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디오를 언제부터 들었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언니와 나는 <이선영의 영화음악>을 들으며 카세트테이프에 녹음을 했다. 당시 그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음악은 대부분 외국영화였다. 영화 내용도 모르면서 우리는 매일 저녁 귀를 쫑긋하며 라디오를 들었다. 약간 중성적이면서 기품있는 목소리. 빛깔로 치면 고급스러운 은은한 회색빛 같은 이선영씨의 목소리. 그 목소리를 기억하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그 음색이 생생히 기억나는 건, 녹음해서 듣기를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단짝 친구가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 사연을 보냈다. 당시 시험기간이었는데, 그 친구는 몇 월 며칠 꼭 읽어달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거기에 내 이름도 함께 불러달라고 적어놓았다. 야간자율학습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와 나는 각자의 집에서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들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진행자였던 이문세씨가 그 친구와 내 이름을 불러준 순간, 나는 뭔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기했다. 라디오에서 내 이름이 나오다니. 라디오는 보이지 않는 끈이었다.
 
라디오에 얽힌 추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나는 늘 라디오와 주파수를 맞추며 살아왔다. 당시는 카세트 플레이어(007 가방보다 조금 작은 크기)로 라디오를 들었는데 동그란 버튼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원하는 주파수를 맞췄다. 1mm만 어긋나도 잡음이 들리고, 다시 1mm만 돌아와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교감 성공! 동그란 버튼을 만지작거리며 주파수를 맞추던 그 손맛은 잊을 수 없다.
 
라디오 키드는 라디오 작가가 되었다 
 
 라디오

라디오 ⓒ 픽사베이


라디오의 많고 많은 추억 중, 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언니와 나는 라디오를 너무 동경한 나머지, '라디오 놀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한 명이 엽서를 쓰고, 한 명이 라디오 DJ가 되어 읽어주는 놀이로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다. 멘트도 직접 쓰고, 사연도 직접 써서 라디오 DJ를 흉내냈다.
 
나중에 들어보면서 우리는 마치 라디오 DJ가 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고 우쭐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녹음 된 내 목소리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내 목소리는 왜 이선영만큼 근사하지 않은걸까. 그리고 도대체 '여의도동'은 어디길래, 모든 라디오와 텔레비전 DJ와 사회자들은 그곳으로 엽서를 보내라는 걸까. 그곳은 라디오만큼이나 멀리 떨어진 행성 같았다.
 
티비보다 라디오를 더 좋아했던 라디오 키드는 어느 순간, 라디오 작가가 되어 있었다. 매일매일 오프닝, 멘트, 사연, 클로징 등의 원고를 직접 쓰거나 다듬으면서 어린 시절 라디오 놀이를 떠올렸다. 처음 라디오 방송을 했을 때의 그 짜릿함을 잊을 수 없다. 아마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간 기분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물론 가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쓴 원고가 DJ의 음성을 타고 내가 모르는 곳까지 널리 퍼진다는 건 떨리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경험이었다.
 
처음 라디오 원고를 쓸 때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라거나 '이쁜 수필같은 글'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라디오 오프닝 원고를 쓰고, 청취자들의 사연을 듣고, 그들이 보내온 메시지를 읽으며 나는 라디오 원고야말로 가장 치열하고 성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라디오 멘트는 거창한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아주 소소한 것들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소재는 작으나 그것이 불러오는 공감은 상상 이상으로 위대하다.
 
라디오가 내 마음에 그토록 들어와있을 줄이야
 
라디오작가를 5년 반 동안 했다. 그동안 단골 청취자들도 생겼고, 우리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애청자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라디오 밖에서 서로 만난 적은 없다. 언제나 사연이나 글, 신청곡으로 그들의 기분, 마음, 건강, 걱정거리, 기쁨, 소소한 행복 등을 전하고 우리는 짐작할 뿐이었다. 그들의 사연을 읽어주고 신청곡을 들려줌으로써 더 큰 공명을 만들어냈다.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공명들의 교집합. 그것이 라디오의 감동이었다.
 
