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새 사건으로 연행됐던 서울영상집단의 고 홍기선(감독). 이효인(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변재란(영화평론가)

파랑새 사건으로 연행됐던 서울영상집단의 고 홍기선(감독). 이효인(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변재란(영화평론가) ⓒ 미인픽쳐스,이효인,서울국제여성영화제

 
1985년 여러 대학에서 한꺼번에 생겨난 대학영화서클은 서로 간의 교류를 통해 연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기존에는 서울대 얄라셩, 프랑스문화원 및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균관대, 학내 커뮤니케이션 센터를 중심으로 한 서강대 등 3개 학교가 주축이었던 것이, 대학영화서클이 늘어나면서 교류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이들의 연대가 강화될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파랑새 사건'이었다. 1980년 시작된 한국 영화운동이 처음으로 권력의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1986년 11월 18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짤막한 기사는 일명 '파랑새 사건'을 알리고 있었다.
 
'서울시경은 18일 민중영화를 만들어 영상을 통한 의식화 활동을 벌여온 서울영상집단 대표 홍기선(29. 서울대 원자핵공학과졸)과 기록교육국장 이효인(25. 경희대 행정학과) 등 2명을 영화법 위반혐의로 구속하고 사무간사 변재란(연세대 영문졸)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지난 7월부터 저곡가, 소값 파동 등을 겪는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만을 8mm필름 40분 상영의 영화로 제작, 전국 19개 소에서 상영한 것을 비롯, 고려대 등 4개 대학에서 4만원씩 받고 필름을 대여 상영케 해 의식화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다.'

 
'파랑새 사건'은 1982년 서울대 얄라셩 출신들이 창립한 서울영화집단이 1986년 10월 18일 서울영상집단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 창립한 직후에 발생했다. 1980년 시작된 '영화운동'에 대한 첫 '구속'이었다.
 
농민들의 삶을 담은 영화 <파랑새>를 만들어 영화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사실 본질은 따로 있었다. 1985년 대학가에 영화 서클이 생겨난 이후 대학영화운동이 활발해지던 과정에서, 불똥이 엉뚱하게 영화운동으로 튄 것이다. 원래 조사하려던 사안에서 혐의가 없자 별건으로 구속기소한 것이다.
 
홍기선과 만난 이효인
 
'파랑새 사건'의 주역이었던 홍기선과 이효인의 만남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9월 복학 후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에 가입한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이 서울영화집단의 홍기선(감독. 2016년 작고)을 알게 된 것은 겨울로 막 접어들 무렵이었다. '그림자놀이'를 만든 안동규(제작자. 두타연 대표)의 안내로 아현동에 사무실이 있던 서울영화집단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이효인은 저서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가제, 2020년 발간 예정)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문을 여니 마주 보이는 구석의 책상에서 한 사람이 멀뚱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의자에서 일어나 걸어 나왔다. 홍기선 형이었다. 서로 인사를 했고, 같이 그 곳 아니면 뒤편에 있는 아현시장으로 들어가서 소주를 마셨던 것 같다. 홍기선은 원래 말수가 없는 편이었고 낯가림도 좀 있는 사람이었으니, 처음 만난 자리에서 특별히 깊은 얘기를 나눈 것 같지는 않다. 주로 현재 서울영화집단의 활동에 대해 물었는데, 별로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때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부의 일을 선뜻 말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뒤에 알고 보니 사실 별로 말할 것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효인에 따르면 당시 서울영화집단은 주로 홍기선 개인을 중심으로 민중문화운동협의회라는 문화운동 단체에 느슨한 형태로 소속되어 있었다. 운영 자금은 대학 등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1회 상영 비용으로 20만 원 정도를 받아 사무실 월세로 충당하고 있었다. 초기 회원들은 어쩌다 모임을 가졌고 영문 책을 놓고, 문원립(감독. 동국대 교수)의 주도 아래 스터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효인은 3학년 2학기가 끝난 후 학교 앞에 있던 자취방에서 서울영화집단 사무실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연세대 영화서클 '영화패'를 만들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 등이 회의 등으로 오갈 때였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서울영화집단의 새로운 회원으로 충원됐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에서 "서울영화집단에는 연세대나 이화여대 영화 서클 학생들이 들렀으며, 충무로 조감독 생활을 하던 임종재(감독), 김의석(감독), 권영락(제작자) 등이 밤에 소주를 들고 와서 같이 마시거나 자고 가기도 했다"며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1986년은 분신 사망 시위, 5.3 인천사건 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벌어진 해였다. 따라서 매일 우리들은 각성된 상태에서 지내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이라도 뜻이 맞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이 나누는 술 한잔, 순댓국 한 숟갈이 뜨겁게 정겹고 눈물겨웠던 시절이었다."
 
