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랴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할 당시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박광수 감독. 옆은 문원립(동국대 교수), 김인수(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얼랴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할 당시 단편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박광수 감독. 옆은 문원립(동국대 교수), 김인수(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 서울영화집단

 
1987년 3월 충무로 영화사인 동아수출공사(대표 이우석)는 1986년 5월부터 연우무대가 공연하고 있던 연극 <칠수와 만수>를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관객몰이하던 흥행연극이 영화로 재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이때 감독으로 결정된 것이 박광수였다. 1978년 극단 연우무대의 <조각가와 탐정>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고 이후 미술을 담당하며 활동한 것이 작용했다. 1980년 한국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 첫 감독 탄생이었다.
 
박광수는 1979년 시작된 서울대 얄라셩이 1980년 정식 서클로 등록할 때 주축이었고, 서울영화집단을 거치면서 20여 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한 경험이 있었다. 얄라셩에서 만들었던 <그들도 우리처럼>과 <섬>은 1982년 영화진흥공사가 주최했던 '청소년영화제(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각각 촬영상(김인수, 김정희)과 특별상(얄라셩영화연구회) 등을 받았다.
 
1983년부터 2년간 프랑스로 유학을 가 영화교육특수학교인 ESEC에서 제3세계 영화를 전공하고 귀국한 박광수는 이장호 감독 밑에서 <어우동>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등의 제작에 참여했고,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 조감독을 맡아 충무로 경험을 쌓는다.
 
'동아일보' 1987년 6월 9일 자 기사에서 박광수는 "영화의 성패는 재미에 달려 있는 만큼 재미 속에 진한 감독과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영화를 선보이겠다"고 첫 영화에 임하는 각오를 전했다.
 
<칠수와 만수>는 1985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발판으로 영화운동 출신들이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영화운동을 했던 청년영화인이 처음으로 감독을 맡아 연출 역량을 처음 발휘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큰 작품이다.
 
1년 정도의 사전 준비작업을 거쳐 이듬해인 1988년 봄 촬영에 들어갔고, 1988년 11월에 개봉했다. 제작 초반에 조감독으로 참여했던 권영락은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요즘처럼 3~4개월이 아닌 1년 정도 걸렸다"며 "처음 퍼스트(조감독)를 내가 맡았고 세컨드가 얄라셩 출신 김동빈(감독)이었으나 아내의 출산에 따른 병원비 마련 등에 어려움이 생기면서 7회 정도 촬영에 참여한 이후 황규덕(감독)에게 자리를 넘겼다"고 말했다.
 
특히 <칠수와 만수>는 제작과정에서 전투경찰(전경)이 처음 등장하는 한국영화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1970~1980년대 시위진압에 주로 나섰던 전경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런 금기를 깨면서 자연스럽게 제작과정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변화의 단면이기도 했다.
   
 <칠수와 만수> 촬영 현장

<칠수와 만수> 촬영 현장 ⓒ 한국영화자료원 소장 자료

 
<칠수와 만수>는 또한 영화운동 출신의 역량이 드러난 영화였다. 사회문제를 짚으면서 기존 충무로영화와는 다른 문법으로 신선한 자극을 줬다. 1988년은 장선우의 <성공시대>와 장길수의 <아메리카 아메리카>에 이어 <칠수와 만수>까지 호평을 받으면서 새로운 영화와 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했던 영화운동의 능력이 주목받게 된다. 이전과는 다른 형식을 선보인 새로운 감독과 작품이 등장하는, 이른바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시작이었다.
 
서울대에서 문화패 활동을 하며 문화운동을 했던 장선우, 1970년대 '영상시대'에 선발돼 1980년대 단편영화 <강의 남쪽>을 제작해 프랑스문화원에서 주목받았던 장길수, 그리고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을 거친 박광수는 영화운동의 각 흐름을 대표하고 있었다.
 
당시 '한겨레'는 "이들은 영화운동에 더해 학구적인 영화 수업을 받았고, 날카로운 현실 인식에 한국영화를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했다. 충무로영화의 한계를 새로운 영화를 통해 비판하면서 미국영화 직배저지 투쟁에 나선 것도 같은 부분이었다. 박광수는 1988년 민족영화연구소 개소식에도 참석하는 등 기존 충무로 밖 영화운동과의 교류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한겨레'는 1988년 11월 5일 기사에서 이들이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 <영화운동론> 등 책을 통해 기존 상업영화의 한계와 모순을 분석 비판하는 한편 현실과 적극 반응하는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섰다"면서 "영화와 저질 상업적 오락물을 등식화하던 기존 개념을 도리어 뒤집고 영화가 수많은 대중에게 엄청난 효과를 미치는 현대사회의 가장 중요한 예술임을 발견해 냈다"고 호평했다.
 
이 기사에서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는 촬영에 앞서 리얼리즘으로 가겠다고 못 박았다"면서 "전체적 영화구조는 쉽게 이야기하듯 풀어나가려고 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홍도의 풍속도 가운데 고양이는 닭을 물고 도망가는데 병아리는 삐약거리고 영감은 맨발로 담뱃대를 들고 섬돌에서 뛰어내리는 그림이 있다"며 "전범으로 삼고 싶은 한국적인 화면은 이런 평이한 이야기다"라고 덧붙였다.
 
