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마당우리, 영화공간1895,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에서 활동했던 고 이언경 감독

영화마당우리, 영화공간1895,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에서 활동했던 고 이언경 감독 ⓒ 정재필(배우) 제공

 
1980년대 영화운동이 강하게 비판했던 것은 한국영화의 저질화 문제였다. 광주민주화운동 등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권력을 차지한 전두환 군사독재는 우민화 정책이었던 이른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로 민중을 기만하고 있었다. 검열로 사회적 목소리를 통제하면서 '영화'를 통해 '성의 상품화'를 부추겼고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의 질을 떨어뜨리면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1989년 만들어진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는 창립 취지글에서 "지금 영화는 예술이란 허울 아래 여성을 상품화하고 사랑이란 이름의 당위성으로 벗기고 몸을 파는 매매춘 행위와 같은 상업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면서 "이제 영화는 역사의 이름으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영화 수입을 위한 방편으로 제작되던 시절이다 보니, 선정적인 영화를 내세워 대중들의 시선을 끌려고 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를 갈망하던 청년들에게 이런 한국영화의 현실은 암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양한 외국의 예술영화를 보고 이를 통해 영화를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청년들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던 곳을 찾았고,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정도가 이들의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적 변화의 흐름 속에 영화운동도 힘을 받으면서 시네마테크 운동이 꿈틀대기 시작한다. 충무로 상업영화에 대한 저항으로서 민중의 삶을 담은 영화를 추구하는 한편으로, 작품성 높은 예술영화를 찾아 영화를 탐구하려고 했던 당시 영화 청년들의 욕구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시네마테크'는 영화를 뜻하는 시네마(cinema)와 프랑스어로 도서관(bibliotheque)을 뜻하는 단어의 '합성어'로써 영화도서관이나 영화 자료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오래된 영화를 수집하고 이를 보면서 공부하는 활동이 이뤄졌다. 
 
프랑스에서 1935년 시작된 시네마테크 운동이 한국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운동이 다양하게 분화된 덕분이었다. 현재는 한국영상자료원 담당하고 있는 시네마테크 역할을 민간차원에서 20대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구축해 낸 것이다.
 
외국 문화원을 제외한다면 국내 시네마테크의 효시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를 꼽는다. 하지만 민간차원에서 시작된 시네마테크 운동의 출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있으니, 이언경과 '영화공간1895'다. 영화마당우리와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에서 활동했던 이언경(감독, 2009년 작고)은 한국 시네마테크 운동의 선구자였다.
 
시네마테크 운동의 선구자
 
영화공간1895의 시작은 1988년이었다.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를 운영했던 이하영(프로듀서, 전 시네마서비스 이사)은 "1989년 이언경이 운영을 하고 있던 때 합류했다"며 "이진욱을 포함해 3인이 함께 운영을 맡았다"고 말했다.

이언경과 이하영의 만남에는 영화마당우리가 매개 역할을 했다. 이하영은 "1985년 당시 한정석의 추천으로 영화마당우리에 가입했다"면서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부재하던 시절, 영화마당우리는 단꿀 같은 존재로서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자체로 흥분되던 시절이었고, 그때부터 프랑스문화원 등으로 영화를 부지런히 보러 다녔다"고 말했다.
 
하지만 뭔가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느껴지면서 영화마당우리 활동을 중단했으나, 군에 입대 후 영화를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영화 인생은 다시 이어진다. 군에서 제대하자마자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의 소개로 이언경과 연결이 된 것이다. 당시 이언경이 마포에서 영화공간1895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하영(프로듀서)과 권은선(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하영(프로듀서)과 권은선(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 ⓒ 이하영 제공

 
이언경은 '영화공간1895' 외에 1990년에는 영화마당우리가 세계 각국의 비디오를 마련해 만든 아현동의 영화전문공부방도 책임지고 있었다. <한겨레>는 1990년 6월 27일자 기사에서 '영화전문공부방이 아현동 고려아카데미텔에 마련됐다'고 전하면서 '비디오 자료 담당이 이언경'이라고 소개했다. 동시에 두 개의 비슷한 공간을 운영했던 것이다.
 
<한겨레>에 따르면 당시 이언경은 "영화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영화 그 자체가 원전으로 <무방비 도시>(1945.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를 보지 않고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영화를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공허한 말장난이 되겠냐"며 "각 개인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모아 꾸민 작은 공간이 새로운 한국 영화언어를 발견하려던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1990년은 당시 영화단체들이 연대한 독립영화협의회가 출범한 상태여서 그쪽 활동에 집중하고 있었고, 당시 영화마당우리 기존 회원들이 하나둘 영화산업 현장에 들어가고 취업 등으로 인해 활동이 약화 되면서 이언경이 영화마당우리의 연구사업과 스터디 활동을 모두 승계하는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이어"영화전문공부방 활동은 이언경이 운영하던 영화공간1895에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언경이 시네마테크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영화를 보지 않고 영화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영화공간1895를 차린 이유기도 했다.

