진만 대통령을 연기한 배우 김갑수 ⓒ tvN

 
김갑수 선배는 대본보다 더욱 인간적인 대통령 캐릭터를 구축하셨다. 원래 대본에 양진만은 서울말을 한다. 수도권 출신의 대통령이라고 설정하여 지역색을 없애고 싶었다. 하지만 김갑수 선배는 사투리와 서울말의 차이를 직접 시연하며 양진만의 캐릭터를 드러내기 위해선 사투리가 용이하다고 오히려 나를 설득했다.

언어의 억양이란 참 신기하다. 사투리는 서울말에 비해 인물의 삶의 행로와 인품의 결을 더욱 상상하게 만든다. '상경'과 '출세', '과거' 등의 개념을 떠올리게 해서 그런 걸까. 김갑수 선배의 인물 구축으로 우린 16회 내내 더욱 질기게 양진만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선배의 분량이 끝난 후에도 늘 양진만에 대한 감정은 이 드라마의 모든 등장인물들에게는 캐릭터 해석의 기준이었고 화두였다.

현장에선 우리가 이토록 선배가 구축해놓은 캐릭터를 붙들고  마음 앓이를 하고 있는 걸 선배는 아실까, 농담하기도 했다. 우린 양진만 대통령을 15, 16회 즈음에 테러 당일의 회상 씬으로 다시 소환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주승과의 가려진 씬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김갑수 선배의 갑자기 불거진 건강 문제와 수술 일정, 촬영 일정, 그리고 다급해진 우리의 준비 일정 등의 문제로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치 우화가 되길 바랐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김실장을 연기한 배우 전박찬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김실장을 연기한 배우 전박찬 ⓒ tvN


캐릭터들을 구축하면서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어떤 인물도 실제 한국 정치에서 특정 인물만을 지시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현실의 사건과 인물을 반영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면, 진영을 막론하고 세 사람 이상의 특징을 넣고자 노력했다. 그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캐릭터도 있었지만, 대체로 모든 사람의 각자 자신의 마음 속에 상실한 구체제와 혼란의 현실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투영하고 이야기를 감상하길 바랐다. < 60일, 지정생존자 >가 미드 리메이크의 외피를 썼기에, 그래서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정치 우화가 되길 바랐다.

김실장은 좀 달라야 했다. 누군지 모르겠는 자그마한 체구의 사람이 거대한 네트워크를 움직이는 핵심인물로 보였으면 했다. 그러려면 다른 등장인물과는 섞이지 않는 자기만의 톤을 가진 배우가 하면 어떨까 했다. 전박찬은 오래 보아온 연극 배우다. <에쿠우스>로 유명하지만 <맨끝줄 소년>이나 <선샤인의 전사들> 같은 연극에서도 몽환적이면서 상징적인, 그리고도 구체적인 인상을 남긴다. 전박찬의 낭송하는 듯한 목소리와 눈빛이, 김실장의 위험한 꿈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길 바랐다. 김실장 역시 공동체에 헌신했지만 버림받은 자의 서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엔 사회적 참사의 생존자로서의 김실장을 생각한 적도 있는데, 김실장의 능력과 네트워크, 한주승과의 연결지점 등을 생각했을 때 버려진 북파공작원으로 설정을 통일시켰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이경표, 일명 태익을 연기한 배우 최영우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이경표, 일명 태익을 연기한 배우 최영우 ⓒ tvN

 
태익, 이경표, 호시노 케이 등 여러 이름으로 가장 바쁘게 드라마 내에서 활약한 최영우씨는 오디션은 망쳤다고 봐도 좋은 경우다. 보통 오디션에선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영우씨는 엉뚱하게 정치인 성대모사를 준비해왔다. 오디션 동안에 계속 웃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웃고 나니 우리가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는 상태가 되었다. 예능 녹화를 하듯 웃다가 이 사람이 연기를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라는 생각이 들 때쯤 계속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는 포커페이스라는 걸 발견했다. 그렇게 태익, 이경표가 결정됐다.

이야기를 풀어가다보니 적진 테러세력에선 이경표(최영우 분), 아군에선 국정원 막내 서지원(전성우 분)의 활약이 눈부셨다. 제작 현장에선 이 배우들과 결국 이 이야기는 이경표와 서지원의 대결이라고 농담하고는 했다. 테러 그 자체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보다 테러가 정치에 미치는 파급효과를 이야기 하는 드라마라, 두 캐릭터의 능력치에 기대서 전개를 압축해야 할 때가 많았다.

