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장적 문화, 성차별적인 대사, 사랑으로 포장된 데이트폭력 등 과거 우리가 웃고 넘어갔던 영화의 그 장면들을 여성주의 시선으로 다시 돌아봅니다.[기자말]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 포스터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는 강동원의 영화 데뷔작이자, MBC 드라마 <로망스>,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로 당대 최고의 '로코퀸'으로 불렸던 김하늘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영화는 사기죄로 수감 되었다가 가석방 된 여성이 의도치 않게 시골 마을 남성 약사와 그의 가족들과 얽히는 해프닝을 그린다.

타고난 거짓말과 연기력을 앞세워 가석방에 성공한 주영주(김하늘 분)가 그간 아무런 연고조차 없었던 최희철(강동원 분)의 약혼녀로 오인받은 것은 반지 때문이었다. 언니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부산행 기차를 탄 영주의 맞은 편에 앉은 희철은 여자친구 재은(남상미 분)에게 프로포즈를 할 반지를 꺼내던 중 영주가 앉은 의자 밑으로 반지를 떨어트린다.

영주 자리 밑에 떨어진 반지를 주우려다가 치한으로 오인 받아 영주에게 죽도록 맞은 희철은 설상가상 소매치기에게 반지를 도둑맞는다. 이를 목격한 영주는 가석방 중이라 도둑으로 몰리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기차에서 내려 소매치기가 훔친 반지를 다시 훔치는 기지를 발휘한다. 하지만 그 사이 기차는 떠나고, 가방을 기차에 두고 내린 영주는 자신의 가방을 되찾기 위해 희철의 집까지 찾아가기에 이른다. 

기차 안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성과 남성이 성추행으로 의심되는 행동으로 인연을 맺게 되는 설정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더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건 이어지는 장면이다. 우여곡절 끝에 희철이 사는 충북 음성군 용강 마을을 찾아간 영주는 수소문 끝에 마을 이장 댁인 희철의 집을 알게 되고 택시로 이동 중 기사(류태호 분)에게 성희롱을 당한다. 
 
"(백미러로 영주를 힐끔 쳐다보며) 내가 이거 이 동네에서 10년 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람인데 아가씨 같은 미인은 허허 처음입니다. 이야~ 거 탤런트 해도 되시겠네 피부 좋고 또 그 각선미 좋고." 

택시기사의 노골적인 성희롱을 참을 수 없었던 영주는 이장님 댁 며느리 될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성희롱을 막기 위한 영주의 거짓말은 곧이어 엄청난 파국을 야기한다. 알고 보니 영주를 성희롱 했던 택시기사는 희철의 셋째 고모부 였고, 영주는 졸지에 약혼녀 연기를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영주를 성희롱 했던 희철의 셋째 고모부는 이후에도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는다.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 시네마서비스

 
신분을 숨기기 위해 희철의 약혼녀로 위장해야했던 영주는 금세 희철의 가족에게 동화되어 간다.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아들이 귀한 집 장손으로 태어난 희철은 아들 하나 더 낳으려다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 대신 할머니(김지영 분)와 고모들 손에 자란다. 가족들과 고향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그들을 쉽게 떠날 수 없던 희철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재은과 갈등을 빚던 중 자신의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영주에게 매료되기 시작한다. 

성범죄로 오인 받는 해프닝과 유별난 가족들 때문에 서로에게 조금씩 호감을 갖게 된 극 중 여성과 남성의 종착지는 결국 가족이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이 있었지만 시골에서 사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애인에게 실망한 희철은 그녀가 아닌 영주를 택한다. 영화 말미에 교도소에 다녀온 영주의 과거가 들통 나긴 했지만, 용강 마을 이장님 댁 며느리가 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듯하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여성, 가부장제 순응으로 구원받다? 