이하영은 "이언경을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잘 맞았는지 이진욱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맥주를 맛깔나게 마셨던 기억이 난다"면서 "그때 이언경이 영화공간1895를 만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전했다.
 
"영화공부를 책으로만 하다 보니 마치 절름발이식 공부 같았다. 그래서 책에 나온 영화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은 것들을 나 혼자 소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공유하고 같이 보면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공간1895를 차린 것이다."
 
이하영은 "이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며 "내가 군입대 전에 갈증을 느끼게 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였고, 그날 이후 이언경의 제안으로 영화공간1895를 같이 운영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영화공간1895는 시네마테크 기능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하영은 "1989년~1991년까지 '24시간 영화학교', '카메라를 든 사나이' 워크숍 등을 통해 영화공부를 활성화했다"며 "당시 공간 사정으로 인원을 제한하다 보니 서로 가입하겠다고 난리가 났었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것이 이언경의 기획이었고, 그것을 추진하는 역할이 자동으로 내게 주어졌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내 최초의 민간 시네마테크였던 영화공간1895는 이언경이 자비로 사무실 공간을 임대하고 초기 운영비를 충당했다. 당시 보증금 15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하영은 "이언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첫인상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됐을 정도였다"며, "당시 이언경은 결혼자금을 다 털어서 영화공간1895를 만들었기에 달리 거주할 공간을 얻을 수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영화공간1895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불법적인 압수수색
 
이하영에 따르면 영화공간1895는 일본에 가서 필요한 자료들을 구했고, 프랑스 등 유럽에서 유학 중인 분들이 보내준 LD(laser disk) 등으로 자료를 구비했으며, 상영방식이 다른 PAL(독일에서 개발한 유럽 아날로그 컬러텔레비전 방식)의 경우 변환장치를 구입했다.  
 
 영화마당우리,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고 이언경(왼쪽)과 허현숙

영화마당우리,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에서 함께 활동했던 고 이언경(왼쪽)과 허현숙 ⓒ 허현숙 제공

 
처음에는 시네마테크 목적이 아닌 책에서 읽던 영화들을 직접 눈으로 보자는 의미였으나, 앞세대들이 책에서 읽던 영화들을 직접 본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점차 국가 차원에서 제대로 된 시네마테크를 운영해야 한다는 필요성도 제기했다.
 
영화공간1895의 활동을 소개했던 1991년 2월 <한겨레> 기사에서 이언경은 "예술의 전당으로 이사한 필름보관소(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자료에 대한 문의가 오기도 했다"면서, "국가가 운영하는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자료 수집 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남한에 필름보관소(한국영상자료원 전신)가 생겨난 것은 1970년대 남북대결의 영향이었다. 1970년 이후 북한이 세계영상자료원연맹에 가입을 신청하면서 경쟁의식을 느낀 박정희 군사독재는 이에 맞대응해 1974년 필름보관소를 만들었다. 이후 1991년 한국영상자료원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96년에 법적으로 공인됐으며, 2000년대 들어 시네마테크의 역할도 강화됐다.
 
국가적인 관심이 있기 전에 개인의 노력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나 영화공간1895는 상당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하영에 따르면 당시 비디오는 모두 1500편 정도로 자막작업을 한 비디오가 200편 정도였다. 자막작업은 정섬(감독)이 맡았다. 운영비는 회비와 후원자들의 후원으로 충당했는데, 월세가 밀리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나름 탄탄하게 운영된 것이다.
 
