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도에 여름 워크숍 작품 촬영을 위해 임진각 갔을때 고대 '돌빛' 회원들.
왼쪽에서 두번째 김시천, 세번째 정병각(감독), 오른쪽 끝 신동일(감독)

1988년도에 여름 워크숍 작품 촬영을 위해 임진각 갔을때 고대 '돌빛' 회원들. 왼쪽에서 두번째 김시천, 세번째 정병각(감독), 오른쪽 끝 신동일(감독) ⓒ 신동일 감독 제공

 
1984년 7월의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는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난 직후 촬영을 교육하는 '작은영화워크숍'과 계간지 <열린영화> 발간한 '열린영화모임'으로 발전했다.
 
여기에 더해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대학영화서클들의 결성이었다. 서울 주요 대학들에 서클이 생기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영화운동은 활기를 띤다. 1979년 공대생 모임으로 시작해 1980년 3월 20일 가장 먼저 생겨난 서울대 얄라셩은 대학 영화서클의 맏형으로서 다른 대학 영화서클 결성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서울대 얄라셩 이후 두 번째로 만들어진 대학영화 서클은 1983년 생긴 고려대학교 돌빛이었다. '얄라셩'과 '돌빛'은 초창기 대학 영화운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85년 이전 두 대학의 영화서클은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대학 영화운동의 밑바탕 역할을 한다.
 
물론 얄라셩이 초기 돌빛의 지도를 맡았을 만큼 역할이나 비중이 더 컸으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이들은 다른 대학 영화서클들과 연대해 대학영화운동을 선도했다.
 
고려대 '돌빛', 안암영화제
 
돌빛의 시작은 1983년 6월, 영화서클을 결성하려한다는 공고가 정민교에 의해 교정에 붙으면서였다. 창립회원이었던 정병각(감독, 충남영상위원장)은 "영화동아리를 결성한다는 공고가 붙어서 몹시 반가웠다"며 "마침 졸업 후에 영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공고를 붙인 정민교는 정병각과 같은 사회학과 80학번 동기였다. 영화 서클을 준비하고 있던 정민교가 서울대 얄라셩과 상의해 여름방학 기간에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회원 모집을 알렸던 것이다. 창립회원은 정민교, 정병각, 이규석(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김양래(독립제작사 운영) 등 15명이었다. 정병각에 따르면 "창립회원 중에는 70년대 학번이 두 명 정도 있었고, 대부분 나보다 아래 학번들이었다"고 말했다.
 
곧바로 여름방학 때 진행된 워크숍이 서클 활동의 시작이었다. 여름 워크숍 프로그램은 '세계영화사', '제3세계 영화', '간단한 작품 제작' 등으로 구성됐다. 강사는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얄라셩 출신 송능한(감독), 홍기선(감독), 박광수(감독) 등이었다. 얄라셩 출신이 아닌 강사(김달선 선생)도 있었다.
 
'돌빛'이라는 이름은 워크숍에서 작명됐다. 제안자는 졸업 후 교사가 된 사학과 78학번 최규석이었다. '돌'은 고려대의 상징이었고, '빛'은 영화의 상징이라 둘을 합치자 한 것이었다.
 
정병각은 초기 '돌빛' 활동에 대해 "충무로 촬영현장 견학도 했다"며 배창호 감독의 <적도의 꽃>(1983) 저녁 촬영에 가서 밤을 꼬박 새우고 촬영 스태프들의 버스를 얻어타고 돌아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때 조감독은 '영상시대' 견습생 출신 신승수 감독이었다. 정병각은 "신승수 감독께서 주도적으로 우릴 안내해서 제일 고마웠고, 지나고 보니 빠듯한 촬영 여건에서도 대학생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배창호 감독님과 안성기 선배 등 스태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고 회고했다. "배창호 감독, 안성기 선배가 우리들에게 환영한다는 인사말을 해줬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돌빛'의 활동 목적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으나, 제작 역량이 미흡해 작품 만들기가 어려웠다. 정병각은 "당시 이규석의 아버지가 영화영상 녹음실을 경영하고 있어서 집에 8mm 카메라와 간단한 조명 장비가 있었다. 이규석은 제작 경험이 있어서 그의 주도로 짧은 단편영화를 만드는 게 전부였고, 실험적인 작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고 회상했다.
 