농민영화 <파랑새> 제작
 
 서울영상집단이 1986년에 만든 8mm 영화 <파랑새>

서울영상집단이 1986년에 만든 8mm 영화 <파랑새> ⓒ 한국영상자료원

 
1986년 서울영화집단은 영화제작을 기획하게 된다. 이 영화가 바로 <파랑새>였다. 이효인은 "홍기선이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갔다가 누군가에 부탁을 받았다"며 "농촌 실정을 다룬 만화가 원작이었고, 아마도 농민운동관계자에게 청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당시는 외국 소 수입으로 인한 솟값 폭락으로 농민들의 시위가 빈번할 때였다. 서울영화집단은 시나리오를 구상한 후 결말과 구성은 보류한 채 촬영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7월 중순 촬영 예정지역의 사정과 출연배우의 거부로 제작이 무기한 연기된다. 그러나 그 즉시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정읍의 농가를 소개받아 촬영에 들어갔다.
 
빈농의 집에서 8시간 일을 돕고 30분씩 촬영한 끝에 8mm 영화 <파랑새>는 8일 만인 7월 30일에 완성된다. 이후 8월 2일 현상하고 3~4일 녹음과 편집을 끝냈다. 음성녹음은 농민들의 사정상 밤과 막간을 이용해 마무리하게 된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에서 "나와 이정하, 홍기선, 그리고 경희대 후배 한 명 등 총 네 명이 했는데, 촬영 도중 나와 홍기선 형이 작업방식에 대한 의견 차이로 몇 번 다퉜다"고 밝혔다.

<파랑새>는 완성 직후 8월 한 달간 민중문화운동협의회에 속한 연극패 몇 명과 함께 가톨릭 농민회 소속의 전국 마을을 돌면서 영화를 상영하고 공연을 다닌다. 마당에서 공개상영회를 열었는데, 이때 서울영화집단의 이름을 서울영상집단으로 바꾸고 그 출범을 알렸다.
 
이효인은 "서울영화집단의 조직을 확충하면서 서울영상집단으로 개명했다"며 초창기 서울영화집단에 속해 있다가 노선 혹은 성격 차이로 따로 모임을 하고 있던 배인정, 김대호 등과 영화에서 영상으로 매체를 확장하고 조직을 통합하기로 한 것으로, 영화예술지향적 성격에서 영상운동을 지향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인정(노동자뉴스제작단)과 김대호는 한때 서울영화집단에 있다 떠났던 사람들이었다. 변재란은 "사무실을 합치기 전이라 이들을 혜화동팀으로 불렀다"며 "남인영(동서대 교수) 등도 혜화동 팀에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변재란은 서울영상집단의 팸플릿과 각종 문건의 제작을 맡고 있었다.
 
서울영상집단은 1986년 10월 18일 자로 펴낸 <영상집단> 창간호에 실린 창립선언문에서 "새로운 영상운동을 펼쳐보고자 모든 민주적 영상팀들이 다시금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며 "모든 자기 주장을 철회하고 이 땅의 문제 해결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서울영상집단이라는 새로운 깃발 아래 우리는 단결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앞으로 우리는 이 깃발 아래에서 과학적인 원칙론에 입각한 다양한 형태의 영상예술 활동과 함께 양심적이며 진보적인 세력으로서 강력한 역할을 이 땅에서 맡고자 하는 바이다"라는 각오를 나타냈다.
 
 서울영상집단에서 발행한 <영상집단> 창간호

서울영상집단에서 발행한 <영상집단> 창간호 ⓒ 성하훈

 
홍기선과 이효인, 변재란이 연행된 것은 서울영상집단이 출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연행 시기에 대해 이효인은 언론의 구속 기사가 나오기 20일 전 쯤인 것 같다고 했고, 변재란은 11월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에서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0월에 들어서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학생 및 사회운동권의 민주화 저항운동이 점점 더 거세지자 전국적인 검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약간 위축되면서도 우리까지 검거될 것이라고 판단하지는 않았지만 여하튼 다들 조심하기로 했다."

