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몇 차례에 걸쳐 한국영화운동을 돌아본다.[편집자말]
 1986년 '파랑새 사건' 이후 1987년 서울영상집단에서 분리 선언을 한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 변재란

1986년 '파랑새 사건' 이후 1987년 서울영상집단에서 분리 선언을 한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 변재란 ⓒ 장산곶매.영상자료원,김혜준 제공

 
1988년 '장산곶매'가 <오! 꿈의 나라>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영화운동단체들이 여러 형태로 분화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 영화운동에 뛰어들었던 청년영화인들이 1985년을 기점으로 하나둘 충무로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영화마당우리의 작은영화워크숍을 수료하거나, 1985년 이후 활발해진 대학영화서클의 영향으로 여러 갈래의 단체나 모임들이 생겨났다.
 
기존 서울영화집단에서 서울영상집단으로 이어지며 영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방향을 달리 잡은 것이 영화운동의 분화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활동에 대한 이견과 노선 차이로 인한 사상투쟁 등이 여러 형태로 전개되던 시기였다.
 
1986년 '파랑새 사건'은 서울영상집단 구성원들간의 결별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저서 <뉴웨이브와 작은역사>(가제, 2020년 발간)에서 "서울영상집단이 1987년 중반에 해산했다"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6년에 재결합한 그들을 대상으로 <파랑새> 사건을 계기로 신뢰를 잃었다고 면전에서 말해버렸다. 홍기선(감독)과 이정하(전 영화평론가)도 그 점에 동의했는지 아니면 내 사정을 고려해서 동의해줬는지 알 수 없다. 상대편들은 운동 노선의 차이에 의한 분리라고 해명/주장했다고 하는데, 여하튼 그들이 서울영상집단이라는 명칭을 쓰길 원했기 때문에 명칭 사용에 동의를 해줬다."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이름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지만, 처음 '서울영화집단'으로 시작됐던 기존 활동과는 다른 별개의 활동으로 본 것이다. '파랑새 사건'으로 연행됐으나 구속을 면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은 "홍기선과 이효인, 두 사람이 풀려난 이후 서울영상집단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나와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는 서울영상집단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며 이효인이 '신뢰를 잃었다'고 말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986년 당시 서울영화집단이 서울영상집단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새로 합류한 혜화동팀(배인정, 김대호, 주명진 등)이 홍기선과 이효인의 구속 기간 중 면회는 물론 활동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안이 필요한 중요한 문건 관리에 철두철미하지 않아 경찰 연행과정에서 압수됐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이 고초를 당한 점 등이 지적되면서 신뢰가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변재란은 "1987년 박종철 열사가 고문 살해당하면서 이정하가 박종철 추모 다큐멘터리 <우리는 너를 빼앗길 수 없다>를 제작할 때 나와 남인영(영화평론가, 동서대학교 교수)은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가족들 인터뷰를 담당했었으나, 다른 혜화동팀은 특별한 활동이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영상집단 이름을 넘겨주는 대신, 만일 탈퇴하는 우리가 추후 별도로 다시 활동하게 될 경우 '서울영화집단' 이름을 쓰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역사>에서 면회 온 사람들에 대해 "수감 당시 변재란과 이정하 등이 몇 번 면회를 왔다"며 "일일이 인사를 잘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정하와 변재란의 옥바라지가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변재란은 "장선우 감독과 함께 홍기선과 이효인의 면회를 간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홍기선, 이효인, 이정하, 변재란 4인의 탈퇴 후 서울영상집단 대표를 맡았던 배인정(노동자뉴스제작단 대표)은 "그들은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간 것이고 다른 단체(민족영화연구소)를 만들어서 활동했다"며 "그 이전부터 서울영상집단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었다"고 평가했다. 활동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분리됐다는 것이었다.
 
배인정은 "서울영상집단이 최초로 독립영화를 지향하는 영화운동가 단체였으나 결성 초기 주요 회원들은 영화제작 현장이나 충무로로 갔다"면서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독립영화 제작을 모색하며 만들었으나, 다른 나라의 영화운동을 소개하거나 우리나라에서의 독립영화에 관한 이론적 고민들을 정리 한 책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1983년 11월 학민사)을 발간한 일에서 멈춰버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몇 편의 독립영화 제작도 시도하긴 했으나, 시도에 그쳤을 뿐이었다"고 덧붙였다.

