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임'은 조용히 변하고 있다. 그간 한국인들에게 얼른 떠오르는 '임'은 <님의 침묵>의 '님'이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자 불법(佛法) 수도자인 만해 한용운이 노래한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의 '님'을 한국인들은 억눌린 민족의 표상으로 이해했다. 그 해석에 더해, '한용운의 님에 석가도 포함됐다'는 해석도 곁들어졌다.
 
당사자인 한용운은 '님'을 꼭 그렇게만 이해하지는 않았다. 민족이 포함되고 부처님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님은 훨씬 더 큰 의미였다. <군말>이란 시에서 그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라고 귀띔했다.
 
한용운의 님은 그를 길러준, 그를 있게 해준, 그래서 그가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는 모든 존재였다. 그 님 중의 대표적인 한 가지가 민족이었던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의 만해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의 만해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국인의 가슴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임'
 
1980년 이후로 한국인의 가슴에서 꿈틀대는 또 다른 '임'이 있다. 그 임이 우리 마음속에 차지하는 비중은 '그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구약성경 욥기 8장 7절)'는 말로 표현될 만하다. 우리 심장 속에서 그처럼 세력을 팽창하는 '새 애인'은 <임을 위한 행진곡> 속의 '임'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속의 그 임이 우리 마음속을 점점 더 파고들고 있다.
 
한국인들이 <님의 침묵>에 가슴 뭉클해 하는 것은 한용운의 님과 한국인들의 님이 '억눌린 민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역시 노래 제목의 '임'과 한국인들의 임이 '억눌린 민주'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일터의 주인이 돼야 하고, 내가 내 공동체의 주인이 돼야 하는데도, 도리어 짓밟히고 예속민처럼 살아가야 하는 이 땅 민중의 한(恨)이 <임을 위한 행진곡> 속에 갇혀 절규하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 노래 속의 임은 이 땅 민중에게 '민주'를 일깨워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민족'을 표방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한용운의 '님'과 더불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우리 의식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한용운의 '님'이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을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이 충족시켜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임'을 환기시키는 이 노래를 조명한 프로그램이 5월 18일 저녁 KBS1에서 방송됐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기획: 임을 위한 노래'가 그것이다. 5·18 당시 중학교 2학년으로 계엄군과 총과 장갑차를 목격한 작곡가 김형석이 가수 이은미와 함께 이 노래의 발자취를 돌이켜보면서 새롭게 편곡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식의 특집 프로그램이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임'을 환기시키는 이 노래를 조명한 프로그램이 18일 저녁 KBS1에서 방송됐다. '5·18 민주화운동 50주년 특별기획: 임을 위한 노래'가 그것이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임'을 환기시키는 이 노래를 조명한 프로그램이 18일 저녁 KBS1에서 방송됐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기획: 임을 위한 노래'가 그것이다. ⓒ KBS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임'을 환기시키는 이 노래를 조명한 프로그램이 5월 18일 저녁 KBS1에서 방송됐다. '5·18 민주화운동 50주년 특별기획: 임을 위한 노래'가 그것이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국인들에게 '임'을 환기시키는 이 노래를 조명한 프로그램이 5월 18일 저녁 KBS1에서 방송됐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기획: 임을 위한 노래'가 그것이다. ⓒ KBS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 결혼식'
 
방송에서 설명됐듯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티브가 된 것은 '영혼결혼식'이다.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그의 가슴에 묻힌 전남대생 박기순의 결혼식이 이 노래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1950년 생인 윤상원은 전남대 졸업 뒤 주택은행 서울 봉천동지점에 근무하다가, 모교에서 발생한 사건을 듣고 사직서를 낸다. 1978년 6월 27일 송기숙을 비롯한 전남대 교수 11명이 교육 민주화를 주장하며 '우리의 교육지표'란 성명서를 발표했다가(전남대 교육지표 사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고 이들에게 동조하는 시위를 벌인 일을 듣고 그는 은행 문을 박차고 나왔다.
 
