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한 자책과 자기 환멸, 가해자의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왜곡된 시선과 소문 같은 사회적 낙인의 두려움 등. 성범죄 피해자들은 이처럼 큰 고통을 받는다. 어렵사리 용기를 내어 가해자를 법정에 세워도 결국 집행유예로 끝나기 일쑤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지난달 23일 방송한 < PD수첩 > '판사님은 관대하다-성범죄의 무게' 편은 성범죄의 양형 문제와 법을 집행하는 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을 살펴보았다.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프로그램의 한 장면 ⓒ MBC


지난 3월 2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N번방 담당판사 오덕식을 판사자리에 반대, 자격 박탈을 청원합니다'란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오덕식 부장판사가 "수많은 성범죄자에게 어이없는 판단으로 벌금형과 집행유예 정도의 너그러운 판결을 내려주었던 과거가 밝혀져 비판받았던 판사"라며 N번방 관련 사건에서 배제해달라고 주장했다. 한 달 만에 청원 수가 46만 명을 돌파하자 부담을 느낀 사법부는 텔레그램 N번방 관련 형사재판 담당을 다른 판사로 교체했다.

오 부장판사는 배우 고 장자연씨를 술자리에서 강제 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 조선일보 기자 조아무개씨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여성 두 명을 성적 노예로 만든 뒤 강제추행하고 여성들이 노예 계약에서 벗어나려고 하자 돈과 성관계를 요구하며 협박한 사건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국민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을 여러 차례 내린 바 있다. 과거 한 로스쿨에서 강의를 하면서 "로펌에서 필요한 여자 변호사는 세 가지 종류다. 부모가 권력자거나 남자보다 일을 두 배로 잘하거나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비하 발언을 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오 부장판사가 담당했던 가수 고 구하라씨의 재판을 보자. 지난해 8월 오 부장판사는 구하라씨의 신체를 불법으로 촬영하고 폭행·협박한 혐의로 기소된 최종범씨에게 협박·강요·재물손괴·상해 등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혐의에 대해선 무죄로 판결했다. 최씨의 범행이 우발적이었고 실제로 유출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었다.

솜방망이 처벌, 감형 이유도 '가지각색'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프로그램의 한 장면 ⓒ MBC


솜방망이 처벌은 오 부장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2008년부터 2018년까지 있었던 성범죄 관련 재판 7만4956건의 판결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집행유예 41.4%, 벌금 30.2%로 나타난다. 71.6%가 실형을 면했다.

감형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진지한 반성을 해서', '피해자와 합의를 해서', '부양가족이 있어서', '가해자의 앞날이 창창해서', '초범이라서', 심신미약 상태라서' 등 재판부는 온갖 이유를 들어 감형을 해준다. 가사도우미를 여러 번 성폭행하고 비서를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김준기 전 DB그룹 회장이 고령이며 피해자들과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사법부는 국민의 상식과 거리가 먼 사유를 들먹여 빈축을 사기도 있다. 지적 장애를 앓는 13살 소녀가 가출 뒤 여러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건에선 가해자들이 사준 떡볶이를 '화대'로 해석했다. 2019년엔 강간 혐의로 기소된 박아무개씨에겐 여성이 접시에 고기를 덜어준 행동은 '성관계를 은연중 동의한 것'이라며 무죄를 판결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의 일상을 되찾기 위한 재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재판부가 옳고 그름을 가르고 범죄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잖아요. 성폭력으로 피해를 입는다면 국가를 믿고 고소를 하고 그 과정에서 정당하게 피해를 인정받고 가해자가 처벌받는 것을 보는 것이 우리 사회 정의의 실현입니다."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프로그램의 한 장면 ⓒ MBC


성범죄 가해자들의 감형을 받으려면 피해자와의 '합의'가 필수다. 여성을 집단 성추행하고 불법 촬영 영상을 유포한 혐의로 넘겨진 가수 최종훈씨, 가수 정준영씨 사건을 보면 합의의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나타난다.

1심에서 징역 5년이었던 최종훈씨는 2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받았다. 1심에서 징역 6년이 내려졌던 정준영씨에게 2심은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정준영씨보다 최종훈씨의 감형이 큰 이유는 합의 여부에 있었다. 항소심 판결을 보면 최종훈씨에겐 '피해자와의 합의'가, 정준영씨에겐 '진지한 반성'이 참작됐다고 나온다.