서울영상집단의 분화
 
서울영상집단을 탈퇴한 홍기선(감독)은 1988년 장산곶매 대표를 맡아 <오! 꿈의 나라>를 제작했고, 이효인은 1987년 이후 충무로의 제작현장으로 가서 연출부로 활동한다. 그러다가 1988년 UIP 직배영화 반대 투쟁이 일어났을 때 이정하와 함께 민족영화연구소(민영연)를 만든다. 변재란은 "당시 이효인과 이정하는 영화 비평 쪽과 이론적인 활동을 하고 싶어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영상집단도 별도의 분화 과정을 거쳤다. 1987년 배인정이 대표를 맡은 이후 남은 회원들은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 산하로 들어갔다가 1989년 노동운동과의 연계를 모색하며 탈퇴 후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이후 1990년 남인영(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과 홍형숙(감독) 등 일부 회원이 분리선언을 하면서 서울영상집단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이효인과 이정하는 1987년 영화책으로는 최초로 판매금지 처분을 받은 <레디고>(이정하 편집, 1987)를 펴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과 함께 레디고 2집인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이정하·이효인·전양준 편집, 1988)을 출간한다. 이효인은 "작은(독립)영화 등 비제도권에만 국한되지 않는 활동을 지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이효인과 이정하가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펴낸 영화이론서 <레디고>,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당시 <레디고>는 당국의 판매금지 처분을 받아 한동안 금서가 됐다.

이효인과 이정하가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과정에서 펴낸 영화이론서 <레디고>, 새로운 한국영화를 위하여>. 당시 <레디고>는 당국의 판매금지 처분을 받아 한동안 금서가 됐다. ⓒ 대학문화사,이론과실천

  
1987년 서울영상집단을 함께 탈퇴한 홍기선과 이효인 사이에도 이후 조금씩 거리가 생기게 된다. 제도권인 충무로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효인은 저서 <뉴웨이브와 작은역사>(가제, 2020년 출간 예정)에서 "출옥 후 이정하와 함께 유학에서 돌아온 지인을 자주 만났다"며 "누가 먼저 보자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주 '홍기선의 그동안 노고를 인정하는 무엇인가를 해서 그를 풀어줘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하곤 했다"고 밝혔다.
 
또한 "처음에 들을 땐 그 말을 호의로 받아들였는데, 후에는 그 말이 홍기선의 과거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 미래의 영역에서는 배제하고자 하는 의도가 들어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었다"며 "물론 그도 의식적으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다들 자신의 영역 구축이 필요했기에 그랬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효인은 "그것과는 별개로 이정하와는 더욱더 운동적, 인간적 차원에서 가까워지면서 홍기선과는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작은(독립)영화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고 생각해 충무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들은 홍기선 형은, 그답지 않게 섭섭하다고 말했다"면서 "어떻게 그런 중요한 일을 자신과 의논도 없이 결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으나, 물론 그 점은 미안하고 잘못했지만, 그때 나에게는 그와 그런 의논을 하기 싫었던 사정이 있었다"고 밝혔다.
  
충무로에 들어온 이효인은 연출부와 지미필름 기획실 등에서 활동한다. 이정하도 충무로 연출부와 영화 무크지 발간 등의 일을 하며 영화계 민주화 및 UIP 직배 등 주요 현안과 여러 일에 실무적으로 참여한다.
 
이들은 충무로 영화계에서의 경험과 세력 조성을 유지하면서 사회, 노동, 학생운동의 활발한 전개에 발맞추고자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데 민족영화연구소(민영연)의 출발이었다. 영상을 통한 운동적 기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이효인은 저서 <한국 뉴웨이브 영화>(가제, 2020년 출간 예정)에서 "1986년 '파랑새 사건'은 영화를 통한 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고, 또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독립영화계 내부 작은영화와 운동영화의 성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며 "민족영화연구소의 출발은 그러한 맥락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이었다"라고 밝혔다.
 
민족영화연구소
 
 1988년 9월 9일 민족영화연구소 창립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김규동 시인.

1988년 9월 9일 민족영화연구소 창립대회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는 김규동 시인. ⓒ 이수정 제공

 
민족영화연구소는 1988년 8월부터 활동을 시작해 9월 9일 북아현동 사무실에서 창립식을 가졌으며, 1990년까지 2년 정도 활동했다. 영상 제작과 보급 외에도 충무로의 영화법 개정 및 직배저지 운동에 참여하면서 영화계 전체와의 연대에 적극적이었다. 당시 미국 영화사의 직배라는 충무로 한국영화의 현안에 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함께 대응한 것이었다.
 
초기 회원은 이효인, 이정하, 이수정, 김재호, 구성주, 이상인 등이었다. 이수정(감독)은 "당시 창립식에 김규동 시인이 격려사를 했고, 홍기선(감독), 박광수(감독), 공수창(감독) 등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민영연은 <민족영화>라는 계간지를 통해 운동 방향에 대한 이론적 토대도 구축했다. 스크린쿼터사수투쟁이 활발했던 1999년~2006년 사이 한국영화의 정책과 이론가로 부상한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이때였다. 김응수(감독), 김준종(평창영화제 사무국장) 등도 민영연을 통해 영화운동에 뛰어든 경우였다.
 
1980년 전남대학교 재학시절 광주에서 5.18 민중항쟁을 직접 겪은 김혜준은 이효인을 재회한 것이 인연이 됐다. 1988년 재야운동단체인 서울민중연합에서 개설한 민족문화교실(4기 : 9월 1일 ~ 10월 24일)과 민족학교(7기 : 9월 16일 ~ 11월 8일)를 다니던 중에 민족문화교실의 영화 쪽 강사로 이효인이 출강한 것이다.
 