민간 시네마테크의 원조로서 지방 시네마테크 활동 지원도 영화공간1895의 역할이었다. 이하영은 "부산 씨네마테크 1/24와 광주 시네마테크, 인천과 대구 계명대 등에서 요청이 와서 활동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화공간1895는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하면서 당시 민족 민중영화를 지향했던 영화운동과의 연대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군사독재의 연장에 대한 실망감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고민하던 영화운동의 흐름에서 필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1991년 경찰의 불법적인 압수수색을 받게 되는데, 영화운동단체에서 제작된 학생운동 관련 영화를 상영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4월 9일 오후 6시 40분께 마포구 대흥동 461번지 영화공간1895 사무실에 마포경찰서 경찰관과 마포구청 직원 등 20명이 시사회가 열리기 20분 전에 들이닥친다. 이들은 압수수색 영장 없이 이날 시사회를 할 예정이던 16mm 소형영화 <어머니, 당신의 아들> 필름을 압수한다. 경찰은 당국의 심의를 거치지 않은 영화이기에 조사해야겠다며 필름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경찰의 불법적인 압수수색에 당시 영화공간1895를 함께 운영하고 있던 이하영(프로듀서)과 이진욱이 항의했으나 이들까지 연행된다. 1990년 <파업전야>를 막으려다 실패했던 노태우 군사독재가 영화운동이 만들어 낸 16mm 영화들에 대해 불법적인 탄압을 자행하던 시기였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영화제작소 청년이 만든 영화로 운동권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파업전야>와 마찬가지로 당시 군사정권은 불법이란 딱지를 붙여 상영을 가로막았고, 상영 현장에서는 경찰과 대학생들 간에 치열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하영은 "마포경찰서로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는데, 당시 <한겨레> 안정숙 기자(전 영진위원장)가 경찰서로 찾아온 것도 훈방에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면서 "심적으로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영화공간1895 명륜동 이전 개소식에 참셕한 영화인들 왼쪽부터 김동원(감독),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세번째 이용배(계원예대 교수), 장동홍(<파업전야> 감독) 등등

영화공간1895 명륜동 이전 개소식에 참셕한 영화인들 왼쪽부터 김동원(감독),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세번째 이용배(계원예대 교수), 장동홍(<파업전야> 감독) 등등 ⓒ 이하영 제공

 
1991년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마포에 있던 영화공간1895는 대학로 옆 명륜동으로 장소를 옮기면서 변화를 맞는다. 이사하면서 '도서출판1895'도 차렸고, 이를 통해 김용태(감독. <미지왕>)의 <스티븐 스필버그>와 계간지 <영화언어>를 출간한 것이다.

<영화언어> 발행은 이용관(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이언경과 이하영이 출판을 담당했던 <영화언어>는 이후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는 데 있어 기초가 된다.

영화공간1895에는 <영화언어>의 발행과 편집을 맡았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주진숙(영화평론가, 한국영상자료원장) 등이 강의를 맡았고, 봉준호 감독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 청년들이 거쳐 가면서 시네마테크 운동의 발판이 됐다.
 
감독을 꿈꾸다 홀연히 떠난 이언경
 
영화공간1895가 활동을 마무리한 것은 1992년이었다. 이하영은 "당시 영화공간1895의 동력이 많이 떨어지기 시작한 때였다"며 "함께 운영했던 세 사람의 나이가 비슷한 탓에 2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암암리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었고, 몇 달 동안 서로 고민하다 영화공간1895를 접기로 결정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감독의 꿈을 키웠던 이언경은 1992년 16mm 단편영화 <흔들리는 달>을 연출하는데, 남북한 화해시대를 지배하는 분단의 논리를 주제로 한 작품이었다. 이하영은 당시 같은 건물에 있던 영화사 신씨네(신철 대표)에 들어가며 충무로에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이언경은 영화제작 활동을 꾸준히 한다. 2003년 즈음 제작자로서 <듀얼 인 부산>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제작관리를 맡았던 이윤진(프로듀서)은 "<듀얼 인 부산>은 이언경이 기획 제작에 이어 나중에는 연출까지 맡아 완성했던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한 "<로스웰의 냉장고>(가제)라는 내 작품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해서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까지는 프로듀서 겸 시나리오 작가로서 기획개발을 함께 했다"며, 이후 이언경이 작가 및 감독으로 영화사 마술피리와 계약한 후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준비를 했으나 완성되지는 못했다"고 덧붙였다.
 
<듀얼 인 부산> 조감독을 맡았던 장정숙(프로듀서)은 "그때가 2003년이었는데, 진행되던 영화가 중단됐고 2004년쯤 재개되면서 다시 조감독 요청이 왔으나 다른 일을 하고 있어서 참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언경을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정도에 이언경과 이하영이 만든 씨네디비넷에서 수개월 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였고, 1회 전주국제영화제도 같이 갔었다"고 회상했다.
 
 이언경이 작고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 사당동에서 모였던 영화마당우리  옛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한정석(영화마당우리 발기인), 민병진(감독), 네번째 정흥순(감독), 김형구(촬영감독), 이원재(교수. 성균관대 영화과) 10번째 우측부터 노종윤(프로듀서), 윤미희(프로듀서), 허현숙(전 교사), 아랫줄 왼쪽부터 이언경,  문명희

이언경이 작고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 사당동에서 모였던 영화마당우리 옛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한정석(영화마당우리 발기인), 민병진(감독), 네번째 정흥순(감독), 김형구(촬영감독), 이원재(교수. 성균관대 영화과) 10번째 우측부터 노종윤(프로듀서), 윤미희(프로듀서), 허현숙(전 교사), 아랫줄 왼쪽부터 이언경, 문명희 ⓒ 낭희섭 제공

 
하지만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했던 이언경은 2009년 5월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작고한다. 민간 시네마테크의 원조와도 같았던 인물이 허망하게 떠난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2년이 지난 2011년에서야 뒤늦게 알려졌다.
 