그 이후 '돌빛'은 '써클 유지를 위해 신입회원을 모으는 것과 작품 제작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거의 활동 전부였다. 정병각은 "이후 85년 졸업하자마자 3월부터 충무로에 들어왔고 그런 연유로 졸업 후에도 꽤 오래 후배들과 관계가 이어졌다"라며 "'돌빛'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온 게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다. 
 
 1987년 개최된 고려대 '돌빛'의 안암영화제

1987년 개최된 고려대 '돌빛'의 안암영화제 ⓒ 성하훈

  
1985년 입학해 돌빛에 가입한 김시천(서울영상위원회 독립영화공공배급망센터 소장)에 따르면 1986년까지는 서클룸이 없어서 학교 로비, 강의실, 매점 앞 등에서 모임을 해야 했다. 87년에 다행히 학생회관 4층에 방을 배정받고서야 떠돌이 생활을 면할 수 있었다. 이때 영화제도 열었고 작품도 제작했다.
 
김시천은 "1987년에 돌빛 회장을 맡아 그 해 '제1회 안암영화제'를 개최해 <오발탄> 등 16mm 필름 상영했다"며 "이후 매년 주제를 정해 개최해 오다가 시대에 맞게 변화하면서 몇 년 전부터는 자체 제작한 단편영화를 발표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영화이론 학습도 하고, 8mm 필름 영화제작 워크숍도 병행했는데, 창립회원인 이규석 선배가 주로 촬영, 편집의 기술적인 지도를 해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 "87년 총여학생회와 공동제작으로 학내 흡연과 여학우 폭행 문제를 다룬 <왜 못마땅하죠?>라는 8mm 작품을 만들었고, 87년 6월 항쟁을 전후로 여러 집회와 이한열 열사 장례식까지 학내외 민주화 투쟁 현장을 8mm 필름으로 기록해 두기도 했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필름은 없다. 김시천은 "다른 대학 동아리에서 상영을 위해 빌려갔다가, 동아리방 건물에 화재가 나는 바람에 그 필름이 소실되면서 기록이 사라지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초창기 '돌빛' 출신 현직 영화인으로는 정병각 감독과 이규석 교수를 비롯해 김동주(<금붕어, 빗자루되다> 감독), 신동일(<컴,투게더>, <반두비> 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민환기 (중앙대 교수. 한국영화아카데미), 김정호 (경희대 교수, 한국영화아카데미), 박동현 (명지대 교수,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집행위원장), 임정하 (<음란서생>프로듀서, <뚜르> 감독), 강이관(<사과>, <범죄소년> 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강연주 (CGV 아트하우스 영화사업팀 부장) 등이 있다.
 
연세대 '영화패', 세계영화제 흥행
 
대학영화서클의 봇물이 터진 것은 1985년 1월 영화마당우리가 '작은영화워크숍'을 처음으로 개최한 후였다. 작은영화워크숍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이 영화서클을 만드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작은영화워크숍에는 모두 33인이 참여했는데, 연세대에 재학 중이던 변재란(영화평론가, 순천향대 교수)과 이화여대에 재학 중이던 황혜란, 강수정, 외국어대에 재학 중인 장기철(감독), 서강대 이정향(감독) 등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1985년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대학에서 영화서클이 만들어 질 때 중심역할을 한다.
 
 연세대 영화패 써클룸에서 창립 회원이었던 이수정(감독)과 이듬해 신입생으로 들어와 1기가 된 안훈찬(프로듀서). 뒤편 김남주 시인의 '자유'는 이정하가 써 놓은 것이다.

