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몇 차례에 걸쳐 한국영화운동에 대해 돌아본다.[기자말]
 1988년 <오! 꿈의 나라>를 촬영하고 있는 장산곶매

1988년 <오! 꿈의 나라>를 촬영하고 있는 장산곶매 ⓒ 장산곶매 제공

 
'장산곶매'가 제작해 1989년 1월 개봉한 광주영화 <오! 꿈의 나라>의 흥행은 영화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은 중요한 계기였다. 당시 제도권을 상징하는 충무로를 벗어난 재야의 민중 영화도 관객의 호응을 받고 성공할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흥행 수익을 내면서 8mm/16mm 단편영화 중심이었던 영화운동의 흐름이 장편영화로 발전하는데 동력으로 작용한다.
 
충무로 상업영화와 달리 운동적 성격이 강했던 것도 장산곶매의 차기작에 탄력이 됐다. <오! 꿈의 나라> 촬영을 담당했던 오정옥(촬영감독)은 "당시 제작에 참여한 회원들이 월급이나 수당을 받거나 수익을 따로 분배하지 않았다"며 "진행비만 받고 움직였기 때문에 이후 다른 작품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의 꿈 키우게 한 <오! 꿈의 나라>
 
<오! 꿈의 나라> 성공은 기존 대학영화서클이나 영화단체에 합류하지 못했던 이들이 영화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90년대 영화운동의 흐름에 동참한 김경형(감독, <동갑내기 과외하기>)은 "KBS 피디로 있을 때 <오! 꿈의 나라>를 봤는데, 영화로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라고 회상했다.
 
김경형은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를 만든 안동규와 이효인의 대학 후배였다. 군에서 제대한 뒤 '그림자놀이'에 가입하려 했으나 복학생은 경찰의 프락치로 의심 받기도 했던 때라 가입이 좌절돼 영화서클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대신 연극 서클을 만들어 광주항쟁을 다룬 <금희의 5월> 등을 연출하며 영화에 대한 갈증을 달랬다. 대학 때 학보사 기자로 활동했던 김경형은 "당시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이 학보에 영화평을 꾸준히 기고해 이런 선배가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 때인 1988년 KBS 피디로 취업한 김경형은 "1989년 1월 예술극장 한마당으로 <오! 꿈의 나라>를 보러 갔었다"며 "당시 KBS 이름이 새겨진 옷을 입고 갔는데, 관제방송으로 비판을 받던 시기라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5.18 광주를 소재로 한 영화에 자극을 받은 김경형은 KBS를 그만두고 연극서클 후배들을 모아 단편영화를 제작한다. 촬영은 경희대 그림자놀이 회장과 대학영화연합 2대 의장을 역임한 김인수(감독)가 담당했다. 보유하고 있던 8mm 카메라로 만든 영화는 <푸른 옷>이었다. 제목은 수형인들의 옷을 의미하는데, 학생운동을 하다 구속된 대학생이 감옥에서 비전향 장기수를 만나게 되고 친해지면서 힘을 얻어 재판에 나가는 내용이다.
 
김경형은 "이후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1989년 11월 충무로에 연출부로 들어가면서 영화계에 발을 딛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 꿈의 나라>가 영화를 동경하던 청년들에게 영화에 뛰어들 수 있도록 힘을 준 것이었다.
 
 1989년 흑석동 사무실에서 <파업전야> 기획회의를 하고 있는 장산곶매

1989년 흑석동 사무실에서 <파업전야> 기획회의를 하고 있는 장산곶매 ⓒ 장산곶매 제공

 
장산곶매에도 변화가 생겼다. <오! 꿈의 나라> 제작 이후로 회원이 늘어나게 된다. 초기 회원은 홍기선(감독), 이은(제작자, 명필름 대표), 장동홍(감독), 오정옥(촬영감독), 장윤현(감독), 공수창(감독), 정성진, 이재구(감독)였다. <오! 꿈의 나라> 제작과정에서 음악을 맡아 참여한 강헌,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인 이용배(계원예술대 교수) 등이 추가됐고, 강헌을 통해 서선영, 김재홍 등이 합류한다. 이화여대 누에의 김숙(감독), 그리고 이은과 대학원 시험에서 만나게 된 변영주(감독) 등도 <오! 꿈의 나라>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여기에 <파업전야> 기획단계에서 대학영화연합에서 활동했던 서울대 알라셩 신종관과 연대 영화패 민경철, 손은영 등이 새로 가입했다.
 