이효인은 당시 선배의 소개로 노량진경찰서 인근으로 거처를 옮겨 수배 중이던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인사와 함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일찍 두 명의 형사가 집으로 찾아와 연행됐고, 성북경찰서로 끌려간다. "다른 방에서는 홍기선 형이 잡혀 있었고 사무실에 있던 책, 자료, 비디오 테이프, 기자재 등도 전부 실려 온 상태였다"고 기억했다. 이틀을 보낸 후 눈을 가린 채 옮겨간 곳은 장안동 대공분실이었다.
 
같은 날 변재란도 경찰에 연행된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은 (혜화동)팀원들과 사무실을 청소하려고 한 날이었다. 홍기선과 통화를 하던 중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 황급히 아현동 사무실로 가봤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 문이 닫혀 있으면 안으로 들어가지만, 문이 열려 있으면 들어가지 말자고 작정했으나, 어쩌다 들어가게 됐고 거기서 숨어 있던 형사에게 잡혀서 성북경찰서로 끌려갔다. 성북서에서 홍기선과 이효인을 봤다. 저녁 식사로 선짓국을 시켜줬는데, 불안함 때문인지 두 분은 제대로 식사를 못하더라. 이후 눈이 가려진 채로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데 나중에 그곳이 장안동 대공분실임을 알았다."
 
<부활하는 산하> 때문에 끌려온 서울영화집단
 
그런데 이들이 연행된 것은 영화 <파랑새> 때문이 아니었다. 8mm 다큐멘터리 <부활하는 산하>를 제작한 것으로 공안당국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활하는 산하>는 서울영화집단이 아닌 연세대 영화패가 제작한 영화였으나 '파랑새 사건'의 바탕이 됐다.
 
연세대 영화패 1기 안훈찬(프로듀서)에 따르면 당시 대학 영화서클 대표자들의 만남이 자주 이뤄지고 있었다. 서울대 '얄라셩', 고려대 '돌빛' ,이화여대 '누에', 경희대 '그림자놀이' 등으로 84, 85, 86학번들이 주축이었다.

1985~1986년을 지나오면서 상호정보교류와 친목의 모임은 5.18 광주항쟁과 이에 따른 대학 내의 분신 투쟁, 그리고 가두 시위 등의 민주화 운동 속에서 시대적 상황과 영화운동의 역할과 방향에 대한 고민으로 발전하게 된다.당시 각 대학 영화써클도 이런 흐름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8mm 필름으로 꾸준히 기록하며, 광주항쟁 비디오 상영 등 영상을 활용한 영화운동을 병행하고 있던 때였다.
 
 <부활하는 산하>를 만든 연세대 영화패 안훈찬(프로듀서)의 대학 재학 시절 모습

<부활하는 산하>를 만든 연세대 영화패 안훈찬(프로듀서)의 대학 재학 시절 모습 ⓒ 이수정 감독 제공

 
1986년 상반기 연세대와 고려대는 총학생회 차원에서 연고전 축제기간 동안 학술제를 개최하기로 한다. 당시 학내에서는 광주학살의 배후가 미국이라는 인식 하에 민족해방(NL)이라는 운동노선이 대중적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NL로 불렸던 민족해방과 경쟁했던 운동노선은 PD로 약칭되는 민중민주였다). 연·고대 총학생회도 반미민족해방노선의 대중화 작업 일환으로 일반학생을 상대로 학술제를 준비한다.
 
그런데 축제기간의 성격과 분위기도 있고 학술제를 자료책 나눠주고 토론자 나와서 딱딱하게 하는 것 보다는 좀더 대중친화적 접근을 시도하자는 차원에서 당시로서는 도전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다큐 제작을 통해 영상적으로 접근해보자는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안훈찬은 "그래서 동학농민운동부터 86년 5,3 인천사태까지를 외세에 저항한 민족해방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8mm 다큐멘터리를 상영시간 약100분 정도로 만들었다"며 "5월 연고전 축제기간에 첫 상영되면서 나름 엄청난 파란을 학생들 사이에서 일으켰다"고 말했다. 그는 "레드컴플렉스가 강고하게 유지되던 시절이라 일단 학생들에게도 '한국전쟁이 단순한 북의 남침이 아니라 외세에 저항하는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식'의 내레이션이 꽤 충격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당시에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진조차 금기시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영화패 회원들은 도서관에 있는 책에서 김일성의 사진을 8mm 카메라에 담았고, 방송에 나왔던 역사 다큐멘터리의 장면도 담아서 영화를 만들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서슬퍼린 탄압기에 위와 같은 내용의 영상물을 제작한다는 것은 극도의 긴장과 보안 속에서 은밀하게 제작해야 했다.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일이었다. 제작에 관여한 사람은 이정하, 안훈찬, 민경철 등이었다.
 