영주도 처음부터 오지랖 넘치는 희철의 대가족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아니다. 영주가 이를 악물고 약혼녀 연기에 돌입한 것은 결혼식을 앞둔 언니(진경 분)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 담긴 가방을 찾기 위해서다. 가방 아니 엄연히 말하면 자신이 직접 만든 목공예 기러기 때문에 일면식도 없던 남자 약혼녀 연기까지 감행하는 영주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당찬 여성이다. 희철의 가족에게 약혼녀로 오인 받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도망을 시도하는 대범함도 동시에 갖췄다. 그러나 영주의 탈출 시도는 이런저런 우연과 해프닝으로 실패로 끝나고, 그러는 사이 희철의 가족과 정이 들어버린 영주는 희철과 희철의 가족을 위해 회개하는 캐릭터로 탈바꿈하게 된다.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던 여성이 어떤 계기로 인해 과거를 청산하고 진실한 모습을 되찾게 되는 설정은 예나 지금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도움에 의존하기보다 자기 스스로 위기를 돌파하고 선택하는 영주의 주체적인 면모와 남성만의 성장이 아닌 여성의 성장을 동시에 보여준 스토리에 있어 여성 캐릭터 구현이 유독 아쉬웠던 2010년대 이후 한국영화가 참고해야할 지점으로 삼을 만하다. 매번 성 상품화 논란을 야기했던 지역 미인대회를 '고추총각' 대회로 비튼 시도 또한 유쾌하다. 

그러나 흥미로운 해프닝 속 여성 캐릭터의 주체적인 선택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남성 중심적 가부장 가족 문화에 동조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의 시대적 한계는 분명하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가 만들어진 2000년대 초반은 <엽기적인 그녀>(2001),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 솔직함과 과격함을 앞세워 극중 남성 캐릭터를 휘어잡는 당찬 여성 캐릭터가 봇물을 이루던 시대였다. 남성을 괴롭히는 여성과 그런 여성에게 꼼짝 못하는 남성은 이전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는 장면 이었고, 기존 성 역할의 유쾌한 전복을 보여준 여성 캐릭터들의 등장은 시대의 트렌드로도 읽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강해보였던 그녀들 또한 사랑 앞에서는 서서히 약한 모습을 보이다가 연인의 마음을 얻는 과정 또한 뚜렷했다.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2004) ⓒ 시네마서비스

 
<그녀를 믿지 마세요> 또한 희철을 성추행범으로 오인한 영주가 그를 응징하는 장면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후에도 영주는 그녀의 약혼녀 행세에 격분하는 희철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며 관계의 주도권을 잡는다. 희철의 가족에게도 영주는 애초 '고추총각' 대회에 나갈 예정이었던 희철 친구의 부상으로 공석이 된 마을 대표 참가자로 희철을 대타로 내세우고,  대회 당일에는 숫기가 없는 희철을 위해 코러스를 자처하며 관객들의 흥을 돋우는 등 우승을 거머쥐게 하는 내조의 여왕으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고추총각' 대회 참가와 전혀 거리가 멀어보였던 희철을 명실상부 고장을 대표하는 남성으로 격상시킨 영주의 우승 프로젝트는 흡사 평강공주의 바보 온달 단련기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영주가 희철을 고추총각 대회에 내보낸 것은 그녀 나름대로 검은 속내가 있기도 했지만, 나약하고 소심한 남성의 성장을 돕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나서는 여성의 조력은 남성들에 있어 한없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여성의 당돌하고 당찬 면모도 남성의 한계를 보완하고 돋보이는 수단으로만 머물게 된 아쉬운 설정이다. 

마지막으로 희철이 결혼까지 생각했던 약대 후배가 아닌 사기 전과자 영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불미스러운 일로 감옥에 다녀온 여성도 기존 가족 질서에 순응하고 남성의 성장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면 얼마든지 지난 과거를 용서받고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암시한다.

만약에 영주가 희철의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거나 고향과 가족사랑이 최우선인 희철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않았다면, 혹은 희철의 전 애인이 그의 고향과 가족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희철은 여친이 아닌 영주를 선택했을까? 개봉 16년 후 다시 본 영화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서로에게 마음이 있던 여성과 남성이 사랑의 결실을 맺는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었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찜찜하게 다가오는 작품이었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 김하늘 강동원 여성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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