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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영화운동 1세대 고 홍기선 감독

한국영화운동 1세대 고 홍기선 감독 ⓒ 미인픽쳐스

 
1985년 1기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한 한국영화아카데미는 당시 영화운동과 충무로  제도권 영화를 잇는 중간지대 역할을 맡고 있었지만, 영화를 통해 세상의 변혁을 추구했던 청년 영화인들이 충무로로 가는 것에 대해 당시 서울영화집단 홍기선(감독)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민중영화를 지향하며 영화운동을 하던 입장에서는 충무로라는 제도권으로 들어가는 걸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규덕(감독)은 영화잡지 <키노> 2004년 4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계기와 홍기선의 반응을 이렇게 설명했다.
 
"서울영화집단에서 수세현물납부에 관한 다큐멘터리(<수리세>1983)를 찍기 위해 전라도 시골(구례)에 내려갔는데, 경찰들이 불순분자를 색출한다고 몰려왔다. 새벽에 포위망을 뚫고 서울로 오는 시외버스터미널 식당에서 신문을 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를 뽑는다는 공고를 발견했는데, 운명적인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간다고 했더니 선배인 홍기선 감독이 배신자라고 해서 술 먹고 대판 싸우기도 했다. 그땐 충무로로 간다는 게 변절이었기 때문이다."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는 "당시 홍기선의 생각은 '그냥 민중영화를 만들면서 활동하지 굳이 충무로로 가야 하냐'는 것이었다"며 "영화운동이 충무로로 상징되는 한국영화의 주류에 편입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는 1985년부터 시작된 충무로 진출을 여전히 '투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파랑새 사건을 전후로 영화운동 세대들이 아예 영화를 그만두거나 그토록 혐오하던 충무로를 선택하게 된다"며 "그동안의 영화운동이 젊은 날의 초상처럼 순수했던 것이 아니라면,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충무로 진출을 위한 경력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고... 냉정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낭희섭은 1984년 충무로에서 하명중 감독 <땡볕> 연출부에 있었으나 '파랑새 사건' 이후 다시 나와 작은영화 운동의 일환으로 단편영화 보급과 독립영화워크숍에 전념한다. 그는 독립영화에 대해 "자본을 넘어 권력을 넘어 인간사회의 공동선을 카메라 쇼트에 담아 말하는 것이, 독립영화와 독립영화인들에게 주어진 참으로 귀중한 사회적 역할이며 특권이면서, 멋지고 고난스럽지만 저버리지 말아야 할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임권택, 이장호, 장선우
 
 임권택, 이장호, 장선우 감독

임권택, 이장호, 장선우 감독 ⓒ 오마이뉴스

 
이렇듯 부정적인 시선도 있었지만, 영화운동 초기 세대의 충무로 진출은 이들을 받아줄 수 있는 기존 감독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도 작용했다. 영화운동 세대들이 충무로에 연출부로 들어서면서 함께했던 감독들은 대표적으로 임권택, 이장호, 장선우 등이었다. 이들은 70년대 문화운동과 새로운 영화를 지향했던 영화운동을 보듬는 역할을 한다.
 
안동규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당시 군사독재의 3S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과 결이 다른 영화를 만들었다. 반공영화같지 않은 반공영화를 만들었고 <짝코>(1983)를 통해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그리는 등 분단문제 등에 관심을 기울이며 젊은 세대들과 소통이 되는 감독이었다.
 
이장호는 1975년 '영상시대' 활동을 하며 새로운 영화에 대한 고민과 함께 사회파 영화를 만들어 온 대표적 감독이었고, 장선우는 1970년대 대학시절 마당극패에서 활동하며 민중문화운동에서 뛰어들어 1980년대 충무로에 들어온 후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솔은>(1983)의 기획과 1985년 <서울황제>로 데뷔한 문화운동의 맏형이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인물은 장선우(감독)다. 임권택 감독이나 이장호 감독은 사회운동의 이력이 없었지만, 본명이 장만철인 장선우는 이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장선우는 1970년대 초 박정희의 3선개헌, 교련, 유신헌법 반대 투쟁으로 대학이 소용돌이칠 때, 채희완·임진택·김민기 등이 벌인 마당극·탈춤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민중문화운동 1세대였다.

