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반민정

배우 반민정 ⓒ 무비스트, 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반민정은 15년을 묵묵히 한 길만 걷던 배우였다. 주어진 작품과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배우였고,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더 나은 연기를 고민하고 정진하던 배우였다. 그런 배우의 삶이 한 순간에 짓밟혔다. 몸도 마음도 추스를 새 없이 하나씩 밝혀지는 사건의 정황들은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조직적이고 악의적으로 가해진 사람에 의한 상처는 그 무엇보다 깊은 상흔을 남겼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외롭고 고된 법정 싸움을 거치며 유의미한 결과들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잃은 것은 너무나도 많았다. 일상은 사라졌고 피해자가 돌아갈 곳은 없었다. 침묵하는 동안, 가해자와 언론에 호도된 대중의 시선은 아직도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난 6년 동안의 일들이 헛되지 않게 더 이상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야만했다.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상처를 받았지만, 다시 치유하고 나아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힘겹던 시기에 작업한 영화의 개봉을 계기로 이제는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거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도 품어보았다.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질 거란 믿음으로 제자리를 찾기 위한 첫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어렵게 용기를 낸 그 목소리와 걸음에 이제는 우리가 답하고 손을 내밀어야 할 차례다.
 
- 호스피스병동에서 근무하는 정신과전문의 강수연 박사와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대전 블루스>의 원작은 김용을 작가의 옴니버스 연극 '손님'이에요.
"<대전블루스>는 원작과 느낌이 많이 달라요. 원작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웰다잉에 초점을 맞췄다면 영화는 웰다잉이라는 주제 속에서 강수연 박사가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어요."
 
- 본인이 연기한 강수연 박사의 캐릭터 설정에 어떻게 접근했나요?
"강수연 박사의 삶과 의사라는 직업 등 여러 상황들을 연구했고 감독님과 많은 소통을 했어요. 그 당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힐링이어서 미흡하지만 매 장면 소중하게 최선을 다해 몰입하며 촬영에 임했어요."
 
- 영화는 강수연 박사와 세 환자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잖아요. 환자들의 사연을 통해 가정의 불화, 종교적 질문 등 여러 삶의 화두가 등장하는데요, 이에 대처하는 강 박사와 환자, 보호자, 병원 관계자들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속에서 강 박사가 결국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그려져요.
"강 박사는 세 환자뿐만 아니라 모든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이타적인 의사예요. 마치 본인의 일인 것처럼, 자신의 아픔처럼 공감하고 환자의 입장에서 대하거든요. 그래서 환자가 가장 평안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요. 남겨진 가족들보다 환자를 더 중시하는 거죠. 강 박사도 결국 떠나잖아요. 그 과정에서 자신도 치유의 과정을 겪지 않았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강 박사는 각자의 스토리와 상처를 갖고 있는 환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아요."
 
- 강 박사가 처한 상황들을 인지한 후에는 환자들과의 관계나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쉽게 납득이 되지만 그 정보는 영화 후반에 밝혀지잖아요. 그래서 초중반에 영화를 볼 때는 의사의 본분, 태도에 대한 관객 각자의 기준에 따라 의문이 생기는 지점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모호한 부분들을 오직 연기로 관객을 이해시키며 극을 끌고 가야한다는 것이 배우로서는 난해한 과제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했던 부분인데, 결국 매 상황, 매 장면마다 몰입하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스토리와 캐릭터를 분석하고 큰 흐름은 인지하고 있되, 순간순간마다 강수연이라면 이런 감정과 이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 몰입하려 노력했죠."
 
- 그렇다면 강박사 캐릭터의 성향, 감정 등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크게 중심을 잡고 간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환자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다보니 보호자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리는 의사이기도 하거든요. 박애, 이타심이라는 두루뭉술한 표현만으로는 상세하게 설명하기 힘든 캐릭터인 것 같아요.
"환자의 아픔이나 상황을 내 일처럼 여기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성향은 동의가 된 부분이었고요. 감독님은 영화에서 표현된 것보다 외적으로 더 감정을 표현하길 요구했어요. 아무리 개인사가 있는 강 박사라 할지라도 그렇게까지 감정이 표현되어야 할까,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결국 제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까지는 표현을 했고요, 감독님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저와 타협을 했어요. 예를 들어 기현이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장면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사로서의 중립적 태도를 넘어 본인의 가족이 죽은 것처럼 슬퍼하며 울잖아요. 내적으로 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감독님은 강 박사의 기본적인 성향에 입각해서 환자의 가족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원했어요. 제 생각과 감독님 생각을 조율해서 지금 영화에 담긴 정도로 표현이 됐는데, 미흡한 점이 있지만 촬영하는 순간 강 박사의 감정은 제가 그 당시 분석하고 감독님과 소통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어요. 저도 그렇고, 배우라면 대부분 자신의 연기에 100% 만족을 못 할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음 작품을 위해 더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발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다분히 연극적 요소가 많이 포함된 영화다보니 극적으로 표현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이질적이고 어색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중간에 편집된 것을 봤을 때도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영화도 흐름이 있잖아요. 요즘 선호하는 경향의 영화 방식을 택하기보다 감독님의 철학이 많이 담긴 편집으로 구성한 것 같아요. 감독님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도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길 원한 것 같아요. 그런 이유로 연극적인 요소들은 관객들의 몰입보다 장면에서 빠져나와 메시지를 생각하게 열어둔 것이라 생각해요. 연극에서도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보면 관객과 극중 인물과의 감정 몰입보다는 극과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관객이 객관적인 입장에서 작품을 이해하고 분석하도록 유도하잖아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어요. 배우로서는 제가 연기한 내용들을 많이 공감했으면 좋겠고요."
 
