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한 장면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한 장면 ⓒ tvN

 
'나를 지켜줄 유일한 공동체'로 전유되곤 하는 가족의 실체는 정말 명실상부할까?

이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가 있다.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아래 '가족입니다'). 드라마는 매우 직설적인 화법으로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세요'라는 돌직구를 던지는데, 이 질문을 경유해 시청자는 현 가족뿐 아니라 원가족까지를 치열히 그리고 쓸쓸히 돌아보게 된다.
 
지지고 볶는 가족 드라마는 주로 코믹물이나 휴먼 드라마로 그려지곤 하는데, <가족입니다>는 그 익숙한 문법에 기대는 대신, 조금은 생뚱맞은 스릴러 형식을 가미해 종종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며 흥미를 돋운다. 따지고 보면 가족이라는 제도만큼 미스터리한 창조물도 없으니, 본질적으로 스릴러가 제격일지 모른다.
 
<가족입니다>의 등장인물인 엄마 진숙(원미경), 아빠 상식(정진영), 큰딸 은주(추자현), 작은딸 은희(한예리), 막내아들 지우(신재하)의 조합은 과거 가족 드라마의 관성을 따르자면, '대추나무 사랑 걸린' 다복한 가족을 떠올려야 한다. 하지만 지독히 가부장적인 아빠 상식과 그의 시녀와도 같은 엄마 진숙이 인생 마지막 반기로 '졸혼'을 선언하는 것으로 드라마는, 이들이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무책임 혹은 방관으로 점철된 결코 행복하지 않은 가족임을 감지하게 한다.
 
"한 남자의 여자를 죽이고 엄마로 살기로 했"던 엄마 삶의 자장 안에 있던 자식들 또한 행복할 수는 없었을 터. 한때 소녀 가장 노릇을 해내며 가족이라는 짐 때문에 독해진 큰 딸, 허허실실 하며 "남한테 잘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나 미움받을 용기를 내지 못하는 둘째 딸, 그리고 '동수저'도 상속받지 못한 청춘으로 각자도생 '헬조선'에서 살아남으려 고전하지만 남매 중 가장 철없는 막내까지, "가족이라 절대 먼지처럼 털어지지 않는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이렇듯 각자 삶의 무게를 짊어진 가족은 부모의 졸혼이라는 삶의 전환을 통해 어떠한 가족으로 거듭나게 될까. 드라마가 첨예한 가족 갈등을 종국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훈훈한 가족애로 섣부르게 봉합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신선한 가족 담론을 생산해내길 기대해본다.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스틸 컷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스틸 컷 ⓒ tvN

 
엄마인 진숙의 삶은 엄마였던 내 엄마와 엄마인 나를 동시에 개입시키며 이입하게 한다. 해서 이번 리뷰는 엄마에 집중하고 삼남매의 스토리는 다음 회에 이어 써보기로 하겠다.

몇 해 전만 해도 익숙하지 않았던 졸혼이라는 삶의 방식은 주로, 일본의 쿨한 노인들의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인 양 소개되곤 했다. 하지만 이에 앞서 일본에서 이미 '황혼이혼'이 가파르게 증가했고, 이에 조응하며 졸혼이 조용히 번졌다는 점에서, 졸혼은 결코 쉽게 낭만화되거나 혹은 늙은 여성의 이기적인 선택쯤으로 가볍게 다루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가진다.
 
자식들의 눈치를 살피며 "이혼 아니고 졸혼, 그거 하려고"라며 소심하게 선언하는 진숙은, 오래전 인기리에 방영했던 KBS 가족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한자(김혜자)를 불러들인다. 한자는 입속의 혀처럼 시부모를 지극히 봉양하고, 어려운 살림에 남편과 아이들을 살뜰히 건사하는 현모양처의 현신이다. 며느리이자 엄마 그리고 아내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 한자가 힘들면 힘들수록 가족은 행복해졌다.

당시 독박육아로 지쳐가던 내게 자신의 삶이라고는 한 조각도 없는 한자의 삶은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로 숨 막혀 보였다. 그러던 그녀가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며 단 일 년 만이라도 혼자 살고 싶다며 시부모에게 읍소한다. 다행인지 시부모는 극단적 가족주의자는 아니어서, 한자는 한시적 독립을 얻어낸다. 혼자 살게 된 그녀는 좁은 원룸에서 지내며,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가족의 끼니 걱정 없이 오직 자신의 입만 해결하면 되는 자유를 누리자, 그 작은 해방에 행복에 겨워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족이 없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던 내게, 한자의 해방은 사이다 같은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그런데 이 장면들의 쾌감은 이어지는 내 엄마의 발언으로 김이 확 빠져버리고 말았다.
 
한자에 가장 공감하리라 생각했던 내 짐작과 달리, 엄마는 뜻밖에도 "저 여자도 참 너무한다. 식구들은 어쩌라고 저렇게까지 하냐"고 했다. 뜻밖의 전개에 나는 뭔가 굉장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가족입니다>의 진숙이 졸혼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나는 한자를 비난하던 엄마가 떠올랐고, 지금은 TV도 못 보시는 엄마가 저 장면을 보면 뭐라고 하실까 싶었다.