변영주의 합류는 이은과의 만남이 계기였다. 이은은 "1988년 11월 즈음 중앙대 대학원 시험을 봤는데,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변영주였다"며 "인사를 나누면서 장산곶매를 소개했고, 관심을 보여 합류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변영주 아버님이 흑석동에서 병원을 운영하셨는데, 그 건물에 장산곶매가 사무실을 얻어 활동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다만 초대 대표였던 홍기선은 장산곶매를 나와 충무로 진출을 모색한다.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홍기선과 영화작업을 함께했던 부인 이정희(시나리오 작가)는 "홍기선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질 수 있는 영화를 원했고, 작가주의 영화보다는 대중적인 영화를 선호했다"며, "다만 충무로에 가면 생각과 다른 영화를 해야 한다는 것에 고민이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영화집단을 지키며 충무로 영화를 비판적으로 보던 홍기선의 변화에 대해 이정희는 "이전에 충무로로 가는 사람에게 배신자라고 한 부분은 그때의 상황도 있을 것"이라며, "홍 감독은 변질은 안 하면 되는 것이기에 본인이 변질할 건 걱정하지 않은 듯하다. 홍 감독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나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홍기선은 당시 임권택 감독의 연출부에 지원해 들어갔다. 하지만 끝내 현장에서는 함께하지 못했다. 이정희는 "임권택 감독님도 좋아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파랑새 사건'과 <오! 꿈의 나라> 상영과정에서 고발된 것 등이 영향을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연출부는 훈련이니 충무로에서 훈련해서 결국 영화로 승부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오정옥은 "홍기선은 토론과 회의보다는 창작집단이 되길 원했다"며 "장산곶매의 방향이 생각했던 대로 가고 있는 상태에서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어 일반 대중들과 만나기 위해 충무로에 가고 싶어했던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후 홍기선의 역할은 이용배가 맡게 된다. 이은은 "홍기선이 충무로 가서도 내 의식 그대로 당파성을 갖고 하겠다면서 장산곶매 활동을 마무리했고, 그 역할을 대신해서 들어온 게 이용배였다"고 말했다.

이용배는 "<오! 꿈의 나라> 제작 과정에서 장산곶매가 내 사무실을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였던 이용배가 '1986아시안게임 공식기록영화' 조감독 작업을 끝내고 애니메이션 제작사에서 일하다가 뛰쳐나와 차린 것이 봉천동의 사무실이었다. 여전히 한국 애니메이션이 일본 하청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을 한탄하며 1987년 말에 1988년 중반 사이 서울대 미대 졸업생들과 함께 작은 사무실 공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사무실 운영을 위해 결혼식 출장 비디오 촬영을 하려고 홈 비디오카메라를 구입했지만, 결혼식 대신 대학생 시위 현장을 누비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용배는 "당시 대학가는1988년 5월 명동성당에서 분신한 조성만 열사 등으로 인해 반미운동이 벌어지면서 비디오 등으로 운동에 동참하는 분위기가 가열차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비디오 활동은 자연스럽게 대학영화운동패들과도 어울리는 계기가 됐다. 대학영화과 연합 모임이 만들어지며 공동상영회 등을 열었고, 현실 참여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열기로 가득 차 올랐다. <오! 꿈의 나라>가 만들어진 곳도 봉천동 사무실이었다.

1988년 미국영화 직배 반대운동이 발생하자 이용배는 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젊은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갖는 등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홍기선과도 자주 만나게 되고 직접 촬영한 시위 현장 비디오 등도 돌려보면서 영화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그게 된 것이었다.

이용배는 "어느날 홍기선이 찾아와 <오! 꿈의 나라>가 탄압 속에서도 대학가 상영을 통해 돈을 좀 마련할 수 있어서 차기작 준비 중"이라며 "몇 가지 제안을 했다"고 기억했다. 영화운동패로 '영화제작소 장산곶매'가 결성됐으니 가입하라는 것이 첫 번째 권유했고, 다음으로 모인 돈 중 일부로 16mm 카메라(캐논 스쿠픽 기종)를 구입했으니 책임을 가지고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라고 하면서 차기작은 노동운동 방향이니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이용배는 "비디오가 아닌 필름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볼 수 있다는 유혹(?)에 먼저 넘어가 장산곶매가 둥지를 틀고 있던 흑석동 사무실에 나가게 됐던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창(감독)은 "영화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많지 않을 때여서 홍기선과 이용배가 친분이 있었다"며 "이용배가 애니메이션 외에 다큐멘터리도 만들었고, 홍기선(감독)이 좋은 분이 있어 함께 하고 싶다고 해서 다들 환영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장산곶매 또래들보다 나이가 위여서 다들 형이라고 불렀다"고 덧붙였다. 오정옥(촬영감독)은 "이용배가 홍기선 이후 대표를 맡으면서 형으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기억했다.
 
노동해방영화론 접목한 <파업전야>
 
 <파업전야>를 촬영한 부평 한독금속

<파업전야>를 촬영한 부평 한독금속 ⓒ 장산곶매 제공

 
<오! 꿈의 나라>가 개봉한 1989년 1월 장산곶매는 두 번째 장편영화로 노동영화를 만들자고 결의한다. 강헌(음악평론가, 경기문화재단 대표)은 "술 마시던 자리에서 다음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노동영화를 만들기로 방향이 잡혔다"며 "현장을 잘 모르니 우선 조사를 시작했는데, 고난의 행군과 같았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운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파업전야>의 시작이었다.
 
강헌에 따르면 당시 3개조로 나눠 구로와 부평, 인천을 답사한다. 부평은 한독금속 노조위원장이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어 촬영 우선순위로 고려됐으나 방위산업체로 사측이 촬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한독금속은 노동쟁의에 대응해 사측이 직장 폐쇄를 하면서 촬영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강헌은 <파업전야> 취재 활동을 마친 직후 보충역(방위)으로 군 복무를 시작한다.
 
<파업전야> 연출부로 참여해 당시 진행 상황을 일지로 정리해 놓은 이재구(감독)는 "1989년 3월 16일부터 본격적인 기획에 들어갔고, 3월 23일부터 현장 취재를 시작했다"며 "4월 9일 시놉시스(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나 개요)를 결정했고, 다음 날인 4월 10일에 강헌이 입대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장동홍(감독)은 "영화의 방향을 놓고 '선진노동자의 활약'과, '뒤늦게 의식을 깨우치고 각성하는 노동자의 모습'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면서 "논의 끝에 후자를 선택한 것이었다"고 밝혔다.