영화는 연세대 대강당에서 첫 상영된 이후 다른 대학에서도 은밀히 혹은 전투적으로 상영된다. 첫 상영 때는 음향녹음이 안 돼 있어 남녀 학생이 변사 역할을 했는데, 호응이 컸다. 이후 녹음 작업을 거쳐 다른 대학에서도 상영된다.
 
안훈찬은 "당시 도서관 혹은 대강당 등에서 기습적 홍보와 함께 경찰의 침탈에 대비해 마스크와 각목으로 무장한 사수대가 지키고 있는 가운데 상영이 이뤄졌고, 이러한 상황은 이후 <파업전야> 상영에서도 전개됐다"고 회상했다.
 
 안훈찬 프로듀서(왼쪽)는 고 홍기선 감독(오른쪽)의 유작 <일급기밀>을 제작했다.

안훈찬 프로듀서(왼쪽)는 고 홍기선 감독(오른쪽)의 유작 <일급기밀>을 제작했다. ⓒ 미인픽쳐스

 
결국 공안당국은 1시간 이상의 다큐를 만들 수 있는 역량과 의식이 있는 단체로 서울영화집단을 특정하기에 이르렀고, 아현동 사무실을 급습해 홍기선, 이효인, 변재란을 연행했던 것이다.
 
'의식화 영화 관련 3명을 연행 조사'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체포 사실을 전한 '동아일보' 1986년 11월 11일자 기사는 <부활하는 산하>라는 제목의 영화에 대해 "문제된 이 영화는 동학혁명에서 6.25, 광주사태, 5.3 인천사태에 이르는 근대 및 현대사의 큰 사건을 반외세민중항쟁적 시각에서 편집한 90분짜리 8mm 다큐멘터리 영화로 TV 화면을 편집해 넣거나 자료책자 등을 촬영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독립영화 역사를 기록한 책 <변방에서 중심으로>(1996)에 따르면 당시 군사독재 정권은 영화 <부활하는 산하>에 이데올로기 서적인 <계급투쟁사>의 몇 대목이 삽입 인용된 점을 빌미로, 불법사상 서적이 대중에게 전파됐다는 의미로 혐의를 잡아 연세대 총학생회에 수배령을 내렸다. 
 
이들이 연행된 후, 자취방 등에 숨겨져 있던 <부활하는 산하> 제작에 사용된 자료들은 영화패 회원들이 치웠고, 제작에 참여한 영화패 회원들은 잠적해서 잡히지 않았다. 대신 연세대 총학생회 간부들이 잡혀가 고초를 당한다.

안훈찬도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으나 <부활하는 산하>가 아닌 <파랑새>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점이 나오지 않아 무사히 넘어간다. 안훈찬은 "<부활하는 산하>는 영화 크레딧으로 표기한다면 제공이 연세대 총학생회고, 제작이 연세대 영화패였다"고 말했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에서 "서울영화집단에 가끔 찾아오기도 했던 연대 총학에서 일을 보던 정씨 성을 가진 재기발랄한 학생과 이정하가 주도적으로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그 학생은 이정하의 친한 후배였는데, 서울영화집단이 배후라고 생각한 근거가 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안훈찬은 "이효인 선배가 얘기한 학생은 연세대 영화패 초기 회장으로 이정하, 변재란 등과 함께 85년도 서클 창립멤버였던 정성원인데, 직접적으로 <부활하는 산하>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며 "이후 87년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했기에 간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안동 대공분실에서의 고문
 
성북경찰서에서 장안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홍기선과 이효인은 경찰에게 가혹행위를 당한다. <뉴웨이브와 작은 역사>에서 이효인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눈가리개를 풀어줬고, 서너 명이 나를 붙들고 지하로 내려가서는 어느 방으로 처넣었다. 고함을 지르며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옷을 발가벗고 그들이 주는 냄새나는 군복으로 갈아입으니 벽을 보고 서 있으라고 했다. 한 시간쯤 지나서 몇 명이 들어와서 무작정 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 명이 나를 책상에 앉히고는 내가 읽은 책, 만난 사람, 활동 내역 등 모든 것을 어릴 때는 물론 대학 입학 후부터 상세하게 쓰게 했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겨우 몇 장을 쓰고 나면 욕설과 함께 손찌검이 이어졌다. 익히 아는 대로, 북한의 지령을 받았지, 너 빨갱이지, 여기서 너 하나쯤 죽어 나가도 아무도 모른다 등의 협박과 함께 계속 반복해서 쓰게 했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동대문구 장안3동 보안분실. 시민사회단체들은 사실상 검찰 공안부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경찰 보안수사대를 두고 '인권침해 수사의 온상'이라며 대폭 축소 및 폐지를 요구해왔다.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운영하고 있는 동대문구 장안3동 보안분실. 시민사회단체들은 사실상 검찰 공안부의 지휘를 받고 있는 경찰 보안수사대를 두고 '인권침해 수사의 온상'이라며 대폭 축소 및 폐지를 요구해왔다.