불행한 결혼생활로 아버지와 이혼하겠다는 퍼포먼스를 종종 무기처럼 행사하던 엄마는 그리 행복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때 왜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한자를 비난했던 걸까? 그렇다면 엄마가 행복하지 않았다는 내 생각이 오해였던 걸까. 그도 아니라면, 아들 둔 엄마로 겨우 자궁 가족의 권력자가 되어 있는 자신의 유일한 지위가 독립이나 졸혼 따위로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을까. 오십 년이 넘도록 딸 노릇을 한 나 역시, 진숙의 딸들처럼, 엄마의 삶과 선택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드라마가 일면 스릴러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서늘히 납득되었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의 졸혼을 선언한 여성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스틸 컷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스틸 컷 ⓒ tvN


소설가 이외수의 부인 전영자는 매우 헌신적인 아내의 아이콘으로 회자되곤 했다. 종종 TV에 등장했던 그녀는 소설가인 남편을 꼭 '선생님'이라고 호칭했고, 남편의 긴 머리를 빗겨 주면서 "우리 선생님은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라며 남편을 마치 어린 아들을 대하듯 했는데, 좋은 시선으로 보기 어려웠다. 

남편은 받들고 모시는 선생님이 되어서도, 죽는 날까지 돌보아야 하는 아들이 되어서도 안 된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삶의 긴 여정을 함께하는 동반자이며, 또는 삶에 때때로 찾아드는 분쟁 혹은 재난을 같이 헤쳐 나가는 공생적 관계여야 한다. 공생을 위해선 부부 중 누구도 상대에게 절대적인 양보나 헌신을 요구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전제가 상시적으로 깨어진다면, 그 관계는 이미 수평적 관계가 될 수 없다. 그렇게 헌신적이던 전영자씨가 <거리의 만찬>에 출현해 졸혼했다며 해맑게 웃으며 등장할 때, 나는 엄청난 충격과 함께 이상하게도 굉장한 해방감을 느꼈다.
 
고작 네 댓 평밖에 되지 않는 원룸에, 오래 머물지 않을 양 간소한 살림살이를 들여놓고, 잠자리로 얇은 매트리스 하나를 덜렁 깔아 놓은 공간에서 그녀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거리의 만찬>의 진행자인 양희은과 박미선은 전영자의 젊을 시절 사진을 함께 보며, 누구의 아내나 엄마이기 전, 그녀가 어떤 꿈을 꾸던 사람이었는지를 얘기한다. 늙어버린 할머니라고 해서 어찌 소녀이고 여자인 삶이 없었겠는가. 결혼이, 가족이, 여성의 꿈을 무참히 부숴버리는 장치라면, 그 자체로 폭력이다. 전영자는 이제 소설가 이외수의 아내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홀로 설 것이며,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일망정 해방과 자유를 누릴 것이다. 그럴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거리의 만찬>을 본 지 몇 달 지나 소설가 이외수가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비보를 접하던 날, 한 사람의 쇠락이 주는 충격에 앞서, 전영자의 '소확행'이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먼저 들려왔던 것은 왜일까. 마음이 아팠다.

전영자와 마찬가지로, <가족입니다>의 진숙 역시, 오랜 세월 자신을 지운 채 살아왔다. 상식이 진숙을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로 인질 삼았지만, 그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되는 시점,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하늘로 오르는 대신, 집을 떠나기로 한다. 실상 그녀에게 남편에게 돌려받을 선녀복 따위는 없다. 이미 훼손될 대로 훼손된 선녀복은 그 기능을 상실했으며, 다 자란 아이들 또한 그녀가 두 팔에 안고 승천하기엔 터무니없이 무거울 뿐 아니라, 이승의 인연을 이미 깊게 뿌리내린 아이들은 엄마와 같이 승천할 마음 따위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용감히 홀로 서야 하는 진숙은 환갑을 맞는 나이에 주부로 살았던 관성에서 어떻게 벗어나 졸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개척해 낼까. 또한 진숙의 남편과 자식들은 그녀의 졸혼을 어떻게 직면하게 될까.
 
그런데 드라마는 졸혼을 선언하고 합의한 부부에게 생각지도 않는 사건을 일으키며 이들을 시간 여행으로 안내한다. 버럭쟁이에다 가부장적이던 남편이 갑자기 22살의 다정다감한 남편으로 돌아간 것이다. 버럭쟁이 남편이 이토록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는 설정은 시청자를 자칫 착각하게 만들 수 있다.

'고개 숙인 남편(아빠)'들이 모두 본래는 저토록 선하기 그지없었는데, 살다 보니 어쩌다 악당이 되어버렸다는 가부장의 스토리, 그리고 그 악당이 된 연원이 자신이 극복하지 못한 못난 식민지 남성성이 아니라, 아내가 행한 불순한 과거에 기인할지 모른다는 나쁜 여자 스토리로 외피를 입히려는 불순함 말이다.

아내의 과거를 모르고 결혼한 게 아닌 한, 상식의 악당으로의 변신은 고단한 삶 때문이라는 핑계로 무죄가 될 수 없다. 저계급 남성들이 사회에서 받는 수모를 가정으로 끌고 들어와 온갖 폭력을 일삼으며 집안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려는 현상은, 비단 상식만의 개인사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으로 가부장의 암울한 그림자가 여전히 짙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22살로 돌아간 상식이 벌이는 달콤한 애정행각에 진숙은 "발목을 제대로 잡힐"것인가. 그렇게 다정했던 남편이었음을 기억하는 일과 동시에, 그렇게 나쁘게 변한 사람 역시 다른 사람이 아닌 동일한 남자 상식임을 진숙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아니면 나쁜 남자 상식이 일시적 기억상실로 인한 '타임슬립퍼'의 여행을 통해, 마치 저승에 간 망자들이 자신의 과오를 처절히 복기하듯 개과천선할 수 있다면, 이는 기적이다. 기적을 행하려면, 드라마는 이 기적을 신파로 전락시켜서는 안 되며 어떻게 진숙의 쓰라린 상처와 상식의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시킬 것인가에 신중히 다가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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