영화공간1895 이후 잠시 다른 일을 하던 이언경은 세상을 뜨기 몇 해 전 영화마당우리 출신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고 한다. 이언경과 같은 부산출신으로 영화마당우리 때부터 가까이 지냈던 허현숙(전 교사)은 "영화를 그만뒀다더라는 소식을 건너서 전해 들었는데, 어느 날 전화가 와서 만났더니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보험을 하고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에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왔다면서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에게 두루 연락해 사당동에서 만났다"며 "그때는 많이 밝아 보였고, 영화에 복귀해서 잘해보려는 의지를 보여 줬다"고 기억했다.

낭희섭은 "이언경이 연락해 당시 사당동에서 만났을 때는 영화마당우리 옛 회원 중 김영진(영화평론가,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과 박현철(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교수)을 빼고는 거의 모두가 모였다"고 회상했다.
 
이때가 이언경과 영화마당우리의 옛 동지들이 만난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후 오래되지 않아서 작고 소식이 전해졌다고 한다. 영화마당우리를 시작으로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시네마테크 운동, 부산영화제의 기원이 된 계간지 <영화언어> 출판, 영화 연출 등에서 폭넓게 활동했던 아까운 영화 인재가 떠난 것이다.
 
허현숙은 "이언경이 발병 사실을 안 이후 오래 투병하지는 않았고,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과 죽음을 주변에 전하지 않길 바랐다고 들었다"며 "당시 가까이 지내던 친구가 (이언경과) 연락이 안 돼 찾다가 장례 소식을 듣게 되면서 알려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하영은 "이언경이 세상을 떠났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정말 힘들었다"며 "청춘 시절 같은 필름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영화 동지였고, 지금까지 내가 영화판에 있게 한 동력이기도 하다"고 그리워했다.
 
문석(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은 2011년 '씨네21'에 쓴 에디토리얼('그 미소를 기억하며')에서 "영화공간 1895의 역사는 끝났지만 이언경은 영화를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고 가정 형편이 나빠져 보험회사에 다니던 동안에도 그녀는 시나리오를 준비했고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며 "그녀는 영화를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추억했다.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활동했던 김응수(감독)는 "20대 때 영화공간1895에서 이탈리아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리고 반납을 안 했던 것 같다"며 "복사가 몇 번 돼서 얼굴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그걸 보고 영화를 공부한 기억이 있다. 거기서 많이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이언경은 특이한 분이었고, 그때 그런 걸 한다는 것은 지금 영상자료원 만드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로 선구자였다"고 평가했다.

이윤진(프로듀서)은 "<듀얼 인 부산>에서 작업을 함께한 이후 내가 쓴 시나리오를 좋아했다"며 "'윤진씨는 보배예요 보배'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장정숙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영화공간1895에서 강의를 듣던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상을 수상했을 때, 흥분하셔서 아마 우리와 술 한잔하셨을 것"이라며 이언경의 부재에 아쉬움을 전했다.
 
씨앙씨에
 
 '씨앙씨에' 간판

'씨앙씨에' 간판 ⓒ 박지만(촬영감독) 제공

 
이언경이 정리한 영화공간1895는 1992년 손주연(시나리오 작가)이 인수하면서 '씨앙씨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손주연은 당시 서강대 커뮤니케이션센터 조교장으로서 다양한 영화행사를 기획하고 있던 시네필이었다. 연세대 불어불문학과 재학 시절 영화에 빠져든 손주연은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대학원에 진학해서 기호학을 연구했고 졸업 후에는 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조교 활동과 함께 비디오 정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센터는 김동원(감독), 김소영(감독)이 영화의 꿈을 키웠던 곳으로 박찬욱(감독), 이정향(감독) 등이 모여들었고, 서강대 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지게 된 밑바탕이었다.
 
손주연에 따르면 이언경이 영화공간1895의 인수자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명륜동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당시 영화사 신씨네와 같은 건물에 있던 영화공간1895를 찾아간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이언경이 시네마테크를 유지해 줄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계속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공간과 자료를 통째로 인수하게 된 것이었다"면서 "인수 자금은 일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분할로 냈다"고 설명했다.