나는 5년 반 동안 한 명의 DJ와 일했다. 2011년 10월 22일 방송은 그 진행자의 40여 년 DJ생활을 마감하는 방송이자,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방송이었고 라디오 작가로서의 나의 마지막 방송이기도 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보통 토요일은 녹음을 했지만, 그 날은 특별한 날인지라 생방송을 했다. 한 시간동안 애써 담담하게 멘트를 하던 DJ는 마지막 클로징멘트를 하며 울먹였고, 마지막 곡이 나가는 동안 마이크 전원을 내리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었다. 마치 어린 소년처럼.
 
마지막 방송 다음날 나는 하루종일 집에 누워있었다. '치열한 생활인이 되자'고 마음먹으며 라디오 오프닝, 클로징 멘트를 썼던 나는 치열한 생활인이 아닌 무기력한 몽상가가 되어 울적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라디오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와있을 줄이야. 그저 단순히 한 프로그램이 끝난 것이 아니라 나에겐 한 시대가 끝난 것이었다.
 
비록 강석-김혜영의 '한 시대'는 지났지만...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33년 대장정 마무리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DJ 강석과 김혜영이 10일 일요일 마지막 생방송을 끝으로 30여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성대모사와 시사 풍자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며 라디오 시사 콩트의 선구자로서 라디오 전성기와 함께했던 강석은 1984년부터, 김혜영은 1987년부터 함께 만 33년 동안 '싱글벙글쇼'를 진행하며 웃음으로 서민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DJ 강석과 김혜영이 6일 서울 상암 MBC 본사에서 열린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감사패 수여식에 참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 33년 대장정 마무리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의 DJ 강석과 김혜영 ⓒ MBC


지난 5월 10일 MBC라디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가 막을 내렸다. 5월 초, 그 소식을 접하고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는 시사 프로그램 라디오작가들에게는 바이블과 같은 존재다. 작가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낯익은 시그널 음악, 성대묘사, 강석 김혜영의 찰떡궁합. 그 프로그램을 들으며 웃으며 통쾌해하고 짜릿해했던 사람이 어디 나뿐일까.
 
33년 매일같이 진행했던 프로그램을 그만둔다는 기분은 어떨까. 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짐작만 해볼 뿐이다. 5년 반 동안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그만 둔 나도 다음날 몸져누웠는데, 강석과 김혜영 그리고 오랜 스태프들의 소회야 오죽할까. 나는 그들의 마지막 방송을 듣지 않았다. 가슴이 아파서라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 그 마지막을 기정사실화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라디오 진행자는 바뀌었지만, 그들이 세상에 불어놓은 커다란 공명과 마치 꿀타래 실처럼 가느다랗고 촘촘하게 이어져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로애락. 그 공명과 인연은 제법 탄탄하기에 <싱글벙글쇼>는 앞으로도 청취자들의 곁에 오래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비록 강석, 김혜영의 '한 시대'는 지났지만 말이다.
 
먼 훗날 또 누군가는 그렇게 회상할지 모른다. '내가 라디오를 언제부터 들었는지 기억은 확실치 않다'라고. 역시 마지막으로 라디오를 듣게 될 날이 언제일지도 모른다. 작정하지 않는 이상,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디오는 그런 것이다. 한 시대가 가면, 또 한시대가 오는 법. 끝도 시작도 없는 아득한 사랑의 미로같은 사랑.

라디오에 귀를 쫑긋 기울이며, 손맛을 느끼며 주파수를 맞추던 '라디오 키드'는 더 이상 없을지라도, 라디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행성이 되어 우리 주변을 빙빙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라디오라는 행성과 주파수를 맞춘다.
 
33년간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기쁨, 소소하지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준 강석, 김혜영씨에게 애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말, 수고하셨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라디오 싱글벙글쇼 라디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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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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