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하늘을 찌를 만했다. 장동 김씨로도 불린 이 집안은 하나의 집권당을 이루며 조선 정치를 좌지우지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트릴 정도로 19세기 전반기 이 가문의 위세는 대단했다.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에서는 안동 김씨들이 흥선군 이하응(전광렬 분)같은 왕족들을 불러놓고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장면이 자주 나타난다. 상당히 과장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안동 김씨의 권세를 반영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랬던 안동 김씨의 세도가 철종 임금의 죽음과 함께 갑자기 땅바닥으로 추락했다. 1864년의 일이었다. 교과서나 백과사전들에는 이것이 1863년의 일로 적혀 있다. 일례로, 2019년 11월 교육부 검정을 통과한 동아출판의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1863년 아들이 없었던 철종을 이어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하지만, 음력으로 철종 14년 12월 8일자 <철종실록> 및 고종 즉위년 12월 8일자 <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숨을 거둔 날짜는 음력으로 경진년 12월 8일, 양력으로 1864년 1월 16일이다.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 대조전. ⓒ 김종성

 
실록 날짜가 음력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탓에 12월 8일을 양력으로 착각하고 이를 근거로 '철종이 1863년 12월 8일 사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착오가 교과서 집필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등극한 것은 1863년이 아니라 1864년이므로 이에 따라 교과서도 수정돼야 한다.
 
안동 김씨는 총 3차례 집권했다. 정조의 아들 순조 때인 1803~1827년, 순조 후반부터 헌종 전반인 1830~1840년, 철종시대인 1849~1864년 기간이 안동 김씨 집권기다. 이 가문이 정권을 확보한 명분은 왕실 외척 즉 '순조의 처가'라는 점, '순조를 부탁하는 정조의 유지가 있었다'는 점, '안동 김씨인 순원왕후가 헌종시대 및 철종시대 초반에 수렴청정(대리통치)을 했다'는 점 등이다.
 
이를 발판으로 세도를 누리던 안동 김씨는 1864년 1월 16일 철종 사망과 함께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철종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풍양 조씨인 신정왕후가 비상대권을 발휘해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을 차기 주상으로 옹립했다. 그런 뒤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에 들어감에 따라 안동 김씨는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됐다.
 
풍양 조씨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처가라는 점을 근거로 순조 및 헌종 때 각각 1차례씩 정권을 획득했다. 이 가문을 대표하는 신정왕후가 12세로 등극한 어린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실시하는 동시에, 자기 권력의 일부를 떼어 흥선대원군을 섭정에 임명했다. 이에 따라 '고종의 왕권' 위에 '신정왕후의 수렴청정권'과 '흥선군의 섭정권'이 존재하는 이중 구조가 출현하게 됐다.
 
<바람과 구름과 비>를 비롯한 거의 모든 사극은 고종 즉위 이전의 흥선군이 안동 김씨 앞에서 설설 기었던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1933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김동인의 <운현궁>이 조장한 역사왜곡에 입각한 것이다.
 
소설 <운현궁>은 흥선군을 상갓집 개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의 흥선군은 모범적인 종친으로서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고종이 태어나기 전부터 '서운관 터(운현궁)에서 성인이 나실 것'이라는 노래도 민간에 널리 퍼졌다.
 
이랬기 때문에, 아무리 안동 김씨일지라도 흥선군을 함부로 다룰 수는 없었다. 안동 김씨의 권력은 왕실과의 인연을 전제로 한 것이기에, 왕실을 무시하고서는 안동 김씨의 권세가 성립할 수 없었다.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 TV조선

 
드라마의 묘사와 달리 흥선군의 지위가 단단했다는 점은, 신정왕후가 수렴청정권 일부를 떼어내 흥선군을 섭정으로 만든 동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정왕후의 친정인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의 전성기인 철종시대에 많이 약해졌다. 그래서 신정왕후는 풍양 조씨의 힘만으로는 안동 김씨를 상대하기 힘들었다.
 
가장 존경받는 왕실 종친인 흥선군과 제휴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를 무기로 왕족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게 신정왕후의 의도였다. 이런 신정왕후의 구상이 풍양 조씨와 이씨 왕실의 연합체인 고종 정권을 출범시켰던 것이다.
 
이 연합의 주도권은 처음에는 신정왕후 쪽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얼마 안 가 흥선군에게 넘어가고 만다. 아들의 즉위 뒤에 흥선대원군으로 격상된 그는 자신에게 부여된 합법적 권위에 더해 타고난 정치적 의지 및 수완을 활용해 권력을 극대화해 나갔다.
 
