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the light  <The Light of the World>(detail), designed by William Holman Hunt(1827-1910), a stained glass window at All Hallows Church, Tillington

▲ I am the light (detail), designed by William Holman Hunt(1827-1910), a stained glass window at All Hallows Church, Tillington ⓒ All Hallows Church

 

등불을 들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정작 그에게는 등불이 필요 없어 보인다. 그의 얼굴에 후광이 비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가 오른손으로 노크하는 곳은 어디일까. 노크를 하니 '문'으로 보일 뿐, 그곳은 사실 담벼락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방치된 느낌이다. 무성한 잡초 사이로 눈치 없이 피어오른 담쟁이넝쿨이 '문은 닫힌 지 오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문 어디에도 손잡이는 없다. 오로지 안에서만 열 수 있는 문이리라.​

방치된 잡초와 달리, 바닥에 나뒹구는 과일은 그 농익은 붉은빛이 먹음직스러움을 과시하고 있고, 집을 염탐하는 듯 비상한 보랏빛 박쥐는 남자의 등장을 경계하는 눈치다. 이 집의 주인은 어떤 삶을 살고 있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남자의 방문을 모르고 있을까. 그리고 남자는 누구길래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남자는 '나는 세상의 빛이다(I am the light of the world)"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다. 그가 말한 '세상의 빛'이 과연 무엇인지 알기 위해, 두 등대지기에게 닥친 비극을 그린 영화 <더 라이트하우스>의 세상으로 가 보자.
 
  떠나는 보급선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토마스와 에브라임.

떠나는 보급선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토마스와 에브라임. ⓒ 제작사 A24

 
광기에 휩싸이는 두 등대지기 이야기

1692년 살렘 마녀재판을 소재로 한 <더 위치(The VVitch: A New-England Folktale, The Witch>(2015)로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이번에는 망망대해 고립되어 광기에 휩싸이는 두 등대지기 이야기 <더 라이트하우스(The Lighthouse)>(2019)로  돌아왔다.

캐스팅은 단 두 명. 할리우드의 천의 얼굴 윌렘 데포와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로버트 패틴슨이 열연, 단 두 명으로도,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흑백으로도 숨 막히는 스릴러가 가능함을 증명했다. <기생충>과 함께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함께 노미네이트되었던 <더 라이트하우스>는 흑백의 풍부한 깊이감과 질감을 인정받아 런던비평가협회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더 라이트하우스>는 1801년 스몰스(smalls) 등대 사건을 토대로 한다. 1775년에 영국 웨일스 펨브로크셔 근해 바위섬에 세워진 스몰스 등대의 운영에 큰 변화를 불러온 사건은 두 등대지기의 불화에서 시작되었다. 두 토마스, 즉 토마스 하웰과 토마스 그리피스는 평소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는데, 그날은 그리피스가 기괴한 사고로 사망했고 하웰은 워낙 사이가 안 좋았기에 살인자로 몰릴까 두려워 그의 죽음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 그는 부패하는 시신을 감추느라 잠도 못 잤고 등대도 혼자 관리해야 했다. 지옥 같은 근무가 끝나고 교대조가 섬에 도착했을 때 하웰의 몰골은 하도 상해서 못 알아볼 정도였고, 그 후 등대는 3인 근무 체계로 바뀌었다고 한다.

​에거스 감독은 이 실화를 기초로 여러 소설과 신화, 민담 등을 결합해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흑백의 영상에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1.19:1의 고전적 화면비율로 '폭풍우'에 고립되고, '과거의 죄'에 포박된 두 남자의 숨 막히는 악전고투를 실감 나게 담아내었다.

두 남자를 태운 보급선은 안개가 자욱한 바닷길을 뚫고 바위섬에 도착한다. 무심하게 떠나는 보급선을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두 사람. 이제 4주 동안 이 손바닥만 한 바위섬에는 바다를 누비던 선원 출신 토마스(윌리엄 데포)와 베일에 가려진 듯 미스터리한 신출내기 에브라임(로버트 패틴슨), 그리고 이들을 위협하는 갈매기떼뿐이다.
 
 <더 라이트하우스> 토마스의 타박에 분노가 끓어오르는 에브라임.

<더 라이트하우스> 토마스의 타박에 분노가 끓어오르는 에브라임. ⓒ 제작사 A24

 

​에브라임은 육지에서 멀어질수록 연봉이 높다는 얘기만 듣고 조용히 바다 구경하며 등대만 켜면 되는 줄 알고 왔는데 실상은 충격이었다. 등대가 켜져 있는 동안 쉴 새 없이 숯을 가져다 태워야 했고, 등의 회전을 위해 기름칠을 해야 했고, 무너져가는 숙소를 수선해야 했고, 툭하면 오염되는 수조도 관리해야 했다. 바위 섬이라 도로가 포장이 됐을 리 만무, 걷기도 힘든데 온갖 것을 싣고 수레를 밀고 다니다 뒤집혀 오물로 엉망이 되기 일쑤다. 하다 하다 이제는 갈매기들까지 그에게 시비를 걸고 비웃고 공격한다.

그러나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선임인 토마스다. 대놓고 껴대는 방귀 하며, 쉴 새 없는 잔소리와 윽박은 물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다. 등대 관리는 처음이라 서툴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타박을 당한다. 무엇보다 등대를 지키는 당직을 서고 싶은데 토마스가 신출내기에게 절대 등대를 맡길 수 없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한다.

