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윤식 선수

엄윤식 선수 ⓒ 박진철 기자

 
"절망만 하고 있으면, 기회도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년 이맘때면, 프로배구 구단들은 올 시즌에 뛸 소속팀 선수와 연봉 계약 등을 한국배구연맹(KOVO)에 등록한다. 그 과정에서 선수들의 희비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수억 원의 연봉을 받으며 잘나가는 스타 선수들이 있는 반면, 이런저런 이유로 연봉 계약을 하지 못해 팀을 떠나거나 아예 배구를 그만두는 선수들도 있다. 지난 6월 30일 KOVO가 발표한 2020-2021시즌 남녀 프로배구 구단별 선수 등록과 연봉 현황도 그 점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올해도 남자 프로배구는 총 16명의 선수가 팀을 떠났다. 구단이 사실상 방출한 자유신분선수 12명, 선수의 개인적 사정 또는 구단과의 입장 차이로 팀을 떠난 임의탈퇴 3명, FA 미계약 1명이다. 여자 프로배구도 총 15명이 자유신분선수(6명), 임의탈퇴(7명), FA 미계약(2명)으로 팀을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 실업팀을 알아보거나, 자신의 인생을 바쳐 온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게 된다.

그러나 매우 드물지만,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배구를 그만둬야 할 위기에 놓였다가 극적으로 프로 무대에서 뛸 기회를 잡은 선수가 있다. 올 시즌 남자 프로배구 삼성화재 선수로 등록한 엄윤식(1994년생·197cm)도 그런 케이스이다.

기대주에서 방출 선수로

엄윤식도 대학 시절에는 기대주였다. 2017년 대학배구 리그와 전국대학배구 대회에서 경희대가 준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할 때, 동기생인 손주형(1994년·204cm)과 함께 장신 센터 콤비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프로에서는 두 선수가 정반대로 엇갈렸다.

2017년 9월 실시된 2017-2018시즌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손주형은 2라운드 6순위로 OK저축은행, 엄윤식은 3라운드 6순위로 대한항공에 각각 지명됐다. 이후 손주형은 차기 대표팀 발탁까지 예고되며 승승장구했지만, 엄윤식은 프로 첫 시즌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당시 대한항공은 진성태, 진상헌, 조재영, 최석기, 김철홍, 천종범, 박상원 등 센터진만 무려 7명이었다. 엄윤식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결국 단 1경기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엄윤식은 불가피하게 2017-2018시즌이 종료된 직후인 2018년 4월 군 입대를 결정했다. 그리고 상무 소속으로 활약하며 군 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그러나 전역하자마자 이번엔 '방출 선수'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어야 했다. 대한항공이 여전히 막강한 센터진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1월 6일자로 엄윤식을 '자유신분선수(은퇴)'로 공시했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엄윤식을 아무 대책 없이 방출하지 않았다. 최근 한국전력으로 영입된 이승호(1996년·세터)와 마찬가지로 올해 5월까지 일정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며, 주전 선수들의 연습경기와 훈련 파트너로서 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엄윤식, 이승호가 다른 프로팀으로 영입되거나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배려를 해준 것이다.

결국 삼성화재는 지난 5월 말 엄윤식을 데려와 입단 테스트를 했다. 그리고 6월 30일 KOVO에 올 시즌 삼성화재 선수로 정식 등록을 했다. 앞으로 V리그, KOVO컵 대회 등 프로 무대에서 뛸 수 있게 된 것이다. 지난 3년 동안 프로 데뷔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방출과 연습생 신분으로 전락했던 엄윤식에겐 말 그대로 '기사회생'이었다.

연습경기서 돋보인 활약, 영입 이유 증명하다
 
 '삼성화재 연습경기' 왼쪽부터 김동영(12번), 황경민(18번), 엄윤식(1번) 선수... 경기도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STC) 배구단 훈련장 (2020.6.30)

'삼성화재 연습경기' 왼쪽부터 김동영(12번), 황경민(18번), 엄윤식(1번) 선수... 경기도 용인시 삼성트레이닝센터(STC) 배구단 훈련장 (2020.6.30) ⓒ 박진철 기자

 
지난 6월 30일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삼성트레이닝센터(STC) 내 배구단 훈련장에서는 삼성화재와 경희대가 연습경기를 실시했다. 사실 삼성화재 훈련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엄윤식은 관심권 선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센터 자원이 5명이나 되는데, 굳이 센터를 또 영입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날 연습경기를 지켜보면서 의문은 사라졌다. 삼성화재 센터진 중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이다. 구단 관계자로부터 엄윤식이 프로배구 선수로 복귀한 과정과 삼성화재 센터진의 근황을 전해듣고 더 고개가 끄덕여졌다.

