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같은 두 달이 흘렀다. 최근에 방영한 드라마, 영화를 통틀어 이만큼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은 없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쀼의 세계'를 보려고 맥주를 싸들고 TV 앞에 앉았다는 인증이 이어졌다. 밤 11시, 종편 채널이라는 다소 불리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마지막회에 28.4%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인터넷에는 각 인물들의 명대사(?)를 활용한 '짤'이 줄지어 유행하고, 이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주조연할 것 없이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영국 BBC에서 제작한 <닥터포스터>(Doctor Foster)를 원작으로 하는 <부부의 세계>는 남편의 불륜으로 인한 이혼과 이혼 후의 부부 관계, 가족 관계의 파국을 다뤘다. 내밀한 심리 묘사, 때로는 자극적이거나 폭력적인 설정도 많았다. 19세 이상 관람가 편성임에도 연출이 충분히 섬세하지 못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더구나 아무리 '한국적'으로 각색을 했더라도 원작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으니 내용적인 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다' 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그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드라마에 반응했다. '쇼윈도 부부'라는 말부터, 오피스 와이프 혹은 오피스 허즈번드라는 단어마저도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지금에, 부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유가 뭘까. 겉으로는 관계에 '쿨'한 척 하지만 실패한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는 반증은 아닐런지. 

일그러진 인간 사회의 자화상
   
'부부의 세계' 포스터 공개 JTBC 새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 포스터.

▲ '부부의 세계' 포스터 공개 JTBC 새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 포스터. ⓒ JTBC


이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관계는 모두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완벽한 부부라 비쳐지던 지선우(김희애)와 이태오(박해준), 여다경(한소희)의 관계뿐만 아니라 손제혁(김영민)과 고예림(박선영) 부부, 민현서(심은우)와 박인규(이학주) 커플까지 어느 하나 건강해보이는 관계가 없다.

남성은 폭력을 휘두르거나 욕망만 쫓으며 무책임하게 굴면서도 뻔뻔하다. 여성은 남성이 휘두르는 행위에 대한 리액션으로만 존재가 드러난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파국으로 몰고가거나, 모른 척 눈감아 주고 재결합을 꿈꾼다. 그도 아니면 약점 삼아 빌딩을 챙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약한 여성은 폭력에 희생되고 숨어다니며 공포에 떤다.

어느 것도 개운치 않다. 그 이유는 그녀들이 보여주는 리액션만으로 그녀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존재를 증명할 적극적인 서사도 없이 대상으로서 행하는 행위만으로 어떻게 하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나. 

또한 드라마 속 인물들은 어느 순간부터 상대방을 '수단'으로 대한다. 이들이 모여서 하는 일이라고는 다른 사람에 대해 숙덕대고 시기하는 일뿐이다. 공식적이고 중요한 일일수록 '사교 모임'에서 은밀히 그 결과를 좌지우지 하고, 아이들의 관계는 어른들의 계급관계 아래에서 이용되고 치부될 뿐이다. 그들에게 대화는 정치 활동의 일부이다.  

지선우의 가족이 겪는 불행은 고산이라는 작은 동네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모두들 그 가십에서 '소외당하지 않을 만큼만' 지분을 행사하며, 때로 만족을 얻는다. 어느 쪽이 이기든 상관 없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니까.

계급적인 문제는 어떤가. 유부남을 사랑한 여다경에 대해 많은 이들은 '예쁘고 부자인 어린 여성'이 왜 저런 선택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에 핑계를 달아줄 마음도 없지만, 내가 착잡했던 건, 과연 그녀가 저지른 행위가 그녀의 삶에 어떤 '피해'를 줬는가였다.

드라마 마지막회에서 여다경은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이태오와 이혼하는 과정은 그의 아버지가 재력과 권력을 이용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그건 그저 여다경에게 '불편한 어떤 경험'일 뿐, 그 경험이 그녀의 삶 어느 것도 망칠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명백하게 그건 '돈'으로 한 일이다. 