유일한 키스신에 얽힌 이야기

우신영(오혜원 분) 기자와 함께 언론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김단 국장(최진호 분)이 있다. 최진호 선배를 볼 때마다 단단해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캐릭터 이름을 보자마자 선배 생각이 났다. 김단 국장은 촬영 스케줄이 가장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는 경우였다. 전체 첫 촬영을 하시고선 거의 다섯 달이나 뒤에 촬영이 있었다. 로케이션의 문제가 커서 몰아찍어야만 했는데, 좀체 풀리지가 않았던 게 이유였다. 다른 스케줄도 많으셨기에 걱정 말고 계시라고 했지만 배우 입장에선 또 불안하셨던 것 같다. 이게 효율 측면에서만 보자면 적은 촬영 일수로 최대 회차를 소화하니 배우에게 유리한 경우에 가까운데, 또 오래 떨어져 있으면 소속감 측면에선 불안한 할 수도 있다. 다섯 달만에 현장으로 달려오는 선배를 보는데 나는 어찌나 엊그제 보고 다시 보는 것 같던지. 
 
국정원 요원 김준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국정원 요원 김준오를 연기한 배우 이하율

▲ 국정원 요원 김준오 < 60일, 지정생존자 >에서 국정원 요원 김준오를 연기한 배우 이하율 ⓒ tvN

 
마지막으로, 또 특별히 신경을 썼던 인물은 한나경의 실종된 약혼자 김준오 역을 맡았던 이하율씨다. 청년 김준오는 담백하게 공동체에 헌신하는 사람이다. 김준오의 존재는 정략에 찌든 정치 세계와 무거운 헌신의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고픈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김준오 역시, 미국 드라마와는 다른 오리지널 캐릭터로서 이 드라마의 정신적 뼈대를 담당하는 지점이 있다. 

김준오를 캐스팅할 때 난 최소 인풋 최대 효과의 배역이라고 농담했다. 존재감은 계속 있는데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뒤에  확실하게 자신을 드러내게 될 거라고 약속했다. 이하율씨는 KBS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의 주인공이었다. 그 때 이하율씨의 얼굴을 보면서 어쩜 저리 반듯하고 건실하게 생긴 사람이 있나 싶었다. 그 반듯한 얼굴로 오디션에서 오영석의 추도식 연설 장면을 열정적으로 소화하는 모습을 보고 김준오로 낙점했다.

하율씨가 현장에 올 때마다 연출자로서 현장의 문제들에 골머리를 썩을 때가 대부분이라 섬세하게 챙겨주지 못했음에도, 이야기 중간 중간에 투입되는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가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김준오는 도망자이기 때문에 보다 격렬하고  불안하게 표현될 수도 있는 배역이다. 그런데 이하율씨는 차분하고 담담한 성품이었다. 그 성품이 김준오에 반영되자, 보다 단단한 신념을 가진 로맨틱한 연인으로서의 김준오가 떠올랐다.

이하율씨는 강한나씨와 함께 이 드라마의 유일한 키스 신을 가져갔다. 2회 한나경 회상 속 둘의 첫 키스 신이다. 두 사람은 오랜 연인 설정임에도 정작 드라마 내에서 같이 연기를 할 시간이 너무 적어, 서로 감정을 쌓지 못해 연기로 반영이 안 될까봐 연출로서는 걱정되었다. 그래서 어색한대로, 초반 촬영 장면에 회상 키스 신이 있는 것이 오히려 서로 친해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다. 두 사람은 키스 신을 찍고 더욱 수줍어져서 각자 자기 연기를 최선을 다해 하고는 서로 내외했다.

그 뒤 생사를 오가는 감정신을 찍을 때도, 두 사람은 조신하게 서로를 배려하며 각자의 감정을 표현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 고지식한 김준오와 한나경답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이야기 속 인물들이 가진 사랑의 크기가 너무 크고 비극성이 너무 짙어서, 현실의 친소 관계가 캐릭터로서의 연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두 배우는 자신의 캐릭터가 가진 숭고함에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줬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은 결국 모든 촬영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 이르러서야 편안하게 말을 주고 받으며 친해졌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연출자입니다. 이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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