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문화, 성차별적인 대사, 사랑으로 포장된 데이트폭력 등 과거 우리가 웃고 넘어갔던 영화의 그 장면들을 여성주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봅니다.[기자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포스터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포스터 ⓒ 조이앤시네마

 
"나는 본래 사내아이로서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머리를 깎이어…"

고 장국영(1956~2003)의 대표작이자 제46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패왕별희>(1993)는 중일전쟁, 국공합작,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시대의 풍랑에 무너진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사랑과 운명을 다룬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영화다. 지난 1일 27년 만에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란 제목으로 재개봉한 영화에는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된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었다.

<패왕별희> 주인공 청데이(장국영 분)은 경극에서 여성 캐릭터를 전담하는 인기 배우다. 어릴 때부터 곱상한 외모로 눈길을 끌었지만 육손이라 배우가 될 수 없었던 두지(데이의 아명)는 아들의 손가락을 잘랐던 엄마 때문에 극단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 때부터 두지의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경극배우가 되는 길은 너무나도 험난했고 고통스러웠다. 두지와 시투(장풍의 분, 단샬로의 아명)가 속한 극단은 배우의 기본기를 탄탄하게 만든다는 명분 하에 체벌과 학대를 공공연하게 저질렀고, 이를 제지하는 사람도 반항하는 견습생들도 없다.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엄격한 교육과 체벌이 필수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나는 본래 계집아이로서 사내아이도 아닌 것이…"라는 대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맞아야했던 두지는 결국 경극학원을 뛰쳐나온다. 하지만 같이 도망친 샤오라이즈와 함께 우연히 관람한 경극을 보고 다시 마음을 바꿔 학원으로 돌아간다.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얼마나 연습했기에 저렇게 멋지게 하는 걸까. 맞기는 또 얼마나 맞았겠어." 

두지와 함께 경극을 본 샤오라이즈는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와 동작에 감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두지 역시 옆에서 조용히 눈물만 흘린다. 그리고 샤오라이즈와 함께 경극단으로 돌아온 두지는 사부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하고,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샤오라이즈의 자결을 목도한다. 

이후에도 대사를 제대로 암송하지 못하여 시투에게까지 폭행을 당한 두지는 결국 대사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모두를 감탄시킨다. 그러나 강렬했던 첫 데뷔의 기쁨도 잠시, 관행이라는 이유로 경극 최대 후원자 장 내관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경극배우로서 성공을 위해, 잦은 구타는 물론 성상납까지 감내해야했던 데이의 삶은 이후에도 파란만장 그 자체다.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주색에 빠져 나라 걱정은 뒷전인 샬로만 해도 시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반면 데이는 오직 경극만 생각하고 지나치게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 대상이 부정축적으로 거부가 된 권세가, 조국의 영토를 침략한 일본 장교라 할지라도 경극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앞에서 노래를 불렀던 데이는 그 때문에 여러 번 고초를 겪는다. 

"아오키 장군은 진심으로 경극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경극은 일본에까지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나라가 어찌 되든 말든 심지어 그 자신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에도 경극밖에 몰랐던 데이는 공산당 집권 이후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경극의 현대화를 반대하다가 반동분자로 몰려 경극배우의 삶을 마감해야 했다. 참으로 미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경극만 생각했던 청데이. 하지만 그의 족적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데이가 경극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듯도 하다. 

"사람은 각자의 운명이 있다. 운명을 거역하지 마라." 

유독 운명론을 믿었던 경극 사부는 데이의 육손을 보고 입단을 거부할 때도, 데이를 장 내관의 침소에 보낼 때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데이가 어머니에게 손가락이 잘려 배우가 된 것도, 샬로를 패왕이라 여기고 평생 그를 사모한 것도, 샬로와 세상에 연이어 버림받은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타고난 운명이었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을 바꿀 수 없을 것 같으니 아예 경극 '패왕별희' 속 우희처럼 살기로 결심한 데이는 매순간 패왕(샬로)과 함께하는 삶을 꿈꾼다. 허나 샬로는 데이가 아닌 화만루의 기녀 쥬산(공리 분)을 선택했고, 데이의 배신감은 커져간다.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죽을 때까지 함께 하라는 사부님의 말을 잊은 거야? 1분 1초가 모자라도 한평생이 아니야, 우리는 한평생을 함께해야 한다고!" 

샬로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연정으로 번민하는 데이. 그러나 동성인 샬로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그를 동성애자 혹은 여성 정체성을 가진 트렌스젠더로 단정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린 데이가 계집아이로 해야 할 대사를 자꾸 사내아이로 혼동한 것은 남성이라는 자의식에서 기인한다. 어릴 때부터 샬로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품긴 했지만, 사랑인지 동경인지 또한 모호해 보인다. 오히려 데이가 취하는 과도한 여성성은 사부들의 잦은 구타와 가스라이팅의 결과로 보인다. 보통 육체적인 성과 반대의 성적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당한다면, 데이는 그 반대인 것이다. 

"저는 청데이에 적격이에요. 저는 항상 예술 속에 살고 있고, 제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으니까요. 제 자신이 바로 청데이예요."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1993년 개봉 버전에는 삭제 되었던 동성애 코드와 관련 일부 장면들이 추가되어 27년만에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 ⓒ 조이앤시네마

 
한편 첸 카이거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장국영은 데이를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가진 인물로 해석하고 연기에 임했던 것 같다. 실제로 장국영은 한 인터뷰에서 예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가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야한다는 신념을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동성애 소재로 주목을 받고, 중국에서는 여전히 관련 장면이 포함된 오리지널 버전을 볼 수 없는 실정이지만 정작 데이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뚜렷하게 규정하거나 혼동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다만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경극 속 인물에 자신을 과 몰입했던 데이는 늘 똑같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경극과 달리 격변하는 현실 앞에 속수무책 무너져갔고, 인생의 전부와도 같았던 경극까지 부정해야했다. 

잦은 체벌은 물론 성상납까지 해야 했던 처지 탓에 경극(예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데이. 만약에 어린 데이가 경극을 수련할 당시 혹독한 구타에 시달리지 않았다면, 장 내관에게 강제로 성폭력을 당하지 않았다면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예술가가 되지 않았을까. 수많은 지식인과 예술인들을 좌절시킨 야만의 시절을 그린 영화 <패왕별희>는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이성적 판단 실종으로 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데이의 삶이 참으로 가혹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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