이름은 씨앙씨에로 지었다. 기호학 언어로서 의미와 표현이라는 뜻이었다. 씨앙씨에는 인수한 자료의 자막작업을 끝낸 후 1992년 8월 1일 개관한다. 개관행사로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리만의 <제7의 봉인>, <산딸기>, <겨울빛> 등을 비롯해 당시 아프리카 신예감독이었던 이드리사 우에드리고의 <어머니>와 라틴아메리카 해방영화의 효시라고 불리는 페르난도 솔라나스의 <불타는 시간>, 중국 첸카이거 감독의 <아이들의 왕>, 영국 피터그리너웨이 감독 <제도의 계약> 등을 상영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손주연은 "처음부터 영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문화원을 다닌 것이 아닌 불어를 전공했기에 프랑스문화원을 다니며 영화를 보다보니 운영 방식은 달랐다"고 말했다. 영화공간1895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영화동아리처럼 운영됐다면 씨앙씨에는 공간을 새롭고 산뜻하게 단장했고 깨끗하게 하면서 도서관 형태로 꾸몄다. 쿠폰제와 회비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운영하면서 자원봉사자들에게도 적지만 대가를 지급했다.
 
운영은 전적으로 손주연이 책임졌다. 초기에는 수익이 발생하면 나누기로 하고 성균관대 영화동아리 영상촌에서 활동했던 고형욱(프로듀서, <가위> <해부학교실> 등)이 자막작업을 도와주면서 파트너로 일했으나, 2개월의 정도 짧은 시간이었다.
 
손주연은 "자료 분류와 영어, 불어 번역은 직접 했고 일본어는 외주처리 형식으로 잘하시는 분들께 부탁했다"며 "운영에 몰두하느라 집에 며칠씩 못 들어가는 일이 생기다 보니 아버님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네마테크 역할 외에 영화제작 워크숍도 씨앙씨에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영화연출론과 시나리오 창작반을 운영했고 강사는 이광모(감독, 영화사 백두대간 대표)와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등이었다.

북한영화 비디오테이프
 
 '씨앙씨에'를 운영했던 손주연 대표

'씨앙씨에'를 운영했던 손주연 대표 ⓒ 손주연 제공

 
씨앙씨에는 크고 작은 영화제를 활발하게 진행한다. 1993년 1월 9일~31일까지는 '세계영화 베스트10' 감상회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전 세계 영화평론가 및 영화감독들에게 의뢰해 10년에 한 번씩 10편의 영화를 선정한 것으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장 르노아르의 <게임의 규칙>, 오즈 야스히로의 <동경이야기>, 앨프리트 히치콕의 <현기증> 세르게이 에이젠스테인의 <전함 포템킨>,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등을 상영했다.
 
1994년에는 검열영화 원작 감상회인 커트영화제 '검열과 영화'를 마련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1994년 3월 15일~10일까지 <칼리큘라>, <베티블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도어즈>, <아이다호>, <1990> 등의 상영회를 기획했는데, 당시 검열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일부가 잘린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는 커트영화제가 공연법을 위반했다며 상영을 중지시키도록 종로구청에 통보했다. 6편의 비디오테이프가 압수되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영화가 발견되면서 손주연은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된다. 검열된 작품을 제대로 보려던 게 오히려 공안사건으로 비화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손주연은 "당시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받거나 프랑스, 독일, 일본문화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북한영화는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몰랐다"며 "영화공간1895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돼서, 당시 복사본을 만들어 놓고 원본은 감춰 놓았는데, 복사본을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은 손주연에게 '인생 종 치고 싶냐'며 윽박지르면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운동권 출신도 아닌 데다 관람권을 판매한 것도 아니었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는 항변에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훈방한다. 손주연은 "운 좋게 나왔다"며 "탄압에도 불구하고 커트영화제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예정대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됐던 북한영화는 손주연의 추측대로 영화공간1895에서 왔던 것이었다. 이하영은 "영화공간1895에서 일본을 통해 소련(현 러시아) 영화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함께 구한 것이었다"며 "재일조선인총연합(조총련) 쪽을 통해 받았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으로 연행될 때 경찰이 다른 비디오 자료를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훈방된 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위험할 수 있는 자료들은 따로 보관했다"며 "아마도 이 자료가 씨앙씨에로 넘어갔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씨앙씨에는 1993년 4월 명륜동에서 인근 동숭동 대학로의 한 갤러리 지하로 이전했고 1994년에는 압구정동으로 옮겨갔다가 1995년에 마무리하게 된다. 손주연은 1994년 씨앙씨에 운영을 친구에게 부탁한 후 백두대간에 일하게 된다. 이광모 감독(백두대간 대표)이 손주연과 정태성(전 CJ 이엔엠 영화부문 대표)에게 해외 예술영화를 제대로 해보자며 상업적으로 수입하고 극장해서 상영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손주연은 생각해 보면 "이광모 감독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백두대간에서 처음으로 개봉한 <희생>이 3만8000명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세계에서 개봉 기록으로는 최다였다고 들었다"며 이후 "백두대간에서 동숭아트센터와 공동으로 동숭시네마테크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한 건 큰 보람이 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운영을 넘긴 씨앙씨에 관리가 안 되면서 손주연이 직접 정리하게 된다. 1000편이 넘던 모든 자료를 한신대 영상자료실에 넘기면서, 영화공간1895를 이어 19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의 초석이 됐던 씨앙씨에는 마무리된다.

