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 키다리이엔티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로 배우 배종옥을 표현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드라마를 넘어 영화로, 그리고 연극 무대로 활발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는 모습을 안다면 더욱 그렇게 느낄 일이다. 

2년 만에 출연한 영화 <결백>에서 엄마 역을 맡았지만 보통의 엄마 이미지와 결이 다르다. 그가 맡은 화자는 급성 치매를 앓고 있고, 농약 막걸리로 마을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억울한 피해자일까 아니면 또 다른 진실이 숨어있을까. 영화는 화자와 변호사가 되어 고향을 찾은 딸 정인(신혜선)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박복했던 한 여성의 삶

인터뷰 자리에서 그가 기자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은 "자꾸 내 부족함만 보인다"였다. 36년 차 베테랑 배우임에도 자신에게 매우 냉정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영화 현장에서 매번 4시간의 노인 분장을 소화하면서 감정에 몰입해갔던 그는 탄탄한 <결백> 시나리오에 철저히 자신을 빠뜨리려 했다고 한다. 

"화자를 연기하며 우려했던 부분이 다행히 스토리에 잘 묻혔다(웃음). 분량 자체는 많지 않은데 같은 신을 나눠서 여러 번 찍었다. 내가 계산한 감정보다 훨씬 더 깊이 있는 감정이 요구되더라. 촬영현장에서 많이 보완하려 했지. 시나리오 자체를 호기심 있게 봤다. 농약 막걸리가 모티브라는데 뉴스를 잘 안 보는 제가 우연히 그 뉴스는 봤더라. 결말이 참 궁금해지는 이야기였다. 배우로서 새로운 역할을 한다. 사건의 주체가 된다는 것보단 시나리오가 주는 재미가 커서 선택한 면이 크다. 내가 실제로 화자였다면 인생을 그 상태로 끝내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픔이 있는 인물이었지."

화자는 극중 대사를 빌리면 박복한 여자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결혼을 앞두고 연인이 사망하는 사건을 겪었다. 그 사건과 관련 있는 사람과 40년 넘게 부부로 살았다. 영화에선 긴 세월의 한, 그리고 자식에 대해 애틋함이 큰 화자의 감정이 켜켜이 담겨 있다.

"제가 현장에서 모니터를 거의 안 보는데 이번엔 많이 봤다. 박상현 감독이 보시면 안다고 해서 가서 보니 정말 그렇더라. 내 부족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니터를 잘 안보는 이유는 사실 (배우 연기 톤과 연결은) 감독의 몫이라 생각했거든. 근데 <결백>은 한 신에 여러 상황이 섞여 있다. 현재, 과거를 오가기도 하고. 내가 아무리 머리로 잘 계산했다고 하더라도 차이가 있었다. 감정 연기였지만 세밀한 계산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많이 무겁고 우울한 인물인데 제가 그때 연극을 병행하고 있었다. 현장에 계속 있지 못하고 무대를 왔다 갔다 해서 너무 지쳐있었다. 분장팀이 그럴수록 칭찬하더라(웃음). 힘을 빼야 했던 인물이라 그런 피곤함이 연기에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노인 분장도 처음엔 낯설었는데 제가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몰입하려 했다. 그걸 내 모습으로 상상하는 거지. 아픈 역할을 하면 정말 아픈 것 같거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할 때도 내가 정말 아픈 줄 알았다. 이번에도 인물을 체화하려 했지."


 
 영화 <결백> 관련 사진.

영화 <결백> 관련 사진. ⓒ 영화사 이디오플랜

 
무서운 선배 혹은 좋은 선배

이번 작품으로 처음 호흡한 신혜선을 언급하며 배종옥은 집중력 좋고, 잘 수용하는 배우라고 표현했다. 모녀 관계이기에 현장에서 자주 마주쳤지만 오히려 배종옥은 인사하러 오는 신혜선에게 거리를 두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아마 처음엔 왜 저러나 싶었을 텐데 사전 연기가 중요했었다"며 그가 말을 이었다.