- 인상적인 연기로 기억에 남는 장면들이 있어요. 우선 강 박사가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실제 모습을 보고 발작을 하는 장면.
"즉흥연기는 아니고요, 강 박사의 증상에 관한 자료를 많이 찾아봤어요. 그런 증상들이 왜,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히스토리를 이해하고, 실제 발작이 일어나는 상황을 찾아보며 연기 분석을 했어요. 그런 과정들이 있었기에 대한뇌종양협회 홍보대사 제안도 수락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자료와 정보가 수집이 되어있었으니 연기를 할 때는 그것들을 기반으로 상황에 몰입할 수 있었어요."
 
- 극한 감정과 표현을 연기할 때 상황에 몰입하면 준비하고 연습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처럼 나오는 건가요, 아니면 상황에 빠져 연기를 하는 와중에도 생각했던 그림을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분석하고 계산하는 건가요?
"제 경우에는 보통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하려고 준비를 하는 거죠. 배우도 직업이잖아요. 관객들이 연기가 사실이라고 믿게 만들고 그 장면에 몰입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직업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최대한 인물을 분석하고 인물이 행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경우의 수를 준비하려고해요. 특히 저는 연습을 많이 하는 편이긴 한데, 민망할 수 있겠지만(웃음), 화장실 장면을 촬영하기 전에도 혼자 발작 연기를 연습했어요. 연습을 미리 충분히 해놓고 촬영현장에서는 그 공간에 녹아들어야 해요. 미리 연습했더라도 현장에서의 여러 변수로 인해 달라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 공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거죠. 그래서 장면 장면에 몰입을 하려고 노력하는 거고요.

연기를 하면서 생각을 하는 부분도 있어요. 어떻게 해야 내가 표현하는 것들이 카메라 너머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을까, 이런 부분들은 연기를 하면서 생각을 하죠. 어쨌든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는 것이니까요. 연기는 그야말로 연기이기 때문에 아무리 몰입하는 과정이라도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면 안돼요. 간혹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부분이 메소드 연기는 폭행 연기도 직접 상대방을 때리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아니거든요. 배우가 상해를 입지 않는 선에서 대부분의 폭행 장면, 특히 심한 폭행 장면 같은 경우는 진짜 때리는 것이 아니라 맞는 역의 상대배우가 폭행당한 고통을 실감나게 연기하는 것이 주가 돼요. 그래서 배우간의 연기 합이 중요한 거죠."
 
- 병실에서 지인의 생일 파티가 끝나고 조 박사와 모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어요. 강 박사의 속내를 많이 드러내는 장면이었어요.
"사실 그 장면은 아쉬움이 남아요. 야외에서 롱테이크로 촬영했는데 사운드 조절이 잘 안 된다거나 여러 주변 환경이 맞춰가기 쉽지 않더라고요. 강 박사와 조 박사의 감정이 넘어가는 단계를 표현하는데 있어 아쉬움이 있었는데, 그래도 전달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강 박사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현실의 강 박사와 혼돈되는 부분을 전달하고도 싶었고요. 집중하려고 노력했는데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웃음)."
 
- 영화 말미 강 박사가 혼란스러워하는 장면에서는 강박사 개인의 삶은 물론 지금까지 영화가 견지해온 주제와 화두를 모두 담아내야하는 연기를 선보였어요.
"말씀하신대로 영화가 담고 있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강 박사 개인의 삶도 있고, 반민정 개인의 삶도 살짝 들어가 있는 것 같고요(웃음). 그 장면에는 많은 것들이 복잡 미묘하게 담겨있을 거예요."
 
 영화 <대전 블루스>의 한 장면.

영화 <대전 블루스>의 한 장면. ⓒ 델로스


- 오랜만의 영화 출연이에요. 소감이 궁금합니다.
"계속 제가 있어야 할 자리였는데... 우선 연기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지금은 그것이 가장 소중하고 기쁜 상황인 것 같아요."
 
- 연극에도 출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로는 전혀 활동을 못했어요. 공연도 2년 전에 짧게 했는데, 외부에 소식을 알리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판결이 난 후였는데도 저를 가해한 범죄자는 사건과 저에 관한 거짓된 내용들을 끊임없이 유포했어요. 그로 인해 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커지다보니 스스로도 두려웠어요. 왜곡된 내용을 믿고 저를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공연장에 와서 방해를 하는 건 아닌가, 공연에 피해를 끼치는 건 아닌가, 두려워서 외부에 알리지 못했던 거죠. 당시 무기력증과 대인기피증이 심한 상태였는데 제가 잘못될까 걱정됐는지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연극 출연을 권했어요."
 