연세대 영화패 써클룸에서 창립 회원이었던 이수정(감독)과 이듬해 신입생으로 들어와 1기가 된 안훈찬(프로듀서). 뒤편 김남주 시인의 '자유'는 이정하가 써 놓은 것이다. ⓒ 이수정 감독 제공

 
변재란은 이정하(전 영화평론가), 정성원 등과 함께 1985년 여름 연세대학교 영화패를 만들게 된다. 1985년 가을에 가입한 이수정(다큐멘터리 감독)은 "당시 3학년이었는데, 교내에서 개최된 '작은영화제'에서 8mm/16mm 영화들을 보고 저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세영화패에 가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때 작은영화제는 1984년 7월에 열린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발표회의 순회상영회 성격을 갖고 있었다.
 
당시 1학년으로 안훈찬(영화 프로듀서, 미인픽쳐스 대표)이 가입한 것도 도 상영 영화가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안훈찬은 "85년 상반기 개최된 작은영화제에서 서울대 얄라셩의 <출구>, 연세대의 <광장> 등을 상영했는데, 매우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래서 상영회가 끝나고 동아리 회원으로 가입하게 됐다"며 "당시 이제 막 동아리를 결성한 선배들이 활동하고 계셨고 정식 모집 1기 회원이 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연세대 영화패를 창립한 이정하, 변재란은 이미 서울영화집단 등과 교류하고 있을 때였다. 변재란은 1985년 1월 영화마당우리의 작은영화워크숍을 통해 홍기선의 서울영화집단을 알게 됐고, <영화운동론>(도서출판 화다) 번역에도 참여했다. 이정하와 함께 서울영화집단이 서울영상집단으로 바뀔 때 창립 회원으로 참여한다.
 
안훈찬은 "선배들이 학내에서 영화동아리를 결성하기 전부터 외부에서 타 동아리나 모임들을 함께 병행하고 있었기에, 선배들로부터 필사본 혹은 복사본 형태의 영화 이론서들을 돌려보며 영화 세미나를 했고, 8mm 영화제작 기법에 대해서도 배웠다"고 기억했다.
 
이듬해인 1986년 봄, 연세대학교 영화패는 교내에서 세계영화제를 일주일 정도 기획해 진행했다. 이수정은 "당시로선 보기 힘들었던 80년대 화제작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양철북>, <미치광이 피에로>, <제7의 봉인> 등을 상영했는데, 딩시 박건섭씨가 있었던 프랑스문화원에서 16mm 필름을 대여받고 나머지는 비디오를 구해 상영했는데, 교내외 학생들이 줄지어 관람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수정은 "연세대 영화패는 이후 1990년 이후 김한민(<명량> 감독)이 있을 때 '연세대 영화패 프로메테우스'로 서클명을 바꾼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안훈찬은 "변재란과 이정하가 활동하고 있던 서울영화집단이 다른 대학 출신들이 모여있었기에, 선배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학교동아리 후배들을 소개 시켜주고 상호 협력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며 "당시 각 대학별 영화서클들은 제작 경험도 일천하고 제작장비 및 인력도 충분치 않아서 서로 교류하고 협력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학 영화서클들의 결성에는 80년대 초반 영화운동단체들의 영향이 자리하고 있었던 덕분에 적극적인 연대와 협력이 가능했던 것이다.
 
경희대 '그림자놀이',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안동규, 조준백 등과 함께 1985년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를 만들었던 곽재용 감독

안동규, 조준백 등과 함께 1985년 경희대 영화서클 '그림자놀이'를 만들었던 곽재용 감독 ⓒ 이정민

 
같은 해 만들어진 경희대학교 영화동아리 '그림자놀이' 역시 80년대 초반 영화운동이 영향을 끼친 경우였다. 창립을 주도한 사람은 안동규(영화제작자, 두타연 필름)였다.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안동규는 1984년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에 참여했고, 열린영화모임에 참여해 1985년 <열린영화> 편집인을 맡기도 했다. 이런 바탕이 자연스럽게 영화서클 결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안동규는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의 홍기선과 친척이었다. 비슷한 또래지만 홍기선은 안동규의 외삼촌이었다. 안동규는 "내 친구들이 홍기선의 친구였고, 홍기선의 친구가 내 친구였다"며 "만날 때마다 영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고 회상했다.
 