성범죄 재판의 가해자들은 형량을 낮추기 위해 피해자들과의 합의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이 과정에서 2차 가해가 빈번하게 벌어진다. 일부 피해자들은 가해자 측이 집이나 회사로 찾아오는 통에 소문이 날까 봐 어쩔 수 없이 합의를 해준다. 가해자가 출소한 후에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에게 보복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합의해주는 피해자들도 많다.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프로그램의 한 장면 ⓒ MBC


배우 강지환씨가 여성 스태프 두 명을 각각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은 대표적인 2차 가해 사례다. 지난 6월 11일에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강지환씨에게 원심과 같은 징역 2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강씨가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은 건 피해자들과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 측 박지훈 변호사는 그 합의에 숨겨진 사연이 있다고 말한다. 피해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회사의 직속 팀장이 합의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강지환씨가 범행을 부인하는 상태에서는 합의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변호인을 통한 합의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강지환씨의 가족들은 피해자들이 소속되어 있는 업체의 직원을 통해 주소, 전화번호를 파악하고 합의를 유도, 또는 합의에 응하지 않으면 어떤 불이익을 줄 것처럼 협박하는 일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반성문 작성법, 대필 서비스도 존재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프로그램의 한 장면 ⓒ MBC


'반성문'은 재판부가 가해자가 진지하게 반성했다고 판단하는 근거 중 하나다. 인터넷에선 반성문 작성법이 올라오고 잘 쓴 반성문이 거래되기도 한다. 반성문 대필 서비스까지 존재하는 상황이다.

반성문을 썼다고 가해자가 진지한 반성을 했을까? 반성의 대부분은 피해자가 아닌 재판부를 향하고 있다. 게다가 재판부에 제출되는 반성문을 피해자는 볼 수조차 없다. 박수진 변호사는 '진지한 반성'이 감형 사유에서 빠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해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진지한 반성이 아니라 재판부를 상대로 해서 반성문을 얼마나 내고 재판에 나와서 얼마나 고개를 조아리고, 얼마나 진정성 있게 본인이 어떤 반성을 한다는 취지의 최후 진술을 하는지. 이런 것들이 직접적으로 (감형에) 영향을 미칩니다."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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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업자로부터 불법 촬영을 당해 고소한 A씨의 사건은 수사의 문제점, 합의의 강요,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는 논리,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재판부 등 우리나라 사회와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이 낱낱이 드러난다.

A씨는 동업자로부터 선물 받은 탁상시계가 불법 촬영 장비임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휴대폰을 분실했다는 이유만으로 동영상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A씨가 고소를 진행하자 가해자는 몰래 돈을 입금해 합의된 것처럼 꾸미기도 했다. 판사는 합의를 종용하는 말까지 던졌다.

더욱 충격적인 건 가해자 측의 항소 이유서다. '피고인 앞에서 서슴없이 옷을 갈아입거나 짧은 치마를 입고 다리를 벌리며 함께 앉아있었다'는 내용을 적어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갔다. 피해자 탓에 사건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PD수첩>  프로그램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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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여아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학원장 사건은 우리나라 사법부가 얼마나 가해자 중심으로 판단하는가를 보여준다. 2019년 열린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징역 8년을 선고한 1심을 깨고 3년으로 감형해주었다. 이유는 10살 초등학생이 보인 저항의 강도가 약했다는 것이다. 고현욱 변호사는 피해자를 탓하는 일부의 인식을 비판한다.

"많은 사례에서 사람들이 가해자한테 '너 왜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했니?'라고 묻는 게 아니라 피해자에게 '왜 그렇게 행동했어?', 예를 들면 '왜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었어?', '왜 밤에 나갔어?', ' 왜 술을 마셨어?'(라고 합니다). 지금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판결을 보면 피해자를 탓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겁니다."

성범죄에 대해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하고 있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현실을 인식하고 올해 12월까지 새로운 양형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양형만 고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성인지 감수성을 갖고 피해자 중심주의를 지키며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겠다는 사법부의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 지금 국민들은 사법부에 묻는다. N번방은 판결을 먹고 자랐다고. 진정한 정의가 무엇인지 사법부가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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