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의 저서 <부산영화 100년>

한국영화자료연구원 홍영철 원장의 저서 <부산영화 100년> ⓒ 한국영화자료연구원

 
서울에서 영화운동이 전개되고 있던 1984년, 부산에서도 영화에 깊은 관심을 보이던 대학생들이 모여 새로운 영화 활동을 모색하게 된다. 1980년 얄라셩으로 시작된 영화운동이 새로운 영화에 방점을 둔 '영화'운동에서, 사회적 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에 방점을 둔 영화'운동'으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이즈음 부산의 영화운동도 출발하게 된다.

사실 부산은 시기적으로 서울보다 대학영화서클이 먼저 생겨난 곳이었다. 서울대 얄라셩이 1979년 공대를 출발점으로 1980년 정식 영화서클이 됐다면 부산의 대학 영화서클은 수십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었다. 서울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이다.
 
부산 영화역사를 연구한 홍영철의 저서 <부산영화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에 따르면 부산대학교는 1956년 3월 영문학자로 영화평론가였던 영어영문학과 장갑상 교수에 의해 부산대 영화연구회가 만들어졌다. 동아대학교 영화연구회도 1961년 3월 24일 생겨났다. 부산영화평론가협회가 생겨난 것은 1958년도였다.
 
하지만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산 대학영화서클들은 주로 영화감상회를 진행하고 감상평을 나누는 형식으로만 이어지고 있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1984년 부산 프랑스문화원에 생긴 부산씨네클럽이었다.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을 통해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던 서울의 문화원 세대들처럼, 부산 역시도 부산씨네클럽이 젊은 대학생들에게 활력소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다.
 
부산씨네클럽은 클럽은 부산 영화운동의 출발점이나 다름없었고, 그 중심에 있던 대표적 인물이 김지석(작고,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오석근(감독, 영진위원장)이었다.

무턱대고 찾아간 프랑스문화원장
 
 부산씨네클럽 행사를 알리는 공고문

부산씨네클럽 행사를 알리는 공고문 ⓒ 강기표 제공

 
부산씨네클럽의 출발은 김지석의 부산대 영화연구회 후배였던 82학번 이진수(건축가)에 의해서였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은 경성대 맞은편에 자리해 있었다. 1981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프랑스영화를 보러 다녔던 이진수에 따르면 부산 프랑스문화원에는 기존에 씨네클럽이 있었으나 회원이 돼도 영화감상 외에는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없어지게 된다. 부산씨네클럽이란 이름으로 다시 생겨난 것은 당시 이진수가 당돌하게 프랑스문화원장을 찾아간 게 발단이 됐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행동이었는데, 1984년 1월 5일 프랑스문화원을 찾아가 원장 면담을 요청했다. 문화원에서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 불어를 배웠을 정도였고 프랑스문화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임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목적으로 무턱대고 찾아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문화원 측은 사전 약속이 안 돼 있다는 이유로 원장 면담이 어렵다고 이야기한 후 다음날로 면담 일정을 정해줬다. 프랑스문화원장을 마주한 것은 이튿날인 1월 6일이었다. 클럽을 하나 만들고 싶으니 강의실을 제공해 주고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당시 다니엘 까리용 원장이 일주일 시간을 줄 테니 운영계획서와 회원모집공고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일주일 뒤인 1월 13일 김지석과 함께 다시 찾아가 원장을 만났고 요청한 자료를 제시했던 것이다."
 
이진수는 "당시 1984년 7월 6일에 입대하라는 입영 영장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군입대를 앞두고 있어 김지석과 상의한 후 같이 갔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운영계획서와 회원모집광고는 부산대 영화연구회 것을 그대로 베껴간 것이었다"고 웃으며 회상했다.
 
일이 잘 풀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다니엘 까리용 원장 덕분이었다.

