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개봉한 독립영화 <바람의 언덕>은 올 초부터 지난 5월 말까지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다소 생소한 상영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전국의 관객들과 만나 왔습니다. 전국 각 지역의 영화 커뮤니티와 독립예술영화 극장 등에서 매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며 '아주 특별한 여정' 이어갔습니다. 그 여정의 기록을 개별 커뮤니티 혹은 개인의 소개와 극장 소개가 포함된 연재를 통해 전합니다. 그 열네 번째는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보내온 편지입니다.[편집자말]
 영화<바람의 언덕> 감독 박석영, 배우 정은경, 장선, 김태희, 장해금, 박소이가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걸으며 입장하고 있다.

영화<바람의 언덕> 감독 박석영, 배우 정은경, 장선, 김태희, 장해금, 박소이가 2019년 10월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에 참석해 레드카펫을 걸으며 입장하고 있다. ⓒ 유성호


박석영 감독의 네 번째 장편, <바람의 언덕>은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관객과의 만남을 가졌다. 감독의 전작들을 인상 깊게 봐왔었지만, <바람의 언덕>을 부산에서 보진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선 늘 봐야 할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러다 보니 부산이 아니면 보기 힘들거나, 스페셜 게스트가 참여하는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해외 작품 위주로 관람 일정을 짜곤 한다.

'<바람의 언덕>은 궁금하긴 했지만, '꽃 3부작' 이후 과연 박석영 감독에게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을까?' 혹은 '근래 독립영화판에서 보기 드문 족적을 남긴 3부작 이후에 과연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상태이기도 했다. 이번에 안 보면 다른 영화제에서 보면 되겠지 하는 안일함으로 그렇게 <바람의 언덕>은 부산국제영화제 관람 예정 목록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박석영 감독과 조금의 안면이 있기에, <바람의 언덕>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보지 않기로 정한 다음부터는 영화제 현장에서의 불문율, 즉 신작을 가져온 감독과 배우들과는 영화를 보기 전에는 가능한 마주치지 않는다는 기조에 따라 피해 다녀야 했다. 하지만 그건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박석영 감독을 처음 만났던 <들꽃>을 상영하던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그랬다. 무명의 중년 신인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민망함을 무릅쓰고 가장 인파가 몰리는 관객라운지 입구에서 <들꽃>의 홍보 입간판을 들고 하루 종일 땡볕 아래 앉아 있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도 박석영 감독은 홀로 손가방에 꽉꽉 채워둔 <바람의 언덕> 홍보엽서를 여기저기 비치하느라 라운지를 자주 찾곤 했다.

엽서가 비어가면 가방에서 뭉치 엽서를 꺼내 세심하게 장소별로 배분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딱 마주쳐버렸다. 인사를 건넸다. 박석영 감독은 (필자의 기분 탓일지 모르겠지만) 인사를 건넸음에도 별로 웃지 않았다. 지쳐 보였고 엽서의 수량이 모자랄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괜히 미안했다.

어느덧 국내 독립영화계에서 만만치 않은 인지도와 위상을 쌓아올린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객에 목말라 있었고 영화에 대한 평가에 예민해 보였다. 부산국제영화제 현장에서 반응이 그리 나쁘지 않게 들려왔지만 감독의 표정은 만족스러워보이진 않았다. 영화를 얼른 보긴 봐야겠구나 하며 그 후로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 박석영 감독을 피해 다니곤 했다. 그렇게 나는 <바람의 언덕>의 프리미어 상영 관람을 '놓쳤다'.

나를 펑펑 울게 한 첫 번째 관람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 영화사삼순

 
2019년 12월 1일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바람의 언덕> 첫 관람

<바람의 언덕> 첫 관람은 서울독립영화제에서였다. 금요일 오전에 서독제가 열리는 압구정 CGV 1층 로비에서 나는 박석영 감독의 옆 테이블에 몇 시간 동안 앉아 있었다. 박석영 감독은 영화제 스태프와 인터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근 세 시간에 가까운 인터뷰 동안 여러 사람이 박석영 감독에게 인사할 틈을 노렸으나, 박 감독은 인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만큼 박 감독은 자기 영화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아 보였다.

몇 몇 지인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저 인터뷰를 지치고 않고 상대하며 기록하는 스태프가 대단하다! 식의. 본의 아니게 그 인터뷰를 실황중계 듣듯이 들어버렸다. '아, 이번에는 <바람의 언덕>을 봐야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로 박석영 감독의 인터뷰에는 자기 영화에 대한 확신과 애착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런 기묘한 부흥의 기운이 인터뷰어에게도 전염되는 것 같았다. 1층 로비에는 주말에는 항상 자리가 모자라다보니 인터뷰가 진행되던 테이블에 합석했던 다른 이들은 인터뷰가 끝날 기색이 없자 내 자리로 피신하곤 했다. 결국 인터뷰를 마치게 한 건 물리적 일정 때문이었고, 만약 일정 문제가 아니었다면 그날 밤을 새울 기세였다. 그렇게 그날도 박석영 감독과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12월 1일 일요일 3차, 오후 5시 20분 CGV 압구정 아트하우스 3관에서 <바람의 언덕>을 드디어 관람했다. 박석영 감독과 '영분' 정은경, '한희' 장선, '용진' 김태희 배우가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했다. 3년 전 <재꽃> 때와 비교하면 몰라보게 커버린 장해금 배우는 무대인사만 관객에게 전하고 냉큼 객석에 앉아버렸다. 영화를 본 소감은 그랬다.

