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그리고 베를린에서> 포스터. ⓒ ?넷플릭스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의 이야기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 소속의 에스티는 17살이 되자 중매결혼을 한다. 집을 떠난 엄마와 주정뱅이 아빠 대신 할머니 손에 길러진 그녀는 결혼에 대한 어느 정도의 기대와 환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시가 모두의 '감시' 아래 그녀에겐 오직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의무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시간이 흘러, 에스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엄마가 왜 떠났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 또한 엄마와 똑같은 수순을 밟고 있었다. 유일한 외부 소통 창구였던 피아노 교사의 도움으로 독일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면서 그녀에게 주고 간 증서 덕분이기도 했다. 그 증서 덕분에 에스티는 독일에서 살 수 있었다. 에스티 엄마도 다름 아닌 베를린에서 거주 중이었다. 

에스티 시가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그녀를 돌아오게 할 방법을 강구한다. 사람 찾는데는 도사인 모이셰를 부른다. 에스티의 남편 얀키의 사촌 형인 그를 얀키와 함께 베를린으로 보내 에스티를 데리고 오라고 했다. 한편 에스티는 베를린에 무사히 도착했지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던 찰나 우연히 음악원 학생과 마주한다. 그리고 평소 애정하던 음악을 향해 열정을 쏟아보기로 하는데... 과연 그녀는 베를린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에스티가 미국 뉴욕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를 떠나 독일 베를린으로 간 뒤 음악 등으로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데보라 펠드만의 자전적 회고록 'Unorthodox'를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원제가 품은 뜻인 '이단(異端)'이라는 단어가 주인공 에스티의 여정과 맞물려 눈에 띈다. 

작품은 크게 세 트랙으로 진행된다. 현재 베를린에서의 에스티, 에스티를 쫓아온 현재 베를린에서의 모이셰와 얀키 그리고 과거 뉴욕에서의 에스티.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모이셰와 얀키의 트랙을 뒤로 하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베를린과 뉴욕의 에스티가 극을 이룬다. 천천히 확고하게 변화하는 에스티를 보는 것도 인상적이지만, 베를린과 뉴욕 모두에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에스티도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지난 3월 말에 공개되어 2020년을 대표할 '명작' 드라마로 칭송받고 있는데, 그동안 개인적으로 손이 가지 않아 제쳐두고 있었다. 제목에서 그 어떤 흥미 요소나 의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었거니와, 생각할 거리가 많고 어려울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다. 조금은 늦게나마 뚜껑을 열어 보니, 생각할 거리는 많았지만 어렵지 않았고 매우 속도감이 빨랐으며 의외의 서스펜스도 선사해주었다. 드라마로서의 흥미 요소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다가오는 의미적 소구점 또한 그 어떤 콘텐츠보다 적확했고 논쟁적이었고 풍부했다. 

살고자 하는, 살고 싶은 삶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에 대해 구구절절 읊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여성을 '아기 낳는 기계'로 대한다는 정도는 알아두자. 극중 에스티의 말로는, 홀로코스트로 희생 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수를 복구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또한 여성은 그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없고 공동체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결혼하면 머리를 완전히 밀어 버리곤 가발을 쓰고 다닌다. 외부인의 시선에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엄연한 그들만의 '문화'이다. 고로, 비판은 하되 비난을 할 수는 없을 테다. 

그럼에도, 비록 '문화'라는 이름이라고 해도, 인류 보편적인 시선에서 용인하기에는, 아주 불편한 구석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본 뉴욕 유대인 하시디즘 공동체는 말이다. 이 작품이 앞으로도 길이 남을 '명작'으로 불릴 충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누구도 알기 힘들었고 알 수도 없었으며 알고 싶지도 않았던 그들만의 문화를 수면 위로 정확하게 끌어올렸다. 우리의 시선에 다양성을 부여한 것이다. 나아가 이 작품의 명작인 이유에 드는 요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에스티의 결심과 여정이다. 

에스티가 향하는 곳은 하필 독일 베를린, 히틀러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대인의 망령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듯한 곳이나 다름없다. 그곳에서 에스티는 도망칠 때 입었던 가발과 옷을 던져 버린다. 그리고 '감히' 치장을 하며 불경한 음식들을 먹는다. 또한 여성으로서 상상도 해본 적 없거니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교육'도 받고자 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느껴 보고... 살아내야 하는 삶이 아닌, 살고자 하는 또는 살고 싶은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인류보편에 속하는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

'숱한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았다'에서 그치면 명작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베를린에서>는 뉴욕에서와는 다른 베를린에서만의 실패를 그리며, 또 다른 차원의 고민에 가닿게 한다. 뉴욕의 공동체에서는 '육체(몸)'적으로 아주 편안하다. 어떤 면에서는 정신적으로도 편할 것이다. 먹고살 걱정 없이, 공동체 차원에서 모든 걸 해주니까 말이다. 반면, 베를린에서 에스티는 정신의 자유를 얻었지만 육체의 힘듦을 얻었다. 현실 앞에서 먹고살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거니와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르니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하여, 에스티를 찾아낸 얀키는 설득을 위해 원론적인 이야기를 던지고 모이셰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던진다. 얀키가 '이제 나도 바뀔게. 아이를 위해서라도 함께 돌아가자'라고 하는 반면, 모이셰는 '네가 베를린에서 혼자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은 네가 해'라고 하는 것이다. 에스티로서는 모든 걸 건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 돌아가든 남아 있든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여정을 봐온 이라면 누구나, 그녀를 둘러싼 환경이 아니라 '그녀' 자체를 응원할 게 분명하다. 

에스티의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들과 우여곡절이라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여정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여성 아닌 남성이지만 가슴이 벅차다. 아무리 부조리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낀다고 해도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이 곧 '세상'이기에,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건 대다수에게 불가능에 가깝다. 하여, 그녀를 응원하면서도 일면 부러움과 함께 선망의 눈길을 보내게 된다. 그녀와 나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게 분명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그녀와 나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그리고 나의 이야기는 인류보편에 속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형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singenv.tistory.com)와 <프리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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