"창립총회 때 계장님을 통해서 들었는데, 난 원장님과 이야기가 잘 됐다고 생각했지만 총괄과장을 비롯한 한국인 직원들은 다들 반대했다고 한다. 시국이 불안했던 때이고, 문화원에 이익이 없는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 까리용 원장이 '젊은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싶다는 데 내가 안 도와주면 누가 도와주겠나? 지원해 주라!'고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서 직원들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장이 아니었으면 부산씨네클럽이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진수는 "그 전에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이 있었기에 부산을 앞에 붙여서 부산씨네클럽이라고 한 것"이라면서 "부산씨네클럽 활동에 도움을 많이 줬던 계장님은 사실 처음에는 반대했던 분이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이어 "김지석 형이 타계하기 전에 만나서 부산씨네클럽 시절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면서, "친절했던 계장님만 기억할 뿐 원장님이 도운 것은 잘 기억 못 해서 다니엘 까리용 원장에 대해 강조한 적이 있다"고 덧붙였다.
 
부산씨네클럽은 1월 회원모집 공고가 붙였으나 회원들이 모이는 데는 시간이 걸리면서, 3개월 정도가 지난 4월 6일 창립총회를 열고 첫발을 내딛는다. 초대 회장은 김지석이었고 이진수는 부회장을 맡았다. 이진수는 "관심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라며 "동아대 영화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오석근은 원래 아는 사이였고, 내가 군입대 후에 강기표 등이 추가로 가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기억했다.

이진수는 "당시 창립총회 사진을 오석근이 찍었는데, 역사적으로 남겨야 할 사진이니 잘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다 잃어버린 것 같다. 아쉽다"면서 "1986년 10월에 제대했더니 경성대 교수였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지도교수를 맡고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어 "제대 직후 곧바로 부산씨네클럽 회장을 맡았다"면서 "날짜를 다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프랑스문화원장 면담과 창립, 군입대가 모두 6일로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부산영화를 대표하는 김지석과 오석근

부산영화를 대표하는 김지석과 오석근 ⓒ 부산영화제, 영화진흥위원회

 
이진수의 군입대 후 부산씨네클럽을 주도적으로 이끈 사람은 김지석과 오석근이었다. 초기에 활동했던 강기표(건축가)에 따르면 1984년 부산씨네클럽이 만들어질 당시 부산대와 동아대, 동의대, 수산대(현 부경대) 등 4개 대학 영화동아리가 함께 영화를 보고 합평회를 하는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동의대 영화서클 빛그림에서 활동했던 강기표는 "당시 부산대 영화서클이 35기, 동아대가 25기, 동의대가 2기였고 영화 감상에 중심을 둔 아마추어 모임으로, 1983년 연극영화과가 생긴 경성대가 2기 정도였다"고 기억했다. 이어 "김지석과 오석근은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가 보고 싶어했고, 부산씨네클럽이 필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지석과 오석근은 1970년대 중반 고등학생 시절 또래들 사이에서 유명한 영화광으로 소문나 있었다. 부산 배정고와 동인고에 각각 재학했던 이들의 영화 내공은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누가 더 많이 아는지가 또래 학생들의 궁금함이기도 했다. 결국 1977년 한 친구의 주선으로 만나게 되면서 이른바 누가 영화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지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오석근은 "당시 처음 만난 김지석의 첫 질문이 '1895가 뭔지 아냐?' 였다"라며 "영화제목과 영화배우들 이름은 줄줄 외우고 있었는데, 1895를 물어봐 순간 당황해서 답을 못했다"라고 말했다. 김지석의 선공에 오석근이 고전했던 것이다.
 
이들이 다시 만난 것은 3년 뒤 대학에서였다. 오석근은 "우리가 입학한 1979년은 부마항쟁으로 긴 시간 휴교가 이어졌다"며 "1980년 내가 동아대 영화예술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5월 광주항쟁 직전 전국에 비상계엄이 발령되고 대학이 휴교가 이어지던 때 부산대 영화연구회를 갔더니 김지석이 회장을 맡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이후 재회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로 두 사람은 친분이 두터워지게 된다. 오석근은 1981년 군에 입대했는데, 당시 국내 굴지의 기업에 입사를 준비하고 있던 김지석은 전방에 있던 오석근을 면회하고 오면서 입사시험에 늦어 떨어지게 된다.
 
