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피고 봄은 오나 봅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한 꽃송이들에 맘이 설레기도 하는 걸 보면 말이죠. 하지만 봄 꽃의 향연을 만끽하기도 전에 아쉬운 소식이 먼저 들려옵니다. '코로나 19'때문에 올 봄꽃 축제 일정 대부분이 취소됐습니다. 아쉬운 대로 집에서 잠시나마 봄을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봄에 보면 딱 좋을 영화가 있어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포스터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포스터 ⓒ 튜브엔터테인먼트

 
"네가 너무 좋아. 봄날의 곰 만큼.
이것은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시작입니다."


현채(배두나 분)가 도서관에서 빌린 화보집에 정갈한 손글씨로 꾹꾹 담겨 있던 메시지. 사랑에 언제나 F학점이었던 현채에게 이것은 분명 자신을 향해 날아든 큐피트의 화살인 것만 같다. 메시지는 "다음 책은 청구기호 R/740.27/C4701 Gustave Caillebette(구스타프 깔레부뜨) 창 밖의 남자입니다"로 끝이 난다.
 
설레임이든 호기심이든,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 청구기호R/740으로 시작하는 책을 찾아보지 않을 이가 누구일까. 책에서 책으로 계속해서 이어지는 메시지들은 이 사랑이 현채 자신을 향한 것임을 거듭 확인시켜주는 것만 같다. "당신은 빨간 색을 좋아하시나보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화장한 얼굴 신부 같아 이제 당신을 만나야겠습니다" 같은 메시지들이 빨간 스웨터를 입고 빨간 장갑을 들고있던 현채, 난생 처음 화장을 해본 현채에게 "그게 바로 너야!"라고 소리친다.

도서관에서 시작된 사랑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사랑을 해본 이라면 누구나 경험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 모든 유행가 가사가 나의 이야기가 되고, 비오는 날도 햇빛 쨍쨍한 날도 모두가 나의 연애를 위한 황홀한 배경이 되는 유치찬란하지만 아름다운 착각 말이다.
  
현채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자신의 연애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챌 만한 눈치 따윈 없는 '미련 곰탱이'다. 고교시절 야구부 남학생을 좋아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투구연습을 한 뒤 '너의 영원한 배터리가 되고 싶어'라 적은 야구공을 건넸던 현채다. 처음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함께 간 극장에서 쩝쩝 소리를 내며 오징어 다리를 씹어대고, "어머, 뽀뽀하려나봐. 그런데 저렇게 키스할 때 입냄새나면 어떡해요?" 하고 큰소리로 낄낄댔던 현채다. 그런 탓에 연애의 실체는 경험해보지 못한 채 환상만 가득했던 그녀에게 그가 나타난 것이다. 감성 가득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황홀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그, 바로 빈센트다.
 
세 번째 책 속의 메시지에서 빈센트는 "아직도 제가 누군지 모르시겠나요?"라 물어온다. 미련 곰탱이 현채가 그 답을 알 리 없지만, 답과는 상관없이 이미 그 미지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있다.
 
현채가 이렇게 환상세계를 헤매는 동안, 현실세계에서는 유치원 때부터의 친구이자 지하철 기관사가 된 동하(김남진 분)가 성실하고도 줄기차게 애정표현을 이어나간다. 새벽녘 라면이 먹고 싶다는 현채의 한 마디에 캠핑용 냄비와 버너를 자전거에 싣고 와 집앞 계단에서 라면을 끓여주고, 기관사 가족은 평생 공짜로 지하철을 탈 수 있다며 은근슬쩍 프로포즈를 하기도 한다. 현채를 닮은 곰인형 오르골과 함께 건넨 '지하철 가족 정액권'은 소소하지만 진실되고 현실적인 동하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그러던 어느 날, 도서관에서 빈센트가 가리킨 책을 들고 있는 동하를 발견한 현채는 빈센트가 바로 동하였다고 오해하게 되고 동하는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거짓말이 들통나 둘의 짧았던 연애는 끝이 나지만 현채를 향한 동하의 사랑은 계속된다. 하루종일 마트에 서서 일해야 하는 현채를 찾아가 종아리 마사지기를 주섬주섬 꺼내어 내미는 동하의 마음이 안쓰럽다.
 
뒤늦게 보이기 시작한 동하의 마음

'동하'와 '현채'라는 이름에 작가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끼워맞추기식 해석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동하'의 '동화'처럼 예쁘지만 현실에 굳건히 발붙인 사랑, '현채'의 '현재'와 무관하게 하늘을 떠다니는 사랑이 다시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한다.
 
공기처럼 주위에 가득한 동하의 '현실적 사랑' 위로 운명적인 만남을 갈구하며 뜬구름 잡는 현채의 '환상 속 사랑'이 둥둥 떠다닌다. 땅속을 달리는 지하철 기관사인 동하와 하늘을 나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은 현채는 그녀의 말대로 앞으로 절대 만날 일이 없는 것일까?
 
"12월 15일, 5시 15분, 벤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책들을 징검다리 삼아 전해져온 마음은 마침내 만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메시지 속 남자의 마음은 현채가 아닌 다른 여인을 향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고, 이제 환상이 깨어져버린 바로 그 자리에 언제나처럼 서 있는 현실의 동하가 보이기 시작한다. 현채가 받아본 동하의 책에는 '사랑'이라는 단어마다 연필로 동그라미가 쳐 있다. 마지막 가장 큰 동그라미는 '엉엉 울었어요'라는 말에... 그리고 빈센트의 것처럼 깔끔하고 정갈한 글씨체가 아닌 비뚤배뚤하지만 정감어린 글씨체로 쓰여진 쪽지 하나가 있다.
 
"난 빈센트도 아니고, 비행기 조종사도 아니고, 그냥 지하철 운전사일 뿐이지만, 널 사랑해. 네가 빈센트를 만나도, 또 나를 영영 안 만나게 되더라도, 널 사랑한 것 만큼은 진심이야."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영화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스틸 컷 ⓒ 튜브엔터테인먼트

 
마지막 장면은 모두가 예상하는 그대로다. '종착역에서 기다릴게' 메시지를 보내고 동하에게 달려가는 현채. 종착역에는 예의 그 환하고 천진한 웃음을 짓고서 플랫폼에 든든히 발 붙이고 선 동하가 있다.
 
"이번 정착할 역은 '사랑' 종착역입니다."
 
어느 늦은 밤, 운행을 멈춘 지하철 기관사실을 구경시켜주며 동하가 했던 안내 멘트처럼, 서로 다른 꿈을 꾸던 현채와 동하가 드디어 함께 '사랑' 종착역에 다다랐다.
 
어쩔 수 없이 집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래서 주위도 좀 돌아보며 조금은 더디게 가는 듯한 시간을 보내게 된 요즘, 발품 팔아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고 책냄새 맡으면서 사랑의 메시지를 읽는 그런 느린 감성을 느껴보아도 좋지 않을까?
 
밖으로 나오라 유혹하는 4월의 햇살과 형형색색 봄꽃들의 유혹에 마음껏 빠져들 수 없는 대신, '봄날의 곰'을 만나보면 어떨까? 이제 막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 켜며 환한 햇살을 맞이하는 곰, 설레임 가득한 미소 머금고 그 큰 엉덩이 살랑살랑 흔들면서 꽃밭으로 달려나가는 곰, 현채와 동하의 새로운 시작이 그런 '봄날의 곰' 같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23년째 손 맞잡고 함께 걷는 한 남자, 그리고 꽃같고 별같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캐나다 런던에 살고 있습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