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 SBS

 
2004년경에 동북공정이란 홍역을 겪은 뒤로 한국의 텔레비전 사극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과거의 한국을 가급적 황제국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백성들의 우러름을 받고 일본에도 위엄을 보이는 SBS 금토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속의 대한제국 황제 이곤(이민호 분)처럼, 지난 십수 년간 사극 속의 한국 군주들은 왕보다는 황제의 위상으로 더 많이 다가왔다.
 
이런 경향이 갖는 긍정적 측면은 한국사의 왜곡된 부분을 시정해준다는 점이다. 과거의 한국을 제후국으로 격하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잡는 데 기여한다.
 
일부 한국인들은 고종 임금의 대한제국 선포 이전에는 한국 군주들이 항상 '왕'으로 불렸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고려시대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백제·신라 군주의 칭호를 '왕'으로 통일했다.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었다.
 
고구려 군주의 한자 칭호는 왕이 아니라 태왕이었다. 광개토왕릉비문, 정확히 말하면 광개토태왕릉비문에서는 전직 군주인 담덕(광개토태왕)이 태왕으로 불렸다. 경북 경주시 노서리 고분군의 신라 무덤인 호우총에서도 담덕을 태왕으로 지칭하는 그릇이 발견됐다.
 
장수왕의 재위 시점인 423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주고구려비(중원고구려비)에서는 현직 군주인 장수왕이 태왕으로 지칭됐다. 태왕이란 한자가 전직 고구려 군주뿐 아니라 현직 군주를 지칭할 때도 쓰였던 것이다. 고구려가 왕 위에 태왕을 둔 황제국 시스템으로 운영됐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최고의 군주를 가리키는 표현, 어라하·건길지

중국 북주(557~581년)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의 이역열전에 따르면, 백제 군주는 어라하(於羅瑕)·건길지(鞬吉支) 등으로 불렸다. 백제인들의 발음을 듣고 중국인들이 발음에 맞는 한자를 찾아낸 것이 어라하·건질지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의 뜻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백제인들이 어라하나 건질지에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가에 주목해야 한다.
 
1972년에 <백제연구> 제3권에 실린 도수희 충남대 교수의 논문 '백제 왕칭어(王稱語) 소고'에 따르면, 어라하에는 '신', '세상', '알 중의 하나' 등의 의미가 있고, 건길지에는 나랏님·누릿님·신군님·대인 등의 의미가 있었다.
 
이는 어라하나 건길지가 최고의 군주를 가리키는 표현이었음을 뜻한다. 또 다른 상급자를 둔 제후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백제 군주 칭호를 한자로 표기할 때는 왕보다는 황제가 더 적합했음을 뜻한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일률적으로 왕으로 표기했다.
 
몽골 같은 유목국가 군주는 칸으로 불렸다. 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한(汗)이다. 한(汗) 자체는 '땀'을 뜻하는 글자다. 한(汗)에 무슨 의미가 담겼기에 칸을 '한'으로 표기했을까 하고 고민할 필요는 없다. '칸'이란 발음과 비슷한 한자를 찾다 보니 한(汗)을 쓰게 됐을 뿐이다.

고조선 군주는 '한'과 비슷한 발음으로 불렸다. 한국 고대사에는 마한·진한·변한이 있었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삼한의 '한'은 가한의 한(汗)과 같이 임금의 칭호이지 나라의 칭호가 아니라고 했다"고 말한다. 고조선이라는 연맹국 혹은 합중국을 구성한 세 군주의 한자 칭호가 마한·진한·변한이었으며, 고조선이 쇠락한 뒤 3대 군주가 분열되는 과정에서 마한·진한·변한이 국가 명칭으로 쓰이게 됐다고 <조선상고사>는 말한다.
 
황제의 도읍을 지칭하는 경(京)이란 표현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 SBS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백제 도읍이 한성(漢城)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한성은 말 그대로 하면 '한'의 성, '한'이 주재하는 성이다. 이 경우에도, 한(漢)이란 한자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발음에 맞는 글자를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어라하나 건질지에 더해 '한'과 비슷한 발음으로도 자기들 군주를 불렀다. 유목민 황제인 '칸'에 상응하는 지위를 백제 군주가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다.
 
고려는 요나라·금나라·몽골(원나라)에 사대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몽골에 사대한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 고려는 한편으로는 최강국에 사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제국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황제국의 전유물인 독자적 연호를 쓴 기간도 있다. 또 황제의 도읍을 지칭하는 경(京)이란 표현도 계속 사용했다.
 