군에서 제대한 오석근이 복학했을 때 김지석은 동아대 대학원에 진학해 있었는데, 이때 프랑스문화원으로 영화를 보러 다니다가 1984년 부산씨네클럽 출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왼쪽에서 두번째 강기표(건축가), 다섯번째 노란옷 방추성(부산 영화의 전당 대표, 일곱번째 허현숙, 오른쪽 끝 오석근(영진위원장)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왼쪽에서 두번째 강기표(건축가), 다섯번째 노란옷 방추성(부산 영화의 전당 대표, 일곱번째 허현숙, 오른쪽 끝 오석근(영진위원장) ⓒ 허현숙 제공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 허현숙 제공

 
김지석과 오석근이 중심이 됐던 부산씨네클럽은 부산에서 영화의 꿈을 키우고 있던 대학생들에게 활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은 각 대학을 돌며 영화서클을 만들라고 권유해, 경성대에 '횃불'이 만들어지고 부산여대에도 영화서클이 생겨나는 성과를 냈다. 연기를 하겠다고 부산씨네클럽을 찾은 학생도 있었는데, 양헌규(제천영화제 사무국장)였다.

서울의 대학 영화서클이 1984년 작은영화제('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이후 1985년에 급증했는데, 부산의 대학영화서클도 비슷한 시기에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부산에 유일하게 연극영화과가 있던 곳은 경성대였고, 전수일(감독, 경성대 교수)이 연극영화과 1기생이었다.
 
부산씨네클럽은 매주 두 번씩 모임을 가지며 영화에 대한 폭을 넓혀 나간다. 강기표는 "한번은 영화, 또 한번은 문화에 대해 공부했고, 번역서가 없어 원서 2권으로 공부를 했다"며 "김지석의 주도로 시험도 봤다"고 말했다. 방추성(부산 영화의 전당 대표)은 "김지석이 워낙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을 가지고 시험을 본 것이고, 불만이 제기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1983년부터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들다 1985년 회원으로 가입한 방추성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부산씨네클럽 막내기도 했다. 방추성은 "당시 중학교를 그만둔 후 놀면서 영화를 보러 다녔다"며 "서울 프랑스문화원의 박건섭(부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처럼 부산 프랑스문화원이 계장이 영사기를 돌렸는데, 착하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관람료가 300원이었는데, 돈이 없으니 한 편만 보고 이후 보는 것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강기표는 "김지석이 학구파였다면 오석근은 현장파였다"며 "씨네클럽이 영화제작을 시도한 것은 오석근의 적극성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오석근은 "당시 부산 경상전문대(현 부산 경상대)에 CF 감독이었던 지청언(본명 지영호) 교수가 있었다"면서 "최민수 배우의 데뷔작 <신의 아들>을 연출한 분으로 방송연예과 교수로 16mm를 강의했는데, 그게 부러워서 학생들 만나서 촬영기법을 배웠고 8mm 카메라도 직접 구입했다"고 말했다.
 
이어 "씨네클럽이 당시 인상비평 정도의 실력만 갖고 있었는데, 경상대와 만나 영화제작의 맛을 알게 된 것이었다"며 "이후 경상대와 교류하면서 대학동야리 연합회 활동을 같이 했다"고 덧붙였다.
 
오석근 주도로 영화 제작
 
 1984년 10월에 열린 부산씨네클럽 단편영화 발표회

1984년 10월에 열린 부산씨네클럽 단편영화 발표회 ⓒ 강기표 제공

 
1984년 씨네클럽은 모두 4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어 10월 27~28일 첫 상영회를 연다. 오석근의 <어느 자살에 관한 보고서>가 16mm 영화였고, 김신규의 <자동판매기에서 나온 사랑>, 허현숙의 <반지>, 서정원의 <한글처럼> 등이 8mm 영화였다.
 
<반지>를 연출한 허현숙은 "김지석은 영화제작에 관심이 없었고, 오석근이 제작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허현숙은 고등학교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기에 대학 입학 후 부산대 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고, 김지석의 권유로 부산씨네클럽을 함께 시작했다.
 
방추성은 "김신규의 <자동판매기에서 나온 사랑>에는 김복근(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올누드로 출연한다"며 "김복근은 대학 재학 시절에도 배우를 하기 위해 연극영화과에 온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후 또 다른 영화제작을 시도했으나 무산되면서 1984년 10월 상영회가 유일한 상영회가 됐다. 방추성은 "이경규 배우의 동창이었던 옥광식(<복수혈전> 제작참여)이 에로영화에 관심이 있어 부산여대 공예학과 학생을 매춘부 역할로 출연시켜 영화를 찍었는데, 여학생 부모님이 그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해서 필름을 빼앗은 후 불태워서 없애버렸다"고 말했다.  
 