- 당시 가장 힘든 시기였을 테니 출연을 결정하는 것도, 연기를 하는 것도 많은 생각들이 오갔을 것 같아요. 막상 공연을 해보니 연기 자체에 대한 심정 변화가 있었나요? 외부 상황은 힘들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연기를 계속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지던가요, 아니면 이렇게 불안하고 힘든데 연기를 계속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하는 걸까, 부정적인 생각이 들던가요?
"그 당시 힘들고 이런저런 회의도 드는 시기여서 출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어쨌든 공연을 하면서 무대에 서 있거나 연기를 하고 있을 때는 다른 생각 안 하고 몰입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에서 상처를 받긴 했지만 다시 치유하고 나아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기도 했고,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결국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건 연기더라고요."
 
- <대전 블루스>는 언제 캐스팅된 건가요?
"언론에 사건 관련해 제 신상이 알려지기 전에 <대전 블루스>가 들어왔어요. 피해자신상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였지만 암암리에 특히 영화계에서는 대부분 제가 피해자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영화팀에서는 개의치 않고 캐스팅을 해주셨어요. 오히려 제가 괜찮겠냐고 물어봤어요(웃음). 그 당시 사건 세 건이 동시에 진행된 것 같은데요."
 
- <대전 블루스> 촬영 당시 그 많은 일들이 진행 중이었던 건가요?
"영화 촬영 때는 성범죄 사건이 대법원에 있었고, 가해자의 지인 이재포 등이 저에 대한 허위기사 보도로 법정 구속되었는데 2심이 진행 중이었고, 디스패치도 왜곡 기사 보도로 형사조사가 진행 중이었을 거예요. 가해자가 디스패치 기자들과의 통화를 녹음한 파일 여러 개를 다음 카페에 올렸는데 상당히 악의적이고 피해자들에게 문제가 되는 내용이었어요. 결국 디스패치가 사과문을 개재하고 왜곡된 기사들을 삭제했지만 이런 사실을 지금도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에서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촬영을 했나 싶기도 해요. 언론이 악의적으로 메이킹 영상의 이미지와 실제 사고 영상의 이미지 일부를 교차편집해 왜곡보도한 날, 사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했어요. 상황의 심각성을 빠르게 인지한 분들 덕분에 다행히 고비는 넘길 수 있었어요.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 제 입장에서는 실제 제가 당한 사고 장면이잖아요. 그 일부 내용들이 일파만파 언론과 불특정다수에 의해 유포되고 공유되다보니 감당하기 힘들었어요.

그 후에도 가해자는 SNS, 유튜브 등을 통해 피해자와 수사기관과 법원 모두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와 모욕을 지속하고 있어요. 이런 행위는 요즘 심각하게 다뤄지는 디지털성폭력의 일환이고, 저는 해당 허위사실 및 모욕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하는 가혹한 상황에 놓이고 만 거죠. 그런 시기에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를 지탱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어요. 현실에서는 매일같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힘들게 지냈지만, 촬영현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숨을 쉴 수 있었어요. 어떻게 버텼나 싶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나마 연기를 할 때는 외적인 상황들을 잊게 해주는 시간이었던 거죠."
 
- 사건 이야기를 계속 해도 괜찮을까요?
"괜찮아요. 사실 인터뷰를 앞두고 잠을 못 잤어요.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어서요. 아무리 사건 얘기를 안 하려고 해도 이야기하다보면 기사에 같이 녹여서 나가게 되더라고요.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 오해하고 있는 것, 아니면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을 지금은 다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동안 저의 침묵이 오히려 가해자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 것 같아요.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고 싶지 않아요."
 
- 하나하나 정리를 하며 여쭤볼게요. 가장 많이 언급되는 논쟁거리 중 하나는 감독이거든요. 감독이 입장을 밝히면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왜 침묵하고 있냐는 거죠. 감독이 판결 후 SNS에 글을 올린 적은 있지만, 침묵하는 동안 가해자는 감독 디렉션에 의한 연기였다고 주장하다보니 힘 있는 감독에게 책임 추궁은 하지 않고 힘없는 조연 배우인 가해자에게만 죄를 묻고 있다는 논리로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해왔어요.
"가해자가 1심 재판에서 성범죄사건의 논점을 흐리기 위해 주장한 것들 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그 주장 역시 본인 스스로 자신의 추행을 밝힌 것에 지나지 않아요. 감독 디렉션에 의한 연기였다면 감독이 가해자에게 성추행하라고 교사했다는 거잖아요. 감독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것뿐이라 억울하다면 본인이 감독을 고소해야하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감독에게 떳떳하게 디렉션을 받았다면 가해자는 왜 바뀐 디렉션을 피해자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숨긴 걸까요? 촬영 전에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는데 말이죠. 그리고 영상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결정적으로 가해자는 감독의 바뀐 연기 지시도 따르지 않았어요. 이 사실을 가해자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 감독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오히려 성범죄를 당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대응조차 못하는 힘없는 후배 여배우를 공격한 거라 생각해요."
 
