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짓> 포스터

<트랜짓> 포스터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역사물이라는 안전지대로 회귀하고 싶지 않았다."
 
1940년대를 재구성한 역사물 <피닉스>로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크리스티안 펫졸드 감독은 안나 제거스의 소설 <트랜짓>을 영화화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역사는 그 시대 속에 머문다는 착각을 지니게 만든다. 역사에 존재했던 아픔과 고통은 그때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현대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인종청소를 통해 현대의 난민 문제를 바라본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 분)는 독일군이 프랑스 파리로 진군하자 마르세유로 탈출하기로 한다. 그는 탈출 직전, 작가 바이델에게 아내와 멕시코 대사관으로부터 온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바이델이 머무는 호텔에 들른다. 하지만 시대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작가는 마지막 작품의 원고만을 남긴 채 자살했다. 이에 게오르그는 바이델에게 남겨진 편지와 그의 원고를 들고 다리를 다친 동료와 함께 몰래 기차를 타고 파리를 떠난다.
 
작품은 파리로 독일군이 진군했다는 사실, 마르세유를 통해 유럽 난민들이 미국이나 멕시코 등으로 떠나는 장면 등을 보여주며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감독은 앞서 언급했듯 시대에 이야기를 가두고 싶지 않았기에, 영화에서 시대성은 희석된다. 독일군은 나치 복장 대신 현대의 무장 경찰복을 입고 있다. 또 작품 속 자동차는 현대의 자동차 모습이다. 때문에 장르는 시대극이 아닌 SF에 가까우며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한다.

시대성을 희석시킨 감독의 의도

  
 <트랜짓> 스틸컷

<트랜짓>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게오르그는 겨우 마르세유에 도착했지만 옆에 잠든 동료는 이미 죽어있었다. 그는 불법체류자 출신인 동료의 가족들에게 그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동료의 아들 드리스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아버지가 죽은 걸 알게 된 후 드리스는 게오르그를 아버지처럼 여긴다. 만약 게오르그에게 예상치 못했던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드리스의 아버지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회는 찾아왔다. 멕시코 대사관에서 게오르그를 바이델로 오해한 것이 그 기회였다.
 
불법체류자로 독일의 인종청소에 의해 제거 당할 대상이었던 게오르그는 바이델로 오해를 받으면서 합법적인 비자를 발급받는다. 또 멕시코로 이민을 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멕시코로 떠날 준비를 하던 그는 마리라는 신비한 여인을 만난다. 계속 도시를 돌아다니는 마리는 누군가를 찾는다. 게오르그는 어딘지 모르게 자꾸만 눈이 가는 그녀가 찾는 사람이 혹시 자신이 아닌가 싶다.
 
과거와 현재의 난민 연결시키는 키워드

작품은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난민을 연결시킨다. 첫 번째는 게오르그의 정체성이다. 게오르그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모습을 버린다. 이는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의 <유로파 유로파>에서 볼 수 있듯 오직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 작품에서 유대인 소년은 살기 위해 정체를 숨기고 소련군이 되는가 하면 또 독일군이 되기도 한다. 게오르그 역시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바이델인 척 행동한다.
  
 <트랜짓> 스틸컷

<트랜짓>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게오르그는 자신으로 살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이는 현대의 난민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에 오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말처럼 난민은 다른 사회에 융합되기 위해 자신이 살아온 문화와 언어라는 정체성을 포기해야 한다. 앞서 게오르그가 바이델이 남긴 마지막 글을 읽으며 오랜만에 읽게 된 모국어에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난민이 된다는 건 고유의 정체성에서 멀어진다는 걸 의미한다.
 
이 정체성이 잘 드러난 장면이 미국 대사와의 대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미국 대사는 유럽이 겪는 비극을 소설로 기록하지 않을 것이냐고 묻고, 게오르그는 학창시절 썼던 글짓기 숙제처럼 경험이나 체험을 글로 남기는 숙제를 다시 짊어지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이는 게오르그가 바이델이란 지식인 또는 역사의 아픔을 경험한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동료 가족과의 만남이다. 동료가 다리를 다쳤다는 건 이동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 단위로 이동해야 하는 난민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난민 가족 구성원 중 일부만이 난민으로 탈출하는가 하면, 일부는 고국에 발이 묶여 게오르그의 동료처럼 비극적인 일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난민의 비극은 곳곳에서 계속된다. 이들은 가정의 행복을 영위하기 어려운 데다, 이주한 사회에서도 하층민의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또한 드리스의 가정은 더이상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게오르그를 만났다고 해도, 게오르그가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마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실종된 남편을 찾기 위해 매일 항구 주변을 배회한다. 그녀에게는 함께 생활하는 의사 리차드, 사랑을 나누는 게오르그가 있지만 온전히 마음을 내주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트랜짓> 스틸컷

<트랜짓> 스틸컷 ⓒ 엠엔엠인터내셔널(주)

 
세 번째는 마리의 존재다. 마리는 게오르그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부터 계속 그를 발견한다. 마리가 계속해서 게오르그를 발견하는 이유는 두 사람에게 같은 난민으로의 고독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그는 아버지 없이 남겨진 드리스 때문에, 마리는 나타나지 않는 남편 때문에 같은 감정을 지닌다. 마리는 마르세유를 떠날 기회가 있었지만 그러질 못한다. 그 이유는 정체성 때문이다.
 
마르세유를 떠나면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난민 출신인 그들은 마르세유에 있다가는 독일군에 의해 대청소를 당한다. 하지만 멕시코로 홀로 떠난다면 정체성을 잃게 된다. 때문에 그녀에게는 곁에서 함께 할 누군가가, 남편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게오르그와 마리는 둘 다 떠나야 하는 사람이지만 떠날 수 없다. 이 점은 극적인 전개에 있어서 다소 답답함을 유발하지만 난민의 문제가 오직 생존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없는 문제임을 보여준다. 
 
한때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유럽 난민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당시 독일 나치의 탄압을 받던 수많은 예술인들과 유대인들 역시 망명의 삶을 택했다. 그리고 현재, 유럽에서는 다시 난민이 사회적 이슈로 올라섰다. 시리아 내전 등으로 난민이 된 사람들은 유럽으로 향하고 있다. 유럽은 이들을 포용하는 문제로 사회 갈등을 겪고 있으며, 일부 극우 정당들은 난민을 적으로 규정해 선동하기도 한다.
 
유럽인들 역시 한때는 망명자였고 미래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난민이 될지도 모른다. 난민문제는 과거가 아닌, 우리와는 먼 지역의 이야기가 아닐지 모른다. 그래서 감독은 시대에 망명의 문제를 가두지 않는다. 2차 대전 당시 난민 문제를 통해 현대의 난민 문제를 조명한다. 동시에 이들에게는 생존이란 빵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장미라는 품위와 존중 역시 보장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감독은 한 건축가와의 만남을 통해 영화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독일 뮌헨에는 걸어다니면서 발에 걸리는 돌 '슈톨퍼슈타인'(걸림돌)이 줄지어 설치된 인도가 있다. 독일 국민들이 2차대전 당시 수용된 나치 피해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걸림돌을 만든 것이다.

감독은 이 길을 통해 현재를 걸으며 과거를 목도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시대를 뛰어넘는 의미를 담아낸다. <트랜짓>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그리고 미래를 그리는 깊은 의미를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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