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조선 토일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TV조선 토일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 TV조선

 
고종 임금의 전임자인 철종은 죽어서까지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그는 많은 현대인들로부터 까막눈이라는 오해를 사고 있다. 포털 사이트에서 '철종 까막눈'을 검색해보면, 오해가 상당히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지금 방송되는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 나오는 철종(정욱 분)의 이미지는 약간 다르다. 이 드라마 속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조종을 받는 유약한 군주이기는 하지만, 까막눈 이미지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다. 14일 방송된 제 9회분에서는 철종이 '별 어려움 없이' 서류를 읽는 장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대중의 인식과 거리를 두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철종이 까막눈이었다고 오해하고 있다. 이런 오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철종의 학문이 높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철종은 학문적 소양이 전혀 없거나 아니면 높지 않은 군주로 인식되고 있다. 
 
 <강화행렬도>. 임금 자리에 즉위하고자 강화도를 떠나는 철종의 행렬을 담은 기록물.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강화행렬도>. 임금 자리에 즉위하고자 강화도를 떠나는 철종의 행렬을 담은 기록물.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이런 오해가 확산된 데는 대중 역사물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일례로, 역사학자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와 <인물 한국사>를 재구성한 <이이화의 한국사>는 철종과 그 형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서술한다.
 
"고아인 이들 형제는 강화도에서 땔나무를 하여 푸성귀로 연명하는 생활을 했다. 때로는 강화도의 유력자 이시원(한말 명문장가인 이건창의 할아버지) 같은 인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그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철종은 여느 초동들과 어울려 지게 목발을 두들기며 나무를 했고, 글 한 줄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자랐을 것이다."
 
글 한 줄 변변히 읽지도 못하고 자랐을 것이라고 했다. 철종을 까막눈 비슷하게 묘사한 것이다. 위 책은 철종이 안동 김씨의 선택을 받아 강화도에서 한양으로 옮겨져 임금 생활을 할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무식꾼인 철종은 궁중에서 온갖 법도를 배워야 했다. 일정한 시간에 글을 익혀 왕도를 배워야 했고, 만조백관을 접하고 정책을 논해야 했다. 그는 거추장스런 곤룡포 따위의 의관을 걸치고, 걸음걸이는 위엄 있게, 말씨는 왕자(王者)답게, 눈빛은 빛나게 갖기 위해 한 시간도 여유 없이 긴장해야 했다."
 
철종이 글 한줄 변변히 읽지 못한 무식꾼이었다는 이 같은 서술은 음력으로 철종 즉위년 6월 9일자(양력 1849년 7월 28일자) <철종실록>과 명확히 상반된다. 1849년 7월 28일은 철종이 주상으로 등극한 날이다. 
 
 철종 즉위식이 있었던 창덕궁 인정문.

철종 즉위식이 있었던 창덕궁 인정문. ⓒ 김종성

  
이날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식을 가진 철종은 희정당에서 대왕대비 순원왕후 및 전·현직 대신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의 일원이었다. 이 자리에서 순원왕후와 대신들은 새로운 군주의 학업 능력을 체크했다. 이때 철종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통감> 2권과 <소학> 1·2권을 읽었지만,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
 
<통감>은 기원전 403년부터 서기 960년까지의 중국 역사를 담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축약한 <통감절요>를 지칭한다. 그리고 <소학>은 아동용 유학 교재다.
 
<통감>과 <소학>을 조금 읽었다는 답변은 적어도 <천자문>은 뗐음을 전제로 한다. 물론 같은 또래 유생들에 비하면 상당히 뒤진 편이지만, 일반 농민 자제들과 비교하면 꽤 많이 앞서는 편이었다. 이 시대의 평균 학력을 명확히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까막눈은 분명히 아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대중 역사물인 신봉승(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역임)의 글인 '역사 에세이: 강화도령 철종'은 이이화의 글과 달리 '철종이 어느 정도는 책을 읽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전개한다. 2012년에 <한글한자문화> 제152권에 실린 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철종이 안동 김씨의 지원으로 왕위에 오르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참으로 기막힌 노릇이지만 어찌하랴. 산에 나무하러 다니던 19세의 더벅머리 총각이 조선의 왕위에 오르니, 이분이 바로 철종 임금이다. <철종실록>을 보면 철종이 <명심보감>과 <소학> 1, 2권을 읽었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고, 경연에서 <논어>를 강론한 것으로 보아 아주 까막눈은 아닌 게 분명하다."
 