시나리오는 공수창(감독)이 맡았다. 공수창(감독)은 한양대 '소나기'에서 활동하며 당시 대학영화의 명작으로 꼽히는 8mm 영화 <인재를 위하여>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공수창은 "준비단계 때부터 시나리오를 계속 쓰라고 했는데, 촬영이 가까워져서야 늦게 완성했다"며 "프리 프로덕션이 80% 정도 진행됐을 때 시나리오가 나왔다"고 말했다.

공수창은 또한 "초기에는 변영주(감독)와 같이 다니기도 했고, 거의 1년 가까이 취재에만 매달렸다"면서 "장산곶매 멤버 중에 단 한 명도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사람이 없어,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든가, 처음에 어떻게 각성을 하게 되고, 어떻게 노동운동에 뛰어들게 됐는지에 대해 취재하고 시나리오 쓰고, 스터디 하고, 책도 많이 읽으며 장산곶매가 많이 단단해졌다"고 덧붙였다.
 
서울대 '얄라셩'에서 활동하다 장산곶매에 합류한 신종관은 "<파업전야>에 들어가면서 창작방법론과 제작방법에 대해 논의했다"며 "충무로의 흐름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던 시간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파업전야>는 당시 '노동해방영화론'을 접목시켰다. '장산곶매'는 1991년 '한국영화운동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노동해방영화론은 노동해방문예론을 영화에 적용한 것"이라며, 이렇게 밝혔다.
 
'1980년대 말 노동자계급이 변혁운동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 문제가 대두되었다. 문화운동 진영에서도 일련의 논의를 거쳐 노동자의 계급적 당파성을 주장하는 노동해방문예론이 정착되었는데, 노동해방문예론을 영화에 적용한 것이 노동해방영화론이다. 노동해방영화론은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영화를 만들 것을 주장했는데, 당파성을 자신의 이념적 계기로 설명했다.'
 
 <파업전야> 촬영장. 왼쪽부터 오정옥(촬영감독), 박만창(조명감독),장동홍(감독), 최호(감독)

<파업전야> 촬영장. 왼쪽부터 오정옥(촬영감독), 박만창(조명감독),장동홍(감독), 최호(감독) ⓒ 장산곶매 제공


1989년 3월부터 본격적으로 제작준비에 들어간 <파업전야>는 1년 만인 1990년 3월 완성된다. <오! 꿈의 나라>를 제작해 본 경험이 도움이 됐다. 장동홍(감독)에 따르면 <오 꿈의 나라>가 워크숍이었다면 <파업전야>는 제대로 만들어 보자고 다짐한 영화였다. <오! 꿈의 나라> 제작과정에서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파업전야>는 장동홍이 책임 연출을 담당했다. 책임 연출이란 충무로 시스템에서 감독이 전적으로 작품을 책임지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은기, 이재구, 장윤현은 연출부를 맡아 장동홍을 도왔다.
 
장동홍은 "<오! 꿈의 나라> 과정에서 공동연출의 문제점이 드러나서 한 사람이 책임 연출을 하게 됐고, 주변에서 내가 하는 게 제일 낫다고 말해 연출을 맡게 된 것이었다"며 "노동자들에 대한 영화였던만큼, 인상 깊게 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00>(1976)이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장동홍은 "성과 정치를 주제로 한 베르톨루치 감독의 영화는 기층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힘있고 역동적으로 그리고 있어 매료됐었다"며 "극 중 농노들이 마름을 죽이고, 농촌 처녀가 쇠스랑을 들고 짚더미에 올라가는 장면이 인상적이었기에 그런 연출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또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진적인 노동자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평범한 노동자가 각성을 통해 노조를 결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파업전야>에서 주임 역으로 나오는 이덕신(감독. 오른쪽)

<파업전야>에서 주임 역으로 나오는 이덕신(감독. 오른쪽) ⓒ 장산곶매 제공

 
<파업전야> 제작진들은 곳곳에 배우로 등장한다. 제작자였던 이은은 노동자로, 이용배 역시 파업을 무력화시키고 노조를 파괴하는 외부 인사로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장동홍 역시 식당에서 밥 먹는 노동자로 화면에 비친다. <오! 꿈의 나라>에서 5월 광주 시민군 역을 맡았던 동서영화연구회 출신 이덕신은 공장 관리직 주임 배역을 맡았다. 이은은 "당시에는 장동홍이 하라고 하면 다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장동홍은 "공장이 중간규모 급인데, 파업하는 노동자가 부족해서 스태프들까지 배역에 투입됐다"며 "대규모 인원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이은이 프로듀서로서 중앙대 후배들과 주변 사람들을 동원했다"고 회상했다. "이은의 역할이 없었으면 영화가 완성되기 어려웠을만큼 절대적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여성영상공동체인 바리터에서 활동했던 김영(프로듀서)은 "배우가 필요하다고 해서 변영주 감독을 따라 갔는데, 여공 역할을 기대하며 기다렸으나 불러주지 않아 참여하지 못했다"며 "취사를 도우려고 했으나 장윤현 감독님이 칼질을 너무 잘해 물만 나르는 역할을 하다 돌아온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날 촬영은 오정옥(촬영감독)이 맡았고, 촬영보조가 이창준(제작자)이었다"면서 "지게차로 카메라가 올라가던 장면과,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불속에서 빨갛게 빛나던 철조각들을 공들여 재촬영하던 상징적인 장면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장동홍은 제작과정에서의 어려움에 대해 "제작비가 부족해 강제로 할당이 됐고, 어머니에게 300만 원 정도를 빌려 영화가 수익을 낸 후 갚을 수 있었다"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제작비를 조달했던 장산곶매 대표 이용배는 "2주간의 촬영 기간 동안 현장 진행비가 없어서 대학 동창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십시일반 돈을 받았고, 나중에 적은 돈은 못 갚았지만 큰 돈은 다 갚았다"고 말했다.
 