반골 기질 드러낸 정지영
 
198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변화는 1987년 6월항쟁의 흐름과도 맞닿아 있었다.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주학살 이후, 파쇼적 통치에 억눌렸던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헌법 개정을 거부하고 장기집권을 꾀한 4.13 호헌조치와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가 도화선이었다.
 
영화인 투쟁의 중심에는 정지영(감독)이 있었다. 충무로에서 활동하던 영화운동 출신들은 당시 정지영이 주도했던 영화인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다. 그는 1973년부터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들며 영화에 심취했던 이른바 '문화원 세대'의 출발점이었다. 대학에서 영화운동을 했던 충무로의 청년영화인들이 자연스럽게 의지하며 따르던 선배였다.
 
 정지영 감독

정지영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정지영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1961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을 본 이후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다. 그가 충무로에 발을 딛게 된 것은 1974년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가 신인 육성을 위해 마련한 6개월 과정의 워크숍에 선발되면서였다.
 
당시 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 위원장은 유현목 감독이었다. 신인을 자체 육성하겠다는 목적으로 대학재학생이나 졸업생 등의 영화 동호인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개최한 것이었다. 면접 실기 등의 심사를 거쳐 감독 5명, 연기 10명, 기술 5명, 시나리오 5명 등 25명을 선발해 현역감독 등 전문가들이 무료로 교육을 한 것이었다.
 
1974년 9월~1975년 2월까지 교육을 진행했고 5분 분량의 실습영화와 30분 분량의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지원자가 모두 300명 정도였는데, 정지영이 25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된 것이다.
 
정지영(감독)은 "당시 워크숍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일회성 행사로 끝났는데, 함께했던 동료 중 영화를 계속 한 사람은 나와 배용균(감독,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둘 뿐이었다"고 말했다.
 
워크숍 수료 후에는 1975년 한국의 뉴시네마를 선포했던 변인식(평론가), 이장호(감독), 하길종(감독), 김호선(감독) 등의 '영상시대' 동인들이 신인 양성을 위해 연출 지망생 등을 모집할 때 신승수(감독), 장길수(감독) 등과 함께 발탁되기도 했다.
 
1975년 김수용 감독의 <내일은 진실> 연출부 막내로 들어간 이후 1977년 김수용 감독의 <가위, 바위, 보> 퍼스트(조감독)을 거쳐 1982년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로 감독 데뷔를 한다.
 
1980년대 초반 정지영은 로맨스와 멜로영화 등을 연출하며 기존 충무로 흐름을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87년 한국영화의 첫 시국선언을 주도한 이후, 영화적으로도 본인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1987년 이후부터 사회성 짙은 소재의 영화를 기획하고 연출하면서 반골 기질을 발산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한국전쟁 당시 남한 빨치산을 소재로 한 <남부군>과 월남전 이야기를 담은 <하얀전쟁>이었다. 한국영화 뉴웨이브로 분류되는 작품으로, 한국 현대사의 아픔과 미국의 용병 성격으로 참여했던 월남전의 상처 등 정치 사회적 문제를 영화로 풀어낸 것이다. 정지영은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어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았기에 정치·사회적인 주제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대적인 상황은 그런 영화를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에 이어 1980년 5월 광주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군사독재 치하의 숨 막힌 현실에서 문제의식 다분한 영화를 만들기는 불가능했다. 검열의 칼날이 마구 춤추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1987년 한수산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한 <거리의 악사> 역시 10분 분량이 검열로 삭제돼야 했다. 원작자인 한수산 작가는 1981년 5월 일간지에 연재 중이던 소설이 전두환을 비유했다는 이유로 보안사(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끌려가 고문당한 필화사건의 당사자였다.
 
정지영은 "1987년 6월항쟁 이후가 영화의 전환점이 됐다"면서 "국민이 권력을 밀어낸 항쟁에 참여하면서 내 뒤에 국민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남부군> 기획에 들어간 것이 이때부터였다"며 "정부 당국이 시비를 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국민이 도와줄거라 믿었다"고 회상했다. 처음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꿈꾸던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지영은 1988년 UIP영화 직배반대 투쟁에서도 가장 앞에 나서서 젊은 감독들을 선도한다. 미국의 문화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의지가 작용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1989년 9월 <남부군> 촬영 중 구속돼 옥고를 치른다. 당시 직배영화를 상영하던 중구 명동 코리아극장과 신촌 신영극장에 뱀을 풀어 넣도록 사주한 혐의였다.
 
물론 당시는 실정법 위반이었지만, 한국영화가 전두환 군사독재 타도에 나선 데 이어 미국에 굴종하던 노태우 군사독재에도 맞섰던 강렬한 투쟁이었다. 정지영은 영화인들의 탄원 속에 구속 후 52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돼 <남부군> 촬영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 정지영은 굵직굵직한 시국사건과 영화에 사회적 메시지를 강하게 담으면서 사회변혁 의지를 충무로와 연계시켜 나간다. 2000년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등은 앞선 1988년 직배반대 투쟁의 경험과 역량이 쌓인 것이기도 했다.
 