손주연은 "씨앙씨에를 운영하면서 한 영화제마다 잘 됐고, 부산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이라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강의를 해줬다"면서 "1996년 이손기획을 차린 후 영화제가 너무 하고 싶어 1999년 당시 종로 코아아트홀에서 프랑스걸작단편영화제를 열었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내빈으로 참석해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록키호러픽쳐쇼' 공연 당시 손주연(왼쪽) 이손기획 대표와 출연 배우들

'록키호러픽쳐쇼' 공연 당시 손주연(왼쪽) 이손기획 대표와 출연 배우들 ⓒ 손주연 제공

 
손주연은 1995년 6월 이언경, 이향, 김영 등과 4명이 최초의 여성영화제인 '페미니즘필름페스티벌'을 개최해 책으로만 보던 페미니즘 영화를 국내에 소개했다. 백두대간을 나온 이후 강남 씨네하우스 아트관 개관 작업을 맡기도 했고, <록키 호러 픽쳐 쇼> 등 영화상영과 퍼포먼스, 연극을 결합한 행사를 기획했다.
 
그는 이후 이병헌과 전도연이 주연한 <내 마음의 풍금>(1999)과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 마케팅을 담당했으며, 2002년 이손필름으로 회사명을 바꾼 뒤에는 오랜 꿈인 첫 영화제작에 나서 2003년 배두나 주연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제작했다.
 
<암살>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은 2012년 9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대학 2학년 때부터 교내 영화동아리 '영화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비디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씨앙씨에' 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며 "이른바 B자 비디오를 틀어주던 그곳은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을 때 안식처이자 꿈의 산실로 (비디오를) 미친 듯이 봤다"고 밝혔다.
 
이어 "선배들이 권하는 영화는 무조건 봤고, 그때는 몰랐는데 훗날 진가를 깨달은 <재와 다이아몬드>(감독 안제이 바이다) 등도 그때 본 작품"이었다면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감독으로 알프레드 히치콕과 마틴 스코세이지를 꼽았다.
 
문화학교 서울의 태동
 
영화공간1895와 씨앙씨에와 함께 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또 다른 축을 담당했던 것은, 최동훈 감독이 대학 시절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문화학교 서울이었다.

3년 정도 운영됐던 영화공간1895와 씨앙씨에와는 달리 문화학교 서울은 긴 생명력을 유지했고 2000년 이후 한국영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독립영화의 토대 역할을 한다. 한국 독립영화와 시네마테크 운동의 조직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선도한 점은 특별하다.
 
문화학교 서울의 출발은 1991년 5월이었다. 한의사인 시네필 최정운이 사당동에 있는 자신의 한의원 건물에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문화학교 서울을 시작한 최정운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대표

문화학교 서울을 시작한 최정운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대표 ⓒ 서울아트시네마

 
최정운은 경희대 재학시절 아마추어 영화제작단체인 '한국영상작가협회'에서 직접 8mm 영화제작을 경험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유현목 감독이 만든 소형영화작가협회에서도 활동하면서 회원들과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나가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면서 필름을 들여다보는 일이 재밌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찍는 것이 더 좋았던 최정운은 1980년대 말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겠다고 시나리오 강좌를 수강하게 된다. 이때 만난 사람들과 함께 1991년 '문화학교 서울'을 설립하게 된다.
 
최정운에 따르면 초기 멤버는 현재 곽용수, 전창수, 정민택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시네마테크를 해보겠다는 명확한 지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91년과 1992년에는 주로 영화 스터디 모임을 진행했고, 93년 첸카이거, 장이모 등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의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시네마테크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최정운은 "문화학교 서울이 시작할 때는 추억영화모임이 있었고, 나이 든 분들도 모였으며, 유현목 감독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며 "당시 보유하고 있던 비디오테이프 등이 200~300편 정도였는데. 자막을 넣어서 정리했다"고 말했다.
 
