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오후 1시 30분, EBS에서는 <일요시네마>가 방영된다. 특별한 계획이 없는 일요일이라면, 느즈막히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대충 정리를 한 후 소소한 간식과 함께 시청하기 알맞은 시간이다. 딱히 시간을 맞출 필요없이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시대에 일요일 이른 오후의 영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언제든 원하는 영화를 재생시킬 수 있는 서비스에는 존중되어야 할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입맛대로 골라 볼 수 있다는 자유는 만족감을 높여줄 수는 있지만 영화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제한할 수도 있다. '나'의 취향을 고려치 않는 누군가의 선택으로 제공된 영화는 다양한 간접 경험을 차단할 수도 있을 취향의 문제를 간단히 해결해준다.

물론, 프로그램의 성격에 따라 방영 선택되는 영화의 성격이 대체적으로 비슷해 프로그램의 취향에 갇혀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제한은 많은 경우 개인의 선택 보다는 좀더 폭넓은 영화 감상을 보장한다. 여기에 선택의 고민에 빠지지 않고 엄선된 영화를 보는 '아무거나'의 편안함도 곁들여진다.
 
 EBS <일요시네마> 편성표

EBS <일요시네마> 편성표 ⓒ ebs

 
일요일 한낮에 방영되는 EBS의 <일요시네마>는 프로그램의 성격을 '가족영화'로 규정한다. EBS에서 방영하는 영화 통합 홈페이지인 'EBS 영화'에서는 <일요시네마>를 "가족영화의 전당, 일요시네마"라고 소개한다. 최근의 방영 목록을 살펴도 요즘처럼 외출을 자제할 필요가 있거나 꺼려질 때 온 가족이 함께 하기 좋은 작품들이 즐비하다.

<일요시네마>의 방영 직전, 12시 30분에는 EBS의 인기스타 '펭수'가 등장하는 <자이언트 펭TV>가 재방송된다. 아이들과 함께 펭수를 보며 웃다가 자연스럽게 <일요시네마>를 함께 시청하기 적당한 편성표이다.

방영 목록만으로 파악할 수 있듯이 <일요시네마>를 채우는 영화들은 개봉 연도가 짧게는 몇 년 전, 길게는 수십 년 전의 영화들이다. 때문에 개인별로 차이는 나겠지만 이미 본 영화들을 다시 만나는 경우가 잦다. 같은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느낌이 다르듯, 같은 영화를 반복해 볼 때의 느낌 역시 상당히 다르다.

지난 5월 31일 방영된 <길버트 그레이프>의 경우 1994년에 개봉된 영화이다. 미혼이었던 20대 시절의 감상과 기혼인 지금의 감상은 사뭇 달랐다. 20년 전에는 가족을 대하는 길버트의 태도를 '희생'의 측면으로만 파악했기에 안타까움이 컸다. 다시 만난 길버트의 태도에서 좀더 발견한 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었으며, 안타까움 보다는 그의 삶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

지난 7일 방영된 <빌리 엘리어트>의 경우에는 영화가 그리는 시대에 대한 창작자의 태도가 처음 볼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이 영화는 1984년 영국 탄광노조 파업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2001년 개봉 당시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보며 파업에 실패한 노조의 비애를 예술로 달래며 승화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시 본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에는 왜 탄광노조가 그토록 긴 파업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 담겨 있었다.
 
 영화 <빌리 엘리언트>의 한 장면

영화 <빌리 엘리언트>의 한 장면 ⓒ 팝엔터테인먼트

 
이처럼 EBS <일요시네마>는 여전히 재미와 감동을 주는 과거의 영화들을 새롭게 감상할 수 있는 남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같은 영화에 대한 다른 감상은 감상자와 주변 환경이 모두 변해서일 것이다. 그 변화를 발견하는 재미 또한 작지 않다. 물론, 처음 보더라도 누구나 즐겁고 편하게 볼만한 작품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EBS <일요시네마>는 초등학교를 입학한 아이들이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전체 관람가나 12세 관람가의 영화를 주로 방영한다. 때로 주의와 지도가 필요하지만, 대체로 함께 보는데 큰 무리가 없다. 다만, 아이들이 잘 모르는 시대적 배경이 많아 이해를 돕기 위한 대화가 필요해진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파업에 참가하는 노조원은 불참한 노조원을 '배신자'라 부른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아이는 '노동조합'의 의미와 1984년 영국 탄광노조의 파업을 먼저 이해해야 했다. 아이는 3월 15일에 방영한 <작전명 발키리>를 이해하기 위해 히틀러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아야 했다. 부러 가르치거나 배우려 하지 않아도 앞으로 영화와 함께 기억할 내용들일 것이다.

4월 5일에 방영된 앤드류 가필드 주연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을 보면서는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과 비교하며 즐거워한다. 특히 거미줄을 개발해내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피터를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한다. 동일한 캐릭터의 다른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다.

영화를 보면서, 혹은 본 후 자연스럽게 대화가 오고간다. 자신의 눈높이 맞는 <샬롯의 거미줄> 같은 영화를 만나면 할 이야기는 더욱 많아진다. 실로 <일요시네마> 자체가 프로그램이 표방하는 진정한 '가족영화'가 아닐 수 없다. (혹 아이와 영화를 함께 보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진행해 볼 것을 권유한다.)

마음껏 극장을 갈 수 없었던 10대 시절, 주말이면 EBS에서 방영해주던 세계 명작들을 잊을 수가 없다. 두 살 터울의 언니와 함께 작은 TV 앞에 앉아 한눈 한번 팔지 않고 보았다. 그때 함께 본 비비안 리와 로베트 테일러의 <애수>(1940),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의 <로마의 휴일>(1953), 찰톤 헤스톤의 <벤허>(1962), 스티븐 맥퀸의 <대탈주>(1963),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1970) 등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아이는 어른이 되면 엄마와 함께 본 옛날 영화들을 어떻게 떠올리게 될까.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는 많이 본 듯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그웬이 <라라랜드>의 엠마 스톤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아이의 놀람이 말해주듯 이제는 좀더 노화한 배우들의 전성기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다시 만나는 재미 또한 쏠쏠하다.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한 장면

영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의 한 장면 ⓒ 소니픽처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의 조니 뎁이나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의 연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품이지만, 그 풋풋한 모습 자체로 감상에 젖게 한다. <샬롯의 거미줄>의 다코다 패닝의 깜찍한 모습은 그저 미소를 짓게 한다. 이제는 영화로 만나기 힘든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은 '명연기'란 말을 그대로 재현한다.

이 영화들이 처음 본 당시의 추억을 새삼 떠오르게 하는 것도 일종의 보너스이다. 중·장년층에게 '복고'는 새로운 해석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추억이자 향수이다. 당시를 기억하면 찾아드는 아련한 감상은 지금을 살게 하는 힘을 주기도 한다.

나른한 일요일 오후, EBS에는 '펭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요시네마>가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양선영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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