 1987년 9월 7일 발행된 <충무로영화>

1987년 9월 7일 발행된 <충무로영화> ⓒ 주진숙 제공

 
1987년 6월항쟁 이후 충무로 변화의 단면 중 하나는 일시적이지만 영화인신문인 <충무로영화>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국영화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담은 <충무로영화>는 양윤모(영화평론가)가 제작한 것으로 진보적 영화인들의 대변지 역할을 담당했다.
 
양윤모는 서울예대 조교 출신이었다. 그의 뒤를 이어 1984년부터 조교를 맡았던 게 권영락(제작자, 시네락픽쳐스 대표)이었다. 양윤모는 1987년 영화인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후, 1987년 9월 7일 '충무로영화'를 만들어 충무로 개혁 요구를 담아냈다.
 
<충무로영화>는 창간사를 통해 '이 땅에서 영화를 한다는 것은 가시덤불을 맨몸으로 헤쳐나가는 것 같다'면서 충무로의 현실을 거론한 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사회적 멸시와 경제적 궁핍, 정치적 소외를 참을 수 없다. 누가 우리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를 기다려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영화신문은 가시덤불 같은 영화 현실의 표지판이 되어야 하고, 영화가 관객을 대상으로 하듯 영화신문도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이 되도록 노력할 것이고, 영화인들 공통의 문제와 정당한 요구를 여론화시켜 영화인의 주체적 입장에서 엄정히 다루는 진정한 정보지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충무로영화>는 창간호에서 영화인 시국선언에 서명했던 김현 편집기사 인터뷰를 통해 시국선언 참여 이후에는 의뢰 들어오는 작품이 한 편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영화인 권익을 대변해야 하는 영화인단체가 이런 영화인 어려움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또 민주화 열기가 뜨거웠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 발맞춰 영화계 현실 문제와 함께 영화법 개정 등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혔고, 현장 스태프들의 낮은 임금과 부당노동행위 강요 등에 대해 다루기도 했다. 1987년 6월항쟁과 7월·8월·9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어지던 정세 속에서 당시 충무로의 문제의식을 담아낸 것이었다.

양윤모는 1988년 김호선 감독의 <서울무지개> 조연출로 참여했고 서울예대와 한양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영화평론가로서 일간지에 영화평을 연재하며 활발한 비평 활동을 펼쳤다. 일본어에 능통해 1988년 남미 우카마우 집단이 쓴 일본어판 <혁명영화의 창조>(도서출판 한겨레)를 번역하기도 했다. 2000년대 처음으로 경선을 통해 선출된 영화평론가협회장이었다.
 
미 제국주의 문화침탈
 
 직배반대투쟁 소식지 <우리영화>에 실린 영화인들의 미국영화직배반대 시위모습

직배반대투쟁 소식지 <우리영화>에 실린 영화인들의 미국영화직배반대 시위모습 ⓒ 주진숙 제공

 
1987년 6월항쟁 이후 재야 영화운동이 제도권 충무로와의 연대에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은 정치적 상황변화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 미국영화 직배저지 투쟁이다. 정부가 미국 메이저영화사 연합배급사인 UIP(유나이티드 인터내셔널 픽처스) 직배 허용 방침에 영화계가 반발하는 가운데 재야 영화운동의 투쟁력이 결합된 것이다. 충무로 안에 있던 영화운동 출신들의 움직임도 탄력을 받게 된다.
 
1988년 미국영화 직배반대 투쟁은 외화수입으로 수익을 추구해온 한국영화계의 입장에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사실상 외국영화 수입으로 먹고살았던 영화업자들에게는 생존권이 달린 문제나 다름없었다. 영화운동의 관점에서는 1980년대 후반 반미의식이 고취되던 시기적 상황과 맞물려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탈'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1980년대 후반은 운동진영 내부에서 한국 사회를 이른바 '식민지 반(半)자본주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보는 관점과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보는 관점이 '사회구성체 논쟁'이란 이름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전자는 민족해방(NL) 계열이었고, 후자는 민중민주(PD) 계열이었다.
 
운동진영의 기본적인 인식은 한국사회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라는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미국영화 직배 허용은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배질서에 따른 결과물이기도 했다. 충무로에 전선을 넓히고 있던 영화운동 입장에서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한국의 영화산업이 미 제국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서울영화집단의 '파랑새 사건' 이후 충무로에서 연출부 등으로 활동하고 있던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과 이정하(전 영화평론가)가 미국영화 직배반대투쟁 과정에서 핵심적인 기획자로서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당시 흐름에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영화계 전체가 들고 일어선 가운데 1988년 10월 8일 발행된 미국영화직배저지·영화진흥법쟁취영화인투쟁위원회 소식지 <우리영화> 1호는 직배반대 투쟁에 나선 한국영화계의 철야농성과 결의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9월 19일부터 시작된 감독위원회의 철야농성은 그동한 굴종과 태만, 패배주의에 찌들은 80년 한국영화계를 과감히 깨부수고 자주적 자립적 민주적 영화풍토롤 조성하기 위한 영화계 혁신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강천, 유현목, 김기영 감독을 비롯한 원로감독, 최금동 씨 등 원로 시나리오 작가, 감독, 조감독, 청년영화인, 영화과 학생에 이르기까지 한국영화계의 전세대가 적극 동참하는 경이로운 장면을 연출해낸 5일 동안의 철야농성 중 연인원 400여명이 합세하여 '한국영화 압살하는 미국영화 물러가라', '영화진흥법 쟁취하여 우리영화 되살리자' 등의 구호를 외치고 전 영화인 단결을 다짐하였다.
 