 배우 반민정

배우 반민정 ⓒ 무비스트, 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 그렇다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감독은 어떤 입장을 취했나요?
"차근차근 말씀드리면, 2015년 처음 사고를 당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울고만 있었거든요. 감독이 와서 제가 우는 걸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삼자대면을 했고, 사과를 했고, 다음날 가해자가 하차하겠다는 문자를 보냈어요. 감독은 처음에 가해자를 고소하라고 했어요. 증인이 되어주겠다면서요. 콘티가 있고 리허설도 했으니 감독이 저에게 말하지 않은 다른 디렉션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감독이 가해자에게 제가 없는 자리에서 다른 디렉팅을 했다는 걸 알게 된 건 2년이 지나 가해자와 2심 재판을 하던 2017년이었어요. 검사님의 면담 요청으로 검사실에서 메이킹 영상이라는 것을 처음 보았는데, 검사님께서 가해자가 술을 마셨냐고 묻더라고요. 메이킹 영상이라 지칭한 영상도 메이킹 촬영기사가 제출한 편집된 영상이었고요. 그때 처음으로 감독과 가해자가 다른 지시를 주고받는 것을 보았고, 지금까지도 저에게 그 내용을 감독, 가해자, 메이킹 촬영기사 모두 숨기며 보여주지도 알리지도 않았어요. 사람들을 쉽게 믿는 내 자신을 자책하게 되더라고요.

고소를 적극 권했던 것도 감독이고, 현장에서 성범죄 피해를 당한 저를 위로했던 자도 메이킹 촬영기사였거든요. 알고 보니 메이킹 촬영기사는 가해자의 최측근으로 의도적으로 제 주변을 맴돈 거더라고요. 성범죄 형사재판, 민사재판, 가해자 지인의 명예훼손 재판, 검찰 조사 등 동시에 여러 사건이 진행됐는데, 대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어요. 그 상황에서 감독을 고소해 또 다른 법정 싸움을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컸어요. 정신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란 생각이 들 정도의 상황이었거든요. 물론 감독이 책임져야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추후에 변호사와 상담을 했지만 교사로 보기 어려운 지점들이 있다더라고요. 감독이 가해자에게 연기를 얼굴 위주로 지시하고 카메라 사이즈를 알려주는 내용도 메이킹 영상에 담겨있었고, 가해자는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은 것이 분명했어요.

감독이 디렉션을 할 때 가해자는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는 것처럼 허공을 보고 있는 모습도 보였고요. 그 영상을 메이킹 필름이라 할 수 없는 것도, 보통 메이킹 필름은 홍보를 목적으로 주연배우 중심의 촬영이 주가 되는데 제가 촬영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저는 몇 초 나오지도 않아요. 감독과 스스로 단역이라 주장하는 가해자만 담겨있죠. 심지어 메이킹 촬영기사는 2심 재판에 가해자 측 증인으로 나왔음에도 피해자에게 메이킹 필름을 보여준 적도 없고 알린 적도 없다, 사적인 목적으로 영상을 촬영했다는 취지로 법정 증언했어요. 그런데 후에 가해자와 함께 참석한 기자회견에서는 정반대의 내용으로 발언을 하더라고요. 인간적인 실망감, 배신감은 차지하더라도 법적 싸움만 6년이에요. 너무 힘들어요. 아무것도 몰랐던 피해를 당한 배우가 감독의 행동에 문제제기를 할 순 있지만 과연 법적 대응까지 했어야만 하는 걸까요? 감독의 지시에 따랐다고 주장하는 가해자에게 물어야하는 일 아닌가요?"
  
- 현장에서 감독 외에도 제작사 대표, 프로듀서, 소속사 대표 등 사건을 인지하고 해결해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은 어떤 조치를 취했나요?
"지금 생각하면 당시 이상한 점도 많았어요. 경기도 이천에서 촬영을 했는데, 사고 발생 후 거의 감금되다시피 이동에 제약을 받았어요. 그전까지 서울을 오가며 촬영하는 스케줄이었는데 감독과 제작진에게 연락이 왔어요. 갑자기 모든 일정이 바뀌었다며 촬영장으로 내려오라고요. 그 이후로 서울에 올라가지 못했어요. 모든 스케줄을 바꾸더니 나중에는 촬영 일정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무조건 촬영이 있다고만 하고 막상 기다리고 있으면 연락이 없어요. 제작진은 피해자를 보호하고 사건을 원칙대로 처리하려 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만 침묵하면 된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철야 촬영을 마치고 나오는데 제작사 대표가 가해자가 왔으니 만나서 사과를 받으라고 제게 소리 지르며 화를 내더라고요. 이미 그 사람은 사과했고 하차한 줄 알았는데, 다시 현장에 나타나 겁을 주었어요.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와 분리하는 것이 아닌 불안전한 일터의 상황을 만들었던 거죠.

그때 저는 제 정신을 잡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먹으면 토하고 정말 한시도 버틸 수가 없었거든요. 감독도 촬영이 끝나면 쉴 시간도 주지 않고 따로 이야기 좀 하자고 수시로 문자하고 전화했어요. 이틀정도 입을 옷과 지방 촬영분의 준비만 하고 내려왔는데 촬영이 끝날 때까지 근 한 달 동안 집에 못 갔어요. 당시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신고나 고소를 해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솔직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어찌됐든 영화의 주인공이니 촬영을 잘 마쳐야한다는 생각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판단이 잘 안 되는 상태였어요. 내가 힘들어하니 감독이 계속 연락을 하고 만나서 어떻게든 정신을 붙잡아주려고 했던 거라 여겼거든요. 돌이켜보면 과연 그런 것이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네요."
 
