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에서 방영중인 <더 킹 : 영원의 군주> 관련 이미지.

SBS에서 방영중인 <더 킹 : 영원의 군주> 관련 이미지. ⓒ SBS

 
지난 17일 첫 방송한 SBS 금토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는 하나가 아닌 여러 우주의 동시 공존을 전제로 한다. 평행우주 이론에 입각한 이 드라마에서는 과거는 물론 현재 이 시각에도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 같은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정권을 탈취할 목적으로 이복형인 황제를 죽인 뒤 조카인 황태자 이곤(이민호 분)마저 죽이려다 실패한 이림(이정진 분)은 '1994년 대한제국'에서 '1994년 대한민국'으로 갑자기 건너왔다. 대한제국 도망자인 그는 훗날 서울 예술의전당 삼거리에 갑자기 출현했다.

여덟 살 때인 1994년에 삼촌 이림에 의해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나 황제가 된 이곤은 '누군가'의 실체를 항상 궁금해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2019년 어느 날, 말 목장에서 '누군가'인 듯한 인물을 발견하고, 그는 말을 타고 뒤를 뒤쫓다가 '2019년 대한제국'에서 '2019년 대한민국'으로 툭 빠져나왔다. 그가 나온 곳은 서울 광화문광장이다.
 
황제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대한민국 광화문에 출현한 이림은 이곳에서는 더는 황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우주에 왔다는 것을 신속히 깨닫지만, 황제 생활에 익숙한 몸에 밴 습관으로 공화국에서도 여전히 황제처럼 행동한다. 하지만 차량이 혼잡한 광화문에 비싼 말을 끌고 나타난 그는 도로 교통을 방해하는 잡범에 불과하다.
 
수려한 외모와 값비싼 옷에다가 백마까지 거느린 채 스스로를 황제로 소개하는 그에게 커피 전문점 여성 직원은 '당신 정도면 그러고 다녀도 된다'는 느낌을 풍기며 "컨셉(콘셉트) 잘 잡으셨네요"라고 말해준다. 대한제국 황제가 대한민국에서 겪게 되는 이 같은 스토리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소현세자의 죽음, 우주가 갈라지다
 
 SBS에서 방영중인 <더 킹 : 영원의 군주> 관련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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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스토리에 따르면, 대한제국이 있는 우주와 대한민국이 있는 우주가 갈라지게 된 출발점이 있다. 비운의 왕세자인 소현세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같은 공간의 두 우주가 분리됐다는 게 드라마의 설정이다.
 
우리가 배운 역사에서는 아버지의 버림을 받은 소현세자가 독살로 추정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데 반해, 황제 이곤의 우주에서는 그런 일 없이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는 남북분단 같은 것도 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역사가 전개됐던 것이다.
 
병자호란의 결과로 1637년에 청나라로 끌려간 25세의 소현세자는 인질답지 않게 청나라 생활에 잘 적응했다. 그곳에서 양국 간 현안을 처리하며 자기의 위상을 드높였다. 심양(션양)과 북경(베이징)에 체류한 9년 동안 그는 중국의 정세 변화도 목격하고 서양문명도 접촉했다. 마테오 릿치가 세운 남천주당에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과 교제한 일도 있다. 이런 경험은 그를 조선 사대부들을 뛰어넘는 원대한 식견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됐다. 아버지인 인조와 집권 서인당의 경계를 사는 원인이 됐던 것이다. 그들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소현세자를 경계했다.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지배층은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에 굴종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울분을 토하며 복수를 운운했다. 그런 그들에게, 청나라와 친한 소현세자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소현세자가 경계를 받은 것은 아니다. 인조 입장에서는, 청나라의 지지를 받는 소현세자가 왕권을 위협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을 만도 했다. 이전에 유사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려 충렬왕과 충선왕 부자의 사례는 권력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점을 느끼게 할 만하다. 아들 충선왕이 몽골 황실의 부마가 되고 그들의 지지를 받자, 충렬왕은 기세에 눌려 아들에게 왕위를 내놓았다.
 
그러다가 아들이 몽골의 미움을 사서 끌려가자, 충렬왕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왕위를 탈환한 뒤 아들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기사회생한 아들에게 왕위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 이런 사례를 알고 있었을 인조로서는, 청나라의 지지를 받는 소현세자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도 경계하고 신하들도 경계하는 상황에서, 음력으로 인조 23년 2월 18일(양력 1645년 3년 15일) 소현세자는 한양으로 돌아왔다. 인질 생활을 청산하는 영구 귀국이었다. 하지만, 2개월이 조금 지난 음력 4월 26일(양력 5월 21일), 그는 34세 나이로 갑작스런 최후를 맞이했다.
 
위 날짜 <인조실록>은 의원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한 뒤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했고, 같은 해 6월 27일자(양력 7월 20일자) <인조실록>은 세자의 시신을 묘사하면서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모두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 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고 했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뒤이어 부인 강빈이 시아버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로 죽임을 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된 세 아들 중 둘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소현세자의 최후는 사도세자의 최후와 함께, 오늘날까지도 두고두고 비극적 스토리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그런 비극적 최후를 기점으로 한민족이 두 개의 우주공간으로 갈라져 한쪽에서는 대한제국 역사가 2019년까지 이어지고 한쪽에서는 우리가 배운 역사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게 <더 킹>의 설명이다.
 