계속되는 투쟁은 영화인 내부에도 반성의 계기를 마련하여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자는 다짐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각성은 강철같은 결속을 통해 투쟁을 더욱 심화시켜 나갔다. 박철수 감독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단결된 영화인들에게 경의를 표한 것이라든지,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이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울먹인 사실 등은 영화인 스스로 이번 투쟁을 얼마나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느끼는가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이효인과 이정하는 이 시기 민족영화연구소를 만들었지만, 충무로와의 연대를 중시하고 있었기에 UIP 직배반대투쟁 과정에서 적극 역할을 한 것이었다. 1990년 민족영화연구소 해소 이후 회원들이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것에서 볼 수 있듯, 한국영화 직배반대투쟁을 거치면서 충무로에 대한 인식은 변화돼 있었다.
 
영화운동 초기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충무로로 상징되는 제도권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시기, 더는 변절이나 투항이 아니었다. 제도권과 비제도권으로 구분 짓던 관점도 바뀌기 시작한다. 적극적인 연대를 통해 활동 폭을 넓혀야 할 전선으로서 목적의식이 뚜렷해진 것이다.
 
1990년 2월 계간지 <민족영화> 대담에서 이효인은 당시 영화운동의 새로운 매체로 부상한 비디오 영화를 언급하며 "영화 전체가 실제 대중들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때로는 관념적으로 선전 선동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과감한 질적 전한을 꾀해야 할 때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애초부터 제도권 비제도권 영화를 구분하여 시간의 길이뿐만 아니라 제도권 영화는 비판적 사실주의 차원에서 만족하고 비제도권 영화는 선전 선동의 목적성만을 요구하는 것은 서로를 위해서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면서 "오히려 서로 다른 대안을 보여줌으로써 자극받고 공동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충무로에서 공유된 '민족영화'  

6월항쟁 이후 불붙었던 충무로 개혁에 대한 의지는 군사독재 연장이 이뤄진 1987년 12월 대선 직후에도 표출된다. 1987년 12월 28일 당시 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에 소속된 이장호, 이두용, 유현목, 김수용, 김정현, 김성수, 서윤모, 이혁수, 정인엽, 정지영, 조문진, 이황림, 홍파, 송영수, 박용준, 하명중, 김원두, 김호선, 배창호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위원회에 소속돼 있던 최금동, 이희우, 윤삼육, 이문웅, 유동훈(전 영화인협회 이사장), 지상학(영화인협회 이사장 역임), 백결 등 28인의 영화인들은 한국영화개혁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들 28인은 '한국영화개혁실천 준비위원회 발기인 일동' 명의로 낸 성명에서 ▲스크린쿼터 사수 ▲ 영화진흥 5개년 계획 수립 ▲창작 표현의 자유 보장 ▲영화진흥공사 해체 ▲영화인협회 예총에서 독립 등을 요구한다.
 
 1987년 12월 28일 발표된 한국영화개혁선언문

1987년 12월 28일 발표된 한국영화개혁선언문 ⓒ 주진숙 제공

 
이듬해 1월에는 전국영화학과연합과 각 대학 영화서클연합체인 대학영화연합, 영화마당우리가 ▲외국영화수입개방 철회 ▲영화진흥공사 해체를 통한 민간차원 진흥기구 설립 ▲8mm 16mm 영화의 자율상영 등을 요구하는 한국영화 개혁을 위한 영화 청년 결의문을 발표한다.
 
이런 의지는 1988년 하반기 들어 기존 충무로 영화단체들과는 다른 새로운 조직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영화운동의 전선이 조직화를 통해 구체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영화인들의 조직은 연합체로서 한국영화인협회(현 한국영화인총연합회)가 있었고 그 안에 감독, 기술, 기획, 시나리오, 연기, 음악, 촬영, 조명 등 8개 분과위원회가 자리 잡은 형식이었다.
 
하지만 영화인협회가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의 산하단체로서 영화계의 현안에 대해 능동적 대처보다는 사실상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어 한계가 명확했다. 군사독재가 전두환에서 노태우로 연장된 현실에서, 충무로의 구체제를 상징하는 영화인협회의 자체적인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당시 충무로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일부 영화사와 상영관 대표 등은 미국영화 직배반대 투쟁 과정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행태를 보이다 불신을 사기도 했다.
 
이때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감독들이었다. 1988년 11월 15일~16일 서울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에서는 20명이 넘는 감독들이 모여 '우리영화연구 감독모임'이란 이름으로 한국영화의 현실을 점검하고 타개책을 논의하는 토론회를 개최한다.
 