 8mm 단편영화 <반지> 제작한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시나리오쓴 박수경, 허현숙 감독,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 옥광식(감독. <복수혈전> 제작). 네번째 서정원 감독

8mm 단편영화 <반지> 제작한 부산씨네클럽 회원들. 윗줄 왼쪽부터 시나리오쓴 박수경, 허현숙 감독, 아랫줄 왼쪽에서 두번째 옥광식(감독. <복수혈전> 제작). 네번째 서정원 감독 ⓒ 허현숙 제공

  
부산씨네클럽이 서울의 영화운동과 연결될 수 있던 계기가 마련된 것은 1985년이었다. 오석근은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상영이 끝나고 누군가 앞에 나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교류하고 싶다고 인사를 했다"며 "경성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온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교수였다"고 회상했다. 부산씨네클럽과 이용관의 첫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용관은 "당시 부산씨네클럽이 모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일부러 만나러 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부산을 영화도시로 성장시킨 이용관은 당시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유일한 영화전공 교수였다. 1983년 연극영화과가 생긴 경성대는 연극전공 교수는 많았으나 영화전공은 없었는데, 1984년 이용관이 첫 영화전공 교수로 온 것이었다. 그는 1985년 김지석의 요청으로 부산씨네클럽 지도교수를 맡게 된다. 강기표는 "1985년 군에서 휴가 나왔을 때 경성대 졸업작품전에 가서 이용관과 처음 인사했다"고 말했다.

오석근에 따르면 당시 부산에는 영화와 관련한 몇 개의 집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부산 경상대 지청언 감독 중심의 방송연예과 16mm 촬영집단, 이용관을 중심으로 한 경성대, 프랑스문화원 부산씨네클럽, 그리고 30~40대 세대가 좋은 장비를 바탕으로 취미활동을 하고 있던 부산 8mm 동호회(김응윤, 강지훈) 등이었다.
 
부산씨네클럽은 김사겸 감독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김사겸 감독은 1960년대 유현목 감독의 연출부로 들어와 조감독을 거쳤고, 1971년 <그대 가슴에 다시 한번>으로 데뷔해 동년배인 임권택 감독, 후배 감독인 하길종과 가까운 사이였다. 1975년 하길종, 홍파, 이장호, 김호선 감독과 변인식 평론가가 중심이 돼 만든 '영상시대' 동인들과도 친했으며 김호선 감독과는 유현목 감독의 조감독을 거쳤기에 가까운 사이였다.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가 흥행하자 김사겸 감독은 <창수의 전성시대>(1975)를 연출하기도 했다.
 
오석근은 "부산씨네클럽은 김사겸 감독을 통해 한국 영화계를 알게 됐고, 하길종 감독의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며 "하길종 감독의 저서<영상, 인간 구원의 메시지>는 뉴아메리칸 시네마 중심의 새로운 영화의 흐름을 정리한 책이라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또한 "유현목 감독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고, 김호선 감독이 부산으로 촬영을 오면 직접 만나 대화할 수 있었다"며 "이렇듯 김사겸 감독을 따르면서 이용관이 시네클럽에 영화 강의를 해주겠다고 손을 내밀었으나 다소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오석근은 "이후 확인한 이용관 수준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용관은 대화상대로 학생들 수준이 약해 답답함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서울의 후배들을 강사로 초빙했었다"면서 "당시 내려왔던 분들이 신강호(대진대 교수), 이충직(중앙대 교수, 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었고, 김지석이 이들과 만나면서 영화에 대한 눈을 뜬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부산으로 강의를 내려왔던 신강호(대진대 교수)는 "당시 이용관이 김지석을 인사시켜주면서 서울처럼 부산에서 프랑스문화원을 다닌다고 소개했다"고 기억했다. 방추성은 "1986년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는데, 전양준, 이충직, 신강호, 조재홍(감독, 전 서강대 총학생회장)이 강사로 강의했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재학 시절 동기 이수정(감독)의 뷰파인더 확인을 도와주고 있는 오석근(영진위원장)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재학 시절 동기 이수정(감독)의 뷰파인더 확인을 도와주고 있는 오석근(영진위원장) ⓒ 이수정 제공

 
이용관의 등장은 오석근과 김지석의 진로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한 오석근과 단기병(방위)으로 군 복무를 마친 김지석은 이용관과 진로를 논의한 끝에 각각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 것이다.
 