동대문구 장안3동 보안분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효인은 "가끔은 무릎을 꿇리고는 구둣발로 머리를 차거나 욕조의 물을 틀고는 너 맛 좀 볼래, 했지만 실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며 "왠지 시간만 질질 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불안해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더 큰 어떤 조직표를 짜는데 시간이 걸리고 있으며, 그 이후에 나에게 상상하기도 싫은 고문이 가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약간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변재란이 다른 취조관 몇 명과 함께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며 걱정했지만, 그녀가 반가운 웃음을 짓는 것을 보고는 안심했다.
 
약 10분이 채 안 되는 이상한 면회였는데,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변재란이 나와 기선이 형을 꼭 확인하고 싶어 부탁을 했다고 했던 것 같다. 직감적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에서는 빠졌다는 것을 느꼈고 어쩌면 여기서 그냥 나갈 수도 있겠다는 희망도 들었다."

 
변재란 역시 1주일 정도 구금돼 조사를 받게 된다. 변재란은 "그 직전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파장이 컸기 때문인지 경찰이 신중했고 장안동으로 갈 때도 걱정했으나 여경이 옆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편안했다"고 말했다.
 
그는 "장안동에서 성북서로 다시 가던 날 이효인을 만난 기억이 난다"면서 "나가기 전에 경찰의 안내로 보게 된 것이고, 이후 홍기선에게 장안동에서 많이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웃었던 기억"은 없다고 했는데, 홍기선과 이효인은 폭행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면 변재란은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조사를 받으면서 심리적 불안감이 덜했던 차이로 보인다.
 
변재란은 "성북서에서 오니 아버지가 계셨고, 귀가할 수 있었다"며 "호흡기 질환이 심해 건강이 대단히 안 좋았기 때문에 구속을 면하고 기소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직접적으로 <파랑새> 제작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구속되지 않은 이유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또 "당시 건대 사태가 벌어진 직후라 장안동 대공분실에 학생들이 많아서 조사실이 부족할 정도여서 그 영향으로 일찍 나오게 된 것 같다"고 덧붙였다. 
 
건대 사태는 86년 10월 28일 건국대에서 열린 학생운동 조직 애국학생투쟁연합을 경찰이 강경진압한 사건이다. 경찰이 학교 진출입로를 봉쇄하자 학생들은 건물에 들어가 농성을 벌였고, 강제진압으로 1525명이 연행되고 이중 1288명이 구속된 80년대 최대 공안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은 이들을 '공산혁명분자'라고 규정했고,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1주일 이상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결국 홍기선과 이효인이 <부활하는 산하> 제작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한 경찰은 대신 <파랑새> 상영을 문제 삼아 영화법으로 구속기소한다. 실질적으로 영화를 만든 주역들이 잠적해 잡히지 않아 두 사람에게는 국가보안법이 아닌 영화법이 적용된 것이다. 별건구속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3월 선고 유예로 석방된다.
 
이효인은 저서 <한국 뉴웨이브 영화>(가제, 2020년 발간 예정)에서 "<파랑새> 사건은 독립영화 2세대(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 시기 두 개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며 "1986년 여름에 제작, 상영된 후 1986년 10월 이후에 피검된 이 사건은 영화를 통한 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었고, 또 이 사건으로 인하여 독립영화계 내부 작은영화와 운동영화의 성향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재판을 계기로 대학영화연합 결성
 
 1987년 5월 서울대에서 열린 대학영화연합 출범식에 참석한 한양대학교 소나기 장윤현 감독, 윤덕원 작가, 김연준 배우 등

1987년 5월 서울대에서 열린 대학영화연합 출범식에 참석한 한양대학교 소나기 장윤현 감독, 윤덕원 작가, 김연준 배우 등 ⓒ 김동숙 제공

 
홍기선과 이효인의 재판은 각 대학 영화서클 학생들에게도 관심사였다. 여러 대학서클에서 참관을 했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대학영화서클의 연합단체인 '대학영화연합'이 꾸려지게 된다.
 