이미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잔혹하고 차가운 냉기 아래 숨쉬기조차 힘든 나머지 제풀에 포기해버린 것들은 너무나 많다. <바람의 언덕>은 그 참혹함을 억지로 미화하거나 단순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영화 속 인물들의 고통을 전시해 소비하지 않았다. 억지 해피엔딩이 아니면서도 "사실은 이렇게 되었을지도 몰라"하는 간절한 기대가 이야기로 구현되어 있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는 정갈하게 펼쳐졌고, 시작과 끝은 수미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소박하고 흔한 전개 같지만 막상 자신의 일이라면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인생의 풍경을 빤하지 않게 그려내 영화 속 인물들이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을 관객이 간절히 원하는 영화를 발견했다.

잔인한 세상에서 우리가 이미 불가능이라 단정해버린 것들, 사람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순간 이뤄질 수 있는 수많은 가능한 순간들에 대한 믿음이 박석영 감독의 영화에는 여전히 약간이나마 존재하고 있었다.

관객과의 대화는 짧지 않았으나 얼핏 간단한 요약정보만 접할 때는 단순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바람의 언덕>엔 확인하고픈 것들이 엄청나게 많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타성에 젖어 '흥, 이 다음엔 이런 식으로 전개되겠지, 결말은 대충 이럴 거야 틀림없고말고'식으로 영화를 계산하고 판정하듯이 관람하게 되어버린 나에게 돌팔매를 던지듯 박히는 순간들이 몇 차례 이어졌다.

(고백하자면, 중반 어느 쯤부터 나는 펑펑 울면서 영화를 봤다) <바람의 언덕>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면 뭔가가 더 필요해! 그렇게 본격적으로 <바람의 언덕>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와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성탄전야에 맞이한 '영화'로운 판타지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 인디스페이스

 
2019년 12월 24일|크리스마스이브, 인디스페이스에서 정성일×바람의 언덕


당시 나는 대구MBC에서 매주 토요일 방송되던 <문화극장 조조할인> 프로그램에서 '작은영화관'이라는, 독립예술영화를 소개하는 코너에 관여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나 애니메이션 소개 빈도가 높다 보니 극영화도 좀 소개하자는 의견이 나오던 참이라 조심스레 <바람의 언덕>이 개봉을 예정하고 있으니 소개해보자고 제안했고 용케 채택됐다.

본격적으로 프로그램 사전 준비를 시작하면서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라는, 이미 독립영화에서 드물지 않은 공동체 상영의 변종으로 들리던 기획의 처음 출발을 견학 차원에서 참석하게 됐다.

하필 그날은 2019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기도 했다. 진짜 가봐야 되나 망설이던 중 하필 원래 예정했던 일정이 줄줄이 펑크가 나버렸고 욱 하는 마음에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부랴부랴 도착한 종로3가 인디스페이스에서 박석영 감독을 만났다.

'제 영화를 보러 대구에서 오신 거예요?' 빤한 상황이지만 순전하게 기뻐하는 표정으로 박 감독의 환영을 받으며 상영시간 2시간, 영화 해설 6시간, 뒤풀이 5시간으로 이어지는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에 승차하는 순간이었다.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째 관람했지만, 이번에도 첫 번째와 거의 같은 시점에서 또 펑펑 울면서 영화를 봐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독립영화의 벗, 빈스로드에서 정성스레 준비한 커피와 빵 간식과 함께 외로운 이들이 함께 모여 성탄전야를 나누는 시간이 도래했다.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정성일 선생이 이 말도 안 되는 기획을 진두지휘했다.

국내 극장환경에서 거의 불가능한 장시간의 토크이다 보니 몇 부분으로 분할해 진행이 이뤄졌다. 첫 번째 시간은 정성일 선생이 해석한 박석영 감독의 네 편의 장편 작품들, 그 발견 당시의 기억과 분석이 유려하게 펼쳐졌다. <들꽃>에서 <스틸 플라워>로, 다시 <재꽃>에서 <바람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경향과 변모에 대한 비평의 소우주가 눈앞에 펼쳐졌다.

