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일화 선수 시절의 남기일 감독(현 제주 유나이티드)이 2008년 12월 26일 부천의 한 인조잔디구장에서 열린 자선 게임에서 부천 FC 1995 팬들 앞 소감을 말하고 있다.

성남 일화 선수 시절의 남기일 감독(현 제주 유나이티드)이 2008년 12월 26일 부천의 한 인조잔디구장에서 열린 자선 게임에서 부천 FC 1995 팬들 앞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심재철

 
2008년 12월 26일 밤 영하 4도의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인조잔디 그라운드 위를 붉은 유니폼을 입고 뛴 남기일(당시 성남 일화) 선수가 "어젯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부천 SK 선수로 뛰던 옛 시절이 그리워진다"는 말을 남겼다. 오래 전부터 그 이름을 외치며 응원해준 부천 FC 1995 팬들 앞이었기 때문에 그 감회는 더 특별했으리라.

그가 더 잠 못 들었을 밤이 지나고 한국 프로축구 역사에 길이 남을 매치 데이가 밝았다. 2020 K리그 투 4라운드 부천 FC 1995와 제주 유나이티드가 26일(화) 오후 7시 부천종합운동장 초록 그라운드 위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됐다.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는 '남기일' 감독

웬만한 해외 축구팬들도 수원 블루윙즈와 FC 서울이 만나는 K리그 슈퍼 매치 이야기를 들어봤을 정도로 더비 매치는 언제나 축구팬들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그런데 오래된 K리그 팬들이 슈퍼 매치보다 더 기다린 게임이 드디어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2006년 2월 2일 당시 부천 SK 프로축구단 팬들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하고 분루를 삼켜야 했다. 그들이 붉은 함성으로 응원하던 팀이 돌연 연고지를 옮겨 제주도로 야반도주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돈줄 없이 프로축구 팀을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자본의 논리로만 축구장을 뒤엎어버린 사건이었기 때문에 부천 SK를 뜨겁게 응원하던 팬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부천의 축구팬들은 그대로 억울한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을 모아 2006년 3월 13일 '새로운 부천 축구클럽 창단 시민모임'을 만들었고, 가시밭길을 건너고 건너 2007년 12월 첫 날 부천 FC 1995를 창단하기에 이르렀다. 

부천 FC 1995는 2008 시즌부터 K3 리그에 참가했고 지금은 한국 프로축구 2부리그인 K리그 2에 속해있다. 그들이 다시 리그로 돌아온 감격적인 그 해 겨울 부천 FC 1995와 부천 OB 선수들이 모여 사랑의 자선 게임(2008년 12월 26일, 부천체육관 인조잔디구장)을 열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는 '윤정환, 남기일, 윤정춘, 이용발, 조성환, 곽경근, 이원식, 이성재, 박성철, 최거룩' 등 과거 부천 SK의 이름을 멋지게 떨친 레전드들이 거의 다 모였고, 특별히 그들의 이름을 다시 외치는 부천 FC 1995 서포터즈 '헤르메스'가 추위를 잊고 곁에 서 있었다.

다음 만남에는 팬들도 관중석에 마주 설 수 있기를

부천을 등지고 비교적 멀리 제주까지 날아간 그 팀은 그동안 이런 매치 데이를 고민하지 않았다. 제주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중위권 이상을 유지하며 1부리그 무대를 누볐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지난 시즌에 제주 유나이티드가 K리그 1 꼴찌(5승 12무 21패 45득점 72실점 -27)로 내려앉는 바람에 승강 플레이오프에 가 보지도 못하고 2부리그로 내려가고 말았다. 11위 경남 FC보다 승점이 6점이나 모자랐으니 그들은 고개를 들 힘조차 없었다.

코로나 19를 피하느라 늦게 시작한 2020 시즌 K리그 2에서 바로 이들 두 팀이 기구한 만남을 공식적으로 세 차례 이루게 됐다. 부천 팬들의 뒤통수를 친 2006년 2월 2일로부터 무려 5227일만에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진 첫 번째 날이 바로 오늘 2020년 5월 26일이다. 

현재 두 팀의 분위기는 극명하게 다르다. 오늘 게임 홈 팀 부천 FC 1995가 시즌 개막 후 3게임을 내리 이겨 승점 9점(5득점 1실점 +4)으로 2위 대전 하나시티즌보다 승점 2점을 앞선 선두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데, 제주 유나이티드는 아직 승리 기록 없이 승점 1점(1무 2패 3득점 5실점 -2)만으로 8위에 매달려 있다.

광주 FC와 성남 FC를 거쳐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제주 유나이티드 지휘봉을 쥐기까지 남기일 감독은 결코 쉬운 시즌이 없었지만 2020년은 더 특별한 경험을 나누게 되었다. 2003년까지 무려 7년 간 부천 SK의 핵심 미드필더로 뛰었던 기억을 무시할 수 없기에 오늘 이 게임 가장 불편한 가시방석에 앉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새 시즌을 맞아 다시 1부리그로 올라가야 한다는 부담감도 모자라 현재 1무 2패에 그치고 있는 팀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가장 크게 작용하고 있는 상황에서 옛 친정 팀의 이름을 가슴 깊이 새긴 상대 팀을 만난 것이다.

어쩌면 가장 아쉬워할 사람들은 부천 FC 1995 서포터즈 '헤르메스' 사람들과 부천 축구팬들이다. 꿈에도 그리던 눈물의 더비 매치가 이루어지는 날 부천종합운동장 관중석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부천 FC 1995 구단 사무국에서는 이 게임 바로 전날까지 큰 현수막을 걸어놓고 팬들이 응원 메시지를 직접 적을 수 있도록 했고, 응원 영상들도 이메일로 받았다. 그리고 부천에서 축구 함성을 처음 울려퍼지게 했던 1996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추억을 SNS에 공유하는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관중 없이 아쉽기만 한 더비 매치는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리그가 계속되기 때문에 이들 두 팀은 오는 7월 12일 일요일 오후 7시에 제주월드컵경기장에서 다시 만난다. 아마도 부천의 많은 축구팬들이 코로나-19 확산 추이를 지켜보면서 제주행 비행기 티켓을 확보했을 것이다.

이날 부천 축구팬들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남았다. 9월 19일(토요일) 오후 4시 20라운드 일정이 부천종합운동장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관중석의 빈 자리가 거의 없을 정도로 더 많은 관심이 몰릴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실제 연고지는 다르지만 이런 기구한 운명의 두 팀이 써 나가는 K리그의 뜨거운 스토리들이 초록 그라운드를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다. '연고 이전'이라는 부끄러운 꼬리표를 하나 더 달고 있는 FC 서울(전 안양 LG)도 오늘 게임이 남 이야기가 아닐 듯하다. 두 팀은 이미 FA(축구협회)컵에서 맞붙은 기록이 있지만 위의 두 팀처럼 같은 리그 안에서 보랏빛 물결이 넘실대는 FC 안양과의 더비 매치를 오래된 축구팬들이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부천 FC 1995 - 제주 유나이티드 2020 K리그 2 일정(왼쪽이 홈 팀)
2020년 5월 26일(화) 오후 7시 '부천 FC 1995 - 제주 유나이티드'
2020년 7월 12일(일) 오후 7시 '제주 유나이티드 - 부천 FC 1995'
2020년 9월 19일(토) 오후 4시 '부천 FC 1995 - 제주 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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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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