'그림자놀이'의 초기 회원은 곽재용(감독), 조준백(연극서클 활동) 등 3인이었다. 안동규는 "신규 서클이라 방을 배정받을 수 없어서, 학교 지하창고에 간판을 걸고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1984년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에서 상영된 단편영화의 학내 상영과 영화이론 학습 등을 했고, 곽재용을 중심으로 단편영화 제작을 제작해 교내 상영을 했다"며, "조준백은 단편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림자놀이 서클이 생긴 이후 몇 달 뒤 80년대 후반 한국영화운동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했던 이효인(경희대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도 회원으로 가입한다. 이효인은 저서 <뉴웨이브와 작은역사>(가제, 2020년 출간 예정)에서 "85년 9월 복학 후 아마 그림자놀이 게시판 공고를 봤을 것"이라면서 당시 서클 가입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물어보니 안동규(임학)와 곽재용(물리)이 최고 선배라고 했다. 학번으로는 나보다 다 아래였지만, 안동규와는 서로 존대하며 맞먹었고, 곽재용과는 하대하며 맞먹기로 했다. 훗날 안동규는 제작자로 이름을 냈고, 곽재용은 <엽기적인 그녀>(2001)의 감독으로 전 국민이 아는 사람이 됐다.
 
둘은 서로 무시하면서도 경쟁하는 듯했다. 그때 곽재용은 16밀리 필름으로 만든 <선생님 그리기>로 청소년영화제에서 작품상을 받고는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청소년영화제는 영화진흥공사(현 영진위)에서 주최했는데, 당시로서는 접근하기 참 힘들었던 영화 제작을 시도한 대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효인은 "1985년 겨울에 직접 쓴 시나리오로 연출을 맡고, 곽재용이 촬영을 맡아 단편영화를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며 "한 청년이 서울에서 겪는 슬픈 생활을 담은 영화 같은데, 제목은 양성우의 시 '꽃상여 타고'에 나온 시구에서 가져온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 제목은 훗날 홍기선(감독)이 자신의 데뷔작을 만들 때 가져다 썼다"고 덧붙였다.

곽재용(감독)은 1986년 충무로에 들어와 이봉원 감독 밑에서 연출부 일을 하면서 <내일은 뭐 할거니> 조감독을 맡게 된다. 이봉원 감독은 1979년 서울대에서 알랴셩 영화연구회를 만들기 위해 대학신문에 처음 모집 광고를 냈던, 얄라셩 출발의 결정적 산파였다. 

외국어대 '울림', 저임금 노동자 그린 <울림>
 
 1985년 외국어대 '울림'을 만든 김태균 감독. 2014년 <가시> 제작보고회

1985년 외국어대 '울림'을 만든 김태균 감독. 2014년 <가시> 제작보고회 ⓒ 이정민

 
경희대와 이웃한 외국어대 '울림'은 1985년 김태균(감독, 전 한국영화아카데미 교수), 장기철(감독), 주경중(감독, <하얼빈> 제작 중), 김대우(감독. <음란서생>) 등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장기철은 1985년 작은영화 워크숍 수료생이었다.
 
김태균은 "1985년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영화서클을 만들어 같이 활동했다며 사회변혁에 대한 목소리들이 많았던 시대였던 만큼 그 목소리들이 널리 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울림으로 지었다고 말했다.
 
초반 울림은 다른 대학 서클과는 다르게 서클룸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김태균은 "내가 정치외교학과 출신인데, 당시 총학생회장이 정치외교학과 후배였다"며, "그렇다고 총학생회 활동을 도와준 것은 아니었지만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태균은 당시 활동에 대해 "우리는 영화를 만들 역량은 아직 안 돼서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 쪽이었다"며 "이후 들어온 후배들이 작품을 만들었고 나는 1986년 졸업 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했다"고 말했다.
 
울림은 이듬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으로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대표작인 8mm 영화 <울림>을 제작했다. 주경중이 주도했다고 한다.
 