이어 "느슨하고 리버럴리스트처럼 지내기는 했지만, 의식 자체는 당위적으로 뭔가 해야 한다는 것도 없진 않아서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술 한 잔 덜 먹으면 되는데 돈을 안 내고 하느냐'며 화를 내기도 했었다'고 덧붙였다.
 
학생운동 대신 영화운동 선택
 
 <파업전야>에 출연한 이은(제작자, 왼쪽)

<파업전야>에 출연한 이은(제작자, 왼쪽) ⓒ 장산곶매 제공

 
장산곶매가 어려움을 뚫고 잇따라 장편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공수창(감독, 시나리오 작가)은 "개인적인 역량이 탁월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 꿈의 나라> 음악 작업을 하다 함께하게 된 강헌 등 주축을 이뤘던 사람들의 역할이 컸고, 특히 제작과 프로듀서로 배급까지 맡은 이은의 활약이 큰 기여를 했다"고 강조했다. 장동홍과 이재구 역시도 "<파업전야>의 완성에는 이은의 힘이 컸다"고 평가했다.
 
오정옥은 "<파업전야> 촬영 때 이은을 통해 기자재를 빌려 장산곶매가 사용한 것"이라며 "당시 빌릴 곳은 중앙대밖에 없었을 때여서 이은이 장비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은에게 장비를 대여해준 중앙대 기자재 담당 이상모 조교의 도움도 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파업전야>에서 제작자와 프로듀서 역할을 맡은 이은은 대학 시절 영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재학 중 처음 만든 영화가 노동문제를 다룬 <공장의 불빛>이었다. 1986년 2학년 2학기에 복학해 만든 영화로 노동현장에 있던 경험을 살려 18분 분량의 16mm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스스로 양심적으로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자본가와 빼앗긴 자신들의 권리를 회복하고 이 땅의 주인이 되길 원하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였다. 1988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상영된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 이은은 학과 동아리인 '광야'를 결성해 학내 영화운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한다. <오! 꿈의 나라>를 위해 대학서클 중심의 청년영화인들이 장산곶매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은의 역할과 비중도 점차 커졌다.
 
이은은 영화운동에 뛰어든 것에 대해 "영화과는 특별하다고 생각했다"며 "당시는 대학생 중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였으니, 학생운동보다는 영화운동을 하고 영화를 하면서 사회변혁을 이루고 실천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전야> 기획에 들어간 1989년에는 이용배와 함께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과 전국노동조합협의회 결성까지의 과정을 담은 16mm 다큐멘터리 영화 <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 >를 제작했다. 42분 분량의 단편 다큐멘터리였는데, <오! 꿈의 나라> 다음으로 만들어진 장산곶매 두 번째 영화였다. 일반 대중보다는 당시 노동운동 진영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상영됐다.
 
신종관은 "< 87에서 89로 전진하는 노동자 >가 만들어지고 나서 부산 상영을 진행한 적이 있다"며 "부산역에서 눈이 가려진 채로 어느 성당으로 안내돼 상영을 했는데, 거기에는 감시를 뚫고 모인 노동운동가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충무로 한국영화를 대표했던 원로 정진우 감독은 이은과의 첫 대면을 이렇게 기억했다.
 
"1980년 중반 대학 동창인 하경근(전 중앙대 총장)이 '학생들이 총장실 점거 농성을 하고 있다'며 도와 달라고 연락이 와서 당시 중앙대를 찾아갔는데, 농성하던 학생들 중 한 명이 다가와 정진우 감독님이시냐며 인사했다. 이은이었다. 인상은 부드럽게 생겼던데, 보기와는 다르게 강성이었고, 당시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다."
 
상영+투쟁
 
 <파업전야> 싱영을 보호하기 위해 각목 등을 들고 모인 사수대

<파업전야> 싱영을 보호하기 위해 각목 등을 들고 모인 사수대 ⓒ 장산곶매 제공

   
<파업전야>는 제작과정보다는 상영과정이 더 극적이었다. '상영투쟁'으로 불릴 만큼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1990년 3월 영화를 완성한 장산곶매는 개봉일을 4월 6일로 정한다. 장소는 예술극장 한마당. <오! 꿈의 나라>가 처음 공개된 소극장이었다. 1989년 <오! 꿈의 나라>를 상영하다 고발당한 장산곶매 초대 대표 홍기선(감독)과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였던 유인택(제작자, 예술의전당 대표)은 1989년 10월 벌금 100만 원과 30만원 을 선고받았다. 이후 유인택은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의 주선으로 영화사 모가드코리아에 들어갔고, 극장은 김명곤(배우, 전 문화체육부 장관)이 대표를 맡고 있었다. 장소도 신촌에서 혜화동으로 옮겨와 있었다.
 