당시 토론회는 사회성 있는 소재의 영화가 억압하고 성(性)개방을 부추기는 이른바 '벗기기 영화'로 한국영화의 저질화에 대한 비판이 높은 현실에 대해 감독들이 함께 비판하고 반성하며 서로 간의 고민을 토로하는 자리였다.
 
참석한 감독들은 이장호, 정지영, 김유진, 김현명, 장선우, 신승수, 박광수, 이미례, 강우석, 장길수 등 행사를 주도한 젊은 감독과 뜻을 같이하는 원로 김기영, 박상호 감독, 중견 감독인 변장호, 이두용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장영일 감독의 '음란영화는 왜 판치는가', 박광수 감독의 '민족영화라는 무엇인가', 이상언 감독의 '한국영화의 나아갈 길' 등에 대한 주제발표를 듣는다. 이를 통해 성적표현은 허용한 채 다양한 사회적 주체를 다룰 수 없도록 한 검열 문제 등에 대해 비판하고 영화정책의 이중구조에 대해 논의한 것이다. 여기서 기존 영화감독 조직과는 별개의 한국영화감독협회 창립이 결의된다.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박광수(감독)는 "영화인들이 이렇게 민족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자리를 가진 적이 이제껏 없었던 걸로 압니다. 이 단어를 쓰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됩니다"라는 말로 주제 발제를 시작했다. 한국영화 현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바탕으로 충무로 상업영화 감독들이 영화운동이 내건 민족영화라는 개념을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발제와 토론을 거친 20여명의 감독들은 '민족현실로부터 출발한 민족영화를 한국영화의 과제로 삼고 영화진흥법 제정을 위한 법적투쟁, 예총에서 독립한 영화감독의 자율기구인 한국영화감독협회 구성' 등을 내용으로 한 '한국영화가 가야할 길을 밝히는 한국영화감독들의 성명'을 채택한다.
 
여기에는 '민족영화라는 개념이 운동권적 저항운동으로만 인식될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억눌린 인간의 해방이라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틀 속에서 재정립돼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항상 우리 사회의 가장 구체적인 억눌린 현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미국영화 직배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민족영화'라는 개념이 당시 영화운동의 의제에서 충무로의 핵심 의제로 강화된 것이었다. 당시 대학 서클이나 영화운동 행사 등에서도 민족 강조될 만큼 민족영화는 영화운동의 주요 테제였다.
 
독재의 억압에 잠들었던 의식 깨어나
 
보름 뒤인 11월 30일 영화계 민주화와 새로운 민족영화 건설을 기치로 내건 한국영화감독협회의 창립총회가 서울YWCA에서 개최된다. 창립총회에서 유현목 감독은 명예회장에, 권영순 감독은 회장에 추대됐고, 이장호와 김정현 감독이 부회장에 선임됐다. 감독협회 창립회원은 이장호, 배창호, 김기영, 김수용 등 선배 감독들과 박철수, 장선우, 정지영, 김현명 등 80년대 등장한 젊은 감독들로 구성돼 있었다.
 
감독협회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문화통치 수단의 일환에 의해 타율성으로 구성돼 정부의 시녀 노릇을 해온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 산하 영화인협회를 탈퇴한다고 선언한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독재의 억압 속에서 잠들었던 영화인들의 의식이 이제 전 국민의 민주화로 가고자 하는 열망과 함께 깨어나, 새로운 영화 건설의 기반을 닦기 위해 영화계의 뿌리 깊은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영화감독협회는 '미국영화 직배저지, 영화진흥법 제정, 영화감독의 텔레비젼 비디오 저작권 확보, 스크린쿼터 감시기구 조직' 등을 활동 방향으로 설정해 한국영화의 개혁 의지를 담는다.
 
영화감독협회의 창립은 1988년 해방 이후 최초로 진보적 예술인들의 연합조직으로 결성된 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창립과 시기적으로 비슷했다. 앞서 1988년 11월 26일 민예총 발기인 대회가 열리는데, 영화에서는 정지영, 이장호, 장길수, 장선우, 박철수, 박광수, 이미례, 신승수, 홍기선 감독 등 101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1988년 12월 17일에는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산하에 민족영화위원회가 설립된다. 민족영화를 지향하는 충무로 상업영화와 재야 영화운동이 연대한 것으로 초기 영화운동을 아우르는 단체가 없던 상황에서 민예총을 기반으로 영화운동진영의 조직이 구축된 것이다. 영화감독협회가 감독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민족영화위원회는 전체 진보적인 영화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민족영화위원회는 창립선언문에서 '비제도권과 제도권에서 상업영화와 비상업영화에서 각기 진행되던 민족영화에의 지향의 결합'을 선언하고, 민주변혁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시점에서 '민족영화운동이 자주 민주 통일을 향한 전 국민의 염원을 담아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한 '민족영화'라는 개념과 관련해서는 "민중들의 삶을 반영하고 나아가서는 민중들의 삶을 변혁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족영화위원회 위원장은 이장호(감독), 부위원장은 정지영(감독)이 맡았다. 위원회 안에 연출, 시나리오, 비평, 촬영, 조명, 연기, 독립영화 8개 소위원회가 구성됐다. 연출소위원회에는 이장호, 정지영, 박철수, 장선우, 이미례, 신승수, 박광수 등 24명 감독으로 구성됐고, 독립영화 소위원회에는 이정하, 김동원, 배인정, 이효인, 낭희섭, 공수창 등이 위원이었다.
 