광주로 돌아와 광천공단 내 플라스틱공장에 취업한 그는, 위 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받고 광천공단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던 박기순(1957년 생)을 알게 된다. 전남대 국사교육학과 3학년 때 공장에 위장취업이 아니라 진짜로 취업해 노동자 및 노동투사의 길을 걷던 박기순에게 윤상원은 급속히 빨려들었다. 윤상원도 그 야학 강사로 참여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978년 성탄절 다음날 새벽, 박기순은 세상을 떠났다. 야학의 땔감을 구하고자 나무하러 갔다가 밤 12시가 돼서야 집으로 귀가한 뒤 연탄가스에 변을 당한 것이다.
 
윤상원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상심했다. 주위 사람들도 그 상심을 알았다. 그 뒤 윤상원은 광주 녹두서점에서 일하다가 5·18을 맞이하고, 시민군 대변인이 되어 5월 27일 새벽 최후의 순간까지 전남도청에서 전두환 군대와 전투했다.
 
<임을 위한 노래>의 방송 시작 15분에 가까워지는 대목에서, 들불야학 학생이자 시민군 전사였던 나명관씨가 등장한다. 스무 살이었던 그는 60세 얼굴로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나 "5월 27일 새벽 0시 40분에 총기를 받으러 갔어요"라며 "상원이 형이 총을 나눠주고 있더라고요"라는 말로 윤상원과의 마지막을 회상했다.
 
나명관을 보고 깜짝 놀란 윤상원은 "너 집에 안 갔냐? 왜 안 갔냐?"라며 총을 안 주려 했다. 어린 학생들을 그렇게 돌려보내려면서도, 그는 죽음이 뻔히 예상되는 그곳에서 한 발짝도 발을 떼지 않았다. 배우 한혜진의 목소리로 나오는 방송 내레이션은 아래와 같다. 배우의 목소리는 다음 문장 끝부분에서 갑자기 비장해진다.
 
"윤상원은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습니다."

 
그때 윤상원이 나명관을 비롯한 동생뻘들에게 귀가를 종용하며 했던 말이 있다. 이런 말이었다.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죄 없는 수많은 광주시민들이 피를 흘리는 모든 과정을 너희는 지켜봤다. 이제 집에 가라. 이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 전해라. 오늘 우리는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짠한 말이지만, '얄궂은' 말이다. 자신들의 항쟁을 잊지 말고 평생 가슴에 담아두라는 요구했다. 그 어떤 빚쟁이의 말보다도 무서운 말이다. 듣는 이에게 채무의식, 부채의식을 심어주는 말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5·18 광주를 잊지 못했고 광주 시민군도 잊지 못했고 윤상원도 잊지 못했다.
 
그의 감동적이지만 슬픈 최후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안타까워했던 여인, 박기순의 혼을 불러냈다. 그가 살아생전에 박기순의 최후를 슬퍼했다는 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두 영혼의 혼인식을 주선했다. 두 영혼을 기억하는 의식인 동시에 5·18 광주를 기억하는 의식, 두 영혼의 우정을 알리는 의식인 동시에 5·18의 진실을 알리는 의식이이었다.
 
방송이 22분을 경과하는 대목에서 작가 황석영이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차적 목표는 광주의 진실을 전국의 우리 국민들한테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온 뒤, 이런 내레이션이 나온다.
 
"광주항쟁이 끝나고 2년 후 망월동 묘역에서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신랑은 도청에서 숨진 윤상원, 신부는 야학 후배였던 노동운동가 박기순."
 
당시 39세였던 황석영은 1982년 2월에 열린 영혼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안타까워했다. 광주에서 창작 활동 중이던 그는 동지들을 모아 영혼 결혼식에 관한 노래극을 만들었다. 결혼식에 가지 못한 미안함을 그렇게 달랬던 것이다.
 
노래극 제목은 <넋풀이>, 부제는 '빛의 결혼식'이었다. 이 노래극의 7번째 노래로 삽입된 것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었다. 이 노래는 그렇게 세상에 태어났다.

작사 황석영, 작곡 김종률, 노래 오정묵... 영감 백기완
 
황석영이 가사를 짓고, 1979년 MBC 대학가요제 은상 출신인 김종률이 곡을 만들고, 오정묵이 최초로 부른 이 노래에 영감을 제공한 것이 있다. 두 영혼의 결혼식 말고, 이 노래에 영향을 준 또 다른 것에 관해 황석영은 방송이 26분을 경과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딱 떠오르는 게... 백기완씨의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하는 구절이 떠오르더라고. 그 한 구절만 딱 떠오르더라고. 한 구절이 결정되니까 전체의 분위기가 딱 생각이 나요."
 