안훈찬은 "홍기선, 이효인 선배의 구속은 영화운동하는 후배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동시에 자극이었다"며 "재판 방청 이후 근처 다방에 모인 각 대학동아리 회장단들은 더이상 친목 단체로 머물지 말고 당대의 학생운동에 발맞춰 대학 내 영화운동도 하나의 조직으로 연합해 연대의 방향을 모색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후 몇 번의 논의 끝에 대학로 한 카페에서 발기인대회를 통해 의장 선출과 함께 출범식을 결정했다"면서 "고려대, 상명대, 서울대, 외국어대, 경희대, 성균관대, 연세대, 한양대의 회장단들이 모였던 것으로 기억된다"고 덧붙였다.
 
87년 5월경 대학영화연합(대영연)은 서울대에서 출범식을 개최한다. 1기 의장은 <부활하는 산하>를 만든 주역인 안훈찬이었고, 총무는 고려대 '돌빛'의 김시천이었다. 85년 집중적으로 생겨났던 대학영화운동이 2년 만에 연대투쟁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후 경희대 '그림자놀이' 김인수가 2대 의장을, 서울대 '얄라셩'의 이승현이 3대, 전영태가 4대 의장을 맡았다.
 
안훈찬은 "처음 사무실은 영화마당우리와 같이 사용했다"며 "전국 영화과 영화동아리 모임과도 함께 모여 공동사업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했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는 "당시 서대문 치안본부 인근에 있던 건물의 옥탑방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월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학영화단체들과 같이 사용했다"며 "선후배로 교류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공동으로 요일을 정해 사무실을 사용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학영화연합과 전국영화과 영화동아리 모임은 1987년 5월경 시국선언문 형태의 유인물과 피켓을 들고 남산에 소재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 올라갔다. 거기서부터 '유신잔재 영화진흥공사 폐지' '영화법 개정' 등의 요구사항을 외치며 대한극장과 스카라 극장, 그리고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까지 행진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1988년 3월에 열린 대학영화연합 민족영화제

1988년 3월에 열린 대학영화연합 민족영화제 ⓒ 성하훈

 
1987년 첫 민족영화제를 열었고, 이듬해인 1988년 3월 15일~5월 말까지 2회 대학영화연합 민족영화제를 개최해 <인재를 위하여>, <노란 깃발> 등을 상영하기도 했다. 낭희섭은 "이때까지 불과 몇 년 사이에 영화운동은 작은영화(1884년), 열린영화(1985년), 민중영화(1986년), 민족영화(1987년)로 변화했다"면서 "대학영화서클 등이 만든 영화가 총학생회 지원을 받아 상영될 경우 민족영화라는 이름을 내세우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말했다.
 
1987년 12월 1일~15일까지 영화마당우리는 대학영화연합과 전국 영화과 연합회 등과 함께 '열린영화를 위하여-작은영화제'를 개최했다. 한양대 '소나기'의 <인재를 위하여>, 외대 '울림'의 <울림> 등이 상영됐다. 대선 직전 검열을 안 받을 수 있어 김민기(노래 '아침이슬' 작곡자)와 공동기획으로 온건하게 대중적인 공간에서 개최된 것이다.
 
영화제 실무를 맡았던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는 "홍보, 자료집 발간, 영사기 사용, 예산까지 실질적인 준비는 영화마당우리가 담당했고, 대학영화연합은 관객으로 참여한 행사였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비슷한 일정으로 연세대 학생회관에서는 외국어대 '울림' 주최로 '제5공화국 보도 영화전'이 열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제5공화국 보도 영화전'을 주관한 장기철(감독)은 "광주학살과 철거 투쟁 등의 영화를 상영했다"며 "외대에서 상영했는데 호응이 좋아 연세대에서도 상영한 것인데, 700원의 관람료를 받았는데도 2만 명이 관람했고, 일반 시민이 70% 정도였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은 대선을 앞두고 주요 대학을 압수수색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영 기자재도 압수됐다. 하지만 다음날 기자재를 재구입해 중단없이 행사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대영연은 1988년 8월 청년영화단체들과 동국대학교에서 집회를 열고 감독협회의 영화인협회 탈퇴를 촉구하고, 영화법 개정 투쟁에 즉각 동참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88년 8월 23일자 기사에서 "이들은 영화에 대한 사전심의는 헌법에 보장된 예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구속하는 위헌법률이라며 영화법을 영화진흥법으로 개정하는 시안을 제기하는 한편 스크린쿼터제 고수, 영화진흥공사의 폐지, 영화참여자들의 자유계약제 실시 등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학교마다 성격이 달랐던 대학영화운동
 