당시 민족영화위 운영위원은 박철수·장선우·이미례(감독), 최사규·임종재·유혁주(조감독), 홍기선(시나리오), 전양준(비평), 김동원·이정하(독립영화) 등 10인이었다.
 
창립 준비위원회에서부터 활동했던 정병각(감독)은 "준비단계부터 간사로 참여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고, 감독과 조감독 중 참여한 인원은 30~40명 정도로 적었다"며 이장호, 정지영 감독과 함께 장선우 감독이 열정적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 체제가 몇 년 가다가 문민정부로 변하게 되면서 제도권 영화인들 보다는 영화운동진영이 중심에 서게 되고 낭희섭이 후임 사무국장을 맡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진보적 예술인 대중조직을 표방하는 민예총이었지만 미국영화 직배저지 투쟁과 영화법 개정 운동에 공감한다고 해도 참여하는 영화인들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면서 "기존 예총에 대항하는 성격이다 보니 다소 예민함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병각의 뒤를 이어 사무국장을 담당한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민족영화위원회는 위원장-사무국장 체제로 운영됐고 단체들끼리의 협의체 성격이었다"며 "시간이 흘러 상업영화 쪽이 빠지면서 지금의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정지영 감독과 김동원 감독이 위원장을 이어 맡다가 1990년 후반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면서 활동이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됐다"고 말했다.
 
 <우리영화>에 실린 조감독협의회 결성대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정병각(감독), 왼쪽에서 세번째 이민용(감독)

<우리영화>에 실린 조감독협의회 결성대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네번째 정병각(감독), 왼쪽에서 세번째 이민용(감독) ⓒ 주진숙 제공

 
이듬해인 1989년 3월 24일에는 영화운동 출신들의 주도로 60여명의 조감독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국영화조감독협의회가 동국대에서 결성된다. 이 역시 1968년 발족한 기존 충무로의 '조감독동인회'를 벗어난 조직으로 한국영화최초의 독립적인 조감독단체였다. 도제식 제도와 노동착취 구조에 대해 반발하던 젊은 영화인들의 문제의식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들은 결성선언문에서 "모든 반민주적인 구제도와 반영화적인 제 세력에 과감히 맞서 시급한 청산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이를 위해 모든 영화인들과 대동단결할 것"을 천명한다. 또한 "도제식 제도 폐지. 도급제 척결. 정당한 임금획득. 직배독점의 근본적 봉쇄, 영화진흥법 쟁취. 반민주적 조직과 제도의 개혁연대와 단결. 그리고 민족영화를 건설하기 위해 헌신할 것"을 강령으로 채택했다.
 
회장은 아카데미 1기 임종재(감독)였고, 부회장은 아카데미 3기 정병각(감독, 전 전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과 김강숙, 감사 이민용(감독), 홍보부장 김동빈(감독) 등이었다. 직배저지·영화진흥법쟁취·영화계민주화투쟁위(3투위)와 노동대책위원회(노대위)를 운영위원히 산하에 설치한다.
 
정병각(감독)은 "당시 창립총회 과정에서 민예총 쪽의 도움을 받았다"며 "김경형(감독)과 허동우(감독)이 열심히 참여했고, 촬영과 조명도 함께 끌어들일 생각이었으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취지에 공감하면서도, 실제 일은 시위를 벌이는 것이라서 이름만 올려놓고 활동이 거의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독립프로덕션의 등장
 
1980년대 후반 충무로의 변화를 이끌었던 새로운 요소는 독립프로덕션이었다. 1985년 이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운동 출신들이 점차 늘어나던 상황에서,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시작된 충무로 2.0 시대는 독립프로덕션의 역할과 비중이 늘어나며 주목받게 했다.
 
당시 개정된 영화법에는 '영화제작을 위한 영화업자가 아닌 자로서 판매 또는 공연장에서 상영할 목적으로 영화를 제작하고자 할 때 문화공보부장관에게 영화제작의 신고를 하면 된다'는 '영화의 독립제작'에 대한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다만 독립프로덕션은 기존의 영화사와는 다르게 1년에 1편만 만들 수 있는 것이 차이였다.
 
충무로 제작방식의 변화가 생긴 것으로 기존 영화사들이 외화수입을 통한 이익 증대에 관심을 뒀다면 독립프로덕션은 철저하게 새로운 한국영화를 추구하며, 저질 시비를 일으켰던 한국영화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1986년 9월 23일 '매일경제'는 "제작 자유화 이후 영화사가 20개에서 50개로 늘었으나 대부분의 제작사들이 한국영화 제작보다는 외화수입에 열중하고 있는 반면, 독립프로덕션의 등장으로 우수한 한국영화가 늘어나게 됐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장호 감독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나 이두용 감독의 <돌아이>를 비롯해 <남부군>을 만든 정지영 감독의 남프로덕션, 1989년 로카르노영화제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인 황금표범상 등을 수상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도 독립프로덕션인 배용균 프로덕션에서 만들어진 영화였다.
 