오석근은 "당시 김사겸 감독의 추천서를 받긴 했으나 시험을 잘 치르면서 한국영화아카데미(4기)에 합격해 북아현동 옥탑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며 "중앙대 대학원에 진학한 김지석은 서울로 통학했는데, 수업이 끝나면 자취방에서 자고 내려갔다"고 말했다.
 
부산으로 온 <영화언어>
 
이후 부산의 영화운동이 탄력을 받게 되는 것은 1990년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발행인으로 있던 계간지 <영화언어>가 부산으로 내려오면서였다. 전양준은 영국 유학을 다녀온 이후 1989년부터 <영화언어>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자 이용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용관이 발간 비용을 책임지기로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언어>는 부산영화제 출범에 탄력을 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당시 김지석은 영화 스터디를 계속할 수 있는 공간을 유지할 목적으로 1989년 남천동에서 프라모델 완구점을 운영하고 있던 때였다. 김지석의 대만인 친구가 프라모델 제품을 공급해줄 테니 판매한 만큼만 돈을 달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었다. 점포를 얻는 보증금은 이용관이 지원했고 방추성이 운영을 도왔다.
 
당시 경성대 연극영화과에 재학 중이던 방추성은 "함성원(편집기사)이 낮 시간대 가게를 지켰고, 학교 갔다 와서 내가 완구점을 맡았다"고 회상했다. 프라모델 가게는 뒤에 골방이 있어 심도 있는 영화비평 토론이 전개되기도 했는데, 영화에 대한 상당히 수준 높은 토론이 이어져 가볍게 영화 감상을 나누려고 생각했던 처음 온 참석자들은 주눅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1989년 창간된 <영화언어>

1989년 창간된 <영화언어> ⓒ 전양준 제공

 
<영화언어>가 부산행을 택하면서 프라모델 가게는 <영화언어> 편집 공간으로도 활용된다. 김지석은 1989년 <영화언어> 겨울호부터 편집진에 이름을 올렸고, 1991년부터는 편집인으로 총괄 책임을 맡게 된다. 당시 <영화언어> 발행 비용은 이용관이 사비를 털어 지원하고 있었다. 전양준은 "김지석이 1991년 봄호(7호)부터 편집인을 맡아 <영화언어> 편집과 발행을 책임졌다"고 말했다.
 
방추성은 "이언경(작고, 영화공간1895 대표)과 이하영(프로듀서, 전 시네마서비스 배급이사)이 <영화언어>에 참여해 부산을 오갔다"면서, "김지석이 팩스를 사달라고 했는데 이용관이 이를 안 사주려다가 결국 사준 일도 있었다"고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언경은 부산 출신이었다.
 
이하영은 "당시 이언경과 함께 시네마테크를 표방했던 '영화공간1895'를 만들어 스터디도 하고 영화도 보는 비영리 공간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강사로 초빙했던 이용관이 어느 날 <영화언어>라는 계간지를 출판할 곳을 찾고 있다면서 영화공간 1895에서 출판을 해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일단은 사비를 털어 '출판사 1895'를 만든 후 <영화언어>를 발행하게 됐다"면서 "이후 원고와 편집 방향을 상의하러 부산으로 출장을 많이 갔다. 김지석을 알게 된 이후엔 광안리 안쪽 조그마한 아파트에서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던 김지석의 집이 부산 출장 때 숙소가 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이하영은 "부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길 싫어하는, 어찌 보면 무척 게으른 그들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엉뚱한 소리로 치부했다"면서 "서울이면 모르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겠다고 꿈꾸는 걸, 한마디로 개그 수준으로 받아들였다"고 회상했다.
 
방추성은 "김지석이 그때부터 영화제를 준비하고 있었다"며 "외국에는 젊은 학생이 혼자서 국제영화제를 하는 경우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해서 늘 노란 서류봉투에 영화제 관련 자료를 넣고 다녔다"고 말했다.
 
