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호 선수... 한국전력 배구단 체육관 (2020.6.17)

이승호 선수... 한국전력 배구단 체육관 (2020.6.17) ⓒ 박진철 기자

 
배구를 그만둬야 할 위기에 놓인 선수가 극적으로 프로 무대에서 주전 도약을 꿈꿀 수 있게 됐다. 이승호(24세·183cm) 선수가 그 주인공이다.

남자 프로배구 한국전력 구단은 지난 5일 날짜로 이승호와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이승호는 5월 중순부터 전 소속팀인 대한항공에서 한국전력으로 옮겨 왔고, 팀 동료들과 훈련하며 입단 테스트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승호는 지난 2018년에 실시된 2018-2019시즌 V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4라운드 1순위로 대한항공에 지명됐다.

그는 대학 시절 세터로서 기량과 잠재력을 인정받은 유망주였다. 2017년에는 대학배구 리그와 전국대학배구 대회에서 경희대를 준우승으로 이끈 주전 세터였다. 2018년 전국대학배구 대회에서도 주전 세터로 활약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신장은 작지만, 점프력이 좋아 블로킹 능력도 갖춘 세터였다. 특히 경희대가 스피드 배구를 추구하면서 이승호는 파이프 공격 등 토스의 다양성, 경기 운영 능력, 2단 연결된 공의 토스 등에 장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프로 무대에서는 지난 2시즌 동안 단 1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아직 프로 데뷔 경기도 치르지 못한 상태다. 그가 지명돼 입단한 대한항공이 남자배구 7개 구단 중 세터 포지션이 가장 막강한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프로 첫 시즌인 2018-2019시즌은 국가대표 주전 세터인 한선수와 수준급 세터 황승빈이 대한항공의 한 시즌 전체를 책임졌다. 최진성, 이승호 등 다른 세터들은 단 한 경기도, 심지어 교체 멤버로도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

1년 동안 프로팀 훈련으로 또 다른 기회

결국 대한항공은 2019년 6월 30일자로 이승호를 자유신분선수로 공시했다. 이는 원하는 팀이 있으면 아무 조건 없이 데려가라는 뜻이다. 사실상 '방출 선수' 신분이다. 보통 이런 경우 해당 선수는 팀을 떠나 실업팀을 알아보거나 배구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는다.

그러나 대한항공은 이승호를 아무 대책 없이 방출하지 않았다. 올해 5월까지 1년 동안 일정 수준의 연봉을 지급하며, 주전 선수들의 연습경기와 훈련 파트너로서 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승호가 다른 프로팀으로 영입되거나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까지 배려를 해준 것이다.

그런 점 때문에 한국전력도 이승호를 영입하기 전에 자유신분선수임에도 대한항공 측에 양해를 구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대한항공도 이승호가 프로 선수로 뛸 기회를 준 한국전력 측에 감사를 표했다.

한국전력 구단 관계자는 "올 시즌 팀의 세터가 김명관 한 명밖에 없는 상태라 우려가 많았는데, 이승호가 와서 숨통이 트였다"며 "두 구단이 서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훈훈하게 영입이 마무리됐다"고 밝혔다.

사실 프로배구에서 본인 팀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로 활용하지 않거나 방출하면서도 다른 팀으로 갈 경우 상대팀 전력이 강해질 것을 우려해 임의탈퇴라는 족쇄를 채워 실업팀으로 가게 하거나 선수를 그만두게 만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은퇴한 지 수 년이 지났는데도 임의탈퇴로 묶어놓는 경우도 있다. 대한항공과 이승호의 사례는 오히려 보기 드문 케이스다.

