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개봉당시 영화 '계춘 할망' 포스터 포스터 속 문구가 마음에 울린다

▲ 2016년 개봉당시 영화 '계춘 할망' 포스터 포스터 속 문구가 마음에 울린다 ⓒ 조하나

 
몇 년 전부터 엄마는 매년 어린이날이면 내게 전화를 걸어 물으신다. "어린이날이라는데 내가 너 용돈 좀 줄까?" 처음엔 마흔을 코앞에 두고도 결혼 생각이 없다며 버티는 딸에게 '철 좀 들라'는 의미를 담아 던진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다 곰곰이 짚어보니, 그 며칠 후 다가올 어버이날에 내가 자칫 무리해서 돈을 쓸까봐 다만 얼마라도 먼저 쥐여 주려고 그러신 거였다. 영화 <계춘할망>의 포스터 속 문구 '당신에게도 있나요? 영원한 내 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났다.
 
<계춘할망>은 2016년 개봉작으로 창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윤여정과 김고은이 각각 손녀 바라기인 해녀 할망과 사연 많은 여고생 혜지 역을 맡아 열연했다. 촬영 대부분을 제주도 올 로케이션으로 진행한 덕분에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광이 할망과 손녀 사이의 그 애틋한 서사를 탄탄하게 받쳐주면서 보는 이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여섯 살 혜지는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마저 재혼한 뒤, '홍계춘' 할망과 제주도에서 단둘이 살고 있다. 해녀인 계춘(윤여정)은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하나뿐인 손녀를 지극정성으로 키우고, 혜지 또한 그런 계춘을 따르며 밝고 구김살 없이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혜지와 함께 서울 나들이를 하게 된 계춘. 계춘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장 안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그만 혜지의 손을 놓치고 만다. 그 후 계춘은 생업인 물질도 포기한 채 백방으로 혜지를 찾아다니지만, 허망한 세월만 속절없이 흐른다.
 
혜지는 계춘이 찾던 그 '혜지'가 맞을까

12년 뒤, 열여덟 살의 혜지(김고은)는 친구와 함께 반지하 방을 전전하며 그들을 폭력으로 통제하려는 가출팸의 우두머리인 철헌(류준열) 밑에서 온갖 지저분한 일을 도맡아 하는 처지이다. 혜지가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남자들을 모텔로 유인하면, 철헌과 그 일당이 들이닥쳐 남자를 미성년자 성매매로 협박해 돈을 뜯어내는 식이다. 그러던 중, 혜지가 유인한 남자가 철헌 일당의 폭행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지면서, 혜지는 졸지에 오갈 데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된다.
 
노숙을 하며 숨어 지내던 혜지는 우연히 우유 팩 뒷면에 적힌 미아 찾기 광고를 보고, 계춘이 12년 전 잃어버린 손녀를 애타게 찾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침내 다시 만난 계춘과 혜지. 혜지의 손목에서, 자신이 혜지에게 사주었던 팔찌를 발견하는 계춘. 계춘은 혜지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손녀임을 확신하고 오열한다. 그길로 혜지는 계춘을 따라 제주도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어쩐지 혜지가 좀 수상하다. 12년 만에 돌아온 집이 영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한 혜지. 혜지는 정말, 계춘이 찾던 그 '혜지'가 맞는 걸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흰 등대를 배경으로 푸른 제주도 바다가 훤히 보이는 자리에 계춘과 혜지가 나란히 앉아 함께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들 것이다. 혜지가 동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몰래 담배를 피울 때, 슬그머니 다가온 계춘은 혜지에게 한마디 타박도 없이 그저 "나도 하나 도"라 할 뿐이다. 그리고 혜지가 내민 담배를 맛있게 피우면서 담담하게 말한다.
 
"세상살이가 힘들고 지쳐도 온전한 나 편 하나만 이씨믄 살아지는 게 인생이라. 나가 느 편 해줄 테니 너는 너 원대로 살라. 할망이 모든 거 다 해줄꺼여."
 

