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구의 '귀화혼혈선수 시대'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있다. 대개 부모 중 한 쪽이 한국사람인 혼혈인으로서 원래 해외국적을 가지고 있다가 국내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하기 위하여 귀화한 사례들이다. 한국농구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러한 귀화혼혈선수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리그 흥행과 국제 경쟁력 강화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이승준-이동준 형제, 김민수, 문태종-문태영 형제, 전태풍, 박승리 등은 한국농구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귀화혼혈선수들이다. 어느덧 이중 대부분이 코트를 떠났다. 전태풍이 2019-20시즌 서울 SK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고,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얻은 문태영도 어느 구단으로부터 영입제의를 받지 못한 계약 미체결자로 남으며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고 있다. 사실상 내년에도 프로농구 무대에서 남아있을 것이 확실시되는 선수는 김민수 정도다. 다만 김민수는 혼혈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귀화가 아니라 국적을 회복한 케이스다.

과거 농구계 혼혈 선수로는 아마시절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김동광 전 감독이나 여자 프로농구의 장예은같은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전통적으로 '순혈주의'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혼혈 선수들이 이처럼 동시기에 한꺼번에 등장하여 주목받은 것은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외국인 선수들 못지않은 신체조건과 운동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기존 토종 한국 선수들과는 다른 스타일의 농구를 펼치는 귀화혼혈선수들의 등장은, 정체된 한국농구계에 새로운 활력을 가져다줄 대안으로 주목받았다.

이동준이나 김민수는 대학 입학을 거쳐 다른 국내 선수들처럼 신인드래프트를 통하여 KBL에 진출한 사례다. 이승준은 울산 현대모비스에서 프로농구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처음 한국무대를 밟았다. KBL은 2009년부터는 아예 귀화혼혈선수 드래프트제를 별도로 신설해 공식적으로 많은 혼혈선수들이 한국무대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이승준을 비롯하여 문태종, 문태영, 전태풍 등이 이 드래프트를 거쳐 정식 한국 선수로 인정받았다. 미국-유럽 등 해외무대에서 이미 프로 경력을 쌓은 수준급 선수들이 적지않았다.

귀화혼혈선수들은 한국무대에서 저마다 나름의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문태종은 LG에서 2013-14시즌 정규리그 MVP에 올랐으며 2회의 KBL 우승,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가장 화려한 업적을 남겼다. 동생 문태영도 한국 국적 선수 최초의 득점왕, 모비스에서 KBL 유일의 3회 연속 챔프전 우승 등을 이끌었다. 전태풍은 2011년 KCC의 우승멤버로 활약한 것을 비롯하여 10년간 KBL을 대표하는 특급가드로 활약했다. 김민수는 혼혈선수 출신중 유일하게 데뷔 이래 SK에서만 선수생활을 이어가고있는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리그만이 아니라 대표팀에서도 귀화혼혈선수들의 활약은 돋보였다. 이승준은 KBL에서는 기대치에 비하여 다소 아쉬웠던 활약과 달리, 국가대표팀에서는 항상 에이스급 활약을 펼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승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2013 아시아선수권 3위 등의 성적을 올리는데 기여했다. 문태종은 불혹의 나이에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의 주득점원으로 활약하며 12년 만의 금메달에 기여했다.

다만 귀화혼혈선수가 국가별로 단 1명밖에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전성기에 이들의 재능을 대표팀에서 다 활용하지 못한 것은 아쉬웠다. 가드인 전태풍은 빅맨이 부족한 대표팀 사정상 한 번도 태극마크를 달고 메이저대회에 나서고 싶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동준-김민수-문태영 등은 국제대회에서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귀화혼혈선수들의 한국무대 적응기가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원하준, 박태양같이 한국무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1시즌만에 미국으로 돌아간 실패사례도 존재한다. 서울 SK에서 뛰었던 박승리는 3년간이나 한국무대에서 활약했으나 귀화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그저 농구선수로서의 직업적 편의를 위하여 제도를 악용했다는 비판을 피할수 없었다.

법무부의 우수인재 채용 정책에 따라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비교적 쉽게 취득한 문태종-문태영 형제 역시 농구 실력은 출중했지만, 오랜 한국생활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어 구사나 한국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래저래 논란이 많았던 귀화혼혈선수 드래프트는 결국 2013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귀화혼혈 선수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은근히 존재했다. 이동준은 프로 진출전 연세대 재학 당시 '용병'이라는 이유로 상대팀으로부터 경기출전을 보이콧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삼성 시절에는 경기중 나이가 어린 국내 선수로부터 욕설을 듣기도 했다. 선후배 문화가 강한 한국농구에서 일반적인 한국 선수들 사이에선 벌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점에서 혼혈 선수들에 대한 차별 논란이 일었다. 전태풍 역시 한국진출 초기에는 나이 어린 국내 선수들이 호칭을 쓰지 않고 반말을 사용한다면서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또한 귀화혼혈선수제도 초창기에는 선수들이 3년마다 강제로 팀을 옮겨야한다는 규정도 존재했다. 사실상 준외국인 선수급 기량을 지닌 귀화선수로 인하여 팀간 전력 불균형을 초래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귀화선수를 상품 취급한다는 비판도 많았다. 특히 전태풍은 이 제도를 명백한 '차별'이라며 노골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많은 귀화혼혈선수들이 한국무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깔이나 개성을 포기해야했던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30대 중반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한국에 진출한데다 유럽무대에서 압도적인 커리어를 쌓았던 문태종처럼 데뷔 초기부터 존중을 받은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수들은 보수적인 국내 지도자들과 만나면서 플레이스타일을 강제로 바꿔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내외곽이 모두 가능했던 이승준이나 김민수가 한국농구 진출 초창기에 빅맨으로 역할을 제한받으며 재능에 대한 기대만큼 성장하지는 못한 것이나, 전태풍이 화려한 드리블을 구사하거나 플로터(공을 한 손으로 슛하는 기술) 등을 쓰지 못하게 제약을 받았다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한국농구에 대한 애정이 특히 강하고 소신발언으로 유명했던 전태풍은, 은퇴후 한국농구가 선수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억압하는 현실에 대하여 여러 차례 쓴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찬란했던 추억도, 아쉬웠던 기억도 뒤로 한 채, 귀화혼혈선수들의 시대는 어느덧 역사속으로 저물어가고 있다. 한국을 떠난 선수들도 있지만 이승준, 이동준, 전태풍같이 현역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에 남아서 농구에 대한 열정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인물들이 있다. 이들이 한국과 다양한 해외무대 경험을 통하여 겪었던 시행착오와 노하우들을 거울삼아 앞으로도 한국농구의 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귀하게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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