김혜준은 고등학교 동창생이 이효인의 대학 운동권 1년 후배여서, 이전에 부천역 근처 친구의 생계형 만화방과 중국집 집들이에서 우연히 인사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민족문화교실에서 강사와 수강생으로 다시 만나면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던 김혜준에게 삶의 전환점이 됐다.
 
김혜준은 "당시 미국 영주를 위한 비자를 1988년 6월에 이미 받은 상태였고. 미국에 계신 어머님과 형제들 곁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삶을 살 것이냐를 고민하던 시기였다"며 "이효인과의 재회가 결국 한국에 남기로 결심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1988년 UIP직배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영화연합

1988년 UIP직배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대학영화연합 ⓒ 이화여대 누에 제공

 
 1988년 충무로에서 벌어진 영화인들의 UIP 직배반대시위 현장. 메가폰을 든 사람이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1988년 충무로에서 벌어진 영화인들의 UIP 직배반대시위 현장. 메가폰을 든 사람이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 이수정 제공

 
당시 영화계는 직배 문제가 불거지며 1988년 8월 24일에 '영화법 개정을 위한 청년영화인협의회'가 만들어졌고, 9월 28일엔 '직배 저지와 영화진흥법 쟁취를 위한 영화인투쟁위원회'가 결성된 투쟁의 시기였다. 한국영화가 취약했던 시기라 당시 직배 시장을 허용하는 것은 국내 영화사들에게는 생존권 위협으로 작용하면서 반발이 커진 것이다.
 
한국영화는 박정희 군사독재가 등장한 1960년대 이후 외국영화 수입을 위해 의무적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외국영화라는 것이 대부분 미국 할리우드 영화였지만 연간 3~4편 이상 제작해야 외국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다. 외국영화는 당시 흥행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던 시기였다.
 
국내 영화사를 거치지 않고 미국 할리우드 영화사의 직접 배급을 허용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영화계는 거세게 반발했다. 충무로 영화계와 함께 1985년 이후 늘어난 대학영화서클도 나서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재야에서 활동하던 영화운동 세력과 제도권인 충무로의 연대 투쟁이었다.
 
김혜준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민족영화연구소를 막 출범시킨 이효인, 이정하 두 사람은 이 투쟁의 한 가운데서 핵심 기획자 역할을 맡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효인에 따르면 민족영화연구소는 창립 시기부터 충무로 영화계를 배척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통일 전선의 대상으로 삼는 강령을 갖고 있었다. 또 일련의 활동을 통하여 독자적인 역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제도권 내의 활동은 시도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후 이들은 미국 직배저지 투쟁에서 일부 충무로 영화인들과의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충무로를 제도권으로, 영화운동권을 비제도권으로 명명한다. 충무로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모두를 선입견 없이 연대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충무로 밖의 영화운동을 비제도권으로 명명함으로써 충무로 제작 현장에 속하지 않은 학계, 비평계, 독립영화계 구성원들과 정치적 혹은 영화적 경향을 구분하지 않고 연대하겠다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명했다.
 
이효인은 "이 시기의 영화운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1987년 민주화대투쟁 이후부터 3당 합당(1991.1.22.)과 소련의 붕괴(1991.12.26.) 시기까지가 마치 혁명전야 같았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며 "1987년 이후 약 4~5년 동안 '작은영화'로 아우를 수 있는 청년 영화진영은 '영화운동' 진영의 논리에 부분적으로 찬성하면서 함께 했다"고 밝혔다.
 
 <민족영화2>

<민족영화2> ⓒ 성하훈

 
이정하는 1990년 <민족영화2>에 실린 '현 단계 영화운동의 전망'에 대한 대담에서 1980년대의 영화운동에 대해 "변혁적인 영화운동의 범주를 스스로 비합법으로 제한해 운신의 폭이 좁았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영화운동의 과제가 식민지 매판영화의 척결과 영화법 개폐 등 많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영화인 전체를 적으로 규정하는 배타성을 갖고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다소 타협적인 운동방식"이었다고 비판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은 그 이전 영화운동에 뛰어든 청년영화인들의 충무로 활동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충무로로 가는 게 변절과 투항이라는 시각도 있었으나, 민영연은 영화운동이 충무로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충무로와의 연대를 주창한 것이었다. 변재란은 "영화운동의 충무로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새로운 전선을 구축했던 것"이라며 "그만큼 활동이 폭이 넓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민영연에서 활동했던 김준종(프로듀서,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사무국장)은 "1989년 2월 군대서 제대한 후 참석한 세미나를 통해서 민족영화연구소를 만났다"며 "당시 이효인과 이정하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김혜준의 경우는 문화운동으로 영화에 접근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민족영화연구소는 이론을 중심으로 했고, 한겨레영화제작소는 영화제작에 중심을 뒀다"고면서 "당시 봉천동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밤새 비디오를 복사했다"고 회고했다.
 