민중문화운동을 함께했던 김학민(학민사 대표)이 2004년 4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당시 대학에서 민중문화 운동을 주도하는 이들이 반독재 운동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이 미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이 땅의 민중의 삶과 공동체 문화를 말살하고 획일화해갈 때, 반봉건 압제의 함의를 슬기롭게 문화적 코드로 발산했던 탈춤·마당극 등으로 우리 민중문화를 계승해보려던 운동과의 갈등과 충돌은 필연적인 일이기도 했다.
 
김학민은 "이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운동가 중심의 학생운동에 이른바 '딴따라'들이 적극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된 거라고 생각한다"며 "이때부터 대학가의 반독재 운동이 학생 대중들에게도 급속히 퍼져나갔고, 곧 존재론적 자기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딴따라들의 기발한 문화적 기제들이 효과를 발휘한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구체적 상황이 1975년 5월22일 김상진 열사의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김상진 열사는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 교정에서 유신헌법과 독재정권의 허위성을 고발하는 양심선언문을 낭독하고 자결했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 도중 절명했으나 벽제화장터에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화장됐다. 며칠 후 기독교방송(CBS)에서 열사의 육성녹음이 방송됐고, 명동성당 추모미사에서 육성녹음 방송이 공개됐다. 1975년 5월 22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추모식을 개최했는데, 학생운동사에서 '5·22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김학민은 "일명 '오둘둘'로 불리는 이 사건에 서울대 '딴따라'들이 총동원됐다"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학생운동가들이 싹쓸이 투옥됐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70년대 이후 민중문화 운동으로 성숙해온 대학가 문화일꾼들의 정의와 자유에 대한 열정과 저항정신의 발로로 보는 것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밝혔다.
 
장선우는 학내에서 1976년 제적 학생들을 모아 민주청년학생운동협의회를 조직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흠씬 두들겨 맞았고,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 서울대, 연세대 시위의 배후조종자로 지목돼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김학민에 따르면 "당시에는 장선우가 학생 시절의 마당극 운동을 정리하고 TV나 영화 등 영상매체 쪽에서의 활동공간을 모색하고 있을 때"였다.
 
 장선우의 데뷔작 <서울황제> 시니리오. 영화 제목이 검열로 인해 <서울예수>에서 <서울황제>로 바뀌었다.

장선우의 데뷔작 <서울황제> 시니리오. 영화 제목이 검열로 인해 <서울예수>에서 <서울황제>로 바뀌었다. ⓒ 성하훈

 
장선우는 1985년 <서울황제>로 데뷔하는데, 서강대 '영화공동체' 김동원(다큐멘터리 감독)과 경희대 '그림자놀이'의 안동규가 연출부로 충무로에 들어섰다. 아카데미 1기 김의석은 <서울황제> 조감독을 맡았다. <서울황제>는 원래 제목이 <서울예수>였으나 검열 과정에서 제목이 바뀌게 된다.
 
충무로에 진출한 장선우는 당시 영화운동의 후배들을 보듬기도 했다. 수감 중이던 후배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파랑새> 사건으로 수감 당시 장선우로부터 받았던 배려를 저서 <뉴웨이브와 작은역사>(가제, 2020년 출간 예정)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은 못 보던 구치소 직원이 내 수인번호를 불러서 나갔더니 욕탕으로 데려가서 목욕을 시켜주었다. 아무도 없는 호젓한 욕탕에서 시간에 쫓기지 않고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니 정말 기분이 좋았다. 목욕을 끝내고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던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눈을 얼핏 맞추고는 "너 장만철 알아?" 그랬다. 장선우 감독이 인맥이 닿았던 구치소 직원을 통하여 부탁을 했던 것이다."
 
장선우 "민중영화는 민중주체의 예술운동"
 
장선우는 1987년 7월 대학영화연합의 마련한 워크숍에 이효인, 곽재용(감독) 등과 함께 강사로 초청돼 '민중적 영화'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효인에 따르면 당시 장선우는 백기완의 '민중문화론'에 깊이 동화돼 있던 시기였다고 한다.
 