전두환의 뒤를 이은 노태우 군사독재는 노동운동을 그린 영화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오! 꿈의 나라>를 통해 민중영화가 대중들에게 호응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파업전야> 때는 필름을 빼앗으며 거칠게 탄압했다. 한국영화운동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 진영과 군사독재의 정면 대결이었다.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첫 상영을 앞둔 1990년 4월 4일 서울지검 공안2부(최병국 부장검사)는 영화가 노동쟁의를 부추길 소지가 짙다고 판단하고, 영화가 상영될 경우 장산곶매 대표 이용배와 상영극장을 영화법과 공연법 위반혐의로 형사처벌하겠다는 방침을 정한다. 검찰은 대본을 입수해 검토한 결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키는 어려우나 영화의 제작 상영과정이 영화법상의 제작업소 등록조항과 사전심의 조항, 공연법의 상영 전 신고조항 등에 위배된다고 판단해, 상영극장의 관할구청과 문화부가 고발하는 형식으로 형사처벌하겠다는 기조를 밝힌다.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었던 최병국은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1981년 부산 '부림사건'을 지휘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였고, 2000년 한나라당(현 미래통합당) 국회의원이 된다.
 
상영 첫날인 1990년 4월 6일. 종로구청은 <파업전야> 제작자인 장산곶매 이용배 대표와 예술극장 한마당 김명곤 대표를 공연법 위반 혐의로 동대문경찰서에 고발한다. 광주에서는 사법경찰이 <파업전야>를 상영 중인 YWCA 영사실에서 필름을 압수했고, 수원에서도 상영을 시도하던 수원문화운동연합 회원 등이 연행된 데 이어 아주대 인문사회관 소극장에서 필름과 홍보전단, 포스터 등을 압수했다.
 
다음날인 동대문경찰서는 예술극장 한마당과 중구 오장동에 있던 장산곶매 사무실에 대해 공연법과 영화법 위반혐의로 압수수색을 실시한다. 영화법 적용 대상이 아닌 16mm 영화에 대한 탄압은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의 무리수였다.
 
4월 13일 광주 전남대 상영에서는 격렬한 투쟁이 전개된다. 헬기까지 동원해 상영을 막은 경찰은 전남대 대강당과 학생회관을 수색했으나 필름과 영사기를 압수하지 못했고,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하게 항의하는 전남대생 1천여 명과 공방전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직격탄을 맞은 대학생이 앞니와 턱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파업전야>를 보기 위해 연세대 대강당 앞에 줄 선 관객들

<파업전야>를 보기 위해 연세대 대강당 앞에 줄 선 관객들 ⓒ 장산곶매 제공

   
 <파업전야> 연세대 상영. 영화 상영을 앞두고 구호를 외치는 관객들

<파업전야> 연세대 상영. 영화 상영을 앞두고 구호를 외치는 관객들 ⓒ 장산곶매 제공

 
4월 14일 연세대 상영에서는 3천여명의 관객이 대강당을 가득 채운 가운데 상영이 진행된다. 필름을 탈취하려는 시도를 막기 위해 관객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으나 관객들은 불평을 나타내지 않고 응할만큼 영화에 대한 호응은 뜨거웠다. 
 
검찰은 <파업전야>를 향한 열기에 4월 17일 제작진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고, 민중운동진영과 노동계는 4월 24일 파업전야 탄압분쇄 공동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상영주체를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으로 바꿔 노동절에 맞춰 전국적인 상영에 돌입하면서 충돌은 격화된다.
 
이용배는 당시 검거령을 피해 한국영화아카데미 동기인 장현수(감독)의 쌍문동 집 등 여러 곳에서 은신하면서 주로 애니메이션 제작사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벌었다. 철야와 야근 등이 빈번한 곳이어서 경찰의 눈도 피할 수 있는 좋은 도피 장소였다. 그러던 중 영화운동집단들이 연합으로 MT를 계획했고 거기에 참석하려고 불광동 버스터미널에 갔다가가 검거된다. 이용배는 "터미널에 있던 사복경찰이 나를 이상하게 봐서 신원조회를 당해 터미널에서 잡히게 됐다"고 말했다.
 
노태우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영 투쟁은 멈추지 않는다. 신종관은 "당시 사무실로 사용하던 골방을 경찰이 막아놨다"며 "민족예술인총연합회(민예총) 사무실로 이동해 거주하면서 <파업전야> 상영을 이어나간 것"이라고 말했다.
 
앞선 <오! 꿈의 나라> 배급 경험은 경찰의 탄압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됐다. 이은은 "주말마다 전국 동시상영을 진행했다"며 "한쪽에서 상영하면 막히기가 쉬워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로 상영해 탄압을 분산시켰던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출범한 시점이라 영화의 파급력은 컸다. 울산과 거제 등의 대공장 노동조합이 파업 투쟁에 들어가면서 영화를 상영했다. 당시 현대중공업이 파업 투쟁 중이었는데, 4월 27일 구내 체육관에서 상영된 <파업전야>는 2천명 노동자들이 시종 열기 속에서 관람하고 영화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적극적인 호응을 얻기도 했다. 파업 투쟁 현장에서는 수천에서 수만 명이 영화를 봤기 때문에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했지만, 최소 20~30만에서 최대 80만 이상이 본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파업전야>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감독)

<파업전야>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감독) ⓒ 장산곶매 제공

 
공수창은 "<파업전야>의 파급력은, 배급의 힘인 것 같다"면서, "배급이 아주 혁명적이었고 당시 노동운동, 민주화 운동의 파워가 결합해 현재의 멀티플렉스에 버금가는 시스템을 임시적으로나마 구축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주 혁명적이고 근사한 시스템이었다"고 평가했다.
 