또 "운영과 기획은 실무자들에게 맡겼다"면서 "운영위원은 곽용수(제작자, 인디스토리 대표)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 조영각(프로듀서, 인디그라운드 센터장) 김형석(영화평론가,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 발간된 계간 <독립영화> 18호에 실린 곽용수, 조영각, 이주훈, 김형석 4인의 대담에 따르면 사무국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곽용수는 1992년 단편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화학교 서울에 참여했다.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는 "1992년에 전창수, 정민택 선배 등을 알게 됐고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영화 스터디를 집과 학교에서 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문화학교 서울 최정운 대표님을 소개해줘서 알게 됐다"며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단편영화 작업이 지지부진해졌고 공간이 있으니까 공간을 활용하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말헸다.
 
이어 "1992년 처음 영화제를 시작했고, 1993년 중국 5세대영화제를 했는데 정말 드문 영화제였다"며 "번역이 안 돼 있어서 도성희(북경연예전수학원 교수)와 김의성(영화배우)이 성우를 하면서 영화를 상영했다"고 덧붙였다. 도성희는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최정운은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좌석이 모두 차서 서서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며 "영화에 대한 욕구와 관심은 큰데, 이를 해소할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주로 비디오를 보던 공간으로 비디오테크로 인식되던 문화학교 서울은 시네마테크로서 역할을 강화하게 된다.
 
공권력 영향 받지 않아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을 맡았던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 운영위원이었던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 조영각(인디드라운드 센터장), 김형석(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을 맡았던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 운영위원이었던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 조영각(인디드라운드 센터장), 김형석(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 인디스페이스,평창영화제,오마이뉴스

 
1993년 10월 동구권영화제 즈음에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이 합류했고, 이후 11월에 조영각(프로듀서, 인디그라운드 센터장)이 뒤를 따르면서 운영위원도 늘어난다.
 
조영각은 "1993년 3월에 제3세계 영화제를 보러 갔었고 정재형 선생(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강의도 듣고 후에 회원 가입하러 갔다가 운영위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갔다"며 "곽용수가 혼자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문화학교 서울 초기인 1991년~1992년에는 제작집단을 지향하며 영화제작을 꿈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면서 "1993년부터 시네마테크로서 기능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운영위원은 한때 10인 이상이었다가 1995년 즈음 이후 6인 체제였다"면서 "이효선(출판인), 우명희(디자이너) 등이 함께했다"고 덧붙였다.
 
계간 <독립영화> 18호 대담에서 곽용수(제작자, 인디스토리 대표)는 "시네마테크라는 활동의 운동성을 부여하면서 1993년 8월부터 정기적으로 상영회를 하기 시작했다"며 "그때까지도 제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영화제 쪽으로 비중이 많이 실리면서 영화제에 대한 고민과 한국의 상황에서 시네마테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자료도 거의 없었고 다른 단체와 부딪히며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영화제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주훈은 계간 <독립영화> 대담에서 "1993년에 문화학교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정리가 잘 안 돼 있었다"며 "제작단체냐 아니냐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영화제도 비정기적이었고 그러다 사람들을 모으면서 정기적인 영화제 체제로 전환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자료정리와 체계적인 해설, 영화에 대해 정리를 하면서 맥락을 잡고 시네마테크 개념을 가져 나갔던 것 같다"면서 이렇게 회상했다.
 
"생각해 보면 영화를 봐도 그렇고 세계사적으로도 1992년과 1993년이 굉장히 미묘한 시기였다. 시네마테크 운동으로써 자리매김된 것은 1994년으로, 토론 프로그램도 진행했었다. 영화를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뭔가를 만들어보자고 동의를 한 게 1993년 말이었다. 그 배경에는 영화 매체가 폭발적인 전파력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무기라는 생각을 갖고 오게 것이다.
 
1980년 말에 대다수 학생운동권들이 영화판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판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판이 어떤 새로운 영토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 공유가 있었다. 서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다 백그라운드를 확인하면서 그렇게 나갈 수 있었건 것 같고, 그러던 게 1994년 들어 시네마테크론으로 정립된 것 같다. 좀더 발전해서 제작, 배급, 시네마테크 이론 이렇게 분화된 건 1994년 말~1995년 초였던 것 같다."

 
이주훈은 "'영화를 읽자'가 문화학교 서울의 모토였다"면서 "'새로운 영화 읽기의 제안'이라고 1993년 말에 우리가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영화 읽기라고 하는 맥락이 1994년도에 정기적으로 영화제를 진행하고 토론 프로그램을 하면서 영화를 읽어야 한다, 그냥 본다가 아니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게 당시로서는 중요한 개념이었고, 지금까지도 시네마테크를 지탱해 온 힘이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문화학교 서울은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1994년 <씨네필>을 발간한 데 이어, 영화 100주년을 맞았던 1995년에는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를 출간했다. 1996년에는 한국영화 연구모임 비상구 회원들의 평론을 모은 책 <한국영화 비상구>를 펴내기도 했다.
 
