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은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첫 방송 1주년이었다. 하지만 같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2020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본다. 더 잊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편집자말]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국정원요원 한나경 역할 맡았던 배우 강한나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국정원요원 한나경 역할 맡았던 배우 강한나 ⓒ tvN

 
네덜란드 소년.

둑에 난 아이 팔뚝만한 구멍으로 바닷물이 넘쳐온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어른을 불러오는 동안 구멍이 커져 둑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네덜란드 소년은 자신의 팔뚝을 밀어넣어 둑을 막는다. 살아가다 보면 가끔 네덜란드 소년이 될 수밖에 없는 때를 만난다. 나는 미숙하기 그지없는데, 공동체의 운명이 달린 어떤 일을 해낼 사람이 하필, 마침 나밖에 없는 경우. 국정원 요원 한나경이 그런 경우다.

결혼을 앞두고 테러로 약혼자가 실종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유가족의 정체성에 머무를 수 없다. 테러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그녀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직의 도움을 받기에는 아무도 쉽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나경은 이제 자신의 팔뚝을 둑 속으로 밀어넣어야 한다. 위로를 받기만 해도 부족할 그 순간에. 

매기 큐가 연기한 원작의 한나 웰스는 연륜 있고 유능한 FBI요원이었다. 그러나 한국판의 한나경은 그렇게 능숙하지 않았으면 했다. 한나경을 움직이는 건 연인으로서,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소명 의식이다. 한나경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지 않고 부족한대로 전진하는 호랑이다. 그 자리에  맑고 밝은, 예상보다 어린 얼굴이 오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게 강한나씨였다. 

한나씨와 나는 한나경을 상상하며 '풀 같은 아름다움'이 느껴졌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강한나씨는 한나경이 짊어진 비극성이 이 이야기에서 가장 크고 무겁다는 것을, 하지만 결코 자기 연민으로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실제의 한나씨는 매우 밝은 성격에 모든 순간에서 유머의 가능성을 포착하는 재치가 있다. 현장에선 최애 개그맨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밝음으로부터 한나경의 진중함으로 진입하는 과정이 늘 신기했다. 평소에 진 빼지 않고 힘을 쓸 때까지 컨디션을 조절하는 운동선수를 보는 느낌이랄까.

한나경과의 공통점도 있는데, 엄살이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 내에서 계속 뛰고 구르며 액션을 해야 했는데, 무술감독님으로부터 그간 작업해온 여자 배우 중에 액션 소화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스턴트 대역이 지도해주며 대기했지만, 최종 화면에 담긴 거의 모든 액션 장면을 결국에는 직접 해냈다. 그렇게 씩씩한데, 제작발표회에서는 사시나무 떨 듯 떤다는 게 이런거구나 싶은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 매력도 있었다. 

첫 만남부터 대통령 욕심을 낸 배종옥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야당대표 윤찬경 역할 맡았던 배우 배종옥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야당대표 윤찬경 역할 맡았던 배우 배종옥 ⓒ tvN

배종옥 선배가 처음 촬영장에 나온 날, 야당대표 윤찬경의 착장을 마치고 현장으로 걸어오시는데 갑자기 심장이 커피 세 잔을 거푸 마신 듯 뛰기 시작했다. 그간 일해오면서 느끼지 못한 감정이라, 스스로도 좀 웃겼다. 선배는 내 유년의 스타다. 그리고 강하고 유능한 권력가의 모습에 너무 적절하게 들어맞았다. 선배는 "윤찬경은 매력적인 캐릭터라 캐스팅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말하며 기운을 북돋워주셨다.

그리고 첫 만남부터 대통령 욕심을 내셨다. 서울 시장 강상구 역의 안내상 선배와 만날 때마다, 두 분은 초등학생처럼 '내가 대통령 할거야', '아니야 내가 할건데?' 하면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으로 주변에 웃음을 안겼다. 카메라가 돌기 직전엔 이것 저것 최종 확인을 하느라 현장이 잠깐 산만해질 때가 있는데, 그동안 미소로 주변 상황을 경청하시다 손뼉을 짝 치며 '자, 이제 찍자!'라고 외치는 모습이 늘 힘이 되고 멋있었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권행대행 박무진의 배우자이자 인권변호사 최강연 역을 맡았던 배우 김규리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권행대행 박무진의 배우자이자 인권변호사 최강연 역을 맡았던 배우 김규리 ⓒ tvN


권한대행 박무진의 아내, 인권변호사 최강연으로서의 김규리씨는 박호식CP의 생각이다. 최강연은 박무진과 친구같은 캐릭터이길 원했기에 규리씨는 어려보여 처음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같이 선 장면을 상상하니, 갑자기 이 둘이 어떻게 만나게 됐을까가 궁금해졌다. 두 사람의 서사에 꼭 필요한 지점이었다. 개인적으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의 규리씨 모습이 여전히 생각나 중학생 엄마로 안 보이는 것이 계속 걱정이었다. 그런데 중2 시완 역의 남우현 군(촬영 당시 고1)이 규리씨가 자기 엄마보다 두 살 위라고  말하는 순간, 근심이 사라졌다. 그만큼 시간이 지난 거였다.