80년대 대학에서 만든 단편영화들과 <오! 꿈의 나라> 배급을 담당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1985년 이후 각 대학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영화서클(동아리) 등이 <오! 꿈의 나라> 배급에 역할을 했고, <파업전야>는 전노협, <닫힌 교문을 열며>는 전교조의 주도로 상영과 배급이 전개됐다"며 "대학영화서클들은 학내에서 상영 홍보와 영사 등 기술적으로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오! 꿈의 나라> 이후 <파업전야>등 장편영화가 잇따라 나오면서 대학 내 단편영화 시장이 퇴조했다"고 덧붙였다.
 
<파업전야>의 가장 큰 의의는 1980년대 서울대 영화서클 얄라셩으로 시작된 남한 영화운동을 총정리하는 귀중한 성과라는 점이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거치며 운동적 지향성을 강화시킨 영화운동의 역량이 <파업전야>를 통해 결집됐기 때문이다. <오! 꿈의 나라>보다 더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한국 영화운동의 대표적 작품을 넘어 2019년 한국영화 100년의 대표작 중 하나로도 평가받았다. 
 
'장산곶매'는 1991년 '한국영화운동이 걸어온 길'이라는 제목의 문건에서 <파업전야>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파업전야>는 전후 한국영화사상 최초로 노동운동의 현장을 변혁운동의 선상에서 정면으로 다룬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또한 전국의 문화운동단체들과 연대하여 전국적인 상영활동을 전개한 것도 영화운동의 보급상영 체계에 대한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 것이었다.'
 
촬영부터 방해받은 <닫힌 교문을 열며>
 
<파업전야>의 흥행성공으로 19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역량은 한층 강화된다.  군사독재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상영하고 흥행을 일궈낸 <파업전야>는 독재권력에 맞서 싸운 한국 영화운동의 위대한 승리였다. 장산곶매는 <파업전야>의 성과를 바탕으로 다음 작품 준비에 들어간다.
 
2019년 발간된 서울독립영화제의 구술사 프로젝트 <다시만난 독립영화>에 나와 있는 강헌의 증언에 따르면 차기작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이 제시되며 내부에서 많은 논의가 이어졌다. 장산곶매가 각 대학 영화과와 영화써클(동아리)이 연합한 형태라 시선이 다양했다. 그 사이 회원도 더 늘어났다. <닫힌 교문을 열며>는 세 번째 선택지였다.
 
당시 현대중공업 등 대기업 공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구상도 있었으나 파업을 안 하면서 접게 됐고, 공수창, 이은, 장동홍 등이 준비하던 35mm 전태일 장편영화는 제작할만한 능력이 부족했다. 최종적으로 제작에 들어간 것이 전교조 해직교사를 소재로 한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였다.

1990년 8월 시나리오팀 구성 후 1991년 1월 기본 취재를 시작했고, 3월 시놉시스와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된다. 가제는 <아! 선생님>이었다. 8월 <닫힌 교문을 열며>로 제목을 확정한 후 9월 장산곶매 총회에서 제작을 결정하고 연출부와 기획팀을 구성한 후 11월 2일부터 본격 촬영에 들어가 12월 20일까지 22회차 촬영을 완료한다. 연출은 이재구가 책임졌다.
 
 <닫힌 교문을 열며>를 연출한 이재구 감독

<닫힌 교문을 열며>를 연출한 이재구 감독 ⓒ 장산곶매 제공

 
강헌은 "노태우 정권은 <파업전야>에서 자기들이 당했다고 생각해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는 전방위적 압력을 넣었다"며 "촬영 장소로 섭외했던 학교들이 촬영 당일 취소를 통보해 오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밝혔다.
 
이재구(감독)는 "관계 당국이 촬영장소 섭외와 함께 당국이 현상소와 녹음실 등 후반작업을 막으면서 두 가지가 힘들었다"며 "배우 녹음은 서강대 방송실에서 했고, 효과 녹음은 고 김벌레 선생이 운영하던 38스튜디오에서, 후반작업은 일본에 가서 했다"고 말했다.
 
장산곶매는 1992년 2월 17일 기자회견을 열어 "문화부가 현상소 녹음실 등의 업체 관계자들에게 장산곶매 영화에 대한 작업거부를 지시해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의 제작을 중단시켰다"고 항의하고, 영화법 상으로 근거가 없는 이러한 월권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는 공개질의서를 당시 이수정 문화부 장관에게 보낸다.
 
당시 <닫힌 교문을 열며>는 편집과 음악 작업을 끝내고 녹음과 상영 프린트 현상만을 남겨 놓은 상태였는데, 문화부가 세방현상소와 한양녹음실 등에 계약 취소를 종용하면서 '작업을 강행할 경우 모처에서 연락이 갈 것'이라는 위협성 발언을 해 작업을 포기시켰다.
 
<한겨레> 1992년 2월 18일자 보도에 따르면, 문화부는 "장산곶매가 <오!꿈의 나라>와 <파업전야>를 제작신고와 공연윤리심사위원회 심의를 거치지 않고 제작·상영해 영화법 위반으로 법적제재를 당해온 단체"라며 "이들이 또다시 입게 될 피해를 막기 위해 관련업체의 협조를 구했다"고 해명했다.
 