조영각은 "<씨네필>은 격주간지 형태로 4호까지 발간했다가 <씨네21>이 창간되면서 좌초했고,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1994년부터 기획을 시작해 8명 정도의 필자가 참여해 1년 정도를 준비했다"며 "당시 김홍준 감독이 쓴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을 밀어내고 베스트셀러 1위에 몇 번 정도 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화학겨 서울에서 펴낸 책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문화학겨 서울에서 펴낸 책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 문화학교 서울

 
곽용수는 "다른 단체들과 나름대로 차별성을 갖는다면, 좋은 프로젝트로 상영하고, 프로그램을 짜는데도 일정 정도 도덕적인 게 있었던 것 같다"며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최정운 대표님의 안정적인 지원이 컸다"고 밝혔다.
 
또한 "다른 단체들이 공권력의 희생을 당했는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공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고 덧붙였다.
 
최정운은 2010년 3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뭐 처단하겠다기보다 정보 취합 차원에서 동태 파악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항상 하는 말은 '좋은 일 하시네요'였다"며 "당시 불법 복사 테이프를 틀 수밖에 없어 저작권법에도 걸리고 상영공간 허락도 제대로 받지 못해 항상 걱정이었다"고 밝혔다.
 
조영각은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나 한국영화계하고 어떻게 교류를 맺을까 이런 걸 고민하면서 초청강좌도 열었다"며 "<유리>(1992) 만들었던 양윤호 감독이나, 박종원 감독, 이정국 감독 등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모셔다가 강연회를 열고, 인디포럼 이전에 독립영화 작가와의 대화라고 류승완, 장기석, 오점균, 김태일 감독 영화도 상영하고 그런 관심을 갖고 인디포럼도 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영화에 영향 미치는 관객 집단
 
경향신문은 1997년 3월 7일 자 기사에서 "하루 수십 명의 영화 애호가들이 들고나는 진귀한 영화창고로 국내 최대 규모의 사설 시네마테크'라며 '보유하고 있는 필름과 비디오의 양이 가장 많고 회원도 1000명이 넘는다"고 문화학교 서울을 소개했다.
 
특히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작품들이 많아 감독 평론가 방송관계자들이 단골로 찾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대중의 눈과 귀를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채로운 영화제로 로드무비영화제, 범죄영화제, 지루한 영화제 등을 열어 이색적인 주제로 일반인의 예술영화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영화상영 외에 비평세력과 영화인력을 키우는 것도 또 다른 목표로서 5개의 연구제작팀을 두고 영화이론연구, 단편영화제작 등 시네마테크로서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며 "관객 출신의 비영화전공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고, 운영위원 4명이 모두 영화를 보기 위해 문화학교 서울을 드나들던 회원들로 창립 5년 만에 한국영화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관객집단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이주훈 제작소장은 "충무로의 영화감독 영화평론가들이 빠지기 쉬운 매너리즘을 아마추어 관객의 솔직한 시각으로 견제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1997년 경향신문 나온 '문화학교 서울' 기사.

1997년 경향신문 나온 '문화학교 서울' 기사. ⓒ 경향신문

 
문화학교 서울은 영화계의 다양한 인재를 키운 터전이 된다. 인디포럼을 개최했고,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결성됐을 때는 조영각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문화학교 서울 이후 월간 <스크린> 편집장을 역임한 김형석(영화평론가,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은 계간 <독립영화> 18호 대담에서 "영화현장에 취재 가면 문화학교 서울에 영화 1~2편씩은 보러 왔었고 연인원을 따져보면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주훈은 "직접 계산해 봤다"면서 "어떤 해는 1년에 1만 1천 명이 찾았다"고 밝혔다.
 
곽용수는 "굉장히 폭발적인 시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같은 목적의식을 갖고 만났다"면서 "젊은 시기에 그런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인자들을 배출하는 터가 됐다는 게 문화학교 서울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만 아쉬운 것은 큰 그림 속에 연구소와 제작소가 갖춰지고 시스템이 갖춰져 이런 큰 틀에서 원활하게 돌아가는 체계를 꿈꿨었는데 안 됐다"면서 "준비하고 엎어지면서 따로 활동 영역이 넓혀지면서 빠져 나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상적인 그림의 어떤 단체가 못 됐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씨앙씨에 손주연은 "문화학교 서울과는 라이벌이기도 했으나 지향점이 다르다 보니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다"고 회상했다.
 
문화학교 서울은 2002년 1월 25일 전국의 시네마테크가 모여 결성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결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초대 회장은 최정운 문화학교서울 대표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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