박무진이라는 중년의 남성의 정체성과 서사에, 아내의 존재가 결정적인 역할을 미쳤으면 하는 것이 나와 작가님의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게 현실과 가깝다. 각자 독립적이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또 신뢰와 우정으로 맺어진 관계. 규리씨의 최강연은 따로 또 같이 선 무진 부부의 모습에 잘 맞았다. 다만 원작과는 달리, 영부인이 아닌 권한대행의 배우자이기에 정치나 테러 관련 플롯에 깊이 개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권한 대행의 배우자라는 이유로 정치력을 갖게 된다면 그건 박무진이 정치인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증거가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강연은 박무진의 정체성을 양분하는 상징적 중요도는 크지만 실제 활약상은 적을 수밖에 없는, 그런 지점에선 오영석 역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야기에서 최강연이 부상하면 박무진의 사적 고뇌가 짙어지며 오영석이 등장할 여지가 없다. 반면 오영석이 활약하면 박무진의 정치적 고뇌가 깊어지며 최강연이 등장하기 힘들어졌다. 

"진영 논리가 왜 나쁘죠 정수정 행정관?"
 
 왼쪽부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 정수정 역할을 맡은 배우 최윤영, 대변인 김남욱 역할을 맡은 배우 이무생, 기록비서관 민희경 역할을 맡은 배우 백현주.

왼쪽부터 청와대 제1부속비서관 정수정 역할을 맡은 배우 최윤영, 대변인 김남욱 역할을 맡은 배우 이무생, 기록비서관 민희경 역할을 맡은 배우 백현주. ⓒ tvN


박무진을 따라온 사람의 활동 범위가 원작에 비해 제약이 생긴다는 점에선 정수정(최윤영 분)도 마찬가지다. 기댈 데 없는 권한대행을 위해 같이 일하던 사람과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배려 선상에서 정수정의 청와대 입성이 이루어졌으므로, 정수정 역시 정치력을 과하게 가지기는 어렵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 혹은 존재감을 지켜 가는 것이 두 캐릭터의 과제였다.

정수정의 경우, 박무진에 대한 인간적인 신뢰와 존중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되 아주 조금의 성적 긴장감도 표현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이, 기본적으로 배우들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라 같이 서 있거나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관계나 서사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욱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감과 감사를 깔고 가지 않는가.

그런데 진희 선배와 윤영씨는 연출이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그 지점을 너무나 정확히 알고 표현해주었다. 눈에 확 들어오며 칭찬받는 부분은 아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연기를 절제했기에 캐릭터가 살아나는 부분이다. 무진에게는 강연이, 수정에게는 영진과 남욱이 이야기 내 파트너의 위치로 종종 보여지는 일은 무진과 수정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민희경 역의 백현주 선배는 몇 년 간 연극 무대에서 뵈온 분이었다. 극에서나 매체에서나 주로 노역 설정, 혹은 서민 설정 배역을 자주 연기하곤 하셨는데, 카리스마 넘치는 캐릭터도 충분히 소화할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연극 <비평가>에서의 근엄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통해 민희경 역을 확정했다.

3회 "진영 논리가 왜 나쁘죠 정수정 행정관?"은 정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민희경의 명대사다. 그리고 그 씬은 백현주 선배를 통해 완성되었다. 민희경이 민정수석 안세영(이도엽 분)과 짝을 이루어 시청자에게 제시되면 어떨까했다. 박무진에게 갈등을 일으키는 실력자들이기도 하고, 카리스마와 코미디를 오가는 캐릭터들이기도 하기에. 그렇게 '청와대즈'의 시니어 그룹이 완성되어 갔다.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청와대 출입기자 우신영 역할을 맡았던 배우 오혜원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에서 청와대 출입기자 우신영 역할을 맡았던 배우 오혜원 ⓒ tvN


우신영 기자역의 오혜원은 산더미처럼 쌓인 프로필 파일에서 건져냈다. 장편을 준비하는 기간엔 연예기획사의 배우 프로필 파일들이 높이 쌓이곤 하는데, 사실 프로필을 뒤적거리며 캐스팅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 배우들의 현재 스케줄이나 연기력, 실제 이미지 등을 어떻게 프로필 사진만으로 알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날 잡아 연출부와 프로필 파일을 뒤졌다.

오혜원씨를 보자고 한 이유는, '너무 멋져서 남자들이 못 덤빌 것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가 느껴져서 였다. 하지만 캐스팅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CF 경력이 워낙 많고 연기 경력은 거의 없었다. 이미 한 분야에 일가를 이뤘다면 이룬 입장인데 굳이 연기에 의욕이 별로 없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혜원씨는 예상대로 근사했고 예상을 넘어서는 열정을 보여줬다. 민희경의 '진영논리' 대사를 몰입해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우신영 기자로 마음 속에 낙점했다. 초기 오디션 멤버 중 하나였는데, 최종 캐스팅을 할 때까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딱 어울리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건 최강연을 보좌했던 김은주 역할의 송유현 씨를 봤을 때도, 서울시장을 보좌하는 장비서 역의 김나미씨를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캐릭터 표현의 여지가 크지 않은 분량 속에서도 캐릭터의 유능함을 표현하며 존재감을 남길 수 있는 배우들이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연출자입니다. 이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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