반면에 스스로의 능력으로 병원 부원장을 하고 있는 지선우가 아직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여다경을 상대하는 게 버거워보였다. 그건 여다경 뒤에서 허물은 덮어주고 안되면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도와주는 여다경의 아버지 여회장(이경영) 때문이다.

이혼하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입장의 동등함이 과연 지선우와 여다경의 삶에 공평하게 나타날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낯선 남자의 대시를 받고 관심 없다는 듯 책을 챙겨서 나가는 여다경의 당당한 발걸음과,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그러면서도 가정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지선우의 뒷모습을 비교하게 되는 건 입맛이 쓰다. 

입장의 동등함을 말하려면 사회가 인간 사이의 동등함을 우선 담보해줘야 하는데, 지선우와 여다경은 전혀 '동등하지 않다.' 지선우와 여다경을 대하는 이태오의 양면적인 태도가 그러한 계급 차이를 명확히 드러내주며, 동시에 그러한 계급 차이가 이태오 같은 치졸하고 비겁한 인간을 양산한다. 이태오는 여다경을 찾아가지는 못해도 지선우는 끈질기게 괴롭힌다. 그런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사회의 계급성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 아닐까. 마지막까지 지선우를 진짜 괴롭히는 건 뭘까. 

관계 맺기에 대한 가슴 시린 고찰
 
그러나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도 그대들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 칼릴 지브란, <예언자> 중 '결혼에 대하여'

부부란, 그리고 가족이란 대체 뭘까. 관계에 실패한 어른이 넘쳐나는 이 사회에서 성숙한 관계맺기란 가능한 일일까?

왜 우리는 첫 만남에서는 그토록 조심하고 잘 보이려 노력하면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들어오면 모든 걸 권태로워하는가. 왜 그들을 위해서는 '나의 인간성'을 갈고 닦지 않는가. 심지어 부부란 말 그대로 '남'인데 결혼을 하고 나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가족'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러워지는 걸까.

더 나아가 가족이라 해도, 개개인의 인간성과 태도에 따라 그 관계의 질은 천차만별임을 왜 모르는 척 하는 걸까. 이쯤되면 가족이라는 이름을 상대를 억압하고 괴롭혀도 되는 허가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가.

'부부'라는 이름은 하나지만 세상에 부부의 모습은 부부의 숫자만큼 다양하다.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쉽게 '결손 가정이다' '그 부부는 정상이 아니다'며 갖가지 평가를 내리지만 가족과 부부 사이의 일은 그들만이 정확히 알 수 있다. 어떤 판단도 외부적인 것이며 그들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러니 부디, 그들이 서로의 방식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더불어 스스로가 괜찮은 어른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한, 그들에게 함부로 '보통' 이나 '정상'의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 그 불필요한 관심과 시선이 그들을 멍들게 하니까.

<부부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건강해 보이는 관계는 노을이(신수연)와 그의 이혼한 엄마 뿐이다. 둘은 이혼 가정의 모습이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고, 엄마와 딸이라는 단어에 얽매이기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관계에 붙여진 이름이나, 관계가 '정상'인지를 가르는 잣대보다는 그 관계 속에 살아 숨쉬는 사람들이 그 관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혼해서 힘들고, 아들이라서 모르고, 엄마는 안되고 아빠는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이혼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아들이든 딸이든 엄마든 아빠든 서로 어떻게 배려하고 알아가려 노력하는지가 우선이다. 

타인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성찰하려는 노력,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내 가족을 나의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객체로서 진정 사랑하는 법을 알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은 부부만이 아니라 모든 관계에 필요한 유일한 기술일 것이다. 

또한 가진 것 없는 보통의 사람들이 강해질 수 있는 길은, 서로를 아낌 없이 사랑하며, 자본이 가해오는 보이지 않는 공격에 맞서는 것뿐이다. 사랑이 변하는 것보다, 어떤 책임도 돈으로 대신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더 끔찍한 거니까.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매일 변화하고 아파하는 내 주변의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가까스로 이뤄가는 사랑이라는 울타리를 형체 없이 공격해오는 자본이라는 오만함일 테니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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