위 인용문에 나오는 <명심보감>은 <통감>으로 바꿔 읽어야 한다. 통감(通鑑)이란 한자를 급하게 읽다 보면 보감(寶鑑)으로 보일 수도 있다. '보감'으로 잘못 읽게 되면 <명심보감>의 약칭으로 오해할 수도 있게 된다.
 
이이화의 글과 달리 신봉승의 글은 철종이 기본 학력은 갖고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 글 역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있다. '아주 까막눈은 아닌 게 분명하다'는 표현은 철종의 학업 수준이 초보적 단계에 머물렀던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철종의 실제 학문능력과 한참 동떨어진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철종은 국립대학 성균관의 유생들을 지도하고도 남을 만했다. 그것도, 모범 유생들을 따로 모아 가르칠 만했다. 이를 증명하는 문헌이 있다. 구한말의 가장 유명한 논객으로서 고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실각시킨 면암 최익현의 문집인 <면암선생문집>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의 연보(年譜) 편에서 철종의 학문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철종이 왕이 된 지 6년 뒤인 1855년이었다. 이때 철종은 24세였고, 최익현은 22세의 성균관 유생이었다. <면암선생문집> 연보 편에 따르면, 이 해에 철종은 춘도기(春到記)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주재했고 최익현은 이 시험에 응시했다.
 
춘도기는 출석 성적이 우수한 성균관 유생들만 따로 모아 시행한 특별 전형이다. 이런 시험이 가을에 열리면 추도기로 불렸다. 제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를 거쳐 제2단계 과거시험인 대과로 나아가는 게 상례였지만,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이들끼리만 대과를 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춘도기·추도기가 바로 그것이다.
 
1855년 봄철에 시험이 치러졌을 때, 철종은 단순히 참관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문제를 내고 채점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가 유생들을 하나씩 불러내 일대일 면접을 하는 방식으로 이 시험은 진행됐다. 시험 범위는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이었고, 최익현은 맨마지막 자리에 배치돼 있었다.
 
이날의 시험장을 긴장시킨 것이 있었다. 바로, 철종의 표정이었다. 문제를 내고 답을 듣는 철종의 표정이 내내 좋지 않았다. "임금께서 즐겁지 않은 기색"이었다고 위 연보는 말한다. 그를 흡족케 할 만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철종의 표정을 일거에 바꾼 것이 마지막 수험생의 등장이었다. 최익현은 막힘 없이 술술 답변했다. 철종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철종한테서 나온 굵직한 한마디는 "순통(順通)이로다"였다. '성적 우수' 판정이 나왔던 것이다.
 
<면암선생문집>은 최익현의 아들이 최익현을 존경하는 문인들과 함께 만든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익현을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어느 정도 과장을 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 상황이 상당부분 진실에 가깝다는 점은 최익현이 이 시험에서 장원급제를 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다. 최익현이 다른 수험생들을 능가하는 답변을 내놓은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위 일화가 철종의 높은 학문 수준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철종은 가장 모범적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문제를 냈다. 그들의 답변을 들은 철종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는 철종이 그들을 평가할 만한 학문적 역량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더 대단한 것은 그가 최익현이라는 걸물을 발굴해 장원급제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머지 않아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지식인을 그가 발탁했던 것이다. 인재를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므로, 최익현을 골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철종의 학문적 능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것은 이때 철종이 24세였다는 점이다. 당시 20대는 지금의 20대보다 조숙했지만, 그 시절의 20대도 지금처럼 젊은 축에 속했다. 20대 전반에 그 정도였다면, 이미 10대 때부터 상당히 뛰어났으리라고 판단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한 학문적 역량이 즉위 후 6년 사이에 축적됐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미 오래 전부터 쌓였으리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즉위식 날에 그가 했던 "<통감> 2권과 <소학> 1·2권을 읽었지만, 근년에는 읽은 게 없습니다"라는 말은 과도한 겸양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철종이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 묘사되는 것처럼, 그는 안동 김씨의 간섭으로 인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까막눈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많이 배운 사람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허수아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허수아비 군주가 되는 것은 배움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자원이 없어서다. 외교 전문가로서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집단의 허수아비가 됐던 것은 최규하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자산이 없어서 그렇게 됐을 뿐이다. 철종 임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