흥선대원군의 권력은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는 물론이고 안동 김씨도 능가했고, 이것은 아들 고종의 지위를 안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왕권이 오랜 만에 되살아나면서 순조·헌종·철종 3대를 풍미했던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됐다. 결과적으로 보면,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는 흥선대원군의 왕권 강화를 돕는 조연에 불과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고종 즉위 이후로 왕실의 권력은, 왕권이 강력한 편이었던 숙종·경종·영조·정조 시대와 비교할 때 엇비슷했다고도 볼 수 있고 더 강했다고도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등장은 1800년 정조 사망과 함께 위축됐던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순조·헌종·철종 같은 무기력한 왕들이 내심 꿈꿨던 왕권 강화가 이 부자의 등장에 의해 손쉽게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정조 사후 64년 만에 왕권이 회복되는 이 중대 사건의 원동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흥선군의 수완은 결코 아니었다. 흥선군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나긴 했지만, 신정왕후가 섭정으로 임명해주지 않았다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흥선군은 권력이 주어지면 그것을 극대화할 능력은 있어도, 혁명이나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람들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낼 만한 역량은 없었다. 안동 김씨를 싫어하는 신정왕후가 철종 사망 당시에 대왕대비 지위에 있지 않았다면, 또 신정왕후가 흥선군 부자에게 호감을 갖지 않았다면, 흥선군은 대원군이 아닌 그냥 군(君)으로 인생을 마쳤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64년간의 세도정치를 끝낸 결정적 요인은 '신정왕후가 철종시대의 대왕대비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TV조선 드라마 <바람과 구름과 비>의 한 장면 ⓒ TV조선

 
신정왕후를 그 위치로 보낸 인물이 있다. 바로, 시아버지 순조다.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당시 10세인 순조는 법적 증조모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게 됐다. 이때부터 3년간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가 세도가문이 됐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는 순조의 처가인 안동 김씨가 왕실과의 인연을 고리로 세도가문이 됐다.
 
순조는 세도가문에 의해 왕권이 억압당하는 현실이 싫었다. 그는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자기 힘으로는 힘들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들 효명세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순조는 그것을 위해 꺼내든 카드는 크게 2가지다. 첫 번째 카드는, 유력 가문 중 하나인 풍양 조씨를 효명세자와 연결해주는 것이었다. 1819년에 신정왕후(11세)와 효명세자(10세)를 결혼시킨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풍양 조씨를 또 다른 왕실 사돈으로 만들고 이 가문을 앞세워 안동 김씨를 견제하는 이이제이 전략을 구상했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는 협력 관계에 있었다.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의 우위를 인정하면서 협조를 제공하던 때였다. 그래서 풍양 조씨는 안동 김씨의 견제를 받지 않고 왕실 외척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두 번째 카드는 1827년부터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었다. 실질적 군주의 지위를 효명세자에게 부여한 뒤, 효명세자가 풍양 조씨의 지원 하에 안동 김씨를 견제해주길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카드는 3년 만에 무위로 끝났다. 1830년에 효명세자가 21세 나이로 급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번째 카드는 그렇지 않았다. 이 카드는 끝까지 살아남았다. 남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입지가 크게 좁아진 신정왕후는 1834년에 아들 헌종이 할아버지 순조를 이어 왕이 되면서 처지가 조금씩 달라졌다. 아들이 왕이 되고 남편이 익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신정왕후는 왕대비로 격상됐다. 그 뒤 철종시대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안동 김씨)가 죽자, 신정왕후는 대왕대비로 격상됐다. 안동 김씨 치하에서 신정왕후가 서서히 지위를 높여갔던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신정왕후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안동 김씨 치하에서 힘없이 살았던 신정왕후는 끝까지 버틴 끝에 56세 때 흥선군과 연합해 안동 김씨의 세도를 끝낼 수 있었다. 신정왕후의 친정을 내세워 안동 김씨를 약화시키고자 했던 순조의 구상이 이렇게 뒤늦게나마 성취됐다.
 
순조의 진짜 의도는 안동 김씨를 약화시키는 데만 있지 않았다. 이를 통해 왕실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 의도 역시 신정왕후의 조력으로 성취됐다. 신정왕후가 흥선군을 섭정으로 임명하더니 머지않아 흥선대원군이 신정왕후와 풍양 조씨마저 약화시키고 왕실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다.
 
순조의 최종 의도는 그렇게 실현됐다. 11세 된 신정왕후를 며느리로 들여 안동 김씨를 견제하고 왕실 위상을 되찾고자 했던 1819년 당시 순조의 의도가, 45년 뒤인 1864년부터 신정왕후의 조력에 의해 순차적으로 성취됐다. 순조가 던진 '신의 한 수'가 45년 뒤에 세상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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