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여행을 생각할 때는 특히 그렇다. SNS에서는 작년 오늘의 내가 떠났던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을 알려주고, 계획대로라면 2주 후에 런던으로 떠났어야 하는 여름휴가를 아쉬워하는 중인데, 코로나19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2019년 6월 1일의 마드리드에서 보았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꿈처럼 느껴지고(관련기사 : 마드리드에서 손흥민을 직접 보다니, 내게 온 두 번의 기적 http://omn.kr/1jl1d), 내년으로 미뤄진 유로 2020의 재개가 의심스럽다. 관중 없이 치러지는 K-리그마저, 언제라도 다시 멈출 수도 있다는 불안으로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릴 수 없으니, 현명하게 불안을 버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영화를 통해 여행을 떠나는 것은 어떨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고 나오는 밤의 풍경 작년 오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완다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리버풀과 토튼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있었구요. 올해도 유로2020에 맞춰서 영국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단 1년 연기되었네요.

▲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보고 나오는 밤의 풍경 작년 오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홈구장인 완다메트로폴리타노에서는 리버풀과 토튼험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벌어졌습니다. 거기에 있었구요. 올해도 유로2020에 맞춰서 영국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단 1년 연기되었네요. ⓒ 이창희

 
우선, 취소된 여름휴가에서 기대했던 영국으로의 여행을 떠올리며,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2010년작 <트립 투 잉글랜드>를 다시 찾아보았는데, 절친인 롭과 스티브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니 <트립 투 이탈리아> (2014)와 작년 여름의 내 여행을 떠올리게 한 <트립 투 스페인>(2017)으로 이어졌다. 그들의 수다엔 귀가 아플 지경이지만, 영화를 통해 만나는 여행은 매력적이다.

여행이 사라진 시대에,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의 '트립 투' 시리즈를 지켜보는 것은 고역이다. 영화에 담긴 여행지의 풍경은 매력적이고, 여행지에서 만나는 식사는 근사하다. 그들은 관광객들로 시달리는 여행지는 피하려는 의도가 분명하고, 와인잔과 여섯 개 이상의 커틀러리가 준비된 근사한 점심을 즐긴다. 몇 개의 코스로 이어진 식사는 플레이팅의 장식까지 섬세하게 준비되고, 요리는 테이블로 전해지며 사용된 재료와 요리법까지 상세하게 설명한다. 당장이라도 먹고 싶어진다.

감독은 실제로도 절친일 듯한 두 명의 배우를 실명으로 출연시키는데, 그들은 마주치는 모든 공간에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성대모사를 겨루고, 작품에 대해 논쟁을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를 나눈다. 감독의 의도가 명확해지는 순간이다.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여행을 실재하는 현실로 느끼게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여행이란 끝없이 마주치는 낯선 것들을 조금씩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이니, 끝없는 그들의 수다와 논쟁마저도 여행의 일부라고 말이다.

그들의 여행을 풍성하게 하는 것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예술가들의 흔적이다. 작가이자 배우인 스티브 쿠건과 성우이며 배우, 토크쇼 진행자인 롭 브라이슨은, 영국 여행에선 워즈워스와 콜리지를, 이탈리아 여행에선 바이런과 셸리의 마지막 순간을 따라간다. 이어진, 스페인 여행에선 세르반테스와 조지 오웰을 얘기하며 <한여름 아침의 보행>을 손에 들고 로리 리의 산문을 언급한다. 매번 바쁘게 옮겨 다니던 나의 여행과 비교하자니, 여유로운 시간과 함께 낯선 공간을 풍성하게 하는 그들만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여행은 내게 새로운 방식의 여행을 제안해 주었다. 조금은 더 여유를 가지라고, 말이다.

지금껏 나의 여행은 짧은 일정에 쫓기듯 휩쓸리는 시간이었다. 어느 여행이든 시간이 안타까웠고, 조금 더 많은 곳에 들러야 한다는 욕심이 앞섰다. 게다가, 요즘의 여행은 월드컵이나 유로와 같은 축구 대회를 따라가는 일정이었으니, 경기 사이의 시간을 가능하면 촘촘하게 채워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여유롭게 잠을 자는 것도, 좋은 식당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만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여유 없는 제한된 시간 동안 끝없이 밀어 넣는 낯선 감정은, 매번 복잡하게 섞이기 일쑤였고 오랜 잔상을 남기기도 어려웠다. 여행의 아쉬움은 언제나 거기에서 비롯했고, 스티브와 롭의 여행이 부러웠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의 마지막 여행은 올해 초의 제주도였다. 회사에 휴가를 이틀이나 내고, 제주도에서 5일이나 머물렀다. 떠나기 전에는 그들처럼 제주라는 공간이 전해주는 감정을 충분히 느낄 생각이었는데,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 종일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식사를 건너뛰기 일쑤였고, 무릎이 아플 때까지 걷다가 결국은 힘들게 뛰어야 끝이 났다. 많이 쉬며 새해의 다짐을 준비하겠다던 계획은, 매일 2만 보가 넘는 기록만을 남겼고 말이다. 그 뒤로는 코로나19가 밀려왔으니, 여행을 바로잡을 기회는 아마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그때는 꼭 트립 투 커플의 여행의 가르침을 따라봐야겠다. 물론, 새로운 곳의 모든 감정을 한꺼번에 쓸어 넣겠다는, 내 욕심을 다스리는 것이 먼저일 테지만 말이다.