- 단순히 가해자의 인성이나 도덕성 같은 개인적인 문제로 국한할 사건이 아니라 더 큰 부분들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성범죄 피해뿐만 아니라 전 소속사 대표, 언론, 심지어 법조인에게도 가해를 당했거든요. (한숨) 영화계, 연예 매니지먼트, 언론,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들을 온 몸으로 겪었어요. 6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사람이 겪기 힘든 일들을 그 과정에서 다 겪었거든요. 검사님이 사건을 조사하다 면담을 요청한 적이 있었어요. 검사님께서 성범죄 가해자 한사람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 조직적으로 가해를 당했다면서, 참 힘들겠다는 위로까지 건넬 정도였어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펑펑 울었어요. 도대체 나한테 왜들 그러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어요. 가해자의 성범죄를 덮기 위해 인맥, 지위, 위력 등이 동원되었는데, 그 중에는 언론사 기자, 제가 몸담았던 소속사 대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배우도 있었어요. 물리적인 상처보다 사람에 대한 배신감, 상처가 가장 깊고 아프더라고요. 그들 모두 저보다 인생을 오래 살았고 심지어 아버지 연배인 분도 있는데, 지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책임지는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보이면 좋겠어요."
 
- 가해자, 제작사 대표, 소속사 대표, 스태프들이 피해자를 어르고 압박하면서 사건을 무마하고 영화는 완성하려는 방향으로 합의를 봤거나,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요. 어찌 보면 모두가 가해자, 공범, 방관자가 된 거겠죠.
"제작자나 감독이나 사고가 났을 때 조치를 취하는 방법이 현명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해요. 이 사건이 가십거리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는 15년 이상 배우라는 한 길만 걸었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던, 신인도 아니고 어린 나이도 아닌 저도 당했어요. 당하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이 나이에, 이 경력에도 당하는데 연기를 시작하는 친구나 혼자 일하는 친구들은 오죽할까 싶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그만큼의 경험과 해왔던 것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버티고 견뎌서 지금까지 왔지만, 만약 어린 나이거나 신인이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것 같아요. 물론 피해를 안 받는 게 가장 좋겠지만, 만약 사고가 났을 때 피해자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는지, 더 이상 이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람들의 인식과 제도가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심각한 구조적 문제로 보여요. 피해자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시스템의 부재뿐만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도 이해관계로 인한 침묵이나 방관을 넘어 적극적으로 가해를 하고 범죄에 가담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구조적 한계가 극명하게 드러난 거잖아요.
"맞아요. 이것은 절대 영화의 예산 규모, 배우 역할의 비중, 업계의 관행, 위력 관계 등의 핑계로 빠져나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문화예술계의 인식과 시스템의 개선으로도 얼마든지 이러한 사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찬가지로 제작사에서 해당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실을 은폐하거나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대처를 했다면 이렇게 피해가 확산되진 않았을 거예요. 사건이 진행되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새로운 정황들이 밝혀지고 있어요. 2심 때 가해자가 1심에서 제출한 자료들을 보게 되었는데, 제작사 대표, 제작진의 대응에 문제가 많았어요. 제작사 대표와 가해자와의 수많은 녹취록, 사건 당시와 태도가 바뀐 일부 제작진 혹은 사건을 잘 모르는 스태프의 확인서 등 가해자가 제출한 자료들을 보면 의문이 생기는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알고 보니 제작사 대표가 스태프들에게 가해자 편으로 확인서를 내라는 단체 문자를 보내 압력을 넣었다고 하더군요. 대표 본인도 확인서를 제출했고요. 만약 나를 고용한 대표가 위력으로 이런 지시를 내렸을 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 사건 이후 일련의 과정들이 가해자 개인이 혼자 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선 것 같아요. 
"가해자는 유죄 확정 후에도 오히려 범죄사실을 자극적인 소재로 이용해 수익을 얻으며 2차 가해를 지속하고 있거든요. 사실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본인도 사건이 이렇게까지 커질 거라고 생각 못했던 걸까요? 아니면 치밀하게 계산적인 사람일까요? 현재 그 사람은 SNS와 유튜브를 통해 극우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데, 더 이상 인격 유린을 견디다 못해 가처분 신청을 내기 전까지 저와 제가 당한 사건은 그자의 개인방송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당하고 있었어요. 사실 지금도 사건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많은 분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심지어 가해자가 개설한 다음 카페에서 활동하며 저를 공격했던 악플러 중에서도 가해자의 거짓 주장에 속았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한 사람들도 있어요.