 1996년 부산영화제 출범을 앞두고 회의 중인 모습. 당시 김동호 집행위원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오석근 사무국장, 박광수 부집행위원장 등등

1996년 부산영화제 출범을 앞두고 회의 중인 모습. 당시 김동호 집행위원장, 김지석 프로그래머, 오석근 사무국장, 박광수 부집행위원장 등등 ⓒ 부산영화제

 
오석근은 한국영화아카데미 4기로 졸업한 후 이명세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네 멋대로 해라>(1992)로 데뷔했고, < 101번째 프로포즈 >(1993)를 연출했다. 이후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 제작에도 참여한다.

이명세 감독이 <남자는 괴로워>(1995) 흥행에 실패한 뒤 부산 오석근의 집에 머물며 시나리오를 완성해 부산 촬영이 결정되면서 오석근이 현장 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부산씨네클럽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복근(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도 합류한다. 오석근은 "그때 촬영 기간 중 김지석의 꼬임에 넘어가 이후 부산국제영화제 준비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석근은 부산영화제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1999년 6월 24일 부산역 광장에서 열린 '스크린쿼터 사수 부산 영화인 궐기대회' 때는 김사겸, 곽경택 감독과 함께 삭발을 하며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대학 등록금으로 씨네마테크 1/24 개설
 
부산씨네클럽의 활동은 1990년대 넘어오며 씨네마테크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씨네클럽에서 활동하던 경성대 김희진, 부산대 영화연구회 이주호, 외국어대 고영수 등 3명이 주축이 돼서 1993년 남천동에 씨네마테크 1/24의 문을 연 것이다.
 
강기표(건축가)는 "1987년 군에서 제대하고 왔더니 시네클럽이 더 이상 모이지 않고 있었다"고 했으나, 시네마테크 1/24 공동대표 역할을 맡았던 김희진(감독, 또따또가센터 대표)은 "고3 때인 1987년부터 시네클럽을 오가기 시작해 군입대 전이 1989년까지도 시네클럽 활동이 이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1987년 이후 시네클럽은 초기 8mm 영화제작을 했던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남아있던 김지석이 비평지 <영화언어> 발간과 정보지 <영화저널> 배급을 담당했고, 이용관을 중심으로 진행된 프랑스문화원의 영화합평회가 진행되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부산씨네마테크 1/24 홍보물

부산씨네마테크 1/24 홍보물 ⓒ 김희진 제공

 
씨네마테크 1/24은 '부산씨네클럽 안에서만 활동하지 말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김희진은 "예술영화의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국어자막을 넣고 상영회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비용은 당시 대학생이던 세 사람이 휴학한 사실을 숨긴 채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받아온 것으로 준비했다. 김희진에 따르면 군에서 제대한 후 1992년 연말에 장소 계약을 했고 1993년 3월에 남천동에서 개관했다. 씨네마테크 1/24은 회원제로 운영됐는데, 비디오 2000편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주호가 제일 먼저 대표를 했고 1994년까지 2년 정도를 고영수 김희진 순으로 대표를 맡았다. 표면적으로는 대표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3인 공동운영 체제였다.
 
씨네마테크 1/24는 비디오를 통해 해외의 예술영화를 상영하고 영화강좌를 개설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부산지역 최초의 민간 시네마테크였다. 1991년 이언경(작고), 이하영(프로듀서)이 중심이 된 서울의 '영화공간 1895'가 민간 시네마테크의 길을 연 것처럼 부산에서도 같은 성격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94년 8월에 운영위원으로 활동에 참여했고, 김희진에 이어 대표를 맡은 양정화(프로듀서, 영화사 해밀 대표)는 "대표로서 상영영화 기획, 시간표 작성, 재정, 회의 참석, 회원관리 등을 맡았다"며 "보고 싶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보니, 당시 필요한 비디오는 해외에서 구입하거나, 아니면 저작권 개념 없던 때라 복사를 했고, 내용은 자체적으로 번역해 자막을 입혔다"고 말했다.
 
또한 "영화비평강좌를 개설했는데, 강사는 이용관, 이효인, 오석근, 김지석, 전수일 등이었고, 전수일(감독은) 씨네마테크 1/24 운영에 사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단편영화 제작시도도 있기는 했으나, 주로 전수일 감독의 제작사 동녘필름에 스태프로 참여해 제작 경험을 쌓았다"고 덧붙였다.
 
