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 울려 퍼진 총소리.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됐다. 대통령을 향해 총구를 겨눈 사람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민주주의를 위해 유신의 심장을 쐈다"는 그가 이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0년. 지난달 김재규의 유가족과 변호인단이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7일 방송된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에서는 김재규의 유가족과 재심 변호인단을 찾아 40년 만에 재심을 청구한 사연을 취재했다.
 
지난 4일 취재진이 김재규의 유가족을 찾았다. 재심을 청구한 건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 김정숙 씨 가족이었다. 김정숙 씨는 아직도 40년 전의 그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김재규의 모습은 어머니와 함께했던 마지막 면회였다. 이튿날 김재규의 사형이 집행됐다.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 SBS

 
10.26사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김재규의 조카 김성신 씨. 그는 "삼촌이 굉장히 자상하게 잘 안아주기도 하시고 또 농담도 잘하시고 늘 표정이 밝고 웃음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당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는 "정당한 사법적 평가, 그런 절차적인 부분들에서 이미 당시에 하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동기와 관련해서도 내란 목적 살인, 내란 수괴죄 이런 것들이 포함돼 있는데, 제대로 된 재판을 통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한 부득이한 살인이었다는 부분을 밝히고 싶다"고 말한다.
 
신군부 체제, 공정하지 못한 재판
 
1979년 10월26일, 이날 궁정동 안가에서의 총격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등 여섯 명이 현장에서 스러졌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이끄는 합동수사본부는 이 사건을 대통령이 되겠다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벌인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결론 짓고, 김재규를 포함한 6명에 대해 이듬해 사형을 집행했다.
 
지난 1993년, 10.26사건 재판 과정 당시 녹음된 내용의 일부가 공개됐다. 김재규는 법정 최후 진술을 통해 유신 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언급했다. 10.26사건을 혁명이라 표현한 데 이어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도 폈다. 하지만 재판 도중 그의 진술은 누군가에 의해 수시로 제지당했다. 아울러 보안사령부가 몰래 녹취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재판 과정을 통해 드러난 사실은 전두환의 합동수사부 발표 내용과 상당 부분 달랐다.
 
당시 김재규를 변호했던 강신옥 변호사는 "완전히 억울한 재판을 받았다. 민간재판을 받았어야 했는데 비상 군법회의를 통해 재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재판장 뒤쪽 어딘가에 컨트롤타워가 있다. 그래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 듣고는 자신들이 재판을 간접적으로 지휘하는 그런 식"이라며 보안사령부가 쪽지 등으로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제기했다.
 
조영선 재심 청구 변호사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기획실장 이학봉 등이 법정에 와서 격려하고 지침을 내렸다는 증언이 있다"고 말하며, 이 과정에서 김재규의 법정 진술 대부분이 공판 조서에서 삭제됐고, 범행동기도 왜곡됐다고 주장한다.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 SBS

 
판결 과정 역시 석연치 않다. 당시 대법원에서는 내란죄 성립 여부를 놓고 8:6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하지만 소수의견을 낸 6명의 판사는 모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양병호 전 대법관만이 지난 1993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재규의 재판에 대해 언급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미 고인이 된 그는 해당 인터뷰에서 "김재규 일행이 내란을 꾀했다는 법정 증거가 없어 나를 비롯한 6명이 '내란 목적살인죄는 증거불충분으로 다시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언급했다. 소수의견을 낸 판사들에게는 불이익이 가해졌다. 일부는 법복을 벗어야 했다.
 
기소된 지 6개월, 대법원 판결 사흘 만에 속전속결로 이뤄진 사형 집행도 의문투성이다. 김재홍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은 "국제사회에서 정치범, 양심수 구출 운동이 벌어질까봐 5월21일 확정판결이 나왔는데 24일, 단 사흘 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이러한 전례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김재규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0년 동안 김재규를 밀착 경호하며 곁에서 지켜봤다는 김재규 집사 김종대 씨. 그는 "아주 정직한 분이다. 정확하신 분이고 바쁜 와중에도 어쩌다 대화할 시간이 있으면 비서진들에게도 '이권 개입하지 마라', '인사 청탁하지 마라' 그걸 입에 담으셨다"고 말한다.
 
김재규는 경북 구미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건 육군사관학교에서였다. 김재규는 1973년 중장으로 예편 뒤 국회의원과 건설부장관을 거쳐 1976년 8대 중앙정보부장에 올랐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향인 데다 육군사관학교 동기이기도 했던 김재규. 하지만 두 사람의 성향은 전혀 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삼웅 김재규 평전 작가는 "박정희는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권력을 쟁취하자는 입장이었고, 김재규는 군인은 국방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주의자였다"며 "두 사람이 가까워질 이유가 없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승승장구하면서 자기 동향 동기생 중에서 유능한 김재규 장군을 핵심 요직으로 등용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재심의 목적
 
유가족과 변호인단은 신군부 체제 하에서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받았다며 지난달 재심을 청구했다. 강신옥 변호사는 "전두환은 김재규에 대해 자기 부하 같은 육군 대위 차지철과 충성 경쟁을 벌이다가 실패하자 욱하고 죽였으며, 그를 애국자가 아닌 파렴치범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당시 보도 금지 지침으로 인해 소수의견은 언론에 보도조차 되지 않던 사실을 꼽으며 김재규의 살해 동기가 은폐, 왜곡됐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조영선 변호사는 "가장 궁극적인 재심의 목적은 김재규를 비롯한 피고인들에게 덧씌워진 내란 목적 살인, 이 내란 목적 살인을 무죄로 하려는 것"이라며 "그렇다고 하여 살인죄를 무죄로 한다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재심은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한상희 건국대 법학과 교수는 "재심은 받아들여질 것 같다"며 "김재규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고 음모를 했다든지 대한민국의 국헌질서를 문란한 상태로 빠뜨리겠다는 그런 내란의 목적을 가졌다고 하는 잘못된 판단은 거두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의 법리로 볼 때 잘못 적용된 부분이 작지 않고, 내란을 일으킨 적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SBS <뉴스토리> ‘김재규, 반역인가 혁명인가’ 편의 한 장면 ⓒ SBS

 
유가족과 변호인단은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단순 살인 사건을 내란 목적의 살인으로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민간인을 군법회의에 기소한 것과 판결 과정이 석연치 않은 점도 의혹투성이다. 재판장에서 김재규가 한 발언은 제지당했고, 공판 조서는 삭제됐다. 대법원 판결 사흘 만에 단행된 사형 집행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김재규, 그는 진정 반역 죄인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그동안 알려진 사실과 상반된 내용이 상당하다는 점만으로도 재심을 통해 그를 재평가해야 할 당위성은 충분해 보인다.
 
"나는 오늘 마지막으로 이 나라의 자유 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20년 내지 25년 앞당겨 놓았다 하는 이 점, 이것은 누구의 뭐하고도 바꿀 수 없는 이런 자부를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이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 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이 나라에 만발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그 여한이 한량이 없습니다."(김재규의 법정진술)
10.26 김재규 박정희 전두환
댓글4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