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한 배우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한 배우 정진영.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개봉을 앞둔 이 신인 감독은 다소 긴장한 상태였다. 배우로 참여했을 때 풍기던 무게감은 여전했지만, 직접 연출한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에선 좀 더 자신의 말을 길게 했다. 데뷔 30년을 훌쩍 넘긴 배우 정진영, 아니 정진영 감독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감독이 꿈이었다고 했다. 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연출은 다른 사람의 영역, 휼륭한 감독들의 몫"이라 생각했던 그는 불현듯 4년 전부터 마음을 바꿔 가졌다. "창피하거나 욕먹기 싫은 마음도 있었는데 하고 싶은 걸 하고 욕을 좀 먹으면 어떤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있는 작은 규모로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라며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사라진 시간>이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영화는 도시에서 시골로 전근 온 한 교사 부부의 사망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형구(조진웅)가 어느 순간 모든 기억을 잃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게 되는 이야기다. 스릴러와 블랙코미디 요소가 고루 담겼는데 특정 결말을 향해 가지 않고 꿈과 현실이 뒤섞여 판타지처럼 흐르는 게 특징이다. "내가 보는 나와 남이 보는 나의 차이는 무엇인가. 산다는 건 무엇인가"하는 정진영 감독의 오랜 생각이 반영된 결과다. 

"고등학생때 부터 꿨던 꿈이지만 그걸 꼭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대학교에서 연극동아리에 들어간 이후 딱 한 번 이창동 감독님의 <초록물고기> 연출부 막내를 경험했고, 쭉 배우로 살았지. 감독은 참 어마어마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책임도 다 져야하고. 그러다 4년 전 <화려한 유혹>이라는 드라마를 끝내고 쉬고 있었는데, 우리 애가 고3이거든. 제가 가장으로서 책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사람이었는데 애가 어느새 다 컸더라. 

앞으로 내가 할 의무는 뭐지? 원래 난 뭘 하고 싶었지 생각해보니 난 예술가가 되고픈 사람이더라. 물론 배우도 예술가지만 막연하게 창조적이고 외로움을 돌파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릴 때 있었다. 근데 어느새 제가 무슨 스타는 아니지만 나름 안정된 시스템 안에 들어가 있더라."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영화 <사라진 시간> 관련 사진.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그런 계기로 정진영 감독은 최근까지 부쩍 저예산, 독립영화에 적극 출연해왔다. 홍상수, 장률 감독의 작품을 거치고 한 독립영화 촬영을 일주일 앞둔 찰나 해당 작품이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끝내 무산되는 일을 겪었다. "안타깝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그러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정진영 감독이 말했다. 

"장률, 홍상수 감독님 영화를 경험하면서 영화는 꼭 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좋은 사람들의 정성으로 하는 거고, 내가 한번 책임져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거지. 근데 그렇게 해서 완성한 첫 시나리오는 버렸다(웃음). 나도 모르게 기존 관습에 매어있더라. 그리고 어떤 계기로 지금의 이야기를 쓰게 됐지. 처음엔 제가 가진 돈으로 하려 했다. 그래서 직접 제작사도 차렸지. 다니필름이라고 직원은 나 혼자다(웃음)."

남다른 애정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한 배우 정진영.

영화 <사라진 시간>으로 감독 데뷔한 배우 정진영. ⓒ 에이스메이커 무비웍스


한 형사가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과 지인들에 의해 교사로 불리게 되고, 교사의 삶을 살게 된다. 정진영 스스로도 이상하고 황당한 이야기라 생각하면서도 (기존 영화계의) 모난 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완성해냈고, 캐스팅을 진행했다고 한다. 초고가 나올 때까진 전혀 주위에 보여주지 않다가 배우 조진웅에게 가장 먼저 초고를 보냈고, 하루만에 조진웅이 응했다. 그리고 조진웅의 <대장 김창수>를 제작했던 장원석 대표가 합류해 지금의 팀이 꾸려졌다. 

혹시나 출연배우들이 정진영 감독과 친분으로 출연했다는 말이 들릴까 혹은 상업성을 노린 영화가 아니라 믿어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까 우려하는 정진영을 북돋은 건 오히려 출연 배우를 비롯한 제작진이었다. 그는 "영화적 평가라도 좋아야 할텐데.."라며 내심 걱정을 드러냈다. 참고로 다니필름이란 이름은 정진영이 딸을 낳으려면 붙이려 했던 이름에서 비롯됐다. "제가 아들이 하난데 문득 이 영화를 만들게 되면서 어쩌면 이 영화가 내 딸인가 보다 싶어서 그 이름을 붙인 것"이라 그가 설명했다. 여러모로 영화에 대한 남다른 그의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라진 시간>을 관통하는 주제는 곧 '나'라는 존재에 대한 정진영의 성찰이고, 이것을 관습적이지 않게 풀고 싶었던 정진영 감독의 바람이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안전하고, 그럴싸해보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영화적으로 낯설게 보일 수 있는 구성을 택했다는 게 인상적이다. 

"관습을 버리려 했다기 보단 내 스스로 검열당하지 말자는 생각이었다. 이야기가 가는대로 가는 거였다. 어떤 분은 제가 장르를 파괴했다고 하는데 장르에 사로잡히지 않으려 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초고가 나오기 전까진 아무에게도 안 보여줬다. 사람들이 하는 충고에 솔깃할 것 같았거든. 완성한 다음 배우들이 봤고, 이준익 감독님과 김유진 감독님에게도 보여드리게 된 거지.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지만 '어유 저 고지식한 애가 시나리오를 썼다고?' 싶으셨을 텐데 나름 좋다고 해주셨다. 다만 분명 호불호는 갈릴 거라고, 각오하라는 말씀도 하셨지. 특별히 제가 무슨 용감한 선택을 한 게 아니라 이처럼 주변분들이 다 격려해주셔서 가능한 일이었다.

주제는 물론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지만 전 재밌게 만들고 싶었다. 무장르 영화라 하는 분도 계신데 전 개인적으로 슬픈 코미디라고 이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물론 홍보과정에선 미스터리로 알려지고 있다. 근데 미스터리는 답을 주지만 이건 주진 않거든. 한 인간이 어딘가에 적응해버리는, 약한 인간의 슬픈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가장 좋은 건 이 영화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것이다. 부디 이 영화로 서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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