"배우는 자기 색깔도 중요하지만 잘 안되는 걸 받아들이며 변화시키는 것도 중요하거든. 사실 현장에서 수용하려는 배우가 많진 않다. 근데 혜선이는 감독과 소통할 때도 알겠습니다, 고민해보겠다 말하면서 정말 자기 걸로 만들더라. 현장에서 늘 혜선이가 인사하러 오는데 제가 오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유난 떤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 그런 사전 연기가 중요하더라. 시나리오에 물론 나와 있고, 다들 준비해서 오겠지만 현장에서 그 인물에 들어갈 때 감정이 되게 중요하거든. 그런 걸 가져가려 노력했다."

이런 이유로 배종옥을 두고 무서운 선배라 표현하는 동료도 있어 보인다. 대학 강단에서도 학생들의 출석률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아니 아무것도 안 하는데 왜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으면서 그는 "묻지 않는 이상 제가 먼저 이래라저래라 하진 않는다. 약속을 잘 지키고, 원칙을 잘 지키면 된다. 간단한 것 같지만 어렵기도 하다"고 답했다. 

"그래서 제 강의에 학생이 4명밖에 없었다(웃음). 출석률 중요하게 여겨서. 단 4명이었지만 거의 일대일처럼 피드백을 주니 학생들이 되게 좋아했다." 

원칙주의, 다소 냉정한 선배라는 인식은 그가 연기를 해오며 스스로에게 꾸준히 물었던 질문 때문은 아닐까. <칠수와 만수>(1988)로 영화계에 데뷔할 때까지 그는 배우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철딱서니 없었지(웃음). 연기를 안 하겠다고 생각했다. 연기가 뭔지도 몰랐고, 재미도 없었지 맨날 혼나기만 하고. 한쪽 발은 담그면서 자꾸 다른 걸 봤다. 공부를 해야 할까, 직장을 구해야 할까 싶다가 <왕룽 일가>라는 작품을 만났는데 거기서 재미를 느꼈다. 그 뒤로 연기를 잘하고 싶더라. 기복은 늘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변해야 하는 것도 있고 인정해야 하는 것도 있더라. 

침체가 오면 전 늘 연극을 했다. 후배들에게도 연극을 권한다. 자기 연기를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대 연기를 잘 해내면 드라마가 오든 영화가 오든 자신 있게 대면할 수 있더라. 제 경우엔 그렇다. 연극 무대는 카메라에 갇히지 않고 온몸을 자유롭게 쓰거든. 드라마만 하면 그런 에너지를 느낄 수 없지. 할리우드 배우들도 연극을 꽤 한다. 우리면 좀 편견이 있지 않나 싶다. 매체를 넘나드는 넓은 배우가 되고자 하는 거다."


 
 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 키다리이엔티

 
배종옥의 원동력

그라고 시행착오가 없었을까. 배종옥은 처음 연극을 했을 때 자신이 받았던 비판의 순간을 전했다. "드라마에선 나름 카리스마 있다는 평이었는데 무대에선 그런 게 없다며 지탄받았다"며 그는 "그래도 밀어붙였다. 난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무대 연기가 너무 좋다고 생각한 지가 얼마 안 된다. 물론 예전에도 좋았지만 많이 두려웠거든. 무대 위를 걷는 것조차 무서웠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가서 무대를 혼자 걸어다니곤 했다. 익숙해지려고. 무대에서 2시간 동안 살아남으면 내가 해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그러면 드라마 신이야 쉽지. 한두 페이지 대사는 금방 외우게 된다. 자기 파트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의 흥미가 아닌 것도 해내다 보면 매너리즘을 극복할 수 있다."

이 말에서 여전한 그의 연기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후회 없이 자신을 녹여낸 작품도 물론 있었지만 동시에 그는 연기 확장을 꿈꾸며 또 다른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코미디 연기를 꼭 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든 생각이다. 근데 사람들이 잘 안 믿더라(웃음). 허준호씨랑 로맨틱 코미디 한번 해보고 싶다. 아니 왜 중년의 사랑은 음침하고, 부끄럽게 다뤄지는 건가. 이혼한 사람이 많잖나 요즘. 아마 누군가는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다양한 작품이 나오면 좋겠다. 전 작업할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삶의 원동력이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게 감사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도."
 
 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영화 <결백>에서 화자 역을 맡은 배우 배종옥. ⓒ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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