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글자 그대로 매일 매일이 좋은 날이란 뜻이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흔히 뒤따라오는 말이 있다. 인생 언제나 좋을 수 만은 없다고. 맞다. 그걸 부정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다만, 내가 일일시호일을 물흐르듯 받아들이게 되는 날이 오면, 그 때 누군가의 자조 섞인 그런 말에, 조언하지 않으면서도 살며시 미소지으며 감싸 안아줄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 것만 같아서다. 영화 <일일시호일>은 그렇게 내게 왔다. 하필 간신히 힘내어 기다렸던 것과, 예상치 못했던 반갑지 않은 상황이 동시에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었던 그 날 말이다.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우선 영화 얘기부터 하려고 한다.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속 주인공 노리코가 '일일시호일'의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 대학 졸업 후 글을 쓰고 싶어 출판사에 취직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은 노리코는 엄마의 부추김에 못이겨 다케시 선생님으로부터 다도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 사이 출판사 시험도 치르지만 결과는 불합격. 이름으론 듣기 좋은 프리랜서로 살아간다. 다도를 같이 배우던 동갑내기 사촌 미치코가 직장생활을 거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정착하는 과정을 보면서는 덥석덥석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 같아 신기할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오랫동안 사귄 남자친구의 배신을 알게 된 노리코는 아무 일 없던 듯 덮어버릴까 했지만 결국 고민을 떨치고 일어나 다시 차를 마시러, 다도를 배우러 간다.

다도는 어느새 그녀의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따뜻한 물이 떨어질 때와 찬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될 만큼. 서른이 넘어 집에서 독립해 살아가는 노리코는 어느 날 근처에 왔다며 전화를 건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못하는데, 며칠 후 벚꽃이 활짝 핀 4월, 아버지는 그녀를 떠나고 만다. 슬픔을 참기 힘들었던 그녀는 다도 선생님인 다케시를 찾아간다.

슬픔에 익숙해진다는 것

젊은 시절 자신이 존경했던 스승의 죽음이 인생의 큰 상처가 되었던 다케시는 비오는 봄 마루에 앉아 노리코에게 말한다. 자기를 탓하지 말라고.
연극의 마지막처럼 벛꽃이 춤추고 있었다.
인생의 일이란 언제나 갑작스럽다.
예나 지금이나 마음의 준비는 못한다.
시간을 들여가며 슬픔에 익숙해질 수밖에...

죽음에는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인간의 운명. 그래서 슬픔에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걸, 가까운 사별 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아직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실은 두렵기도 하다. 얼마의 시간을 들이면 슬픔에 익숙해질까. 잘 익숙해지지 않기에 우리는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다른 많은 감정들로 시간을 채우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문득 어떤 사물이나 기억에 배어 있는 죽은 이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때라도 그때는 좀 더 의연하게 슬픔을 대면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정도면 슬픔에 익숙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이 슬픔이 오래된 화석이 될 때까지 기다려 떠오르면 떠오른 채로 잊혀질 땐 잊혀진 채로 그냥 두어야만 하는 것 아닐까. 그냥 같이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자책 대신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노리코는 비 오는 바닷가 저편에 서 있는, 다가갈 수 없는 아버지를 바라본다. 노리코는 울부짖는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노리코가 미안하다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노리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고맙다 였다. 그저 흘려보낼 수 있었던 대사였지만 내겐 좀 특별하게 다가왔다. 슬프지만 자책하며 아버지를 보내지 않기 위해 그랬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고맙다고 고맙다고 반복해서 부르짖어도 저 멀리 서 있는 아버지에게 한발자국도 다가설 수 없지만, 그래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춤추는 바람 인형 같은 그녀의 모습은 아버지를 보내기 위한 그녀만의 특별한 의식이었을 것이다. 노리코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매일이 좋은 날이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느 날, 노리코는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다도실의 벽에 붙어 있던 '雨聴'(우청)의 두 글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빗소리를 듣는다.
비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는다.
오감을 동원해 온몸으로 그 순간을 맛본다
눈 오늘 날에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매일이 좋은 날이란 그런 뜻이던가!

노리코는 살며시 미소짓는다. 온몸으로 순간을 맛보는 일. 그것이 매일이 좋은 날이라는 걸. 깨달음의 미소란 이토록 아름답다. 겨울의 다도를 배우기 위해선 여름의 다도를 잊어야 한다. 머리로 외우는 것이 아니라 손이 알아서 다도를 행해 나갈 때까지 그저 지금에 오롯이 집중해야 하는 일. 그건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덥고 추운 계절적 감각을 그대로 살려서 살아가는 것과 결국 똑같다.

매일이 좋은 날이란 건 결국 흐르는 시간과, 보이는 공간과, 펼쳐진 상황과, 내 옆의 사람에게, 나의 오감과 마음을 다해 감응(感應)하는 바지런함을 나눠 쓰는 일이라는 걸, 나는 또 부담스럽게도 배우고야 말았다.