김희진은 "씨네마테크 1/24를 함께 시작한 고영수가 복학할 때 이용관이 등록금을 빌려주기도 했다"면서 "민규동 감독이 부산에서 카추사로 군 복무를 할 때 시네마테크 1/24에서 비디오를 빌려가기도 했고, 강소원(영화평론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박상훈(촬영감독), 이승진(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팀장) 등이 중심을 이뤘다"고 말했다. 운영은 지역 여러 대학 출신들이 골고루 섞여 운영을 담당했고, 직장인이나 일반인 회원들도 있었다.
 
양정화 이후 우정태(감독, 전 부산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가 대표를 맡았는데, 이때는 청소년 비디오 워크숍을 진행했고, 여기에 하니영상 조성봉(감독, <레드헌트> 연출)이 합류한다. 당시 조성봉 감독 작업실 장비가 좋은 데다, 편집이 가능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성봉은 1997년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헌트>를 제작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돼 구속될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우정태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펴낸 <부산독립영화작가론-독립영화 계보그리기, 첫줄>(2004년 발간)에서 '씨네마테크 1/24은 크고 작은 대내외영화제를 통해 서구 예술영화의 대중적 보급을 활동의 중심에 두고, 학교와 연계한 영화 강좌와 디지털로 만들어진 단편들을 상영하는 언더그라운드 캠코더 영화제 등을 병행했다"고 밝혔다.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강소원(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학부 때는 영화를 전공한 게 아니어서 대학원에 진학에 영화를 공부하던 때였다"며 "영화를 보러 가거나 비평강좌를 맡기도 했고,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 자료와 영문으로 된 책 번역 작접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비디오로 작은영화제도 진행했다. 당시 부산에서 연극영화과가 경성대밖에 없다 보니 경성대 영화과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고 말했다.
 
씨네마테크 1/24은 1996년까지 남천동에 있다가 이후 부산대로 옮겨갔고, 2003년까지 운영된다. 강소원은 "어떤 책임을 맡아서 한 것은 아니다 보니 2000년 이후까지 긴 시간 활동을 했었다"며 "활동이 마무리될 무렵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고, 공간을 빌려 테이프를 보관했는데, DVD가 나오던 시점이라서 비디오테이프를 찾아볼 필요성이 점차 약해졌다"고 기억했다.

이에 대해 김희진은 "해체 이후 부산독립영화협회 공간 등에서 보관하던 비디오테이프는 또따또가센터 활동을 시작하며 만든 '영화공간 보디드문'으로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시네마테크에서 활동했던 김희진(감독), 양정화(프로듀서)

부산시네마테크에서 활동했던 김희진(감독), 양정화(프로듀서) ⓒ 또따또가센터,권경원

 
양정화는 "씨네마테크 1/24이 1996년 부산영화제가 시작됐을 때 함께 동참했다"며 "영화보기 운동으로 예술영화 관객 측의 저변 확대에 경험과 네트워크가 있었던 게 장점으로 생각돼 씨네마테크 1/24이 1회 부산영화제 자원봉사팀을 맡았다"고 밝혔다.

씨네마테크 1/24은 이후 부산독립영화협회(부독협) 결성에 바탕이 됐다고 한다. 김희진은 "문화학교서울이 한국독립영화협회 결성에 바탕이 됐듯 '씨네마테크 1/24'도 1999년 부산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 지는 데 역할을 했다"면서 조성봉, 이성철 감독이 초대 공동대표를 맡을 때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소원은 "씨네마테크 1/24이 부독협으로 이어졌다기보다는 이후 부독협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등으로 부산의 영화문화를 전반적으로 확장 시키는 역할을 했다"면서 "부독협은 동녘필름에서 활동하던 박지원, 김희진, 김휘, 김백준, 박성남, 전인룡 감독 등이 독립영화협회 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밝혔다.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로 이어진 활동들은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석근은 "부산씨네클럽은 순수하게 영화에 집중했다"고 말했고, 양정화는 "나는 학생운동을 했으나, 씨네마테크 1/24에 민중운동적 성향은 없었다"고 밝혔다. 방추성은 "사실 이용관 김지석 등은 보수적인 분들인데, 다만 심성이 바르고 정의로운 분들이다보니 항상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 나갔기 때문에 진보적으로 보인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부산에서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했던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산영화운동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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