장선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민중영화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대학영화 세미나 등에서 활용되기도 했다. 1985년 <실천문학> 봄호에 기고한 글 '민중영화의 모색'에서 민중영화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상업영화는 이미 그 체질상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것이니 작은영화로 탈출구를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며, 제작 주체를 민중 속으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일어나고 있다. 하여간에 중요한 것은 타협적이고 수구적인 제반 태도에서부터 근본적이고 공격적인 시각에 이르기까지 그 변화의 요구는 전면적이고 한편 근본적으로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중영화란 바로 이러한 전면적인 요구와 근본적인 각성을 추구하는 여러가지 경향을 아우르는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포괄적이란 말은 민중영화라는 틀이 기존 상업영화가 지니는 가능성에서부터 이에 맞서는 작은영화들에 이르기까지 다 끌어안고도 남을 만한 그릇이라는 뜻이며, 역사적이란 민중시대에 제반 민중예술 분야의 축적된 운동량이나 그 논리와 무관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민중영화는 민주주체의 예술운동이라는 시대적 활동과 연관되는 말이면서 동시에 영화의 매체 특성을 반영하는 독자적인 자기 운동 논리를 띨 수밖에 없다. (중략)
 
우리영화는 그동안 특권과 지배, 물신 숭배와 외국 숭배 베스트셀러 숭배, 소재 숭배, 향토주의 숭배, 인기 숭배, 과대망상 등으로 멍들어 왔다. 민중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멍든 영화는 차라리 민중을 죽이는 죽음의 그림자이며 고문일 수도 있었다.
 
민중영화는 곧 살아 있는 영화이다. 또한 민중의 분열, 대립, 적대감, 환락, 부패를 책동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기 회복을 위한 저항, 각성, 통일, 신명을 촉성하는 영화이다. 민중영화에 대한 그러한 규정이 가능할 때 우리 영화는 상업영화이든 실험영화이든, 극영화이든, 기록영화이든, 소재가 무엇이든, 창작 주체가 누구이든, 관객이 누구이든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 된다. 중요한 것은 민중은 누구이며 민중은 무엇인가, 삶의 편에 서 있는가, 삶을 압살하는 자들의 편에 서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민중문화운동협회의 사무국장 시절 불법 연행 미술인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유인택(오른쪽 아래. 예술의 전당 사장).  뒤편에 당시 재야운동가였던 고 김근태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민중문화운동협회의 사무국장 시절 불법 연행 미술인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유인택(오른쪽 아래. 예술의 전당 사장). 뒤편에 당시 재야운동가였던 고 김근태 의원의 모습도 보인다. ⓒ 유인택 제공


문화운동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1984년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를 만들게 되는데, 여기서 비중있는 인물이 또 한 사람 나타난다. 서울대 마당극패에서 활동했던 장선우의 후배 유인택(예술의전당 사장)이었다. 그는 1985년 민문협 사무국장을 맡게 된다. 장선우에 이은 유인택의 등장은 70년대 문화운동 출신들이 80~90년대 영화운동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문화운동에서 터를 닦은 유인택은 1990년대 영화운동에서 눈에 띄는 역할을 하게 된다.
 
유인택은 1983년 대학 졸업 후 제약회사에서 들어가며 평범한 직장인 생활을 택했다. 하지만 재학시절 학생운동으로 문화운동에 열중하던 유인택으로서는 당시 어두운 시대의 상황에서 안주하는 게 체질에 맞지 않았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온몸으로 부딪혀보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전업활동가를 선언하고 퇴사한다. 1984년 극단 연우무대의 사무국장을 맡아 다시 문화운동의 일선에 서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민문협의 살림을 책임지게 된다.
 
유인택에 따르면 군사독재의 감시와 탄압을 받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산하에는 영화분과위원회가 있었다. 구성원은 서울영화집단의 홍기선(감독), 서강대 영화공동체의 산파역인 김동원(감독) 등 다수의 의식 있는 영화인들이었다. 유인택은 "어느 날 홍기선이 농촌영화 <파랑새>를 제작하는 데 돈이 모자란다고 해 민문협에 30만 원 지원을 요청해 지원한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유인택은 이후 1988년 민족예술 전용극장인 예술극장 한마당을 운영하면서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상영을 돕다가 탄압을 받게 된다. 하지만 꿋꿋하게 버티면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로 이어지는 영화운동의 든든한 조력자와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다. 그의 활약은 1990년대 이후 더욱 돋보이게 된다.
 
1980년대 영화운동이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문화운동의 지류 역할을 했다면, 장선우와 유인택은 문화운동의 선배로서 영화운동을 도왔고, 이후에는 아예 영화운동에 전면에서 주도적으로 나서게 됐다는 특징이 있다.
 