1989년 당시는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곳곳에서 민주노조가 생겨나며 교육용으로 볼 수 있는 비디오가 많이 요구됐던 시기였다. 재야단체나 시민단체 대학 총학생회 등에서 필요로 했다, 관심이 뜨거운 현안과 관련해서는 수백 개 정도를 복사해서 판매했고, 대여도 꾸준히 이뤄지면서 활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김혜준은 민족영화연구소 활동을 한 이유에 대해 "대중과의 소통 측면에서, 공연 보다 영화가 훨씬 효과적인 매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당시 민영연은 <노동하는 시민을 위한 세계사>를 만들고 있었는데, 목욕탕 건물 지하 작업실에서 더빙을 하고 있던 연구소 구성원들이 저를 바라보는 표정이 상당히 특별했다"고 회상했다.
 
한겨레영화제작소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 회원들.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 회원들. ⓒ 이수정 제공

 
민영연은 1989년 5월 영화 제작을 중심에 둔 '한겨레영화제작소'를 따로 설치해 운영한다. 이에 대해 이효인은 "장산곶매의 영화 <오 꿈의 나라> 제작을 의식한 것이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정치적 탄압에 대한 방책이었다"고 밝혔다.
 
민영연은 정보기관의 사찰로 짐작되는 징후가 빈번해지면서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 제작 관련 장비를 북아현동의 공간이 아닌 봉천동 공간으로 옮길 정도였는데, 훗날 회원 중 한 명인 배인오(본명 백흥용)는 1993년 '안기부 프락치 양심선언'을 하게 된다.
 
이효인은 "배인오가 언제부터 프락치 활동을 한 것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이 사건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당시 민영연 회원들의 누군가가 프락치일 수 있다는 불안이 과민 반응만은 아니었다"고 술회했다.
 
영화운동가로 위장해 활동하던 배인오(본명 백흥용)는 1994년 독일 베를린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프락치로 활동했다고 양심선언을 한다. 이후 국내로 오지 않고 1998년 평양으로 들어가면서 파장이 일었다. 영화운동에 대한 정보기관의 감시와 사찰이 있었음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한겨레영화제작소는 이정하가 대표를 맡았고, 연세대 영화패 초기 회원인 이수정(감독)이 제작국장으로 활동하면서 16mm 필름 작품 <하늘아래 방한칸>을 연출했다. 30분 단편 극영화였던 <하늘아래 방한칸>은 당시 1988 서울올림픽 이후 전세값 폭등으로 한 해 20명 정도 자살한 사회적 배경을 토대로 한 영화였다.
 
당시 미아리 달동네(지금은 아파트촌)에서 촬영했고, 전세값 인상으로 내몰릴 위기에 처한 공사판 일용노동자 가장이 자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영연 회원이었던 이유미가 각본을 썼고, 김준종(프로듀서, 평창영화제 사무국장)이 조연출, 김재호 촬영, 대학영화연합 2대 회장이었던 김인수(감독)가 촬영부로 참여했다. 제작비 500만 원은 민영연의 비디오 판매 수익으로 마련했다.
 
 1989년 한겨레영화제작소 <하늘아래 방한칸> 촬영 현장

1989년 한겨레영화제작소 <하늘아래 방한칸> 촬영 현장 ⓒ 이수정 제공

 
이수정(감독)은 "초기에 민영연 청년영화학교 출신 이창원(제작자), 김응수(감독)도 함께 활동했고, 김준종도 이 시기에 들어왔다"고 말했다. 이어 "1989년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을 촬영하러 울산에 내려가기도 했다"면서 "봉천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한 데는 당국의 영화운동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연구와 제작을 분리하고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정보기관 프락치로 밝혀진 배인오(백흥용)와는 1990년 민중당 창당을 같이 촬영했다"라고 기억했다.
 
이수정은 대학 졸업 후 1987년 한국영화아카데미(4기)에 입학해 다음해인 1988년 임권택 감독 연출부로 들어간다. 그러나 "연출부 내 위계 폭력을 계기로 충무로를 떠나게 돼 민영연 창립부터 함께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인과 이창원은 1989년 다큐멘터리 영화 <깡순이, 슈어 프로덕츠 노동자>를 제작했다. 1974년 미국인에 의해 설립된 다국적 기업인 슈어 프로덕츠가 1988년 일방적인 폐업신고를 하자 노동자들이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였다. 이상인과 이창원은 노동자들과 2개월간 숙식을 같이하면서 농성 노동자 중 막내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노동자들의 싸움과 내면의 정서를 카메라에 담았다.

한겨레영화제작소 시절 속보 영상 제작도 주요활동 중 하나였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광주의 아들, 이철규를 살려내라>였다. 1989년 5월 10일, 5.18 9주기를 앞두고 경찰의 수배를 받던 조선대생 이철규가 광주의 저수지에 변사체로 떠오르게 된다. 노태우 군사독재에서 발생한 의문사 사건으로 온갖 의혹이 제기되면 파장이 컸다. 한겨레영화제작소는 당시 의문의 죽음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역할을 맡았다.
 
