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상상의 범위를 벗어나는 치명적인 공포를 가지고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겨를도 없이 살기 위해서는 일단, 도망가야 한다. 혼돈의 세상에서 시스템은 붕괴되고,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믿음은 위태로운 줄타기를 벌인다.

눈앞의 망가진 세상, 회복이 불가능한 그 상태를 보면서도 우리 인간은 여기가 아닌 어딘가, 청정지역, 지금의 디스토피아와 균형을 이룰 유토피아가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불확실한 그곳을 향해 길을 떠난다. 과연 그들은 혹은 우리는 '그곳'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더 로드>의 한 장면

영화<더 로드>의 한 장면 ⓒ 누리픽쳐스

 
WHO(세계보건기구)는 지난 11일 '코로나 19'에 대해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pandemic)을 선언했다.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급증하는 확진자의 수를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해소되지 않는 불안과 공포를 견뎌야만 했고, 이 공포는 여전히 유효하다. 3월 중순을 넘긴 현재 우리나라는 최악의 상황을 지나왔다고는 하나 집단 감염과 해외 유입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변수의 위험에서 아직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는 중국과 한국을 넘어서 전 세계가 코로나 19의 공포에 떨고 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던 거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고요하기만 하고, 여기저기서 가짜 뉴스들이 넘쳐난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이 묘사한 전염병이 퍼지는 과정, 그리고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를 겪는 오늘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치부할 수 없는 모호한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우리의 불안을 가중시킨다. 

아침이면 약국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모두 마스크를 사기 위한 사람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바꿔 놓았는지(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혐오와 경계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집단 모임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고, 집단 감염이 아직도 발생하는 것에 경악한다. 또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봄과 함께 이 피로감을 나들이로 위로받고 싶은 마음과 싸우면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사람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공간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자연의 고요함은 평화를 주지만 도시의 고요함은 공포를 자극한다. 이미 최악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다음에는 무엇이 있을까? 여러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눈앞을 스친다. 
 
 영화<더 로드>의 한 장면

영화<더 로드>의 한 장면 ⓒ 누리픽쳐스

 
회색빛으로 변해버린 병든 지구는 시한부 환자처럼 생기를 잃고 자꾸만 말라간다.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지진에 말라비틀어진 나무는 지탱할 힘을 잃고 쓰러지고, 잿빛 땅은 푸른 잎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다. 먹을 것이 없어지자 사람들은 인육을 먹는 사람들과 아닌 사람들로 나뉘고, 이 비참한 상황 속에서 따뜻한 남쪽 바닷가를 향해 어린 아들과 함께 길을 떠나는 남자(비고 모텐슨)가 있다. (<더 로드>, 2009)

사람의 형태를 한 무엇이 다른 사람을 물어뜯는다. 물린 사람은 숨을 거두었다가 다시 깨어나고 사람이 아닌 다른 무엇, 즉 좀비로 변해 역시 다른 사람을 물어뜯는다. 이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하루아침에 도시는 좀비의 공격에 아수라장이 된다. 간호사 안나(사라 폴리)는 좀비로 변해버린 남편을 피해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가까스로 대형마트로 도망친다. 그녀와 생존자들은 마트에서 죽음을 기다리느니 (아마도) 좀비들이 없는 청정구역인 섬을 찾아 위험천만한 모험 길에 오른다. (<새벽의 저주>, 2004)

사람들이 무언가를 본다. 무언가를 본 사람들은 극한의 공포를 느끼면서 갑자기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달리는 차 앞으로 몸을 던지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전염병처럼 사람들의 집단 자살은 빠른 속도로 퍼지고 맬러리(산드라 블록)는 자신의 여동생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밖을 보지 않는 한 안전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적응해 나가지만 이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들의 공격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루하루가 불안과 공포와의 싸움인 상황에서 맬러리는 두 어린 아이와 함께 생존자들이 모여 있다는 안전한 그곳을 찾아 떠난다. (<버드 박스>, 2018)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 넷플릭스