초유의 일이 된 영화인 시국성명
 
 2011년 10월 영화인 희망버스에 참여한 정지영 감독이 가로막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2011년 10월 영화인 희망버스에 참여한 정지영 감독이 가로막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 성하훈

 
영화운동을 거쳐 충무로에 들어오는 창년 영화인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하던 1987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영화인들이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의 호헌발표를 비판하는 시국성명을 낸 것이었다.
 
당시 영화인 시국성명은 기존에 유례가 없던 일인 데다 1980년대 영화계가 처음으로 단체 행동을 한 것이기에 역사적 사건이었다. 정권의 검열과 온갖 제약 속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인들이 단체로 정치적인 성명을 낸다는 것 자체가 아주 특별한 일이기 때문이다. 
 
시국성명의 시작은 정지영 감독이었다. 여기에 정일성 촬영감독과 함께 1980년 이후 데뷔한 감독들과 85년 이후 충무로에 연출부 등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젊은 영화인들이 참여했다. 정 감독은 1970년대부터 독일문화원과 프랑스문화원을 드나들었던 초기 문화원 세대였다.
 
정지영 감독에 따르면 발단은 술자리였다. 성명 발표 이틀 전쯤 충무로의 한 술자리에 모인 영화인들에게 "우리도 가만 있지 말고 나서자"는 말을 꺼내자 전부 동의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고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당시는 전두환의 장기집권 음모를 반대하는 사회단체들의 성명과 이를 찬성하는 관변단체들의 성명발표가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했던 국민들의 요구와는 달리 기존의 간선제로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은 군사독재를 연장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실무를 담당했던 안동규는 "당시 충무로 '한국의 집' 뒤에 위치한 한 단체의 사무실을 하루 빌려 전화를 돌렸다"며 "100명을 넘기는 게 목표였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에는 문화예술단체들의 호헌반대 성명이 잇따르던 때였고, 만화가들도 참여하는 상태에서 영화인들이 뒤처지는 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해 나서게 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안동규는 밤새 전화를 걸어 젊은 영화인들에게 동의를 받아낸다. 주로 연락한 대상은 충무로 주류 영화계에 들어와 있던 문화원 세대와 대학 영화운동 출신들이었다. 충무로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이들은 성명을 낼 거라는 이야기에 동참 의사를 전했다.
 
안동규는 "젊은 사람들은 동의한다고 해도, 나이 드신 분들에겐 서명에 참여하는 게 생계가 걸린 문제고 위협적인 일이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해 줘서 감사했고, 정지영 감독님과 가까웠던 감독님들이 다수 동참했다"고 말했다.
 
'4.13 호헌반대 성명'은 1979년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으로 출발한 한국영화운동에서 진행된 영화인들의 첫 시국성명이자 정치적 연대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이야 영화단체들의 성명이나 입장표명이 일상화 되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에선 이례적이었다. 6월항쟁으로 표출된 한국사회 민주화 투쟁에 영화계 역시 동참을 결의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가 큰 행동이었다.  
 
 1987년 5월 11일 발표된 영화인 시국성명

1987년 5월 11일 발표된 영화인 시국성명 ⓒ 성하훈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영화인들의 성명은 다소 부드럽고 완곡하게 썼지만 단호한 입장을 담았다. 
 
"전 국민의 지지와 열기 속에서 진행되어온 민주제 개헌 논의를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우리는 최근의 정부, 여당의 4.13 조치에 깊은 우려와 실망을 금할 수 없다'며 호헌론을 주장한 정부, 여당의 일방적인 4.13 조치가 바로 전국민적인 민주 개헌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림과 아울러 진정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민주헌법을 제정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표명한 것에 다를 바 없음을 확신한다"고 호헌 반대를 밝혔다.
 
또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저해하는 모든 비민주적 요소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권분립의 확립, 언론의 자유, 학문과 예술의 자유 보장이 선행되어야 한다"면서 "헌법은 이러한 제도적 장치를 담아야하며 이를 위한 개헌논의는 전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진행되고 반드시 성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영화인들은 더 이상의 방관 혹은 침묵이 민족의 당면과제인 민주화의 실현에 도움이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진정한 애국의 심정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면서 "'4.13 조치의 즉각 철회', '개헌논의를 여야 간의 협상이 아닌 전국민적인 기반 위에서 국민 개개인의 행복과 발전을 위한 민족적 차원에서 진행',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민주헌법을 위한 개헌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했다.
 
성명에 참여한 영화인들은 모두 97명이었다.