5.18 광주민중항쟁을 다룬 첫 상업영화인 이정국(감독)의 <부활의 노래>와 황규덕(감독)의 데뷔작인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등 사회성 짙은 영화들 역시 각각 독립프로덕션인 '새빛영화제작소'와 '물결'을 통해 제작된 작품이었다.
 
 영화공장서울 창립작품 <네 멋대로 해라>

영화공장서울 창립작품 <네 멋대로 해라> ⓒ 한결 제공

 
충무로의 변화를 원했던 영화운동출신 입장에서는 제작에 조금이나마 활로를 모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1989년 9월에는 외국어대 영화서클 '울림' 출신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인 김태균(감독)이 중심이 된 독립프로덕션 '영화공장 서울'이 만들어진다.
 
김태균은 "아카데미 4기 오석근(감독. 전 영진위원장), 현남섭(감독, 시나리오 작가), 조명남(감독), 김형구(촬영감독), 진영환(촬영감독), 3기 박기용(감독, 전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 그리고 비아카데미 출신으로 차승재(프로듀서, 동국대 교수), 남재봉(감독), 방혜경(기획) 등이 함께 의기투합한 것이었다"면서 "아카데미 4기 전찬호(감독)은 후반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남재봉(감독)은 "아카데미 출신들에 더해 충무로를 기반으로 연출부에서 활동하던 서울예대 영화과 출신들인 정홍순, 김용석, 이동원, 서준원 등이 합류했다"며 "60년생으로 대학 79학번들이 중심이 됐었다"고 말했다.
 
또한 "박현원(조명감독)의 경우 후배들을 도와주겠다고 돈도 못 받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조동관(촬영감독) 도움도 받았으며, 차승재(프로듀서)도 적극적으로 영화공장서울 활동을 도왔다"면서 "사무실이 충무로 한국의집 뒤편에 있다가 약수동으로 옮겼을 때 한결(프로듀서)가 합류했다"고 덧붙였다.
 
영화공장서울은 대학에서 영화운동을 했던 청년영화인들이 만든 독립프로덕션이라는 상징성에 더해 한국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해외의 영화관계자들이 한국영화를 보기 위해 많이 찾았기 때문이다.
 
영화공장이라는 이름은 영화를 수공업이 아닌 산업적 방식으로 만들겠다며 지은 이름이었다. 첫 작품인 <네 멋대로 해라>는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를 한국판으로 각색한 영화로, 부산영화운동의 중심이었던 오석근(감독, 전 영진위원장)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했다.
 
오석근(감독)은 "어떤 절차가 있었던 게 아니고 일단 시나리오부터 준비하자고 시작한 것이고 내가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연출까지 맡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태균은 "비디오 보급이 활성화되던 상태에서 영화법 개정 등이 작용해 독립프로덕션이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당시 비디오 문화의 등장은 한국영화산업에 2차 판권을 만들어내면서 영화수익 외에 새로운 수입원이 됐다. 기존 8mm 카메라가 대중화된 것과 마찬가지였고, 젊은 감독들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남재봉은 "당시 삼호필름에서 이명세 감독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를 제작할 때 영화공장서울이 전반적인 책임을 맡아 진행했다"며 "충무로에서 전문적인 제작시스템의 출발로 평가할 수 있다"고 회고했다.
 
충무로로 향한 홍기선
 
한국영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홍기선(감독, 작고) 역시 1991년 독립프로덕션을 바탕으로 첫 상업영화 제작에 들어가며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오! 꿈의 나라>를 제작한 이후 장산곶매 활동을 정리하고 충무로의 새로운 전선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홍기선이 1984년 서울영화집단 황규덕(감독)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을 변절이라고 비판했던 것에 비춰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충무로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이었다.
 
이은(명필름 대표)은 "홍기선이 장산곶매를 정리하며 '충무로에 가서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영화들을 만들겠다'고 했다"면서 "그 약속을 일관되고 꾸준하게 지켜냈다"고 평가했다.
 
홍기선은 1990년 계간지 <민족영화> 대담에서 당시 "제도권과 비제도권을 나누는 방식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상업영화냐 아니냐 보다는 현 체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으며 실천하느냐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공통된 과제를 자주·민주·통일이라고 할 때 이에 반대하는 입장, 즉 기득권자의 입장에서 이뤄지는 영화활동을 비제도권이라고 불러야 한다."
 
 <오! 꿈의 나라> 촬영 당시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홍기선 감독

<오! 꿈의 나라> 촬영 당시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홍기선 감독 ⓒ 장산곶매 제공

 
홍기선의 충무로 활동은 역량을 인정받았으나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바라보는 당시 노태우 군사독재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시나리오 작가와 평론가로도 활동했었으나, 한국영화운동 출발의 주역이었기에 당시 군사독재는 요주의의 인물로 본 것이다.
 