김혜준은 "한겨레영화제작소 동료였던 민병진 감독과 광주 현지 취재를 갔었다"면서 "제작 경험이 거의 없어서, 촬영 보조 역할을 하는 정도였는데, 속보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명동성당 들머리 등에서 야외상영을 했다"고 말했다.
 
이수정은 "이철규 비디오는 당시 언론에 거의 보도가 안 된 상황에서 긴급하게 세상에 알려야 했던 사안이라 주검 사진 등을 가지고 밤에 쥐가 나오는 봉천동 사무실에서 혼자서 덜덜 떨면서 밤샘 편집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민병진과 함께 밤에 대학에 담 넘어 들어가 방송반 후배 성우를 통해 녹음한 후, 비밀 프로덕션에서 비디오테이프 300개 정도를 복사해서 전국 배포했다"고 회상했다.
 
 시나리오 회의를 하고 있는 한겨레영화제작소.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수정 감독

시나리오 회의를 하고 있는 한겨레영화제작소.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수정 감독 ⓒ 이수정 제공

 
청년영화학교도 민영연의 중요한 사업이었다. 이수정은 "야심차게 시작한 청년영화학교에 관심들이 많았고, 작고한 박광정 배우도 학생으로 왔었다"라며 "실습 작품에는 연세대 영화패에서 활동했던 후배 김한민(감독, <명량>)도 청년영화학교에서 제작한 단편 극영화에 연출인가 출연자로 참여했다"고 기억했다.
 
김혜준은 "청년영화학교는 1989년 여름방학 때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가 함께 준비한 행사로 신촌 우리마당(대표 김기종) 공간에서 열렸다"며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1989년 5월 28일 출범하고, 7월 3일 정부 당국에서 가입교사들을 해직시키겠다고 방침을 정한 시기여서 한겨레영화제작소에서는 연대활동 차원으로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배인오(본명 백흥용)와 연세대 재학 시절의 김한민(감독. <명량>) 등을 만난 것도 청년영화학교였다"고 덧붙였다.
 
한겨레영화제작소의 마지막 작업은 전태일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제작한 <어머니>였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회갑과 전태일 기념사업회 20주년을 기념한 영상으로 이수정이 연출과 촬영, 편집을 홀로 담당했다.
 
이후 이수정은 1994년부터 방송 다큐 연출을 거쳐 1997년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인 이정향(감독)의 데뷔작인 <미술관 옆 동물원> 프로듀서를 맡았다. 몇몇 저예산 독립영화의 프로듀서를 하며 극영화 연출을 준비하다가, 2011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깔깔깔 희망버스>를 연출했다.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가 해소로 방향을 정했던 1989년 12월 임시총회 저료. 보고서 등이 묶인 문건의 첫 페이지다.

민족영화연구소와 한겨레영화제작소가 해소로 방향을 정했던 1989년 12월 임시총회 저료. 보고서 등이 묶인 문건의 첫 페이지다. ⓒ 이효인 제공

 
민영연은 1988년 이후 2년 정도 활동하다 1990년 해소의 길로 들어선다. 이효인은 "총 회원이 30여 명에 이르렀고 비대해진 조직을 초기의 운동 논리와 조직 운영 원리에 따라 유지하기는 힘든 상태에서 세계사적 전환과 국내 상황의 변화를 맞으면서 '해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또한 "1989년 12월 27~28일 1박 2일 동안 열린 임시 총회에서 '결정서 채택'이라는 형식으로, 각자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기존의 영화운동 논리를 유지하며 활동한다는 맥락에서 '해산'이 아닌 '해소'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며 "1기 창립회원들은 10명이었는데, 1990년 중반에 접어들어 이들은 운동적 입장을 유지하면서 각 개인의 진로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쉽게도 그 결정서는 토론을 통하여 당일 작성되어서 현재 남아 있지 않고, 사실 '임시총회'라고 명명했지만 '비상총회'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효인은 "이후 이들의 활동은 일의 성격에 따라 작은 군집의 형태로 의견 교류나 공동 활동 등으로 이루어지는데, 엄밀하게 말해서 일관된 노선을 유지하거나 행동 통일을 꾀한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사실 해소라고 표현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해체되고 만 것이었다"고 정리했다.
 
민영연에서 활동했던 대표적 인사들은 이효인, 이정하, 이수정, 김재호(촬영감독), 구성주(작고, <그는 나에게 지타를 아느냐고 물었다> 감독), 이상인(한양대 교수, <어머니, 당신의 아들> 감독), 민병진 (<우리 이웃의 범죄> 감독), 김소양, 이유미,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김준종(프로듀서, 평창국제평화영화제 사무국장), 김응수(<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감독), 이창원(제작자) 등이다.
 