금세 알 수 없는 것들을 기다리며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영화 <일일시호일> 한 장면. ⓒ 영화사 진진

 
시간이 또 흘렀다. 노리코가 다도를 시작한 지 이십년. 여든이 넘은 다케시 선생님은 이렇게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라며 노리코에게도 다도를 가르치는 일을 권한다. 사십대가 된 노리코는 이제 '진짜' 시작할 때임을 직감한다.
세상에는
금방 알 수 있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
금방 알 수 있는 건
지나가도록 두면 된다
그러나 금세 알 수 없는 것은
오랜 세월을 거쳐 조금씩 깨달아 간다
어릴 땐 이해 못했던 펠리니의 영화 '길'에
지금의 내가 하염없이 눈물을 쏟듯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지도 모르겠다
  
   
 
노리코의 다부진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이 마지막 장면에서 정말로 예상치 못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영화는 끝이 났는데,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이 눈물 여행의 시작지를 찾고 싶었다.

바로 얼마 전 나는 엄마와 주부라는 현실적 위치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나의 꿈(글쓰기 작가가 되는 것이 나의 꿈이다)을 준비하기 위해 새로운 모임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몸의 신호를 거부할 수 없어 중도하차도 아닌 초반하차를 해야만 했다.

코로나19 이후 아이와 반강제로 갇혀 살았던 반년의 시간을 뚫고 다시 한번 밖으로(온라인 세상으로라도) 나가보려 했는데 그런 나의 시도는 좌초됐다. 병원을 들락날락하던 며칠은 멍했다. 몸에 기운도 없었지만 마음 속 서운함이 더 컸다.

조금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해 보자면, 지난겨울 아이의 아토피가 재발하는 바람에 나는 2년간 하던 일을 중단했다. 일을 중단할 때만 해도 잠정적이었는데 곧바로 닥친 코로나19는 나를 아예 가정주부로 고착화시키고 말았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반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이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내가 그토록 어려워했던 '나 자신을 찾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다시 도졌다. 코로나19는 끝이 보이지 않고 나는 이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신감도 떨어졌다.

그나마 붙잡고 있던 건 글쓰기였다. 혼자 블로그를 열어 놓고 억지로라도 끄적끄적 댔다. 조금이라도 뱉어내면 마음에 어떤 해소되는 감정같은 게 채워지곤 했다. 그러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글쓰기 모임을 알게 됐다. 이름과 참가 이유 같은 몇 줄만 적어 신청서를 제출하고 입금만 하면 되는데, 일주일 넘게 끙끙거렸다.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글은 쓸 수 있을까. 아이의 방해를 물리치지 못하면 어쩌나. 신청해 놓고 제대로 못하면 어떻게 하나 오만가지 걱정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나이 많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마흔 고개의 절반을 넘어 오도록 이런 결정이 힘들어 혹여 아무 선택 조차도 하지 않을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그건 내 자신에게 비겁해지는 길이니까. 이 때 만큼은 내 나이가 부끄럽고 무거웠다.

기다'려야만' 오는 '진짜' 시작

'진짜 시작'이라는 단어에 얹어진 노리코의 옅은 미소는 나에게 더할 나위 없는 진솔한 위로였다. 내가 처한 이 기막힌 타이밍은 어쩌면 금세는 알 수 없는 것에 해당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노리코처럼 나는, 지금보다 어렸다면 이해할 수 없었을 이 영화를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지금에서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영화를 본 후 나는 내가 이번에 왜 아팠는지 그 이유를 알았다. 내 내면의 밑바닥에 말라붙어 있던 자존감과 용기의 찌꺼기들을 박박 긁어내느라 내 몸과 정신의 에너지를 과하게 썼던 탓이라는 걸. 의학적 병명은 대상포진이지만 나는 마흔 중반 아줌마의 찌질해도 귀여운 성장통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그 바람에 인생영화 목록에 기꺼이 올릴 영화를 알아보게 됐고, 생각지도 못했던 글쓰기의 소재도 만났다. 며칠 계속 맞아야 하는 주사를 또 맞으러 가는 오늘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일일시호일의 첫날. 그래서 나는 글을 또 쓴다. 내 상상이지만, 노리코는 내게 이렇게 말해줄 것 같다. 모임이 시작이 아니라, 지금 쓰는 이 글이 '진짜 시작'이라고.

기다'려야만' 오는 것들이 있음을 이젠 알겠다. 물론, 무작정 기다리진 않는다. '진짜' 시작을 내가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내 할 일을 계속하면서, 온몸으로 순간순간을 느끼면서 말이다. 좋은 건 나눠 갖고 싶은 법. 풀리지 않는 인생의 어느 한 언저리에 있을 사람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매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자, 엄마인 사람 입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