"너는 너 원대로 살라." 계춘의 그 한마디에 눈물이 났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날, 상한 마음 그대로 본가에 내려가면 내가 아무리 웃는 얼굴로 괜찮은 척을 해보아도 엄마는 귀신같이 알아채곤 혀를 쯧쯧 차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니가 먹여 살릴 자식이 있어? 속 썩이는 서방이 있어? 너무 조바심내지 말고, 그저 너는 너 원대로 살아. 그러면 돼."
 
"할머니, 나 있잖아. 진짜 잘 살게"
 
극중 계춘(윤여정) 과 혜지(김고은)의 저녁 밥상 씬 손녀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할망의 마음

▲ 극중 계춘(윤여정) 과 혜지(김고은)의 저녁 밥상 씬 손녀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할망의 마음 ⓒ 조하나


나는 올해로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가끔은 어린애처럼 엄마 품에 기대어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그것은 아마 내가 여전히 엄마의 '새끼'이기 때문이 아닐까? '엄마'라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온전한 나의 편이 있음을 알기에 상처받은 어제의 시간을 툭툭 털어내고 이렇게 다시 씩씩하게 오늘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인지도.
 
혜지는 서울에서 열린 사생 대회에 참가하러 간 날, '고백'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계춘에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철헌 일당에게 붙들려서 봉변을 당할 처지에 놓인 혜지. 다행히 경찰들에게 무사히 구출되지만, 혜지는 그동안 철헌과 같이 저지른 죗값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경찰서로 부랴부랴 달려온 계춘. 계춘이 혜지를 향해 마침내 꾹 참아왔던, 물음을 내놓는다. "너, 정말 혜지가 아니냐?" 여섯 살 '혜지'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열여덟 살의 혜지. 혜지가 '혜지'가 아니라면 대체 그녀는 누구인 거지? 
 
일 년 뒤, 제주도로 돌아온 혜지. 혜지는 얼마 남지 않은 계춘의 생을, 계춘이 자신에게 그러했듯이 온 힘을 다해 따뜻하게 감싸 안기로 마음먹는다.
 
"할머니, 나 있잖아. 나 진짜 잘 살게. 잘 살아 볼게."
 
죽음을 앞둔 계춘을 보면서 불현듯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떠올랐다. 그날, 저러다 큰일 나지 싶을 만큼 비통하게 우는 엄마를 달래다가 나는 문득 부끄러웠다. 나뿐 아니라 세상 모든 자식들이 잊고 있는 것,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구나, 엄마도 누군가의 새끼였구나' 하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엄마가 돌아올 어버이날에 가슴 저미게 보고픈 사람은 아마 '새끼'인 내가 아닌 외할머니, 엄마의 '엄마'일 거란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돌이켜 보면, 엄마라고 어디 사는 게 쉽기만 했을까? 가끔은 엄마에게도 마음껏 기대어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엄마'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그런 엄마를 위해, 오늘 엄마를 닮아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딸이 그동안 쑥스러워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한 편의 영화로 대신하고 싶다.
 
엄마의 헛헛한 마음에 위안이 될 영화

이 영화는 저물어 가는 무렵에 놓인 '할망'과 번쩍번쩍 빛나는 시절을 보내면서도 그것을 차마 알지 못해 외로운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흔을 코앞에 둔 내가 일흔을 바라보는 엄마와 이제야 비슷한 속도로 서로에게 물들어가는 요즈음, 함께 본다면 틀림없이 엄마의 헛헛한 마음 한구석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될 수 있는 영화다. 어버이날, 본가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한테 슬그머니 문자를 한 통 보내야겠다.
 
'엄마, 오늘 나랑 영화 한 편 볼래? 엄마랑 내 얘기야.'
 
나를 포함한 세상 모든 철딱서니 없는 딸들을 위해 이 영화를 추천한다. 반드시 엄마와 함께 보시라. 그리고 영화가 다 끝나갈 때쯤, 이제는 늙고 볼품없어진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귀한 그 손을 잡고 말씀드리자. 나 역시, 온전한 당신의 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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