모든 시대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도읍 명칭 끝에 '경'이 붙으면 그곳에 최고의 군주가 산다는 의미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한자 경(京)은 황제나 칸 혹은 '한'이 사는 도읍을 뜻했다. 고려 수도는 개성이 아니라 개경이었다. 대외적으로 강대국에 사대한 기간 동안에도 고려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위상이 유지됐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상당히 심했다. 그런 중에도 군주의 공식 칭호는 왕이 아니라 주상(主上)이었다. 왕이란 용어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로 죽은 왕의 시호에 사용됐다. 공식 명칭인 주상은 중국의 황상(皇上)보다는 약간 격이 떨어졌지만, 현대 중국의 주석(主席)보다는 약간 높은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주(主)님'과 비교할 때도 밀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일부 사극에서는 조선 군주를 '국왕'으로 부른다. 국왕은 중원을 장악한 황제국이 제후국 군주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1등급 제후를 뜻하는 용어였다. 중국인들은 조선 군주를 그렇게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자기들 군주를 주상이라는 고귀한 표현으로 불렸다.

한국 역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가치 있는 일, 하지만...
 
<더킹>을 비롯한 최근 십수 년간의 사극들이 한국을 황제국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그동안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런 역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사관 등에 억눌려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한국 역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한국 역사 속의 황제국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옳고 당연하지만, 황제국의 역사를 권장할 만한 역사로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국가들은 형식상의 국민주권국가에서 실질적인 국민주권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정부 공직을 갖지 않은 일반 국민들이 국가 운영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하고 있다.
 
이와 달리 옛날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왕실의 나라였다. 이런 국가들의 운영 방식은 오늘날의 재벌기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실이 백성을 대하는 시각도 재벌기업이 소비자를 대하는 시각과 유사했다. 자신들이 군대를 동원해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세금을 내고 병역을 제공하는 게 마땅하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이런 시대에 왕실은 나라의 주(主)이고 백성은 객(客)이었다.
 
그 같은 구도 하에서는 왕실이 약하면 약할수록 백성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이 백성을 수탈하는 구조가 존재했으므로, 왕실이 약하다는 것은 곧 백성들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왕실이 너무 강해져 황제 칭호를 쓸 정도까지 된다는 것은, 백성들이 더 많은 수탈을 당할 가능성이 생기게 됐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군주의 도읍은 한층 더 화려해지고 군주의 집도 한층 더 웅장해지기 쉬웠다. 군주의 사사로운 야심을 위해 백성들이 전쟁터에 동원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이 허약했던 시기는, 거꾸로 생각하면 민중이 그만큼 강했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백성들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이 권위를 더 높이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왕실이 허약해서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못한 것을 두고 현대인들이 안쓰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보다는 대한민국이 낫다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 SBS


과거에는 왕실과 국가가 역사 서술의 주체였다. 그래서 과거에 나온 역사서는 온통 다 그런 관점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역사서에서는 군주가 황제 칭호를 써야 좋은 것이고, 군주의 권력이 저 산간벽지에까지 골고루 미치는 중앙집권화가 관철돼야 좋은 것이고, 백성들이 굶주려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국가권력이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두는 것이 좋은 것이고, 군주의 영향력이 전쟁을 통해 외국 영토로까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좋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관점이 아닌 왕실과 소수 지배층의 관점이 투영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옛날 역사서들이다.
 
지금의 인류가 지향해야 할 역사는 그런 역사가 아니다. 국가 지도자의 지위를 하늘 끝까지 올리는 역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지위를 하늘끝까지 올리는 역사가 현대 인류에게는 필요하다. 어느 한 명이 황제가 되어 신처럼 군림하는 역사는 미래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점은 최근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황제국 이미지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을 던진다. 사료 속에 숨겨진 황제국의 역사를 찾아내 한국사의 진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고 필요하지만, 황제국만이 이상적이고 위대한 국가였던 것처럼 미화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우러름을 받지 않고 1인만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은 인류 역사의 발전 방향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다.
 
<더킹>에는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 각각의 우주에서 공존한다. 신라 국보인 만파식적만 갖고 있으면 두 우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만약 <더킹>에서처럼 2020년 현재까지도 우주 어디선가 대한제국이 존재한다면, 그건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그런 나라가 있다면, 만파식적을 훔쳐서라도 대한민국이 있는 우주로 건너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도 문제점이 많은 나라이지만, 적어도 대한제국에 사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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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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