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디지털 첨단 기술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의 축복은 보이지 않는 곳의 어둠도 깊게 만들었다. 특히 디지털 기술은 미성년자 성매매와 관련하여 무분별하게 남용되는 상황이다. 지난 24일 방송한 KBS <제보자들> '청소년 성 착취 보고서, 랜덤채팅을 고발합니다' 편은 아동·청소년의 성을 착취하는 랜덤채팅 앱을 집중 조명했다.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제보자들> 제작진과 만난 18살 A양은 랜덤채팅 앱에 접속하면 한 번에 채팅 20개는 기본으로 온다면서 "고등학생이라고 하면 더 좋아한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공무원, 경찰분들도 계셨다. 제 나이대 딸 있는 가장분이 진짜 많았다. 저랑 만나면서 자기 딸, 아내한테 전화와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라는 충격적인 경험을 들려주었다. A양이 말하는 랜덤채팅의 세계는 누구든 익명으로 악마가 될 수 있는 곳이었다.

'랜덤채팅 앱'은 접속한 사람 중 한 명과 연결해 온라인상에서 일대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앱이다. 여성가족부가 지난 15일 발표한 <2019 성매매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이 조건만남을 하는 주요 경로는 채팅 앱(46.2%), 랜덤채팅 앱(33.3%), 채팅 사이트(7.7%) 순으로 나타났다. 랜덤채팅 앱을 성매매 도구로 악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화의 익명성과 휘발성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국내에 유통되는 랜덤채팅 앱은 400여 개에 달한다. 하지만, 랜덤채팅 앱의 80~90% 가까이가 이용자의 신원을 특정할 수 없다. 대부분 랜덤채팅 앱은 별도의 본인인증 절차 없이 나이, 성별, 지역 등을 입력하면 활동이 가능하다. 이런 정보조차 허위로 입력해도 제재를 받지 않기에 대화의 익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랜덤채팅 앱에선 두 사람이 대화하다가 한 명이 나가면 대화 내용이 바로 삭제된다. 랜덤채팅 앱의 30% 가량은 이용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대화 화면의 캡처를 막는다. 이런 대화의 휘발성으로 인해 디지털 성 착취 피해를 당해도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신고 기능이 있는 앱도 55%에 불과하다.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지금 랜덤채팅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제보자들> 제작진은 다수의 랜덤채팅 앱에 가입하여 미성년에 해당하는 18살 여성으로 가장하고 여러 이용자와 접촉을 시도했다. 가상의 인물이 접속하자마자 수많은 성매매 제의와 온갖 음담패설이 쏟아졌다. 염건령 범죄심리학 교수는 익명성에 숨어 미성년자 성매매를 시도하는 이들을 향해 분노를 토로한다.

"미성년자 성매매에 대한 죄의식이 전혀 없이 가격을 제시하고, 심지어는 성적 취향이나 성 경험이 있냐 (묻고), 방송에 담지 못할 참혹하고 음란한 내용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와요. 자식을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들의 정신세계가 어떤지 뇌 구조를 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납니다."

제작진이 잠입 취재를 통해 만난 성 매수자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21살로 추정되는 남성은 3만 원에 유사 성행위를 제안했다. 49살로 추정되는 남성은 25만 원에 성매매를 제의했다. 32살로 추정되는 남성은 집 주소를 주면서 일회성 만남을 넘어 아예 숙식을 제공하는 대가로 성관계를 요구했다. 가출 청소년들은 이런 사람들을 '헬퍼'라고 부른다.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미성년자를 성매매에 동원하는 사이버 포주들 역시 랜덤채팅 앱과 각종 SNS를 활용한다. 제작진이 만난 한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저희는 '공주님 사업'이라고 부르거든요. 아가씨라고 하기에는 연령대가 상당히 어리기도 하고. (나이가 적으면) 18살도 있고. 가출한 여자아이들을 상대로 숙식을 제공하는 대신 노래방에 나가거나 랜덤채팅 성매매를 하라고 강요합니다. 위치추적 앱에 아이들을 등록시키고 어디인지 보기도 해요."

랜덤채팅 앱에선 또 다른 방식의 미성년자 성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바로 '청소년 속옷 판매'다. 제작진과 만난 18살 여학생 B양은 랜덤채팅 앱을 이용하여 자신이 입었던 스타킹, 속옷 등을 팔고 있었다. 개인 간의 중고거래라 법적인 처벌도 어렵다.

"보통 스타킹은 2만 원에서 3만 원 대에 팔더라고요. 속옷은 4만 원에서 5만 원 정도에 팔고. 신고 와달라는 분이 있으면 착용하고 갔다가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벗어서 담아 드립니다."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스마트폰의 보급 이후 활성화된 랜덤채팅 앱은 성매매, 마약 거래, 금융사기 등 각종 범죄의 도구로 악용되었다. 국회에서 몇 차례 랜덤채팅 앱을 규제하는 개정안이 발의되었지만, 과잉입법이란 인터넷 업계의 반대와 지나친 규제라는 이유로 번번이 폐기됐다.

2015년 랜덤채팅에서 만난 포주에 의해 성착취를 당하던 15살 가출 청소년이 봉천동의 한 모텔에서 성매수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랜덤채팅 앱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일부 회사는 앱에 본인인증 절차와 신고 기능을 추가하는 등 자정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자정 노력은 오래가지 않았고 규제는 또다시 제자리걸음에 머물렀다.

5년 후, 범인 최신종이 전죽 전주와 부산에서 실종된 여성 2명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혔다. 그는 랜덤채팅 앱을 이용해 피해 여성을 물색하고 유인한 것으로 알려진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박사' 조주빈 역시 랜덤채팅 앱을 통해 피해자를 끌어들였다.

5년 동안 우리 사회는 무엇을 했나? 이것은 단지 랜덤채팅 앱 회사의 책임만이 아니다.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등 모두에게 불법적인 '조건만남'을 조장하고 방조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제보자들> 프로그램의 한 장면 ⓒ KBS


지난 15일 정부는 실명 인증이나 휴대전화 인증을 하지 않고, 대화 저장 기능이 없으며, 신고 기능이 없는 랜덤채팅 앱은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하여 청소년이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불특정 이용자가 간 온라인 대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애플리케이션(랜덤채팅 앱)의 청소년유해매체물 결정 고시안'을 행정 예고했다. 이 고시안을 올 하반기에 발령하고 시행에 들어갈 예정이다.

본인 인증과 신고 기능만으로 성범죄에 무차별적으로 노출된 아동·청소년들을 보호하긴 힘들다. 유해 환경으로부터 아이들을 지킬 수 있는 실질적인 규제를 강구해야 한다. 경찰의 잠입수사에 대한 법적 근거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랜덤채팅 앱의 금지어를 지정한 필터링 엔진을 개발할 필요성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회 인식의 변화다. 우리나라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법원 최종심에서 대부분 집행유예(48.8%)나 벌금형(14.4%)을 받을 정도로 처벌 수위가 약하다.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청소년 성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매매'의 개념을 적용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아동·청소년은 성인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에요. 아동·청소년은 취약 계층입니다.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모든 건 성적 학대고 성 착취입니다. 성매매란 용어 자체를 쓰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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