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글에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메인 포스터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메인 포스터 ⓒ 씨나몬(주)홈초이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하 <밤쉘>) 포스터에는 세 명의 백인 여성이 등장한다. 메긴(샤를리즈 테론), 그레천(니콜 키드먼), 케일라(마고 로비)가 영화 전개의 주축이다. 왜 백인들만 주연인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슬로건으로 인종 차별 철폐 시위가 연일 이어지는데, 같은 비(非)백인으로서 '이 시국에' 백인들만 나오는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달갑지 않을 법하다.

<밤쉘>은 2016년 미국 보수언론 '폭스(FOX)'의 여성 앵커들이 CEO 로저 에일스를 성희롱으로 고소한 실제 사건을 다룬 영화다. 첫 고소인이 백인 여성인 그레천 칼슨이었기 때문에 영화로 재구성할 때에도 같은 인종의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밤쉘>은 단순히 실제 사건에 충실하기 위해 백인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세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제목이 왜 '밤쉘(bombshell)인지, 왜 백인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어야 했는지 명확히 설명한다.

'밤쉘'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폭탄선언', '매우 충격적인 소식'이다. 영화의 부제가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아주 섹시한 금발 미녀'다. 왜 이런 뜻이 다의어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첫 번째 뜻보다 두 번째 뜻이 더 많은 시사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국에서 백인은 확실한 기득권층이다. 더군다나 미국 제1보수언론인 폭스의 앵커라면 백인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이라는 말은 성폭력 피해 여성을 권력자의 위치로 끌고 와 그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효과를 낳는다.

영화에서 트럼프에게 여성혐오 발언을 들은 메긴이 "난 기득권층 아닌데"라고 말하자 남편 더그는 "정신 차려. 당신 기득권층 맞아"라며 일침을 놓는 장면이 예시이다. 같은 백인이지만 이 방송국에서 여성 앵커는 남성 앵커보다 더 많은 것을 강요당한다. "TV는 시각 매체"라는 명목으로 모든 여성 앵커들이 미니스커트를 입도록 하고, 훤히 드러난 그들의 다리를 클로즈업해 시청률을 올린다.

신입 여성 앵커는 로저 앞에서 한 바퀴 돌아 몸매를 보여주는 것이 통과 의례이며, 포스터에 등장하는 주인공 중 케일라는 로저에게 위계 강간을 당한 사실을 동료에게 울면서 털어놓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기득권층이면, 유명 언론사에서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얻으면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백인 남성 앵커들은 왜 회장 앞에서 몸매를 보여주지 않는가? 그들 역시 기득권층이고 유명 언론사에서 일하는 덕에 부와 명예를 얻는데 말이다.

폭스 앵커들의 위계 성폭력 피해는, 일상적인 성희롱과 강제 추행이 기득권층 여성이 얻은 부와 명예의 '대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남녀를 떠나 권력자-피권력자 사이의 위계가 성범죄의 원인"이라고 말할 때 나타나는 허점이다.

영화 속 여성 앵커들은 단독 진행자 자리를 두고 경쟁한다. 남들보다 앞서가기 위해 더 높은 힐을 신고 브래지어에 패드를 추가하며 '자발적으로' 섹시한 앵커가 된다. 케일라 역시 승진 기회를 엿보다 우연히 로저의 개인 사무실에 방문한 후 지속적인 성폭력을 당한다. 또 로저가 그레천에게 고소당한 후 한 여성 직원은 로저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담긴 티셔츠를 동료들에게 나눠주며 그를 두둔한다.

영화는 그 '자발성'을 꼬집는다. 로저에게 혐의가 없기 때문에 그를 응원하고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밥줄'을 끊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남성 권력자이기 때문에 감히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폭력을 당한 후에도 연락을 계속하거나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일하는 등 여성 피해자들의 행동은 생존하기 위한 방어 기제일 뿐 결코 가해자와의 '합의'가 아니다.

<밤쉘>의 원제는 < Bombshell >이다.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이라는 부제는 국내로 수입할 때 원제를 설명하는 목적으로 붙은 듯하다. 애석하게도 영화의 결말은 여성들의 성범죄 피해 고발이 세상을 "바꾸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실제로 로저 에일스는 그레천 칼슨의 고소 후 혐의를 부인하다 숨어 있던 피해자가 하나둘 목소리를 내자 결국 CEO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바뀐 운영자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성지향성을 드러내도 되고 바지를 입고 출근해도 되는, 조금 더 나은 회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영화는 끝나지만 현실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권력형 성범죄의 피해자인 서지현 검사와 김지은씨가 오랜 시간 가해자의 처벌을 위해 싸워 왔지만 다른 곳에는 여전히 피해자가 존재했다. 대한민국 수도와 제2도시의 수장 자리가 모두 공석인 이유다. 여성 노동자의 '밥줄'을 성범죄의 빌미로 삼는 짓은 언제쯤에야 끝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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