조선-청나라 관계 달라졌을 가능성은 낮아

이 같은 설정은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개연성이 낮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의 죽음이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이 역사를 갈라놓을 만큼의 중대성을 띠지는 못했다. 소현세자가 그런 최후를 겪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역사가 달라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당시의 최대 현안인 조선-청나라 관계와 관련해서도, 소현세자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 해도 조·청 관계가 달라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에서는 반(反)청나라 감정이 고조됐다. 청나라에 복수해야 한다는 북벌론을 입에 담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정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복수를 운운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국가정책으로 연결된 적은 없다. 소현세자의 동생인 효종이 북벌정책을 추진했다는 말도 있지만, 효종이 명확하게 북벌을 언급한 것은 죽기 2개월 전 송시열과 독대할 때뿐이었다. 이것도 그나마 그 당시에는 극비였다. 그가 죽고 나서 오랜 뒤에야 이 사실이 공개됐다. 따라서 효종이 생전에 북벌을 추진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조선에서 반청을 내세운 정치 슬로건이 공식 제기된 것은 김옥균이 일으킨 1884년 갑신정변 때가 처음이다. 그나마 그 정변도 3일 천하로 끝났다. 친청나라 정책이 공식 종결된 것은 10년 뒤인 1894년 청일전쟁 때였다. 그래서 그 이전의 조선은 누가 봐도 친청의 나라였다.

인조와 서인당은 소현세자의 친청적 태도를 싫어했지만, 그들 역시 소현세자 못지않게 친청적이었다. 청나라에 굴복한 조선에서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는 길은 친청 노선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더군다나 소현세자가 사망한 1645년 시점에는 조선과 청나라가 한층 더 우호적이 되어 있었다. 1644년에 중국 전역을 장악하면서, 청나라는 사방의 적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조선에 대해 호의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과의 관계가 나빠져 여타 지역에 신경을 못 쓰게 되면, 중국의 안보가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와의 관계가 그처럼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소현세자가 죽지 않고 보위에 올랐다고 해도 조선의 대외관계가 크게 바뀔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다만, 양국관계가 어느 정도 나빠졌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이전 사례들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몽골에 대해 자주적 태도를 취한 공민왕은 몽골 수도에 있을 때만 해도 그 누구 못지않게 친몽골적이었다. 그렇게 환심을 사서 왕이 된 뒤, 그는 몽골을 배신하고 자주 노선을 추구했다.
 
유사한 사례는 충선왕한테서도 발견된다. 몽골이 충렬왕을 몰아내고 아들 충선왕을 세운 것은, 충선왕을 자기편으로 확신했기 때문이다. 세자 시절에 몽골에 체류한 충선왕은 계국대장공주와 결혼하고 몽골 황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몽골의 후원으로 왕이 되자마자, 그 역시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반몽골로 돌아섰다. 결국 몽골은 그를 체포하고 아버지 충렬왕을 복위시켰다.
 
이런 사례들에서 느낄 수 있듯이, 강대국에 체류하면서 그 신임을 받은 왕세자라 해서 즉위 뒤에 그 나라를 계속 떠받들란 법은 없었다. 오히려 강대국을 배반하고 자주노선을 표방할 수도 있었다. 강대국 사람들 틈에서 차별을 당하고 비위를 맞추다 보면, 반감이 자연히 싹틀 수도 있었다.
 
소현세자 역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그가 친청파가 된 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병자호란 패배 뒤에 아버지 인조가 삼전도(서울 석촌호수)에서 굴욕을 당할 때, 그 역시 그 옆에 있었다. 이때의 치욕과 울분이 쉽게 증발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지 않고 즉위했다면 그가 반청으로 기울었을 가능성도 전혀 없지 않다.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조선 군주의 성향이 동아시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는 힘들었다. 청나라의 패권을 건드리고 동아시아 정세를 요동치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여타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이 아니라 양반 사대부가 지배하는 조선에서 군주 1인이 바꿀 수 있는 일은 생각 외로 많지 않았다. 이 점은 소현세자를 싫어했던 신하들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후계자가 되는 것을 기피했다. 그는 소현세자의 핏줄을 무척이나 경계했다. 하지만 서인당 신하들은 소현세자의 아들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이 관철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런 주장을 편 것은 소현세자의 혈통이 왕이 돼도 별다른 변화가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현세자 혈통이 왕이 되면 나라가 뒤바뀔 거라고 판단했다면,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우려 할 때 그들이 심하게 반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볼 때는 봉림대군보다는 소현세자 아들이 왕이 되는 게 정치 안정에 훨씬 더 유리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봉림대군보다 정통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소현세자가 왕이 됐다고 해도 국제적으로뿐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실질적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도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현세자의 비참한 최후는 대중에게 강인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오늘날까지도 문학이나 예술의 소재가 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틀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인 것은 맞지만, 역사의 분수령이 될 만한 사건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현세자의 죽음을 기점으로 두 우주가 갈라졌다는 <더킹>의 설정은 그럴싸하기는 하지만 개연성은 낮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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