독립영화협의회 출범  

민영연은 해소되기 전 영화마당우리 등과 함께 한국독립영화협의회를 출범시킨다. 1990년 1월 31일 결성된 독립영화협의회는 영화운동 단체들의 첫 연대조직이었다. 민족영화연구소(이효인 대표), 아리랑(윤석일 대표), 영화공동체(낭희섭, 최용배 공동대표), 영화마당우리(김영진 대표), 우리마당 영화패(민병진 대표), 한겨레영화제작소(이정하 대표) 등 비제도권 6개 단체가 영화운동의 집단적 의미를 갖고 독립영화를 지향하는 단체를 결성한 것이었다. 중앙의장은 한겨레영화제작소 이정하가 맡았다.
 
한국독립영화협의회는 1980년 이후 영화운동의 첫 연대기구라는 것과 함께 독립영화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단체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소형영화, 작은영화, 열린영화 등의 명칭이 혼재돼 사용되던 시기에 독립영화를 단체 이름으로 쓰면서 이후 독립영화로 통일된다.
 
 독립영화협의회 회원들.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 네번째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여섯번째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일곱번째 김준종(평창국제평화영화제 사무국장), 아랫줄 왼족에서 네번째 이수정(감독). 오른쪽 끝 최용배(청어람 대표)

독립영화협의회 회원들. 윗줄 왼쪽에서 두번째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 네번째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여섯번째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일곱번째 김준종(평창국제평화영화제 사무국장), 아랫줄 왼족에서 네번째 이수정(감독). 오른쪽 끝 최용배(청어람 대표) ⓒ 이수정 제공

 
1990년 한국독립영화협의회의 결성선언문을 보면 당시 이들의 지향했던 영화운동의 방향이 담겨 있다. '독립영화=민족·민중영화'라는 점이 강조되고 충무로와의 연대에도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국독립영화협의회는 출범을 알리며 '한국영화는 진실한 민족·민중영화가 돼야 하고 독립영화인들은 민중들의 계급적 정서와 과학적 세계관을 풍부한 영화예술로 구현하고자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다음으로 '한국영화운동은 영화가 민중이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직접적인 예술이 되기 위해 대중적 보급의 길을 개척하는 임무도 부여받고 있다'며 '독립영화인들은 상업적 배급망 외의 새로운 대중적 보급망을 꾸리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어 '한국 영화운동의 주역은 제도권 내의 양심적, 진보적 영화인들과 비제도권 독립영화인들이라고 정의하면서 우리 독립영화인들은 제도권 내의 영화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악수를 청하고 같이 손잡고 싸워나가는 데 앞장서고자 한다'고 밝혔다.
 
끝으로 '한국영화는 민족적인 영화예술이 되어야 한다'며 '독립영화인들은 조직적인 창작과 보급, 그리고 연구를 병행하여 참으로 우리 것인 영화미학과 창작방법론을 세워나가고자 한다'는 지향점을 제시했다.
 
그러나 한국독립영화협의회는 민영연 해소 이후 영화단체 연합 성격에서 개인들의 참여로 바뀌게 된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1년 사이 영화운동을 지향하는 단체들의 참여 부족과 서울영상집단과 장산곶매 등이 연대한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 분화, 사회주의권 붕괴, 민족영화연구소 해소 등으로 단체가 아닌 개인들의 참여로 바뀌게 된 것"이라며 "이름도 한국을 뺀 독립영화협의회로 변경하고 제작분과, 연구교육분과, 보급사업 분과 등으로 재편됐다고 말했다.
 
분과체제 활동으로 바뀌면서 1991년 김동원(감독, 푸른영상 대표)이 2대 대표를 맡았고, 독립영화 배급을 모색하기 위해 '영화공동체'를 만들었던 낭희섭이 1992년 3대 대표를 맡은 이후 2020년 현재까지 독립영화워크숍 활동을 중심으로 긴 시간을 이어 오고 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시작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노동자뉴스'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노동자뉴스' ⓒ 노동자뉴스제작단 제공

 
배인정이 대표를 맡았던 서울영상집단은 1987년 민중문화운동연합 산하로 들어갔다가 1년 만에 탈퇴해 다시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방향을 전환한다. 장산곶매를 나온 대학영화연합 출신 '들풀'과 함께 한시적 조직을 꾸리게 되는데, 노동자뉴스제작단(노뉴단)의 시작이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재학하며 학생운동을 했던 배인정은 1982년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같은 학과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을 통해 진보적 영화 활동을 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입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남인영(동서대 교수) 둥과 함께 별도로 활동하다가 1986년 서울영화집단이 서울영상집단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다시 합류했고, '파랑새 사건' 이후 홍기선 이효인 변재란 이정하가 분리선언을 하면서 서울영상집단 대표를 맡게된다.
 
배인정은 "1987년 이후 서울영상집단의 상황은 썩 좋지 못했다"며 서울영상집단은 최초로 독립영화를 지향하는, 7년 된 영화운동가 단체였으나 결성 초기 주요 회원들은 영화제작 현장이나 충무로로 갔다"고 회상했다.
 