- 가처분 신청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네요.
"다음 카페와 SNS를 통해 가해하고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는데, 가해자가 본인 이야기를 하는 건 상관없죠. 하지만 저와 이미 판결이 난 사건에 대해 계속해서 허위 내용을 유포하고 인격모독, 심지어 가족까지 모욕하는 건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어쨌든 이제는 나도 살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제 신상이 공개된 후에는 대놓고 성범죄 사건 관련 영상뿐만 아니라 빨간 글씨로 '반민정! 너 잘 걸렸다' '개X랄' 등 2년 넘게 매일같이 이런 내용을 영상에 넣고 유튜브 제목으로 뽑아서 올리는데 너무 무서운 거예요. 이런 걸 누가 볼까 싶었는데 팔로우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다행히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지원센터의 도움으로 심각한 게시물들과 피해자를 비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설된 다음 카페 등을 가처분 신청했어요. 법원에서 인권 유린과 허위 사실 유포, 명예훼손, 모욕이 다 받아들여져서 다음 카페는 폐쇄됐고 게시물은 삭제가 됐어요. 게다가 사전금지 처분까지 내려져서 앞으로 저와 사건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지됐어요. 이렇게까지 안 했다면 가해자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당할 수 있겠구나, 심지어 내가 죽고 난 후에도 나의 죽음이 또 자극적인 내용과 영상으로 돈벌이 수단이 될 수 있겠구나, 나는 이 사람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건가, 이런 무서운 생각이 평생 들었을 거예요.

이제는 각자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6년을 매일 매일 지옥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내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도 사건이 너무 커져서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 생각하고 싶어요. 오랜 시간 너무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했잖아요. 대중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배우라는 직업을 택했을 텐데, 우리가 다시 대중에게 돌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더 이상 괴롭게 하는 일은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를 계기로 나도 조금은 숨을 쉴 수 있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작은 희망을 품었는데, 정말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 민사 소송에서도 승소했잖아요.
"한 푼도 배상 못 받았어요. 그 사람이 못 주겠다 하면 끝이더라고요. 민사에서 이기면 그동안 나를 도와준 단체나 연대해준 분들에게 기부를 통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질적으로 피해복구가 되는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오히려 피해만 계속 늘어났고요. 제가 겪은 6년이 가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화계나 문화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지난 6년 동안의 일들이 헛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하루빨리 저도 힘을 내서 제가 도움 받았던 것처럼 다른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 연대해준 여러 단체, 연대자님들, 언론인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어요."
   
 
 배우 반민정

배우 반민정 ⓒ 무비스트, 이종훈 실장(스튜디오 레일라)

 
- 언론의 허위 보도로 인한 2차 가해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예요.
"가해자가 성범죄 사건에 대한 허위 사실을 언론에 유포했을 때 대부분의 언론사가 저나 제 대리인에게 사실관계 확인을 위한 연락을 하지 않았어요. 배우 이전에 성범죄 피해를 당한 인간인데, 단지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자극적인 기사를 연일 보도했어요. 성범죄를 다루는 언론보도 지침이 있음에도 이를 지키는 언론사는 거의 없었어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사건이 자극적인 가십으로 보도가 돼서 더욱 견디기 힘들었어요. 한번은 법원에서 판사님이 한 언론사에게 어떻게 언론기사가 찌라시보다 못하냐고 질책한 적도 있었어요.

가해자가 SNS나 유튜브에 올린 내용들이 허위이고 명예훼손이 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삭제가 됐고, 앞으로 관련 언급도 하지 말라는 사전금지 처분까지 내려진 거잖아요. 그런데 SNS와 유튜브의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며 가해자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일부 언론사들이 있어요. 기사로 보도되니 사람들은 믿는 거잖아요. 이제는 피해자도 자신의 피해 사실에 대해 잊고 싶거든요. 허위 내용이고 원 게시자의 게시물도 삭제가 됐다, 그러니 기사를 내려 달라, 요청해도 처음에는 내려줄 것처럼 하더니 재산권 운운하며 결국 안 된다고 하는 언론사도 있더라고요. 언론이 범죄자의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큰 문제 아닌가요?

가해자는 수익창출을 목적으로 유튜브 방송을 하고 불법 후원도 받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언론이 홍보해주고 있는 거예요. 미국은 범죄자가 자신의 범죄로 얻은 대중적 인지도를 이용해 돈을 벌 수 없게 하는 '샘의 아들'이라는 법이 있더라고요. 우리나라는 이런 부분을 너무 방치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제가 당하기 전에는 언론은 사실만을 보도한다고 믿었거든요. 대중은 언론 보도를 기본적으로 진실이라 믿어요. 법 앞에서 일반인, 유명인의 구별은 없어요. 범죄 내용을 보도할 때는 더욱더 신중하게 보도해주길 간곡히 부탁드려요."
 
- 가해자와 그의 지지자들은 1심에서 가해자가 승소했는데 2심부터 여성단체들이 합류하면서 재판부가 그 압박에 못 이겨 판결이 뒤집혔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어요.
"가해자가 재판 과정을 본인과 여성단체의 대결 구도로 몰고가려하는데 정말 잘못 알려진 거예요. 여성단체와 연대자들이 큰 의지가 된 건 사실이지만 의도적으로 영화인들이 참여했다는 사실을 축소해 이야기하더라고요. 영화인들과 젊은 영화단체들도 주축이 되어 도움을 주었어요. 그들 덕에 2심 재판에서는 영화계의 특수성과 배우라는 직업의 전문 분야를 이해시킬 수 있었어요. 우리가 법과 법조인이 하는 구체적인 일에 대해 잘 모르듯, 판사들도 배우가 상대배우와 어떻게 합을 맞춰 연기하는지, 영화는 어떻게 촬영을 하는지 현장에 대해 잘 모르잖아요. 1심에서는 놓쳤던 부분이었어요.