정성일 선생은 요즘 흔한 방식인 프리젠테이션 대신에 장문의 발제 원고를 준비했고 구전민담처럼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한 단락이 끝날 때마다 미련 없이 본인이 보던 발제문을 바닥에 소리 없이 떨어트렸다. '스타일리시'해 보이기도, 시간의 흐름을 시계로 표기하는 것처럼도 보이던 그 순간은 인디스페이스 상영관 속 작은 우주의 별세계처럼 느껴졌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지난해 12월 24일 서울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 영화 <바람의 언덕> 상영회 ⓒ 영화사삼순

 
정성일 선생치고는 퍽 자제한 것처럼 느낄 정도로 예상보다 짧았던 작품해설 후 공연이 이어졌다. 관객들은 영화 속 인상 깊게 들렸던 노래들이 영화 속 인물로 분했던 배우들에 의해 짧게나마 재현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스크린 속과 바깥의 경계가 살짝 무너지는, 성탄전야에 있을법한 그런 판타지의 시공간이 잠시나마 인디스페이스 내에서 그렇게 펼쳐졌다.

잠깐의 간식 시간 후, 본격적으로 객석과의 대화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성일 선생의 사회로 박석영 감독, 정은경, 장선, 김태희 배우가 함께 자리했고 시간은 훌쩍 날짜변경선을 지나버렸다. 관객들은 참 열심히들 질문을 던지고 소감을 부끄러워하면서도 간절히 읊조렸다. 감독과 배우는 성실히 답변에 임했고 정성일 선생은 추임새를 맞추듯 주석을 달고 보충질문을 던지거나 본인의 주관으로 재해석을 시도했다.

근래 어느 영화제나 상영회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시네마테크의 유령들이 깃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흔히 연상하는, 자신의 영화 지식을 뽐내는 그런 자리는 아니었다. 이제 갓 백년이 좀 넘은 영화라는 존재가 예술이니 미학이니 하는 행세보다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전하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체험에 가까웠다.

그렇게 어느새 새벽2시가 지났고 살아남은 이들은 뒤풀이 장소로 향해서 못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탄절 아침 해가 밝아왔다.

대구 MBC가 가져다 준 작은 선물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대구MBC에 출연한 <바람의언덕> 팀 ⓒ 영화사삼순

 
2020년 1월 14일 |대구mbc 문화극장 조조할인 <작은영화관> 녹화

약 3주가 흐른 뒤, 기획했던 방송이 드디어 녹화 당일을 맞았다. 박석영 감독과 이후 참 여러 차례 전화통화와 서신교환을 통해 일정을 조율하고 내용을 준비했다. 지역방송이지만 공중파를 통해 정식개봉도 하지 않은 독립영화를 조명하는 자리라 그런지 역시나 박석영 감독은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기대치를 어떻게 낮출까 궁리하는 3주였다.

처음 기획은 확대돼 <바람의 언덕> 소개가 1부, <들꽃>, <스틸플라워>, <재꽃>으로 이어진 '꽃 3부작' 소개 특집이 2부로 2주에 걸쳐 방송되게 됐다. 30분 분량의 1회 방송이 1부와 2부, 그것도 2부는 1시간 특집편성이라는 실험으로 확대된 데에는 박석영 감독의 간절한 열망과 그에 전염된 나의 만용이 어우러졌으리라. 토요일 아침 방송되는, 광고가 붙지도 않는 저예산 프로그램을 꾸려가던 팀에게는 큰 부담과 도전이었다.

당일 아침 일찍 도착한 감독과 배우들과 함께 하루 종일 대본 리딩, 1-2부 녹화, 짧은 휴식과 점심식사, 분장과 당일 녹화에 대한 약평까지 하루가 금새 흘러갔다. 방송 팀이 종일 함께 하다 보면 '당 떨어지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고, 특히 2부는 1시간 녹화라면 실제 토크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분량이라 혹시 하는 마음에 간식을 꽤나 준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스튜디오 사정상 고정 MC와 패널을 빼면 초청 게스트는 3명이 한계라 1부 <바람의 언덕>은 박석영 감독과 정은경, 장선 배우가, 2부 <꽃 3부작>은 박석영 감독과 김태희, 정하담 배우가 함께 출연하는 조합으로 녹화했다. 준비 과정에서 고생이 꽤나 컸지만 자신의 전작을 정리하는 기획에 적극 협조해준 박 감독과 새로운 도전에 긴장이 참 많았던 방송 팀의 노력 덕분에 꽤 잘 정리된 방송이 만들어졌다.

해당 방송은 1월 25일과 2월 1일 대구MBC를 통해 방송되었으며 유튜브 대구MBC PROGRAM 채널을 통해 다시보기가 지원되고 있다. <바람의 언덕> 집중소개인 1부는 본 영화의 인스타그램 메인에서 작품 해설 자료로 공인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고군분투하는 독립영화인들에게는 작은 선물 같은 기획이자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를 만들었다는 보람이 남는 순간이었다.
 
 영화 <바람의 언덕>의 한 장면

대구MBC에 출연한 <바람의언덕> 팀 ⓒ 영화사삼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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