서울 대학로에 있는 혜화역에서 성균관대로 가는 길목에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집이 있었다. 그 집 대문 앞을 지날 때마다 항상 눈길이 가는 것은 분필로 시 한 수를 적어놓은 칠판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항상 새로운 시가 적혀 있었다. 한용운처럼 시인이자 투쟁가인 백기완은 황석영의 말처럼 <임을 위한 행진곡>에 영감을 제공했다.
 
<역사비평> 2015년 가을호에 실린 정근식 서울대 교수의 논문 '임을 위한 행진곡 - 1980년대 비판적 감성의 대전환'은 영감을 제공한 그 작품이 <묏비나리>라고 하면서 "이 시는 백기완이 1980년 12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지은 것"이라고 소개한다.

박정희 피살 이후의 '서울의 봄(민주화 정국)'과 5·18 광주항쟁 실패로 인한 절망감을 이겨내고자 쓴 시였다고 한다. 장편시인 <묏비나리> 후반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유사하다.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리더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산 자여 따르라
 
백기완은 10·26 사태 뒤 결혼식을 위장해 반정부 집회를 가진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때문에 서대문구치소에 갇히게 됐다. 그 상태로 5·18을 지난 그는 자신이 느낀 시대적 상심을 담아 <묏비나리>를 지었다. 위장 결혼식 사건을 계기로 투옥된 백기완의 노래가 박기순·윤상원의 영혼 결혼식을 위한 노래에 영감을 제공했던 것이다.
 
<묏비나리>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점은 <임을 위한 행진곡>, 이 노래가 전두환뿐 아니라 그 이전의 반민주 독재에 대한 민중적 저항을 계승하고 있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노래가 한국인들을 울컥하게 만드는 이유는 거기 있다. 노랫말이 한국 민중 자신의 역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시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랑하는 것은 이 시대를 해석해온 문인이 작사하고 대학가요제 은상 가수가 작곡한 훌륭한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인 한국 민중이 직접 체험한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노래의 주인공인 박기순과 윤상원은 다름 아닌 한국 민중 전체라고 말할 수 있다.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도 울려 퍼지는 노래

KBS <임을 위한 노래>의 앞부분과 끝부분에서도 강조된 것처럼, 오늘날 이 노래는 홍콩 민주화 시위에서도 울려 퍼지고 타이완·호주·캄보디아의 민중 시위에서도 울려 퍼지고 있다. K팝이라 할 수 있는 이 노래가 외국 시위 현장에서 불리는 것은 이 곡이 세계 민중의 보편적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목숨 걸고 투쟁하는 현장에서 한국 민중가요를 부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5·18 광주를 담은 이 노래가 국제적 보편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5·18 광주항쟁이 전라도를 위한 운동이나 남한을 위한 운동에 그치지 않고 세계 민중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운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에 세계적 보편성이 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보편성을 바탕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은 1982년 이래 근 40년간 한국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에너지는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고 2016년 촛불혁명을 이끌었다. 그것은 지금 또 다른 대(大)역사를 향해 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님의 침묵>의 '님'이 '민족'을 형상화했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은 '민주'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두 '임'은 상호 충돌하지 않는다. 두 개의 임은 현대 한국이 가야 할 과제를 제시하는 이정표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임을 한 명도 두기 힘든데, 무려 둘이나 둔 것은 행복한 일일까? 조금도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한국 민중의 정치적 과제들이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한용운이 <님의 침묵>을 읊은 것이 약 100년이나 되는데도, 한민족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영향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외세 지배의 결과물인 남북분단도 아직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한용운의 '님'을 계속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임'을 위한 공간마저 내줘야 하니, '님'과 '임'을 함께 묻은 한국인들의 가슴은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시구처럼, 한국인들은 시대적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탓에 아직 님을 보내지 못하고 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시대적 과제들을 향한 노력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는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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