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장면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트럼프와 설전을 벌인 폭스뉴스의 간판 앵커 '메긴 켈리(샤를리즈 테론)'는 트럼프의 계속된 트위터 공격으로 화제의 중심에 선다. 그녀는 트럼프의 공격에 대해 폭스뉴스의 회장인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가 자신을 보호하기는커녕 자신을 이용해 화제성을 유지하려 하는 것에 불만을 품는다.

한편, 폭스뉴스의 앵커로서 스타덤에 오르겠다는 야망에 불타는 '케일라 포스피실(마고 로비)'은 로저 에일스에게 접근하다 그에게 성폭력을 당하고 고통에 시달린다. 때마침 메긴의 동료이자 케일라의 상사였던 그레천 칼슨(니콜 키드먼)은 수년간 이어진 로저 에일스 회장 성희롱 건을 고소하고, 세 여성은 조금씩 '언론 권력의 제왕'인 로저 에일스를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많은 여성 영화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경험하는 차별이 어떠한 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지를 고발한다. 더 나아가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이 어떻게 연대해서 맞설 수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도 전달한다. 2018년에 있었던 폭스뉴스 스캔들의 실화를 기반으로 한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역시 마찬가지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폭스뉴스 사옥 건물을 중심으로 여성 억압의 사회구조적 측면을 부각하면서 여성 운동의 진정한 목적을 다시금 일깨우는 영화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밤쉘>은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뉴스 채널인 폭스뉴스의 사옥 구조를 메긴 켈리의 입을 빌려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얼핏 봤을 때 이 장면은 그저 영화 전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공간적 배경에 대해 미리 정보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메긴의 설명을 다 듣고 나면 폭스뉴스의 사옥은 그 자체로 어떻게 여성들이 차별받고 억압당하며 조종당하는지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그 의미가 변한다. 

사회적 구조가 낳은 비극, 로저 에일스의 성추행

수많은 보수 일간지들과 여러 사무실들이 밀집되어 있는 건물 구조를 설명할 때 영화는 세 가지를 강조한다. 폭스뉴스의 오너인 머독의 사무실이 8층이라는 것, 회장이자 사실상의 편집장 로제 에일스의 사무실은 2층에 위치한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실무자들이 일하는 장소는 대부분 지하에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건물 구조는 남성 중심적 사회의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우선 남성들이 장악한 권력은 건물의 지상에 있는 반면, 그 권력의 피해자인 대다수의 여성이 건물 지하에서 일하는 모습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유리 천장의 또 다른 버전이다. 또한 오너 일가에 비해 회장의 사무실이 현저히 낮은 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로저 에일스의 성추행이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구조가 낳은 비극임을 암시한다. 

작중 그레천 칼슨의 폭로가 폭스뉴스 회사 내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은 위의 권력 구조, 곧 건물 구조에서 조금 벗어나지 않는다. 2층에 위치한 폭로 당사자인 로저 에일스는 자신이 여성들을 고용하고 스타로 만들었음을 강조하며 지하에서 일하는 여성 직원들로 하여금 자신을 옹호하는 변명을 외부에 늘어놓도록 지시한다. 미디어 업계 종사자라는 특성상 상하 관계가 분명하고, 폭스뉴스의 악명이 높아서 다른 미디어로 이직하는 것도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를 악용하는 것이다. 이는 로저에게 성추행을 당한 메긴이 자신의 경력, 생활비, 자녀들의 교육비 등 현실의 무게 때문에 그 사실을 공개해 그레천의 편의 서는 것을 망설이는 것처럼, 적지 않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쉽사리 고발에 나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하지만 영화는 여성들을 이용하는 로저 에일스 또한 이용당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진짜 원인은 그가 아님을 강조한다. 8층에 자리 잡은 머독 일가는 로저와 지속적으로 마찰을 일으킨 바 있고, 이에 그를 내쫓기 위해 그의 성추문 폭로를 이용한다. 그가 막대한 이윤을 남길 때는 성추행에 관심도 없었으나, 그가 회사에 불이익이 되는 순간 내쫓는 것이다. 그래서 케일라는 루퍼트 머독이 로저를 회사에서 내보낸다는 공지를 할 때 과감히 회사를 때려치운다. 진정한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작중 지하와 지상, 지상 2층과 8층이 강조된 폭스뉴스의 사옥은 현실 속 여성차별의 사회구조적 원인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영화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 그린나래미디어(주)