직급으로 찍어 누르는 토마스에 분노가 끓어오른 그날 밤 에브라임은 이 섬까지 자기를 따라온 누군가를 인식하게 된다. 바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숲으로 바뀌고, 둥둥 떠다니는 통나무 사이로 한 남자의 시신이 떠오르는 환상을 본다.
 
 <더 라이트하우스> 폭풍우로 교대조가 오지 못하고 섬에 고립된 두 등대지기

<더 라이트하우스> 폭풍우로 교대조가 오지 못하고 섬에 고립된 두 등대지기 ⓒ 제작사 A24

 
지옥 같은 4주가 지나고 드디어 교대하는 날이 왔지만, 심한 폭풍우로 보급선이 뜨지 못한다. 거센 파도에 뱃길이 열리지 않아도 밤이 되면 등대는 켜야 하고, 안개가 짙어 빛이 뚫고 가지 못하는 날에는 사이렌을 쉴 새 없이 울려 음파 신호를 보내야 한다. 등대마저 집어삼킬 기세로 몰아치는 파도는 그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 술기운으로 버텨왔는데, 술도 떨어지자 서로를 향한 불신과 환멸로 잡아먹을 듯이 싸우고, 또다시 밀려오는 공포와 고립감에 서로를 붙들고 의지한다. 적대감과 유대감의 양 끝을 미친 듯이 오가는 두 사람의 곡예는 마침내 참담한 파국을 맞는다.

등대의 불빛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바닷길을 지나는 선박이 안전하게 운항하도록 밤길을 밝혀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불빛으로 신호를 주면서 선박에게 올바른 바닷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등대가 육지의 끝이 아니라 육지보다 더 앞선, 바다 가운데 세워진다. 어두운 바다의 길잡이가 등대의 목적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등대지기의 본분이다. 그런데 <더 라이트하우스>의 두 등대지기 토마스와 에브라임은 이 등대의 빛, 즉 '등명기'의 용도를 다르게 여기고 있다.

젊은 시절 바다를 누렸던 토마스는 이제 바다를 지키는 등대지기가 되었다. 그런 자부심 때문인지 신입을 혹독하게 다룬다. 토마스는 이전 파트너의 사망에 대해서도 정신이상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토마스와 함께 하는 에브라임은 놀랍도록 전임자의 전철을 밟아간다.

밤바다라는 절대 암흑을 비추는 빛 '등명기'를 토마스가 지나칠 정도로 독점하려는 이유가 뭘까. 에브라임의 추리는 처절하다. 토마스의 독점욕을 언제부턴가 에로티시즘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고 빼앗고 싶은 욕망으로 번져간다. 등대는 암흑을 지나는 배에게 구원의 불빛이지만, 불행하게도 등대 밑은 암흑이며 등대지기의 내면은 좌초되었다.

 
 <더 라이트 하우스>  망망대해 거센 파도와 폭풍우에도 빛을 밝히는 등대

<더 라이트 하우스> 망망대해 거센 파도와 폭풍우에도 빛을 밝히는 등대 ⓒ 제작사 A24

 
빛은 무언가를 태워야 얻을 수 있다

스스로 발광하는 존재가 있을까. 해파리 등 심해어나 반딧불처럼 발광 생물이 있긴 하지만, 주로 짝짓기나 경고, 먹이 함정 등 생존에 한정된다. 어두움을 밝히는 빛은 항상 매개체를 태워야 얻을 수 있다. 토마스가 자기의 자부심인 등명기를 켜고 당직을 설 때, 보일러실에서 쉴 새 없이 석탄을 퍼다 나르던 에브라임의 수고를 알아줬다면 어땠을까.

토마스가 신입 등대지기인 에브라임이 단 한 번이라도 밤 당직을 설 수 있게 선임으로서 잘 지도했더라면 어땠을까. 토마스가 파트너들의 정신이상에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에브라임 역시 이 섬의 주인인 갈매기를 존중해 줬더라면 어땠을까. 도망치지 않고 죗값을 치렀더라면 어땠을까. 죗값을 치르는 게 빛의 길이 아니었을까.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8장 12절)

태우지 않고 빛을 얻는 방법이 있으니, 그것은 빛 되신 예수를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빛은 어둠의 결핍이며, 죄의 결핍을 뜻한다. 죄에 취약한 인간은 지은 죄 때문에 어둠 속에 거하고,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또 죄를 짓기도 한다.

<더 라이트하우스>의 두 등대지기는 흑암에 등불을 비추는 직책을 맡고도, 그 내면의 지독한 어두움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 주지 못한다. 마음의 문을 열면 빛이 기다리고 있는데, 열지 못하고 박쥐의 비호를 받으며 어둠 속에 거한다. 상대에게 빛이 되는 삶은 결국 자신을 태우는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문을 열고 예수를 영접하고 따르는 삶이기도 하다.

4월 12일은 부활주일이다. 교회가 공동체에 우려를 주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요즘은 일부 교회와 성도들이 코로나에 대응한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지 않아 큰 우환이 되고 있다. 세찬 파도가 몰아치는 최전선에서 세상을 비추는 등대가 되어야 할 교회가 자꾸만 육지로, 도시로, 노른자 땅으로 파고 들어가고, 세상 쪽으로 비춰야 할 등명기의 방향을 교회 안으로 고정하려고 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6절)는 말씀이 무색하지 않도록 자신을 태우는 삶이 어떤 삶인지 성도라면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도서출판 참서림의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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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영화를 봐도 성경이 떠오르는 노잼 편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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