이에 대해 장산곶매는 "위법행위의 사전예방이었다면 문화부는 문제적 작품을 쓸 우려가 있는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원고지와 펜을 팔지 못하게 문방구를 봉쇄할 셈인가?"라고 반박한다. 당시 영화법이 35mm 상업영화를 대상으로 하고 있을 뿐 8mm와 16mm 영화에 적용하는 것이 무리인 상태에서 정부가 법적 공방 차원을 벗어나 관련 업체에 대한 회유와 탄압이라는 음성적이고 비열한 수단을 동원한 것이었다.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닫힌 교문을 열며> 상영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진행을 맡은 당시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안정숙 전 영진위원장. 이은(제작자), 이재구(감독), 박홍규(배우)

2019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닫힌 교문을 열며> 상영 뒤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진행을 맡은 당시 한겨레신문 기자였던 안정숙 전 영진위원장. 이은(제작자), 이재구(감독), 박홍규(배우) ⓒ 성하훈

 
장산곶매는 2월 25일 후반작업이 안 된 상태로 예술극장 한마당에서 언론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열고, 3월 6일~7일에는 한양대학교 대강당에서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회를 강행한다. 군사독재가 방해하는 영화로 알려지면서 상영회는 주목을 받았다.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 동안 이어진 상영에는 당시 집단 해직된 전교조 교사들과 학생들이 대거 관람에 나섰다. 서울시교육청의 장학사들과 관계자들이 중고등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정문 부근에 깔렸으나, 해직교사들과 함께 입장하는 학생들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이날 상영이 주목받은 것은 녹음이 안 된 상태에서 출연 배우들이 영화의 대사를 상영장에서 직접 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무성영화 시대처럼 스크린 아래에 모여 앉아 있던 배우들과 성우들은 화면에 맞춰 실시간으로 직접 대사를 했고, 어색함 없이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게 만들면서 크게 화제가 됐다. 효과음과 음악도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질만큼, 한국영화 역사에서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이른바 '상영관 동시 더빙'을 선보인 순간이었다. 어떠한 탄압과 제약이 와도 뚫어내겠다는 영화운동의 의지가 드러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양대 상영은 일종의 위장 전술이었다. 당시 장산곶매는 일본의 도에이영화사로 보내 필름을 보내 현상과 녹음을 진행 중이었다. 문제는 필름을 갖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당시 필름은 해외에서 포르노 영화를 갖고 오는 사람들 때문에 마약과 함께 세관에 걸리는 품목이었다.
 
1992년 4월 25일 전국 상영을 결정해 놓고 홍보 포스터 등 작업을 마무리 한 상태에서 장산곶매 대표였던 강헌은 상영 이틀을 남겨 놓고 이은과 오기민 등 5명을 도쿄로 보내 각각 다른 비행기로 김포와 김해 등으로 들어오게 한다. 할 수 없다, 다 잡혀가자라는 생각이었다.
 
이들 외에 장산곶매 회원이 아니었던 한 명을 비밀리에 더 보내 카세트테이프보다는 크고 비디오테이프보다는 작은 유맥틱(U-matic) 필름으로 들여온다. 5명이 모두 잡힐 경우를 대비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5명 중 잡힌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도리어 강헌을 당혹스럽게 한다. 강헌은 "당시 정부 측에서 다 알면서 일부러 안 막은 것 같다"며 "<파업전야> 때처럼 헬기가 뜨고 해야 홍보가 되는데, 한 명도 잡히지 않으면서 다섯 명을 희생시키려던 홍보 전략에 차질이 빚어지게 됐다"고 회상했다.
 
 <닫힌 교문을 열며> 자료집 표지. 정진영 배우의 첫 영화 출연작이다.

<닫힌 교문을 열며> 자료집 표지. 정진영 배우의 첫 영화 출연작이다. ⓒ 성하훈

 
<닫힌 교문을 열며>는 배우 정진영의 데뷔작이기도 했고, <파업전야> 상영 과정에서 고발당한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김명곤 등이 출연해 이전 작품들보다 배우들이 돋보였다. 연출을 맡은 이재구(감독)는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만드는 것이 참여했던 이들의 꿈이었다"며 "모두 의무감과 책임감을 갖고 같이 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제작과정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은 <닫힌 교문을 열며>는 장산곶매의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상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다만 앞선 두 영화의 배급을 통해 경험을 쌓은 장산곶매는 전교조와 함께 은밀한 방법으로 배급을 한다. 일부 공개적인 상영을 예고한 지역에서는 학교와 교육청이 나서 홍보물을 빼았거나 학생들에게 참석하지 말 것을 지시하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영은 약 2년 간 이어졌다.
 
제작진에 대한 고소 고발도 되풀이됐다. 장산곶매 3대 대표였던 강헌은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과 상영을 이유로 영화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됐다. 홍기선, 이용배에 이어 강헌까지 장산곶매 대표를 맡았던 이들은 모두 기소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고발은 검열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려던 권력에게 자충수가 된다.
 
검열 무너뜨린 '장산곶매'
 
<닫힌 교문을 열며>까지 성공시킨 장산곶매는 농촌 영화 <땅의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으나 제작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활동방식에 대한 이견이 생기면서 구성원들이 각자 개인적으로 영화활동을 하게 된 것이 이유였다.
 
이재구는 "<닫힌 교문을 열며> 이후 '전태일 영화'와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장산곶매 영화학교운영, <땅의 사람들> 등 세 가지 사업 구상이 있었으나 무산됐다"며 "농민영화 <땅의 사람들>은 초고상태까지 진행됐다가 미완으로 남게 됐다"고 말했다.
 