대학영화서클이 생겨난 후 대학영화연합으로 이어진 1980년대 대학영화운동은 학교마다 성격이 달랐다. 치열하게 외국의 예술영화를 보며 한국영화의 현실을 비판하고 이론을 강화한 쪽이 있었다면 또 다른 한 쪽은 제작을 추구했다. 딱히 한 쪽 방향의 구분을 두지 않고 자연스레 여건과 상황에 따라 흘러갔는데, 제작은 서울대 '얄라셩', 한양대 '소나기', 외국어대 '울림' 등이 두드러졌다.

외국어대 '울림'의 대표로 8mm 영화 <울림>(1986)을 만든 주경중(감독, <하얼빈> 제작 중)은 "원래 제목은 <노동 울림>이었고 가난한 노동자가 봉제공장에 취직해 의식화되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고 말했다. "이후 1987년까지 다큐멘터리를 찍었고, 노동현장의 투쟁 장면을 담기도 했다. 민중운동의 실천 수단으로, 운동으로서 영화를 선택한 것으로 현장에서 실천하는 모습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울림'에서 활동했던 장기철은 "서울영화집단의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가 할리우드 외의 다른 영화를 소개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고, 영화마당우리의 워크숍이 제작에 도움을 줬다"면서 "두 개 부분의 대학영화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했다.
 
 서울대 얄라셩 이상빈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어둠을 뚫고 태양이 뜰 때까지>

서울대 얄라셩 이상빈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어둠을 뚫고 태양이 뜰 때까지> ⓒ 이상빈

 
1987년 12월 대선 당시 구로구청에서 발생한 부정 투표를 발견하고 시민과 학생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했던 구로구청 사태 때는 서울대 얄라셩이 뛰어들었다. 이상빈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어둠을 뚫고 태양이 솟을 때까지>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당시의 부정 선거 문제와 국민의 분노로 3일간 이어진 항쟁을 대학영화서클 학생들이 필름 자료로 남겨 놓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서울대 '얄라셩'의 이상빈과 이승현은 구로구청에 진입해 농성 현장을 촬영하다가 이승현은 연행되고 이상빈은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캐비닛에 숨어 있다가 빠져나오게 되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
 
이효인은 대학영화운동에 대해 <뉴웨이브와 작은역사>에서 "1985년에는 경희대, 고대, 명지대, 서강대, 성균관대, 서울대, 연대, 외대, 이화여대, 한양대 등의 영화 동아리들이 느슨한 형태로나마 연합 동아리의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며 "연세대 영화패를 이끌던 이정하와 내가 합심하여 학생운동이나 사회운동에 발맞추는 조직으로 탈바꿈시키려 몇 번 시도했지만 이루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당시 영화운동 구성원 대부분이, 민주화운동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영화'에 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며 "따라서 1985년 서울영화집단이, 불과 몇 명에 불과했지만, 민주화운동과 같이 발을 맞추고자 했던 것은 영화 '운동'의 조그만 시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영화'운동이든 영화'운동'이든 어느 것이 옳았다는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라고 덧붙였다.

서강대 서강영화공동체를 만들었던 배병호(감독)는 "1980년대 대학영화서클들은 각각의 지향점이 있었다"며 "군사독재타도와 사회변혁의 의식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그는 "당시 영화서클 활동을 운동적인 성격으로서 국한시키는 것은 영화의 확장성을 제약하는 것이고, 8mm/16mm 영화를 찍어서 노동자나 농민을 계몽시킨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이야기"라며 "영화 자체에 대한 공감도 만만치 않았고, 영화 그 자체가 좋았기에 영화를 공부하지만 특정한 경향으로 가는 것은 선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대학영화연합은 이후 1987년 6월항쟁과 그 끝의 6.29 선언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안훈찬은 "1987년 7월 8월 9월 노동자 대투쟁 등 한국사 격변기 속에 좀 더 다양한 분화가 시작되는 역사를 맞이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얄라셩에서 활동했던 정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대학영화연합은 영화를 선전선동의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우세하여 많은 회의와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영화운동론을 정립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참고한 영화들이 <알시노와 콘도르>, <칠레 전투>,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같은 남미 영화, 천카이거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등이었고, 이 작품들은 노동 다큐와 함께 대동제 기간에 학내 영화제에서 상영됐다"고 말했다.