곽지균, 김유진, 김행수 김현명, 남기남, 박광수, 박철수, 송경식, 신승수, 원정수, 이미례, 장길수, 장선우, 장영일, 정지영, 정희철, 조금환, 조문진, 주영중, 차성호, 차현재, 홍파, 김성수 (이상 감독) 송길한, 유시몬, 임승수, 장춘태, 한대희 (이상 시나리오 작가) 김명곤, 조선묵(이상 배우) 강근식, 강인구, 신병하, 오동식, 장옥조, 정성조(이상 영화음악 작곡가) 강제규, 곽재용, 권영락, 견지섭, 김한진, 김강숙, 김경식, 김동원, 김봉은, 김상범, 김윤태, 김의석, 김재수, 김진용, 낭희섭, 문명희, 박기용, 박태장, 박현덕, 박현철, 배경민, 서명수, 서재경, 송관선, 신동창, 신영희, 심승보, 안동규, 양승규, 양윤모, 유영재, 이건호, 이권근, 이도희, 이영재, 이정국, 이정하, 이하영, 이효인, 임경중, 임종재, 전경수, 전양준, 정지섭, 정병각, 정수문, 정홍순, 조경오, 조성구, 주성욱, 최사규, 황인용, 허근회, 현봉기, 홍기선, 김경식(이상 조감독) 박성덕, 서정민, 정일성, 최찬규(이상 촬영기사) 김 현(편집기사) 등이 동참했다.
 
정지영 헌신적 노력의 결실

성명이 발표되자 참여자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안동규는 "중부경찰서와 남산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충무로 영화사들과 가까이 있다 보니 정보기관의 감시가 만만치 않았던 때였다"며 "성명에 참여한 일부는 '중부경찰서에서 전화를 받았다'면서 철회를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압박이 심하게 들어오면서 3명이 철회 의사를 밝혔고, 당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영화인협회 이사장이었던 정진우 감독은 회원 중 명단에 포함된 37명을 개별적으로 불러 앞으로는 영화에만 전념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협회에 제출하게 한다. 영화인협회는 이를 바탕으로 영화사들에 서명 영화인의 활동과 관련 협조공문을 보내기도 했다.
 
공문내용은 '시국선언을 발표해 영화계에 물의를 야기시킨 데 대해 당사자들의 잘못을 충분히 반성, 각성했으므로 앞으로는 다시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이 종전과 다름없이 한국영화발전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이 공개되면서 일부 서명 영화인들은 반발했다. 이들은 "정진우 이사장 권유로 '영화에만 전념하겠으며 서명작업을 확산시키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제출한 적은 있으나 서명행위 자체를 잘못으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내용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당시 정지영 감독은 <위기의 여자> 개봉을 준비 중이었는데, 심의가 보류돼 영화관계자들은 이를 시국선언과 관련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은 1990년 7월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1987년 5월 11일의 영화인 시국성명은 '정지영 감독의 헌신적 노력의 결실로 이는 뒷날 UIP 직배저지 및 영화진흥법 쟁취투쟁에서 보여준 영화인의 단결을 확인한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군부독재 타도없이는 한국영화 발전이 없다'는 입장을 정리한 영화인들의 유인물

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군부독재 타도없이는 한국영화 발전이 없다'는 입장을 정리한 영화인들의 유인물 ⓒ 성하훈

 
6월항쟁을 앞두고 나온 영화인 시국성명은 검열과 제약에 순응했던 충무로 주류 한국영화가 본격적인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는 데 물꼬를 튼 것이었다.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앞두고 일부 영화인들은 '애국영화인 일동 명의'로 군부독재의 완전한 타도와 노태우는 한국영화탄압을 책임지고 즉각 사퇴, 영화검열 철폐를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1년에도 영화인 시국성명이 이어졌다. 당시 노태우 정권의 공안정국에 반대하는 시위과정에서 강경대 열사가 경찰에 타살됐을 때, 정지영, 박철수, 문성근, 이용관 등 영화인 129명이 성명을 내고 노태우 정권의 강압적이고 물리력에 의한 통치 중단, 수감 중인 민주인사 석방 등 민주개혁 조치를 요구하기도 했다.
 
1987년 영화인 시국성명은 영화운동에 몸담았던 청년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으로 자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대가 충무로 주류 영화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탄과도 같았다. 바야흐로 영화운동이 충무로라는 토양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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