영화촬영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법정에서 사고 영상을 초단위로 분석한 새로운 증거가 채택되며 결정적으로 유죄를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단체의 압박 때문이 아니라 영화단체와 영화인들의 도움이었다는 걸 가해자도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가해자는 수천, 수만 장의 프레임을 0.1초미만으로 세밀히 쪼개서 저보다 더 오랜 시간을 법정 진술했거든요."
 
- 1심과 2심 재판부는 사건의 접근부터 전혀 달랐군요.
"1심 재판부는 영화계의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중요한 증거인 영상들, 즉 사고 영상과 메이킹 영상의 분석 자체를 안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단순한 건데 말이죠. 증거 영상이 있는데 재판부는 왜 법정에서 조사할 생각을 안 했을까요? 1심에서는 오직 진술만 했거든요. 그런데 2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는 괴롭고 힘들겠지만 사고 영상을 보면서 하나하나 진술할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내가 당한 영상을 법정에서 보며 진술해야한다니, 생각만으로도 너무 힘들었어요. 정말 많이 고민했고, 결국 하겠다고 답했어요. 그리고 확실하게 유죄의 증거로 입증됐죠. 1심에서는 그렇게 놓친 부분들이 많았어요. 2심에서도 논점을 흐리기 위한 전략으로 가해자 측 변호사의 인신공격에 가까운 발언이 계속 됐어요. 이에 판사님은 피해자가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그게 성범죄를 당한 것과 무슨 상관이냐, 재판부는 실제 성범죄 여부만 판단하겠다, 영화가 19금이면 추행을 해도 된다는 것이냐, 다른 지엽적인 것들은 이야기하지 말라고 첫 재판부터 선언을 했어요." 

- 그동안 어떤 단체나 개인에게 도움을 받았나요?
"1심 때는 피해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도 없었고, 알리는 것도 두려웠어요. 그래서 피해자 지원을 받아 국선변호사를 선임해서 진행했어요. 당연히 유죄가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무죄가 나왔고, 판결문이 피고인 변호인 의견서와 거의 똑같더라고요. 피고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까지 변호사들에게 들었어요.

제 상황을 들은 영화계 선배님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며 여성민우회에 상담을 받아보라고 조언해줬어요. 가해자 측에서는 88개의 여성단체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데, 독립영화협회나 영화노조, 찍는페미 같은 젊은 영화인들과 영화 단체가 주축이 되어 가장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가해자 측은 여성단체와의 대결구도를 만들어 사건의 논지를 흐리는 작업을 했는데 사실 어느 정도 그들의 의도대로 된 부분도 있었어요. 저는 연기만 생각하고 직진했던 사람이라 사회적 문제에는 많이 미흡했어요. 페미니즘이라든가 영화계의 문제들이 피부로 와 닿진 않았거든요. 나조차도 배우는 어느 부분은 감당하고 어느 부분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을 자각하게 되는 시점이었는데, 다행히 영화단체에서 연대를 해주었죠.

개인 연대자분들도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특히 마녀님이라는 연대자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그분은 지금도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를 하고 있어요. 저도 어느 정도 피해 회복이 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그분만큼은 아니더라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실 멘탈이 굉장히 왔다 갔다 했거든요. 재판 과정에서도 그랬지만 마녀사냥 당하듯 언론이 몰아갔을 때는 너무 억울해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어요. 그럴 때 그분이 견딜 수 있게 잡아주셨어요. 연대해준 분들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약하지만 조금이라도 제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하고 싶어요."
 
- 영화계에도 미투 운동이 일어나고 어마어마한 반향이 있을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잖아요. 그래서 이 사건도 영화계에서 좌시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잘못된 관행들이 쉽게 변하지 않을 거란 건 알지만, 그래도 변화의 계기와 자성의 분위기가 형성된 상황에서는 용기를 낸 피해자들에게 최소한의 호응은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요, 그래야 다른 목소리들이 계속 이어지고 변화가 진행될 거라 생각하거든요. 큰 힘이 되진 않을지언정 목소리를 보태는 것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움직임도 별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렇게 분노하던 영화인들은 다 어디 갔을까 싶기도 하고요.
"어느 영화 관계자가 저로 인해 번거롭게 촬영 전에 교육하고, 전에는 안 해도 될 촬영 준비와 리허설을 한다며 비꼬듯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정말 잘 됐네요, 당연히 그래야죠, 그래왔어야 하고요', 이렇게 대답했는데, 제가 그렇게 이야기할 거라고 전혀 생각 못했나 봐요. 당황해하더라고요. 그런 부분들이 이제는 일상화돼야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작업을 하는 공간인데 서로 배려하고 인격을 존중해줘야 하는 거잖아요. 더디지만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져야죠."     - 궁극적으로 중요한 건 인간 반민정의 일상과 배우 반민정의 자리를 다시 찾는 것이겠죠.
"찾고 싶어요. 많은 도움이 필요해요."
 
