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종영한 SBS 드라마 <굿캐스팅>

16일 종영한 SBS 드라마 <굿캐스팅> ⓒ SBS

 
이소룡에서부터 성룡까지 무협영화를 섭렵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오빠가 무술과 무술 영화에 관심이 있었던 탓인데, 황송하게도 종종 어린 막내 동생을 영화관에 동반하곤 했다. 그때는 '아싸' 하며 좋아했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호사를 누린 동생은 세 여동생 중 내가 유일했다. 원님 덕에 나팔을 제대로 불었던 셈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술영화를 봤던 터라, 내게 액션은 매우 익숙한 장르인데, 당시엔 무술 영화에(40년도 전이다) 여성이 나오지 않았다. 날렵한 남자 배우들의 현란한 무술이 주를 이루었기에, 나는 이런 영화나 무술은 응당 남자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다. 당연히 무술을 행하는 배우나 당사자가 여성 혹은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스크린에서 여성 주인공이 멋진 무술(액션)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와 저 배우 대단한데' 정도가 감상이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구체적 부러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려한 액션으로 악당을 제압하는 배우의 동작을 보면, '아, 나도 저 배우처럼 하고 싶다', 특히 벽 차고 돌려 차기로 안면을 가격한다든가, 점프한 채 두 다리를 교차해 목 감고 조르기를 하는 장면에선, 정말 온갖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다. 한 번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같이 시청하던 남편과 딸아이에게, "나 저거 정말 해보고 싶다"고 했다가, 이보다 딱할 수 없다는 표정을 대답 대신 듣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쉰도 훨씬 넘은 나이가 원망스러울 뿐이고...
 
주목받지 못한 국정원 세 요원의 성장 드라마
 
 16일 종영한 SBS 드라마 <굿캐스팅>의 한 장면

16일 종영한 SBS 드라마 <굿캐스팅>의 한 장면 ⓒ SBS

 
여성의 빛나는 그 액션, 할 수는 없어도 보며 환호하는 것은 내 자유. TV 채널을 돌리다 최강희가 죄수복을 입고 활극을 벌이는 장면이 잡혔다. 동작 멈춤. 채널 고정. 와 진짜 멋있다. 그렇게 SBS 월화드라마 <굿캐스팅>을 보기 시작했다. 저토록 몸을 잘 쓰는 여성을 보면, 미치도록 닮고 싶다.
 
<굿캐스팅>은 국정원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세 여성 요원이 명 요원으로 거듭나는 일종의 성장 드라마다. 이 요원들의 면면을 보면, 어떻게 작전을 수행할까 의아할 정도로 얼핏 오합지졸이지만, 들여다보면, 스파이로서 꽤 유용한 면모를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우선 백찬미(최강희)를 보면, 그녀는 뼛속까지 요원인 열혈 스파이 체질로 국정원 내에서도 좀 기피하는 자칭 타칭 '로또(로얄 또라이)'다. 하지만 작전 수행은 어김없이 백발백중이다.
 
다음은 황미순(김지영). 배우 김지영은 이 드라마를 위해 몸무게를 12킬로나 늘렸다는데, 보기에도 스파이 분위기는 아니다 싶게 좀 둔해 보이지만, 과거에는 작전 꽤나 했던 요원이다. 경제적으로나 가사 분담으로나 형편없이 부실한 남편과 고등학생인 딸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워킹맘으로 사느라 지쳐, 어느덧 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 현장에선 멀어졌다. 생활형 요원이라 할 수 있는 미순은 영화 <걸캅스>의 박미영(라미란)을 상기시킨다. 현장이 체질이지만, 가사와 일을 병행하느라 자신의 몸에 대한 감각조차 잠재우고, 그저 '먹고사니즘'에 급급했던 미영이 다시 걸출한 경찰로 거듭나는 경로가 유사해서다. 이 유능한 여성들의 날개를 부러뜨린 자, 누구인가.
 
마지막으로 가장 젊은 요원 임예은(유인영). 뛰어난 IT 전문가로 현장을 백업하는 게 주 업무인데, 어쩌다 현장 요원이 되어야 했다. 세 살짜리 딸을 키우는 싱글 맘 예은은 스스로의 고백대로 "사명감이나 애국심" 없이 "먹고살려고" 국정원에 다니는 직장인이다. 그런 예은은 어린 딸을 어찌하고 현장에 나설 수 있을까. 홀로 세 살짜리 딸 소희(노하연)를 키우는 싱글 맘을 현장 요원으로 투입하려면, 국정원은 복지 시스템부터 마련했어야 한다.

돌아가며 소희를 돌보는 동료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싱글맘이 어떻게 현장에서 유능한 요원이 되겠는가. 국정원 요원이 아니더라도 돌봄 시스템이 부실한 한국에서 워킹맘 그것도 싱글맘으로 사는 일 자체가 사실 작전을 방불케 할 것이다. '예은들'은 이미 매일 전쟁터 같은 현실에서 눈물겨운 작전을 펼치고 있다.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모성은 언제나 백전백패

좌충우돌을 수도 없이 겪으며 B급 스파이로 작전을 수행하는 세 명을 보면,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가 겹쳐진다. 물론 <나를 차버린 스파이>에서는 전문 요원이 아닌 오드리(밀라 쿠니스)와 모건(케이트 맥키넌)이 어쩌다 범죄에 연루되어 스파이가 되긴 하지만. 이 둘은 어설픈 스파이 노릇을 하며 기발한 웃음을 자아내고, 액션 또한 어쩌다 액션이지만 적재적소에 유머러스하게 벌어지는 바람에 얼떨결에 쓸 만한 스파이가 된다.