또 "영화를 만드는 데는 너무 많은 돈과, 기술과 사람도 필요했는데 사실 돈, 기술, 사람, 다 핑계였을 것이고, 우리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이어 "뭘 해야 하는지를 알았던 사람들은 뛰쳐나가서 민족영화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했다"며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지리멸렬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해체는 시간문제였을 때였다"고 덧붙였다.
 
배인정은 서울영화집단 초기부터 활동해온 홍기선(감독)에 대해서는 "조직을 키우는 데는 큰 관심이 없었고, 자기 작품을 만드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들풀'이 제작한 <흩어지면 죽는다> 한 장면

'들풀'이 제작한 <흩어지면 죽는다> 한 장면 ⓒ 노동자뉴스제작단

 
새로운 활로가 모색된 것은 1988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 이후였다. 배인정은 사회변혁노동자당 기관지 <변혁정치>에 연재한 '노뉴단이야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꽤 추웠던 1988년 12월 말쯤에 서울영상집단의 대표로 있던 나와 서울대 영화서클 얄라성 출신 최원석 한경훈 등 몇몇이 종로의 한 술집에서 만났다. 얄라성 몇몇 회원들이 당시 현대중공업 투쟁을 2~3개월간 촬영했고, 아직 투쟁은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작품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들풀'이라는 팀으로 현대중공업 128일 투쟁에 관한 <흩어지면 죽는다>를 만들었다."
 
'들풀'의 멤버는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신종관, 민경철 등이었다. 신종관은 "'들풀'은 대학영화연합 OB팀이었다"며 "장산곶매에서 나온 이후 홍대입구 쪽에 사무실을 얻었고, 현대중공업 파업투쟁 비디오를 제작해 배급하고 노동자뉴스제작팀에 합류해 4호까지 만들다가 다시 장산곶매에 합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배인정은 '들풀'에 대해 "당시에 필름으로 만든 영화에 익숙한 영화운동가들과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자고 일어나면 터져 나오는 노동자 투쟁을 빨리 촬영하고 빨리 편집해서 빨리 노동자에게 보여주는 것만 생각했다"며 "독립영화도 아닌 것이 예술영화도 아닌 것이, 굳이 말하자면 방송에서 하는 뉴스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뉴스를 만들고 싶어 했고, 그 일을 서울영상집단에 함께 하자고 했다"고 밝혔다. 얄라셩 출신들은 이후 여러 명이 합류하며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은 서울영상집단과 '들풀'에 더해 얄라셩 출신 이상빈이 활동하던 '새힘'이 연대했다. 1987년 12월 대선 부정선거 논란으로 발생했던 구로구청 농성에 합류해 이를 촬영한 후 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했던 이상빈은 "1988년 '새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면서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며 "3개의 프로덕션이 합쳐서 임시로 공동작업을 했고, 1988년 말에 노동자뉴스가 도입되면서 할 일이 많아졌다. 기자재도 달라 한 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상빈은 또한 "노동자뉴스 3호 제작까지 참여했고, 1989년 연작으로 구상한 <통일로 가는 길>을 시작으로 1991년까지 3~4편의 다큐멘터리 제작 작업에 참여했다"고 덧붙였다,
 
1989년 여름 노뉴단 설립 7개월이 지날 무렵에는 얄라셩 출신 김명준(현 미디액트 소장)이 합류한다. 81학번인 김명준은 대학 재학시절 얄라셩의 운동적 셩향을 강화시킨 주역 중 한 명이었다.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이 철수한 1984년 대학 4학년 때 알랴셩에서 8mm 노동영화 <얼어붙은 땀방울> 등을 제작해 노동운동 등 사회적 연대를 추구하기도 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에 합류한 이후 1992년 대표를 맡아 2006년까지 활동을 주도했다.
 
김명준은 "1985년 대학 졸업 직후 군에 입대하기 전 서울영상집단에서 잠시 활동한 적이 있었다"며 " 배인정 대표도 아는 사이였고 얄라셩 후배들도 여럿 활동하고 있을 때여서 1988년 제대 후 노동자뉴스제작단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16mm 필름 대체한 비디오카메라  
 
 노동자뉴스제작단. 윗줄 왼쪽 첫번째 김명준(미디액트 소장), 오른쪽 끝 태준식(감독), 아랫줄 왼쪽 첫번쩨 배인정 대표

노동자뉴스제작단. 윗줄 왼쪽 첫번째 김명준(미디액트 소장), 오른쪽 끝 태준식(감독), 아랫줄 왼쪽 첫번쩨 배인정 대표 ⓒ 노동자뉴스제작단

  
당시 노동자뉴스제작단이 힘을 얻게 된 것은 비디오카메라 덕분이었다. 김명준은 2000년 격월간지 <삶이 보이는 창>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 이후 대중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교육에 대한 수요가 일어나고, 상영공간의 확보가 이루어졌으며. 또 나름대로 준비해 오던 주체들이 있었다"면서 "제작이 용이하고 기동성과 저렴함을 갖춘 비디오 매체의 발전과 비디오 대여라는 새로운 문화적 현상들이 노뉴단 활동의 받침이 됐다"고 말했다.
 