이렇게 건물 안에 깃든 여성 차별의 구조적 원인을 지적한 후 영화는 이에 맞서는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의 상징으로 엘리베이터를 등장시킨다. 작중 인물들은 수직의 구조로 이루어진 폭스뉴스 건물의 각 층들을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오가는데, 특히 영화는 케일라, 메긴, 그리고 그레천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엘리베이터(Elevator 혹은 Lift)의 가장 큰 특징이 이름에서 드러나듯 올라가는 기능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 연출은 그 자체로 세 여성 모두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건물과 폭스뉴스의 구조에 반대한다는 점을 멋지게 표현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세 여성이 그 안에서 서로의 상황을 눈치채고 이후 은연중에 협력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 엘리베이터 장면은 여성 간의 연대를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엘리베이터에 탄 세 캐릭터가 의미하는 바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겉만 보면 셋은 다 같은 금발머리 여성(Bombshell, 밤쉘은 금발 여성을 뜻하는 어휘이기도 하다) 일뿐이다. 하지만 사회의 위계질서를 함께 거슬러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는 청년, 중년, 장년의 서로 다른 여성이 타 있다. 가장 어린 케일라는 성추행을 당했는지 묻는 메긴에게 그녀 역시 자신을 힘들게 하는 기득권층에 불과하다고 쏘아붙인다. 반면에 중년에 접어든 메긴은 그녀 역시 남성 상사가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다며 억울함을 역설하고 분을 표출한다. 장년 여성인 그레타는 그녀처럼 성추행을 당한 여성들이 숱하게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자신이 더 일찍 나서지 못한 것을 자책한다. 

실제로 작중 케일라, 메긴, 그레타는 서로 간에 믿음이나 신뢰가 거의 없다. 케일라가 메긴을 비난하는 것처럼 그레타는 메긴이 자신과 뜻을 같이 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메긴 역시 로저의 성추행을 폭로한 후이지만 그레타와 별다른 인사를 나누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이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는 장면은 더더욱 <밤쉘>이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여성 운동의 지향점이 드러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민 끝에 변호사에게 증언하던 메긴이 자신 외에도 20여명이나 되는 피해자의 존재를 깨닫고 놀라듯, 영화는 비록 현실적으로 각기 다른 이유와 목적이 있다 해도 여성들이 연대할 때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영화의 주제의식에 악영향을 끼치는 장면

그러나 건물의 구조를 활용해 여성 영화로서의 주제의식을 적절히 제시하는 것과 별개로, <밤쉘>은 호불호가 명확히 나뉠 만한 영화이기도 하다. 우선 여성이 피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과 여성들이 연대해서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제시된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웃기고 있네 여자들이 바보야? 누가 네 옷을 벗겼는데 그걸 증명하라며 나체로 걸으란 소리잖아"라고 외치는 메긴의 대사가 대표적인 예시다. 이 대사는 그 짜릿함과는 별개로 건물을 메타포로 진행되는 영화의 흐름에서 과유불급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 외에도 피해 여성들의 음성을 직접 들려주거나 작중 캐릭터들이 카메라를 빈번하게 직접 들여다보는 연출은 사건의 무게를 더해주지만 동시에 본래 의도와는 달리 극 영화와 다큐멘터리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줄 수도 있다. 

또한 작중 등장하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향한 신랄한 비판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가리는 악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 비하적 혹은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고, 여성 영화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트럼프를 향한 집요한 비판은 자칫 여성 차별의 문제를 특정한 개인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밤쉘>이 여성에 대한 성범죄가 특정 개인이 아닌 구조적 원인에서 발생한다고 비판하는 영화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영리하지 못한 연출이다.  
 
폭스뉴스의 CEO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 네이버 영화 '밤쉘' 소개 중 스틸컷

▲ 폭스뉴스의 CEO 로저 에일스(존 리스고) 네이버 영화 '밤쉘' 소개 중 스틸컷 ⓒ 그린나래미디어

 
사실 영화의 주인공이자 로저 에일스의 성추행 사건의 판을 뒤바꾼 메긴 켈리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도 아랑곳않지만 "부부 간 강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정보에는 흥분한다. 로저가 자신과 다른 동료들에게 성공의 기회를 주었다고 인정하면서도 폭스뉴스가 직장 내 성희롱을 방관한 것에 대해선 미국 민권법 제7조에 의거해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현실의 그녀 역시 "예스 민즈 예스(Yes means Yes)" 운동이 남성 혐오적이라고 평하는가 하면, 블랙페이스(백인이 얼굴을 검게 칠해 흑인 분장을 하는 것)가 인종차별이 아니라고 말했다가 이직한 회사에서 결국 쫓겨났다. 더 나아가 최근 미디어 내 인종 다양성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트윗을 올려 다시 한번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로스쿨을 졸업한 기득권층 엘리트 백인 여성의 존재 덕분에 <밤쉘>의 메시지는 더욱 힘을 얻는다. 일반화되어 있는 금발의 여성 세 명을 한 쇼트 안에 담을 때 역으로 여성이라는 이미지 안에 갇힌 세 사람의 다양성과 공통점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통념에서 어긋나는 메긴 켈리가 주인공이기에 모든 여성의 경험은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고, 다양함 속에서도 공유되는 차별과 피해의 경험을 토대로 연대할 때 구조적인 남성 권력의 횡포에 맞설 수 있다는 영화의 메시지에 더 큰 힘과 진정성이 실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은, 비록 완성도의 측면에서 약간의 아쉬움을 남기기는 하지만, 해야 할 말은 시원하게 다 하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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