이들은 이 어쩌다 스파이 노릇을 통해 자신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스파이 기질을 발견하는데, 이 과정은 여성이 가정이나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다움을 연기하느라 망실했던 자기다움을 길어 올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들의 스파이 되기는 곧 '자기 되기'의 과정이며, <굿캐스팅>의 미순과 예은 역시 현장의 스파이 되기를 경유해 자신이 몰랐던 혹은 외면했던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미순은 국정원 요원임을 감추기 위해 보험 설계사라는 외피를 입고 있다. 나름 최선을 다해 가정과 일을 양립하며 살고 있지만, 무능하고 배려 없는 남편과 어느새 훌쩍 큰 딸은 미순에게 살갑지 않다. 엄마에게 종종 반항을 일삼는 딸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있는 참담한 현실에 미순은 가슴이 아프다. 훨훨 나는 무술 실력으로 치면, 딸들을 괴롭히는 아이들이야 한주먹 거리도 안 되지만, 딸아이에게 학교라는 사회는 간단히 주먹 몇 대로 해결되지 않는, 그 아이로선, "인생이 달린 일이"기 때문이다. 미순은 딸애의 신체적 심리적 피해에 피눈물이 난다. 마치 자신이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는 죄책감과, 폭력 피해를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을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에 모성은 언제나 백전백패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가해 부모를 만났으나 오히려 맞을만한 짓을 해서 때렸을 거라는 인면수심에 미선은 절망한다. 이런 안하무인의 가해 아이와 부모에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어설픈 합의는 무용지물. 미순은 '이모 찬스'를 씀으로써 가해 아이들을 징벌한다. '이모 찬스'는 다분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으로, 이 방식이 가해자의 개과천선을 담보할지 의문이고, 이런 방식을 쓸 수 없는 적지 않은 피해 아이들의 입장에선 허탈할 수 있겠지만, 오직 약자의 무능한 무기일 수밖에 없는 인정이나 눈물에 기대 피해를 호소하는 일 또한 백약 무효하기에, 시청자는 이모들(찬미, 예은)이 강자인 가해자를 징벌하는 장면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심정적으로는 법보다 주먹이 가깝지만, 주먹조차 약자의 복수 혹은 정의 실현의 도구가 될 수 없는 게 현실인 반면, 기득권자들은 법이면 법, 주먹이면 주먹을 모두 요량껏 구사하지 않는가.
 
'눈에는 눈'식이 일면, 역지사지라는 인지상정을 전제한다고 보면, 즉 때리는 놈도 맞아봐야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반드시 반윤리적이라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눈에는 눈' 방식은 절대 약자의 전략이 될 수 없기에, 오히려 약자가 행한 개인적 징벌이 아이를 둔 엄마로서 일면 속 시원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모 찬스'를 쓸 만한 튼실한 이모가 없음이 아쉬울 뿐이고.
 
모성적 러브 스토리, 진부하지 않은가

<굿캐스팅>은 담대한 배짱과 탁월한 액션을 탑재한 요원들이지만, 이들이 일과 가정을 양립하느라 얼마나 악전고투해야 하는지와, 이들에게 집은 쉬는 곳이 아니라 또 다른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현장이라는 사실을 웃프게 재현해 냈다. 이런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요원으로 거듭난 이 여성 캐릭터들을 어찌 애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굿 캐스팅>은 여성 배우 세 명이 주도하는 서사로 액션까지 훌륭히 해낸 보기 드문 여성 드라마다. 무난히 '백델테스트'를 통과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다. 백찬미와 김예은의 부담스러운 러브 라인이 그런데, 기습 키스도 예외 없이 등장한다. 백찬미와 윤석호(이상엽)의 러브라인이 정말 필요했는지도 모르겠고(달달한 회상 장면이 오히려 드라마의 긴장을 무너뜨린다), 냉철한 박찬미가 석호에게 보이는 감정은 다분히 모성적이다. 연상의 여성이 보이는 모성적 러브 스토리, 진부하지 않은가.
 
강우원(이준영)이 김예은에게 보이는 가학적 행각은 안하무인 톱배우가 보이는 태도로 무마하기에 지나치다.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제멋대로 예은을 좋아하는 우원의 미숙함을 '썸'타는 연인의 줄다리기인 양 희화화해서는 곤란하다. 이는 사랑이라는 외피를 씌워 '나쁜 남자'에서 좋은 남자로의 귀환에 여성의 헌신과 인내가 요구된다는 오래된 신화를 불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토록 무도한 남자는 어떤 여자도 구원할 수 없다. 게다가 우원이 예은에게 기습키스를 하는 장면을 연애 행각으로 재현한 부분은 여성이 주도하는 서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스파이 드라마에 러브스토리가 꼭 필요한지, 게다가 그것도 시대착오적인 러브 스토리라면 더욱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옥에 티가 걷어진 여성 스파이 드라마를 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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