배인정은 "뭔가 새로운 변화의 징조가 잡히기 시작했던 게 88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였던 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서도 아니고, 10만의 노동자들이 같은 목소리로 요구하고 혈서를 쓰고 행진하는 것에 감동해서도 아니었고, 이날 대회를 촬영하는데 사용한 비디오 카메라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필름이 아닌 16밀리 테이프를 넣어서 사물을 기록하는 비디오카메라는, 1988년 당시 나온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매체였다. '서울영상집단'이 처음으로 필름이 아닌 비디오로를 활용해 전국노동자대회를 촬영한 것이다.
 
한겨레영화제작소 대표였던 이정하는 이화여대 영화서클 누에가 1989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운동의 함성>에서 "비디오 보급율이 15%에 이른 것은 8mm 영사기가 그만큼 보급된 것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배인정에 따르면 이날 대회를 촬영한 서울영상집단의 한 회원은 촬영하고 싶은 것을 한 테이프에 2시간이나 담아낼 수 있었다. 모자란 부분은 다시 테이프를 갈아서 1시간을 더 담아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비디오데크가 있는 곳에서 낮에 촬영한 영상을 곧바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과 흥분에 휩싸였다. 필름으로는 생각지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필름으로 촬영할 경우 초 단위 분 단위로 계산해서 자유롭게 3시간을 찍을 수 없었고, 촬영하고 나서 며칠간의 인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에 낮에 찍은 것을 당일 저녁에 볼 수 없었다.
 
배인정은 "이 비디오 매체로 영화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이 바로 들풀이었고, 그들이 만든 작품 현대중공업 파업을 담은 다큐 <흩어지면 죽는다>가 비디오테이프로 만든 최초의 다큐멘터리이고 노동영상이었다"고 말했다.
 
비디오 매체로 작업의 전 과정을 이미 경험했던 '들풀'은 서울영상집단에게 노동자투쟁을 다룬 뉴스 작업을 제안했고, 3개월 뒤에 비디오로 만든 <노동자뉴스 제1호>가 나오게 된다. 노동현장에서 반응은 거의 폭발적이었다.
 
배인정은 "<노동자뉴스 제1호>는 오랜 시간 뭘 해야 할지 답답한 시간을 보낸 서울영상집단 회원들에게, 앞으로 뭘 해야 할지를 상당히 극적으로 알려준 셈이었으며 적어도 내게는 필름에게 굿바이~라고 말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은 4호를 끝으로 들풀 등과 함께한 한시적 활동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배인정이 노동자뉴스제작단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서울영상집단은 다시 분리된다. 배인정은 "한시적인 1년의 활동이 끝난 후 계속 이 작업을 하고 싶어 했으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다"며 "관점의 차이를 보인 남인영, 홍형숙, 김양래, 주명진, 신종수 등이 나갔고 이들이 서울영상집단 이름을 쓰고 싶다고 해서 넘겨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두 개의 파업> 한 장면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두 개의 파업> 한 장면 ⓒ 노동자뉴스제작단

 
이후 노동자뉴스제작단에는 서울지역대학영화패연석회의에서 활동하던 태준식(다큐멘터리 감독)과 허은광(영화평론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무국장), 박정미(감독) 등이 참여했다. 배인정과 허은광은 1999년 현대중공업 노조 투쟁사를 다룬 <두 개의 파업>을 공동연출했다.
 
배인정은 "당시 노뉴단 활동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찾아오고는 했다"며 "태준식도 그렇게 합류했고, <두 개의 파업>은 허은광이 편집을 담당했으나 공동연출로 이름을 올리게 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1995년부터 2002년까지 활동했던 태준식(감독)은 "1990년대 초반 영화하는 학생들한테 노뉴단은 꽤 유의미한 활동공간으로 알려져 있었다"면서 "서울영상집단 연구팀에 있던 이대봉 선배가 추천을 해준 것도 있고, 허은광이 먼저 노뉴단에 들어가 있다가 군대에 간 사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 말 '서울영상집단'과 '노뉴단' 등은 장산곶매 <파업전야> 상영 투쟁을 마무리하며 향후 영화운동전망을 모색하기 위해 노동자영화대표자회의라는 연대기구를 결성한다. 독립영화협의회에 이은 영화운동단체들의 협의체였는데, 독립영화운동단체가 양분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노동자문예운동연합 영화분과(11월 13일)', '바리터' 등 5개 단체가 참여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해체된다. 전문영역별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영화이론 및 정책연구를 하는 '정책분과', 시나리오 작가들이 모인 '시나리오분과', 서울영상집단과 바리터가 결성한 '다큐멘터리 작가회의' 등의 단위로 활동했으나, 대표자회의 위상과 활동 방향에 대한 논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성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 이후 10년을 경과한 영화운동은 1990년을 지나면서 폭이 더 넓어졌고, 노동운동과 연대를 통해 필름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분화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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