- 외롭게 싸워오면서 한국 사법부가 처음으로 영화촬영 도중 성적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판례를 남긴 것처럼 유의미한 결과를 쟁취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영화계 내부의 목소리 부재에 아쉬움을 표하는 이유는 피해자의 자리를 찾기 위한 변화는 영화계 내부의 움직임이 동반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거든요. 그 부분은 피해자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편견과 선입견, 불이익과 차별 없이 전처럼 다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느냐의 문제가 남은 거죠.
"저는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잔 다르크도 아니고 정치도 잘 몰라요. 단지 제가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이 살기 힘든 사회라는 건 알겠더라고요. 몇 차례나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지금도 내가 돌아갈 자리가 없다면 떠나야하나, 그 생각은 계속 하게 돼요. 영화계에 피해 받은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환경이나 제도가 없는 것처럼 법적으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저도 6년 전에는 소소하지만 연기도 강의도 가장 많이 하던 시기였고, 왕성하게 일을 해야 하는 나이였고, 분가도 준비하던 때였는데 지금은 다 잃었거든요. 일도 시간도 돈도 송사를 겪으며 다 허비하고 주변 친구들도 다 잃어버렸어요. 방 안에만 갇혀 나가지도 못했어요. 어쨌든 재판에서 이겼어요. 이겼는데 피해자가 살 길은 전혀 없는 거예요. 가해자가 먼저 소송을 걸었지만 민사에서도 이겼어요. 근데 가해자가 피해 배상 안 하겠다면 저는 받을 방법이 없는 거예요. 추심도 해봤지만 본인 명의 재산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언론에는 가해자가 가압류를 당해서 통장이 막혀 생활비도 인출 못하고 신용불량자가 됐다는 식으로 보도를 하더라고요.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민사 판결 후 추심을 했는데 가해자는 대출도 없고 신용등급이 너무 좋대요. 근데 이미 재산은 다 돌려놓았는지 본인 명의로 된 것을 발견하지 못했대요.

사실 가압류도 계좌를 알 수 없어 가해자가 SNS에 공지한 불법후원금 통장을 추적했는데 10만 원가량이 있었대요. 변호사님께 너무 억울해서 그거라도 압류하고 싶다고 했지만 최저 생활비 이하는 손을 댈 수가 없다고(웃음). 민사 배상판결 금액이 너무 낮게 나왔다고 항소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안 하겠다고 했어요. 항소해봤자 변호사 비용도 부담되고 어차피 피해 배상할 생각이 없는 사람인데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지켜보던 친구가 더 답답했는지 얼마 전 가해자가 유튜브 방송에서 차도 바꾸고 새집으로 이사하는 걸 자랑한다고 알려주더라고요. 이제 충분하지 않느냐고 묻고 싶어요. 당장 피해자가 실질적으로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들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지만,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서라도 좋은 판결의 의의가 사라지게 하고 싶진 않아요. 영화계에서는 피해자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제도가 마련된다면 좋겠고요."
 
- 인식 개선뿐만 아니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것 같아요. 피해자라는 이유로 명백하게 불합리한 처우를 받는 경우가 없도록 현명한 방법들을 함께 고민해봐야 할 시기인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어떤 식으로 자리 찾기를 시도해보고 있나요?
"작품에 출연하는 건 저 혼자 힘내고 뭔가 해보겠다고 해서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죠. 하지만 올해는 힘을 내서 이런저런 활동들을 시도해보려 하고 있어요. 언제까지 가해자에게 끌려 다닐 수는 없으니 내 자리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애써 밝게 인터뷰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가해자가 만든 왜곡된 거짓말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로 저를 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렇다고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닐 테니 언젠가는 진실을 믿어주겠죠. 전에는 영화의 주제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하나씩 해결해나가자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영화계에서도 피해자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어려운 상황의 배우들에게 손을 내밀고 같이 생각해 보고 함께 작품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해요. 어떻게 해야 개선이 될까요? 혼자 힘으로는 너무 미약하네요."
 
- 연대할 수 있는 이들과 최대한 연대를 해야죠. 목소리 또한 계속 내야하고요.
"저는 목소리를 제대로 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가해자의 목소리 때문인지 어느 순간 제가 굉장히 예민하고 까탈스런 이미지가 돼버렸더라고요.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웃음). 하지만 상대배우에게 물리적, 정신적 상처를 줄 수 있는 조심스럽고 민감한 장면을 촬영할 때는 당연히 배우들이, 여배우에 국한되는 건 아니고요, 모든 배우들이 섬세하게 준비를 하고 연기에도 민감하게 반응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 몇 가지 분명한 것들은 있어요.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한 걸음 한 걸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분명 좋은 올림으로 다가올 거라는 건 확신해요.
"그런 생각으로 용기를 내려고요. 저도 용기를 냈으니 많은 분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피해자뿐만 아니라 영화계 관계자들도 함께 해주셨으면 해요. 힘을 내서 목소리를 내고 무언가 해보려는 움직임들은 앞으로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잖아요. 번거롭고 귀찮다거나 다른 누군가가 할 거라는 생각보다는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갖고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봐요. 혼자 할 수 있는 건 없더라고요."
 
- 배우로서의 각오, 바람도 한 말씀 부탁드려요.
"앞으로 좋은 작품, 좋은 사람들 만나서 계속 연기를 했으면 좋겠어요. 경험들을 녹여낸 더 좋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이제는 더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도 제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요. 이런 제 모습이 다른 누군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힘을 내고 있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영화전문매체 무비스트(www.movist.com)에도 실렸습니다.
반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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