<트립 투 잉글랜드>의 여행은 런던에서 시작하여 영국의 북쪽으로 올라가며, 영국의 요리가 '피시 앤 칩스'라는 감자튀김을 곁들인 생선튀김뿐이라는 세상의 조롱을 강하게 반박한다. 런던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은 드문드문 나무가 보이는 평원이 이어져 있고, 맨체스터를 넘어가서 스코틀랜드 국경지대에 가까워질수록 울창한 삼림이 이어진다. 그들이 찾은 숙소는 근사한 시골의 풍경과 하나인 아름다운 곳이었고, 식당에선 정성스럽게 그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언젠가의 영국 출장지에서 만났던 근사한 램 스테이크가 떠올랐고, 그 시간이 그리웠다.
 
티레니아 해를 바라보며, 늑대를 달래는 프란치스코 성인 지난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찾았던 몬테로쏘 알 마레의 풍경인데요, 언젠가는 장화의 반대편은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가는 <트립 투 이탈리아>의 루트를 따라가고 싶어요.

▲ 티레니아 해를 바라보며, 늑대를 달래는 프란치스코 성인 지난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찾았던 몬테로쏘 알 마레의 풍경인데요, 언젠가는 장화의 반대편은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가는 <트립 투 이탈리아>의 루트를 따라가고 싶어요. ⓒ 이창희

 
영국 여행을 끝낸 친구들은 4년 뒤 <트립 투 이탈리아>에서,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과 셸리의 흔적을 따라 이탈리아 북부의 제노바에서 시작하여 아드리아해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들의 여행 방식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들은 나이가 들었고 요리는 근사한 이탈리아의 맛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여행은 다시 <트립 투 스페인>으로 이어지며,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의 공통점, 스페인의 역사와 무어인의 점령과 퇴각에 대해 얘기한다. 멋진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서의 정성을 다한 스페인식 식단이 이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들의 여행은 영국 남부의 항구인 플리머스에서 출발하여 스페인의 산탄데르에 도착하는데, 언젠가 나도 이 배를 타고 싶다.

이렇게 '트립 투' 시리즈가 지나온 여행지들을 따라갔음에도 아쉬움이 남는다면, 근사하게 나이 들어버린 다이안 레인의 프랑스 남부 여행기인 <파리로 가는 길>(2016)을 더해보자. 이 영화는 프랑스 남부 칸에서 파리까지의 여행을 보여주는 극영화인데, '트립 투' 시리즈의 여행지의 풍광이나 근사한 식사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로맨틱한 프랑스의 감정도 같이 보여준다. 게다가, <파리로 가는 길>에서 등장하는 식사는 좀 더 로맨틱한 저녁이니,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프랑스식 만찬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여행이 멈춘 세계를 상상한 적이 없다. 낯선 곳에서만 가능한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볼 수 있었던 시간으로써의 여행을 좋아했다. 나의 '분주한' 여행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언젠가는 한 곳에서 여유롭게 살아보는 방식의 여행을 실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놓았다.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의 이면을 드러냈고, 살아가는 일상을 낯설게 만들었다. 어쩌면, 낯선 여행지에서나 가능했던 것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도 가능해졌을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가 보지 못한 곳'으로의 여행이 그립다. 아쉬운 대로, 마을 여행과 홈 파스타를 즐기고는 있지만, 충분할 리 없다.

스티브와 롭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여행도 언젠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 그때의 여행에선, 코로나19로 멈춰진 세상이 내게 알려준 여행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다. 세상 어딘가의 낯선 감정을 여유롭게 느끼는 시간을 통해, 미뤄두었던 삶의 문제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고 말이다. 내 모든 여행은 결국, 현실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 과정이었으니까. 우리 모두의 여행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내가 아는 최고의 영국식 아침 회사 일 때문에 영국 중부의 체스터라는 도시에 종종 들렀었습니다. 여왕의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챙겨먹던 아침 식사인데, 가장 전형적인 영국식 아침이네요.

▲ 내가 아는 최고의 영국식 아침 회사 일 때문에 영국 중부의 체스터라는 도시에 종종 들렀었습니다. 여왕의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챙겨먹던 아침 식사인데, 가장 전형적인 영국식 아침이네요. ⓒ 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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