이승호 "기회 준 한국전력, 대한항공 모두에 감사"
 
 2020-2021시즌을 이끌 한국전력 세터 김명관(왼쪽)-이승호... 경기도 의왕시 한국전력 배구단 체육관 (2020.6.17)

2020-2021시즌을 이끌 한국전력 세터 김명관(왼쪽)-이승호... 경기도 의왕시 한국전력 배구단 체육관 (2020.6.17) ⓒ 박진철 기자

 
배구 인생의 끝자락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프로 무대에서 다시 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17일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한국전력 배구단 체육관에서 만난 이승호는 "경기를 뛰고 싶은 열망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며 "기회를 주신 한국전력 감독님과 코치님, 그동안 배려해준 대한항공에게도 고맙다"고 말했다. 

장병철 한국전력 감독은 "이승호도 충분히 능력 있는 선수다. 프로 경기를 뛰는 것에 배고픔이 많을 것"이라며 "김명관 세터가 흔들리거나 교체해줘야 할 타이밍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승호가 서브도 좋아서 원 포인트 서버로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올 시즌은 매 경기 코트에 들어갈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김명관, 이승호 세터가 경쟁 체제로 가는 게 팀 입장에서는 훨씬 좋다"며 "두 선수에게도 좋다. 서로 자극제가 되면서 서너지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승호 사례로 본 프로 운영과 2군 가능성
 
 대한항공 선수들 경기 모습... 2019-2020시즌 V리그

대한항공 선수들 경기 모습... 2019-2020시즌 V리그 ⓒ 한국배구연맹

 
이승호의 경우는 단순히 미담 사례로만 치부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프로배구 리그의 미래와 발전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이승호뿐만 아니라, 올해 1월 자유신분선수로 공시한 엄윤식(26세·197cm·센터)도 똑같이 훈련 파트너로 고용했다. 엄윤식도 경기 감각을 유지하다 최근 다른 프로팀으로 영입됐다. 삼성화재는 엄윤식과 7월 1일자로 정식 계약을 체결했다. 올 시즌 V리그에서 교체 멤버로라도 출전할 수 있게 됐다.

두 선수뿐만 아니다. 대한항공은 자유신분선수로 공시한 대부분의 선수를 그냥 방출하지 않았다. 다른 프로팀에서 영입하거나 실업팀 등 직업을 찾을 때까지 1군 선수 연습경기와 훈련 파트너로 활용하면서 연봉을 지급해 왔다. 물론 이 같은 조치들은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모기업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은 여건상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해도 대한항공의 운영 방식은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배구계의 염원인 2군 제도가 없는 현실에서 사실상 2군 개념의 팀 운영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항공이 최근 몇 년 동안 남자배구 최강팀으로 올라선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만큼 배구단에 비용을 들여 투자를 한 것이고, 선진적인 프로구단 운영을 한 것이다. 프로배구도 구단의 의지만 있다면 큰 비용을 추가하지 않고 2군 리그가 가능할 수 있다는 단초를 보여준 셈이다.

아울러 국내 프로 리그에서 강팀과 전력 평준화는 투자를 발목 잡는 제도들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기업 사장(구단주)의 스포츠 팀에 대한 애정과 적극적 투자, 구단 프런트의 프로다운 운영 마인드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것이다. 

프로배구는 중하위권 팀의 전력 상승과 리그 전체의 평준화를 위해 신인 드래프트,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공개 선발 드래프트), 샐러리캡(팀별 연봉 총액 상한선)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3대 제도가 그 기능이 갈수록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지난 16시즌 동안 V리그 결과와 과정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챔피언결정전에 오른 팀들의 면면을 보면, 전력 평준화 목적과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또한 3대 제도가 배구단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구단의 의지를 꺾고, 투자에 인색한 구단들이 '우리는 투자하기 싫으니 너희도 하지 말라'는 발목 잡기식 하향 평준화 기능이 도드라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더 장기화되면, 프로배구 발전에 큰 장애가 되리라는 우려도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중하위권 팀일수록 강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더 절실하고 과감하게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V리그 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과 코치를 동시에 영입하면서 선진 배구 시스템 도입을 시도한 팀은 아이러니하게도 최강팀으로 평가받는 대한항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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