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한 마디도 못하고 그냥 서서 당했습니다. 제발 제 결백을 밝혀주세요" 지난 5월, 한 아파트 경비원이 음성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입주민의 폭언과 폭행에 시달린 뒤 빚어진 비극적인 사건이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지난해 기준 60세 이상 임금 노동자 10명 중 7명은 비정규직이었다. 경비원의 평균 연령 66세, 이들은 대표적인 고령의 임시계약직 노동자로 꼽힌다.
 
지난 4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에서는 갑질에 시달리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비원 사건을 통해 고령의 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들여다보고, 갑질을 차단할 특단의 대책은 없는지 집중 취재했다.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 SBS

 
경비원의 극단적 선택
 
지난 4월21일, 최희석 씨는 평소 업무 지침대로 이중 주차된 차량을 처리하다가 해당 차량 소유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그는 "경비원 주제에 내 차를 밀었다"면서 최 씨의 얼굴을 가격하고 옷을 찢었다. 최 씨는 폭행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같은 달 27일 신고 사실을 알게 된 가해자는 최 씨를 경비실 화장실로 끌고 가 감금 뒤 폭행을 가했다. 최 씨는 코뼈가 부러지는 등 중상을 입었다.
 
가해자는 최 씨에게 사표를 쓰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괴롭히겠다', '쥐도 새도 모르게 암매장하겠다'며 협박했다. 날짜를 지운 과거 교통사고 장애진단서를 보낸 뒤 오히려 자기가 다쳤다며 돈까지 요구했다. 명예훼손으로 허위 고소한 사실도 드러났다.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던 최 씨는 급기야 '억울하다'는 취지의 유서를 남긴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사건이 알려진 뒤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왔고, 청원인이 44만 명을 넘었다. 가해 입주민은 지난달 12일 구속 기소됐다.
 
공기업에서 38년 간 근무한 뒤 정년퇴직한 조정진 씨. 4년 동안 아파트와 빌딩에서 경비원 등으로 일했고, 지금은 주상복합건물의 경비원으로 근무 중이다. 그가 4년 동안의 임시계약직 경비원 생활을 기록한 책 '임계장 이야기'를 발간하여 비정규직 고령 노동자들의 노동 실태를 세상에 알렸다. 여기서 '임계장'이란 '임시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다. 취재진이 조정진 씨를 찾았다.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 SBS

 
조 씨는 아파트 경비원들이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으며, 휴식 시간에도 쉬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그는 "24시간 근무하지만 실제 임금은 10시간 정도를 공제하고 준다"며 "휴게 시간이 하루 10시간 넘어도 현실적으로는 임금이 쉬는 시간이지 몸이 쉬는 시간이 결코 아니다"라고 말한다. 근로기준법 적용을 배제한 감시단속적 근로자 규정 때문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경비원들은 경비업법에 따라 시설 경비와 감시를 주로 하는 감시직 근로자로 규정돼 있다. 근로기준법으로부터 배제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주당 52시간으로 제한된 근로시간을 안 지켜도 무방하고, 각종 수당을 주지 않아도 위법이 아니다. 하지만 아파트 경비원 일과표를 들여다보면 순찰 외에 청소,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주차관리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부가 업무가 많은 현실이 도외시된 것이다. 조정진 씨는 "감시직 근로자에서 아파트 경비원을 제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한다.
 
조 씨가 틈 날 때마다 메모한다는 수첩 10권에 가장 많이 적힌 단어는 무얼까. '자른다'였다. 그는 "'고르기 쉽다', '다루기 쉽다', '자르기 쉽다' 이런 이유로 경비원들 스스로 '고다짜'라고 비하해서 부른다"고 말한다. 법의 사각지대에서 언제 잘릴지 모르는 경비원의 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지난해 말 민간단체 비정규직 노동센터 실태조사에 따르면 경비원 10명 가운데 1명 이상이 부당해고를 경험한 것으로 드러났다. 10명 가운데 3명은 3개월이나 6개월짜리 단기계약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시계약직으로 24시간 격일제 근무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각종 부가 업무와 사실상의 업무 시간인 휴게 시간. 이 시대의 임계장 경비원들은 이러한 현실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한편, 피해 경비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잇단 갑질 사건의 기저에는 일부 입주민의 편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윤지영 변호사는 "경비원에게 아무 일이나 다 시켜도 되고 그 사람의 노동이 원래 나를 위해 봉사하는 업무라고 생각하는데, 경비원은 경비라는, 그 다음에 관리라는 전문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이라며 그들의 노동을 존중해주는 성숙한 사회 분위기를 강조했다.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임계장과 갑질사회’ 편의 한 장면 ⓒ SBS

   
갑질 피해 방지 대책
 
경비원을 향한 갑질에 여론이 집중되면서 국회와 지자체도 대책 마련에 분주한 모양새다. 16만 경비원의 고용 안정과 갑질 피해 방지를 위한 토론회가 국회에서 처음 개최됐다. 이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지만, 처벌 위주의 접근을 경고하는 목소리에 관심이 집중됐다. 경비원들이 경비와 감시를 주로 하는 감시직 근로자로 규정되면서 부가 업무를 못하도록 강제하고 있으나 이로 인한 부작용 발생이 우려되는 현실 탓이다.
 
서울시 강북구에 위치한 SK북한산시티아파트. 경비원에게 청소 등 다른 업무를 시키면 경비업법 위반으로 처벌하겠다는 경찰의 단속 예고 이후 지난달 고령 경비원의 해고를 추진했다. 입주자 대표회의 결정에 일부 주민들이 반발하면서 결국 무산되긴 했으나 다른 아파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우려된다. 6년 전 입주민 갑질로 경비원이 극단적 선택을 해 이슈가 됐던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는 시간이 흐른 뒤 용역업체를 바꾸는 방식으로 경비원 78명을 해고한 사례도 있었다.
 
안성식 아파트 경비노동자 공동사업 노원노동복지센터장은 "이분들은 서비스 노동자로, 관리서비스 노동자로 법적인 신분을 전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그래야 이분들의 권리도 침해받지 않고 입주민들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경비원의 명칭을 관리원으로 바꾸고, 그에 걸맞게 공동주택관리법도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차난에 의해 발생하는 불만 그리고 온갖 갑질까지. 이를 묵묵히 받아내야 하는 경비원. 아파도 자칫 해고될까 두려워 병원에도 갈 수 없는 열악한 근무 여건. 경비원을 향한 입주민들의 갑질은 오늘날 고령의 임시계약직 경비원들에게 짐 지워진 무거운 현실에 다름 아니다.
 
갑질이 초래한 비극적 사건. 최 씨의 죽음은 노인 빈곤율 1위라는 불명예 속에서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고령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문제점과 함께 공동체의 의미를 각인시킨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갑질. 이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선 정책적 수단의 뒷받침과 동시에 사회 구성원 상호 간에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제2의 최희석, 제3의 최희석이가 나와서는 절대 안 되죠. 정말 뼈저리게 어느 누구든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아셔야 되죠."('임계장 이야기'의 저자 조정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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