삼성화재는 올 시즌에 뛸 센터 공격수로 총 6명을 등록했다. 박상하(1986년·197cm), 지태환(1986년·199cm), 손태훈(1993년·196cm), 김시훈(1987년·199cm), 김정윤(1995년·196cm), 엄윤식(1994년·197cm)이다.

주전급 센터는 박상하, 지태환, 손태훈이다. 그러나 누수 요인이 많다. 박상하는 현재 V리그 개막에 맞춰 몸을 만들어가고 있다. 문제는 지태환과 손태훈이다. 지태환은 양쪽 무릎을 모두 수술하고 현재 재활 중이다.

지난 시즌 주전 센터로 맹활약했던 손태훈은 오는 17일 공익근무요원으로 군에 입대한다. 올 시즌 V리그는 출전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박상하, 지태환, 김시훈은 한국 나이로 30대 중반이다. 6개월의 긴 V리그를 소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세대 교체를 준비하는 차원에서 젊고 가능성이 있는 신진 센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날 연습경기에서도 라이트 김동영과 센터 엄윤식의 활약이 돋보였다. 김동영은 빠른 공격으로 많은 득점을 올렸다. 엄윤식도 몸 상태와 경기력이 기대 이상이었다. 현장에 나온 구단 관계자도 "오늘 센터진은 엄윤식의 활약이 단연 눈에 띈다"고 평가했다.

높은 점프력과 속공 '강점', 블로킹 리딩 '보완점'
 
 엄윤식 선수

엄윤식 선수 ⓒ 박진철 기자

 
엄윤식의 장점은 점프력과 속공이다. 신장이 197cm이지만, 점프력이 좋기 때문에 센터 속공이 파워 있고 빠르게 들어간다. 블로킹 높이도 그만큼 더 높아진다. 팔 길이도 길고, 블로킹 손 모양도 좋은 편이다. 보완해야 할 점은 경험과 블로킹 리딩 능력이다.

극적으로 프로에 복귀한 엄윤식은 "한때는 절망도 컸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며 "그럴수록 긍정적인 생각이 있어야 나중에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했다"고 소회를 밝혔다. 이어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계속 오다 보니까 이번에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고 덧붙였다.

그는 "삼성화재에서 감독님이 지도해주시는 걸 많이 배우면서 더 좋아지고 있다"며 "대한항공에 있을 때 몸 관리를 꾸준히 해온 것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어렵고 절망스러운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프로에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한다는 의지는 더 간절하다"며 "연습경기 때 감독님이 출전 기회를 많이 주셔서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이 행운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각오를 다졌다.

'연습생 신화' 꿈꾸는 엄윤식·이승호

프로배구에서 이승호, 엄윤식 경우처럼 '훈훈한 사례'는 사실 드물다. 방출 선수는 대부분 스스로 알아서 진로를 찾아야 한다. 오히려 다른 팀으로 못 가도록 임의탈퇴로 묶어놓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승호, 엄윤식은 대한항공이 사실상 2군식 팀 운영을 하면서 방출 이후에도 1군 선수들의 훈련 파트너로 활용해 왔다. 그 때문에 두 선수는 프로 선수로 뛸 수 있는 몸 관리를 꾸준히 할 수 있었다. 

현재 겨울철 경쟁 종목인 남자 프로농구는 물론, 심지어 여자 프로농구도 2군 리그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배구는 남녀 모두 2군 리그가 없다. 때문에 대한항공의 팀 운영 방식은 전문가와 팬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프로배구도 구단의 의지만 있다면 큰 비용을 추가하지 않고 2군 리그가 가능할 수 있다는 단초를 보여준 셈이다(관련 기사 : 프로배구 선수로 복귀한 이승호, 대한항공 배려 돋보여).

엄윤식, 이승호가 프로 무대에서 좋은 활약을 한다면, 2군 리그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더 커질 수 있다. 또한 방출 선수, 연습생 선수의 성공 사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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