또한 "학내 영화제는 흥행도 잘 돼서 그 수익으로 영상 장비를 사서 시위 현장도 기록해서 보급했고, 시나리오와 문예이론 등을 학습하던 '여름영화학교'도 운영했다"며 "알라셩 출신 송능한 감독과 김홍준 감독도 이 시기에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덧붙였다.

<오! 꿈의 나라>나 <파업전야> 상영 사수 투쟁도 대학영화연합에 속한 동아리가 중심이 됐는데, 서울영상집단, 장산곶매, 바리터, 푸른 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이 있어 선배들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됐으며, 졸업 후 그쪽으로 진출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대영연에서 서대영연으로
 
 서울지역 대학영화패 연석회의에서 활동했던 오정훈(다큐멘터리 감독), 허은광(영화평론가), 조윤정(프로듀서), 유윤성(영화평론가), 박진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서울지역 대학영화패 연석회의에서 활동했던 오정훈(다큐멘터리 감독), 허은광(영화평론가), 조윤정(프로듀서), 유윤성(영화평론가), 박진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 서울독립영화제,오정훈,조윤정.박진형

 
대학영화연합은 1991년에 이르러 87학번인 오정훈(다큐멘터리 감독, 전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이 중심이 돼 서울지역대학영화패 연석회의(서대영연)으로 재편된다(1987년 6월항쟁을 전후로 서클이라는 명칭은 우리말인 동아리로 차츰 바뀐다).
 
1기 의장은 건국대 '햇살' 오정훈이었다. 2기 경희대 '그림자놀이' 정병국, 3기 서울대 '얄라셩' 허은광, 4기 고려대 '돌빛' 이동혁 등으로 이어졌다. 3기 의장을 맡았던 서울대 얄라셩 허은광(영화평론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사무국장)에 따르면 서대영연은 제작 장비 교류 등의 현실적 필요성에서 출발했고, 91학번들이 주축이었다.
 
박진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대학영화동아리들이 1992년 동유럽영화제를 개최하면서 서대영연의 결속이 강화됐고 회지 형태로 <젊은영화>를 발행했다"며 "동아리 전체가 참여하기보다는 몇몇이 대표성을 갖고 만나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80년대처럼 정치적 성격이나 운동의 맥락으로 가지는 않았다. 영화패의 성격이 변화하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허은광은 "대략 20여 편의 동유럽영화를 직접 번역하고 자막을 입히는 작업을 분담하여 진행한 동유럽영화제는 서대영연의 위상을 확인하고 참여 대학 간에 끈끈한 유대를 통해 조직력을 확보한 행사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서대영연은 이전 대영연에 비해 운동적 성향은 옅은 조직체였다"면서 "그러한 성격을 드러난 사례는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백기완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는 영화인들이 홍보팀을 구성했는데, 서대영연 차원에서 조직적 참여는 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서울대 얄라셩의 허은광, 건국대 햇살의 태준식(다큐멘터리 감독)이 개인적으로 참여한 바 있고, 노동자뉴스제작단, 서울영상집단, 보임 등이 단체로 결합했다"고 덧붙였다.
 
서대영연에서 당시 연대사업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화여대 '누에' 조윤정(프로듀서, 블루문파크 대표)은 "한달에 1~2번 만났고, 공동워크샵을 가졌으며 노동자뉴스제작단이나 장산곶매 등과 협력했다"며 "당시에는 MBC 파업과 미군에게 살해당한 동두천 기지촌 여성 윤금이 사건 등을 비롯해 개인의 자유와 범람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영화가 갖는 의미 등에 대한 세미나를 했고 4편 정도의 영화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조윤정은 또한 "당시 서강영화공동체 박진형과 서울대 얄라셩 유운성이 학술부서를 맡았고, 영화동아리가 없던 숙명여대의 김일란(다큐멘터리 감독)이 개인적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학교로 돌아가 영화동아리 '아침'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서대영연 회원 중에는 중앙대 영화동아리 '반영'의 이혁상(다큐멘터리 감독)도 있었는데, 김일란과 이혁상은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연분홍치마'에서 활동하며 용삼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과 <공동정범>을 만들었다.
 
1980년대와 비교해 방향이나 지향점에선 차이가 있었지만 1990년대의 대학영화운동 역시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이후 한국영화 발전에 든든한 밑바탕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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