 
위에서 언급한 세 영화는 각기 다른 소재를 가지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종말을 향해 치닫는 세상에서 여기가 아닌 어딘가, 삶이 있고 희망이 존재하는 그곳을 향해 모든 것을 걸고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많이 닮아있다. 원인이 불분명한 재난이 발생하고, 수세기 동안 쌓아온 우리의 시스템은 그동안의 시간(인류의 역사)이 무색하게도 빠른 시간 안에 무너진다. 혼돈과 공포가 세상을 지배하고, 선과 악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삶(단지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인간적인 삶)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끝을 모르는 추위와 인육을 노리는 자들의 공격, 그리고 무엇보다 적응을 모르는 허기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없다. 남자의 아내(샤를리즈 테론)처럼 절망 속에서 하루를 더 사느니 목숨을 끊는 것이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포기할 수 없다. 제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을 위해서 이곳을 떠나 어쩌면 아직 존재할지도 모르는 따뜻한 남쪽 바닷가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영화 <더 로드> 속 세상에서 타인과의 만남은 온기가 아니라 경계와 적대감을 낳는다. '함께'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의 불행을 외면할 줄 알아야 한다. 나쁜 사람(인육을 먹는 자,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이 되지 않는 것이 최선의 선이 되어버린 것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 또래의 아이를 본 적이 없고, 평생 경계와 의심을 배워 온 아들은 이 절망 속에서도 타인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의 증거다. 하지만 남자는 아들의 따뜻함을 보면서 아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세상이 사라진 지금, 어떤 마음이 들까?

<더 로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버드 박스>에서 생존자들을 위협하는 것은 또 다른 생존자들이다. 두 아이와 함께 길을 떠나는 맬린다는 아이들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안대를 벗지 말 것! 절대로 다른 목소리를 듣지 말 것!' 타인과의 접촉이 공포가 되어버린 잔혹한 현실에서 붙잡는 희망의 끈은 위태롭다. 눈을 뜨고 보라는 유혹의 목소리들.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 도대체 그들이 보는 무엇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것일까?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영화 <버드 박스>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맬러리와 아이들. 급류를 맞이하기 전, 누군가는 안대를 벗고 밖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맬러리는 윤리의 심판대에 오른다. 두 아이(소년은 맬러리가 낳은 아이이고, 소녀는 아니다) 중 누가 볼 것인지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맬러리의 진심을 눈치 챈 소녀가 자신이 보겠다고 한다. 맬러리는 갈등하지만 결국 누구도 보지 않을 것이라고, 이대로 모험을 강행할 것이라고 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나와 내 가족을 우선시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족을 우선시 하는 것과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마음에는 큰 차이가 있다. 좀비가 인류를 삼켜버린 극한의 상황에서 이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가족이 좀비로 변해 나를 공격하는 <새벽의 저주>에서 경찰은 고백한다.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에 목숨을 잃은 동료들에게 조의를 표했지만 내가 아닌 그들이 죽은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젠 죽음보다 두려운 것이 있다고. 그것은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살아있음이 더 이상 안도감을 주지 않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영화 <새벽의 저주>의 한 장면

영화 <새벽의 저주>의 한 장면 ⓒ UIP코리아

 
<새벽의 저주>에서 생존자들이 영화 속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극단적이지만 꽤나 설득력이 있다. 좀비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르는 영화 초반, 그들은 좀비에게 물린 부상자들을 당연히 치료하고 도와주려 한다. 그들이 좀비로 변해버리자 아직 변하지 않은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친다. 아직 의식이 있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런 고민을 했던 생존자들은 마트 옥상에서 마치 게임을 하듯 좀비 죽이기를 즐긴다. 

우리가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왔던 욕망과 가치들은 극단의 상황에서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 오직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 일까? (위에서 언급한) 영화들에서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희생, 이타심, 인간적인 삶을 버렸지만 영화는 역설적으로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함께' 살아가는 당연한 일상이 당연하지 않은 요즘이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피로감이 점차 쌓여가고 있는 것이 걱정이다. 언젠가는 코로나 19가 끝이 나고 상점에도, 공원에도, 극장에도 사람들이 가득할 테지만 전문가들은 이것이 끝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살아가야한다. '함께'의 범위는 인간과 인간만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은 없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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