첫 작품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의 제작 준비부터 파장이 일어난다. 당시 영화진흥공사가 창작지원작으로 선정됐으나, 이를 며칠만에 번복하면서 한바탕 풍파를 일으킨 것이다. 노골적인 정치적 탄압이 작용했던 결과였다.
 
1991년 5월 4일 홍기선은 영화진흥공사(영진공, 현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5천만 원의 사전제작지원을 받게 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당시 사전제작지원은 당시 상하반기 5편씩 선정해 지원하는 사업으로 시나리오 상태의 영화를 심사해 5천만 원 제작비를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30편의 작품이 경합할 만큼 경쟁이 치열했는데, 홍기선의 첫 작품이 선정된 것은 그만큼 역량을 인정받은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사흘 만에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5월 7일 영진공이 발표한 91년 극영화 제작 사전지원작품 5편 중에 <가슴에 돋는 슬픔을 칼로 자르고> 대신 <살어리랏다>가 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은 김동호(전 부산영화제 이사장)이었다.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영화진흥공사는 문화부에 제작신고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작품을 바꾼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문화부는 '4월 18일 접수된 <가슴에 돋는 슬픔을 칼로 자르고> 제작신고를 영필름의 대표 홍기선씨가 영화법상 영화제작자로서 결격사유자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당시 영화법 4조 2항에는 '영화법을 위반하여 벌금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그 형의 집행이 종료되거나 집행을 받지 아니하기로 확정된 뒤 1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영화제작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규정돼 있기는 했다. 홍기선은 1989년 10월에 <오! 꿈의 나라>를 문화부에 제작신고를 하지 않고 제작했다는 이유로 영화법에 따라 1심에서 1백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한 상태였다. 재판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 무시된 것으로 위법적 결정이었다. 영진공과 문화부의 해명 자체가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다. 문화부는 영진공이 사전지원제작를 발표한 뒤에야 홍기선의 제작신고를 수리한다.
 
김동호 사장 재임 시절 영화진흥공사는 1989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작품의 시나리오를 검열해 제작을 막아 아카데미 학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제출해 사전 검열을 받아 실종된 청년노동자, 학원 프락치,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 가족 소재 관련 작품을 반려한 것이었다.
 
홍기선 영화에 대한 제작지원이 뒤집힌 것도 비슷했다. 영화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한 달 뒤인 6월 9일 영화인협회 감독위원회(김호선 감독)는 "영화진흥공사의 결정이 다분히 정치적인 것으로 이러한 우회적인 탄압은 한국영화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홍기선이 감독위원회 회원은 아니지만 이번 문제는 영화감독들이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라며 규탄대회까지 개최한다.
 
하지만 영화진흥공사는 억지를 부리기 시작한다. 처음 문체부를 핑계 대던 것과는 다르게 홍기선의 작품이 조선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작 <화도>의 표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홍기선의 <가슴에 돋는 슬픔을 칼로 자르고>가 원명희 작가의 <먹이사슬>을 모티브로 삼아 원작자와 논의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홍기선의 부인인 이정희(시나리오 작가)는 "당시 문화부가 자신들이 제시한 논리에 문제가 있자 영진공이 직원과 친분관계가 있는 어떤 사람을 내세웠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어 "(표절을 주장한 당사자가)자기가 소설 쓰는 사람이라면서 우리 시나리오가 자신의 초고를 훔쳤다는 주장을 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초고를 어떻게 볼 수 있냐?"면서, "원작자와 협의를 통해 만든 시나리오였는데, 억지 주장을 펴서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혼
 
 명필름 심재명, 이은 대표

명필름 심재명, 이은 대표 ⓒ 명필름 제공

 
충무로 안과 밖의 영화운동 출신들은 함께 모여 대응책을 논의한다. 이춘연이 이끌던 한국영화기획실모임과 민예총 민족영화위원회 등은 '사진제작지원을 심사결과대로 집행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책 모임을 열고 서명을 진행한다.
 
여기서 9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부상한 두 영화인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다. 이은(명필름 대표)과 심재명(명필름 대표)이 만난 것이다.
 
이은은 "홍기선 감독 문제를 논의하러 한국영화기획실모임과의 회의에 갔다가 그 자리에서 심재명(명필름 대표)를 처음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은이 본 심재명의 첫인상은 '충무로에서 마케팅 잘하는 사람'이었고 심재명이 본 이은의 첫 인상은 '독립영화계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이었다.
 
홍기선의 조카로서 한국영화기획실모임에서 활동했던 안동규(제작자)는 이후 이은과 심재명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이은이 결혼을 해야겠다며 사람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다. 영화사에서 일하던 어떤 사람을 이야기했으나, 싫다면서 심재명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따로 심재명과 약속을 잡은 후 이은에게는 '지나다가 우연히 만나는 식으로 합류'하라고 했고, 계획대로 이은이 등장한 후 둘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자리를 피해줬다."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만들며 재야 영화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던 이은과, 충무로 상업영화에서 빼어난 역량을 발휘하던 심재명의 만남은 화제였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정지영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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