장산곶매는 활동과정에서 내부 구성원들 간의 정파투쟁도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 운동 노선에 따른 갈등이 장산곶매 내부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강헌은 "<파업전야> 성공 이후 정파투쟁이 생겼는데,  NL(민족해방) 계열과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등에서 보낸 사람들이 있었다"면서 "내가 색출해서 다 잘랐으나 <닫힌 교문을 열며>를 제작하기까지 내부가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신종관은 "장산곶매는 정회원과 준회원으로 구분됐는데, <파업전야> 이후 회원이 많이 늘어나 정회원이 13명이었고, 준회원이 수십 명이었다"며 "그런데, 상층부 핵심들이 따로 의결기구를 만들면서 거기에 대한 반발과 창작방법론에 대한 차이로 인해 일부 탈퇴가 있었고, 대학영화연합 출신들도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 이전에 한때 탈퇴했다가 나중에 다시 장산곶매로 결합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강압적으로 몇몇의 뜻을 따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반감도 작용했다"며 "다소 민주적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재구는 "<파업전야>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가입의사를 밝혀왔으나 거의 다 운동권이었다"며 "우리는 당장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한데 그런 사람이 많지 않아 아쉬웠다"고 말했다. 또한 창작방법론에 대한 이견 부분은 "더 강한 투쟁으로 가야 한다는 대학영화연합 출신들과, 영화를 중심으로 생각하자는 기존 회원들의 견해 차이였다"고 설명했다.
 
 장산곶매 3대 대표를 지낸 강헌(경기문화재단 대표)

장산곶매 3대 대표를 지낸 강헌(경기문화재단 대표) ⓒ 장산곶매 제공

 
<닫힌 교문을 열며> 이후 장산곶매의 활동이 점차 약해진 것에 대해 이은은 "활동을 이어나갈 방법에 대한 생각들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당시에는 "월급도 활동비도 받지 않던 구조에서 회원들 중 가정을 꾸린 사람도 늘어나며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이은은 "장산곶매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소수의 사람들 중심으로라도 집중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 다른 이들은 이를 지지하는 방식으로 활동하자고 제의했으나, 강헌의 생각은 '영화의 결과는 결국 회원들 모두의 책임으로 돌아오는 것이기에 회원들 모두가 함께 결정하고 책임지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표결 끝에 강헌의 의견이 다수가 되면서 생계활동이 필요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장산곶매는 공식 해체가 아닌 서서히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지만 한국영화운동에서 매우 중대한 성과를 이뤄낸다. 오랜 시간 이어져오던 영화 사전검열을 폐지시킨 것이였다. 장산곶매로 인해 검열기관과 다름없었던 공연윤리위원회(공륜)가 해체된다.
 
<닫힌 교문을 열며>로 인해 영화법 위반으로 기소된 강헌이 1993년 10월 검열문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됐다. 
 
앞서 <오! 꿈의 나라>로 인해 기소된 홍기선도 영화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제기했었으나 법원에서 기각된 상태였다. 강헌은 "법원이 어차피 기각할 것이라며 하지 말자고 했지만 당시 변호를 맡은 김형태 변호사가 절대 포기하면 안 된다고 했다"며 "한 사람의 진정한 마음이 세상의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기각이 예상됐던 위헙법률심판제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면서 반전을 이룬다. 당시 서울형사지법 김건일 판사는 "영화도 넓은 의미의 표현 자유 영역'이라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내면서 2년 만에 재판이 중단된다.
 
그로부터 3년의 시간이 흐른 1996년 10월 4일 헌법재판소는 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심의는 사전검열제도로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시작된 검열의 역사가 영화운동의 끊임없는 저항에 마침내 무릎을 꿇게 된 것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의 영향으로 그해 9월부터 시나리오 사전심의가 폐지된 데 이어 근 10년 만에 공륜의 검열까지 없어지면서 창작의 자유가 한층 강화된다. 장산곶매 표현의 자유 투쟁이 얻어낸 소중한 결과물이었다.
 
 <파업전야> 촬영 현장

<파업전야> 촬영 현장 ⓒ 장산곶매 제공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한국영화에서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인다. 이들은 여러 흥행작을 만들어내며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다.

<오! 꿈의 나라>를 만들었던 1988년부터 <닫힌 교문을 열며>를 만들었던 1992년까지 장산곶매 회원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은 고 홍기선(감독, <일급기밀> <이태원 살인사건), 이용배(계원예술대 교수), 강헌(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이은(제작자, < JSA 공동경비구역 >, <아이 캔 스피크> ). 공수창(감독, <알 포인트>, < GP 506 > ) 장윤현(감독. <접속>), 장동홍(감독, <이웃집 남자>), 이재구(감독), 정성진, 오기민(제작자. 마술피리 대표), 오정옥(촬영감독), 김재홍(교수), 장문일(감독, <바람피기 좋은 날>), 강경환(시나리오 작가, <차형사>), 고길수(제작자, <차형사>), 김숙(감독), 김유진(감독), 김은채(시나리오 작가), 김정호(교수), 박현선(시나리오 작가), 서우식(프로듀서), 서정일(교수), 손은영, 신종관, 오창환(전 동북아평화연대 이사), 이연수, 이장길, 이창준(제작자), 이천형(작가), 임성찬(감독, <가벼운 짐>), 정진완(감독), 조미라(시나리오 작가), 최호(감독, <빅 매치> <사생결단>)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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