김태균은 "이후로 들어온 울림 출신 영화인들은 장광수(영화진흥위원회), 문승욱(감독), 김난숙(영화사 진진 대표), 박재홍(교수), 박정우(감독), 연극반 후배로는 이재용(감독) 등이 있다"고 말했다.
 
1986년 한국영화아카데미를 거쳐 충무로에 진출한 김태균은 80년대 후반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에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면서 <박봉곤 가출사건>(1996), <키스할까요>(1998) , <화산고>(2001) 등을 연출하며 주목받는 감독으로 부상한다.
 
한양대 '소나기', 대학영화 명작 <인재를 위하여>
 
한양대학교 '소나기'는 1985년 84학번 홍대관에 의해 만들어졌다. 비디오가 활발히 보급되던 시절 취미 활동으로 만들었으나 이듬해 장윤현(감독)과 공수창(감독)이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장윤현과 공수창은 이후 90년대 영화운동의 결실이었던 <파업전야> 제작에 참여했고, 충무로로 진출해서는 90년대 한국영화의 기대주로 성장한다.
 
 1987년 8월 <인재를 위하여> 촬영현장. 공수창(맨 왼쪽 의자), 장윤현(책상 위) 김연준 배우(오른쪽 의자)

1987년 8월 <인재를 위하여> 촬영현장. 공수창(맨 왼쪽 의자), 장윤현(책상 위) 김연준 배우(오른쪽 의자) ⓒ 김연준 제공

 
소나기를 대표하는 작품은 두 사람이 중심이 돼 만든 <인재를 위하여>다. 45분 분량의 중편으로, 80년대 대학영화서클이 만든 8mm영화 중 꽤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학생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울대 '얄라셩'에서 활동했던 "정미(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매우 센세이셔널한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는 "1987년 베를린영화제의 요청으로 추천 작품을 작성할 때 <인재를 위하여>도 목록에 있었으나 8mm 필름이어서 아쉽게도 제외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운동권 학생들을 그린 영화는 시와 최후 진술이 주제였다. 시로 시작하는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학교 신문에 발표된 조금은 불온한 우영의 시를 운동권 핵심인물인 영성이 운동권 학생들 회지에 싣는다. 영성은 우영에게 학생운동 서클 가입을 권유하지만 처음에는 이를 거부하던 우영이 차츰 관심을 갖고 생각이 바뀔 무렵 경찰에 연행된다. 담당 형사는 영성을 잡기 위해 고문과 회유를 자행하고, 우영은 취조를 받는 과정에서 상황을 인식하고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안일함을 반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스크립터와 조연출 역할을 맡았고 단역으로 출연했던 김소연(프로듀서)은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감독)이 취조하던 형사를 맡아 악역으로 출연했고, 장윤현 감독은 운동권 핵심인물 영성을 맡았다"며 "윤덕원(시나리오 작가, <빅매치> <사생결단>)와 방상연(감독, 사과나무픽쳐스)도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고 홍기선 감독의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을 만들었던 최강혁(프로듀서), 박찬욱 감독 작품을 제작했던 이춘영(프로듀서) 최인규(감독), 김용한(감독), 최하동하(감독), 박하나(작가, <정직한 후보>), 이상현(프로듀서, <은교>) 등이 '소나기' 출신 영화인이라고 소개했다. 최근 인기를 끈 tvN 드라마 <방법>을 연출한 김용완 감독도 '소나기' 활동을 했다고 한다.
 
1987년 '소나기' 4기 회원으로 가입해 <인재를 위하여> 제작에 참여했던 이창준(프로듀서)은 "<인재를 위하여>가 조금 쇼킹한 소재로 이슈가 될 만한 작품이었다"며 "글(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개인적인 능력을 갖고 있던 장윤현이나 공수창의 역할이 컸다"고 말했다.
 
'소나기'는 제작 역량이 뛰어났던 영화서클 중 하나였다. 이창준은 "서클에서 워크숍을 강하게 했다"며 "집이 지방이었는데도 방학 때 내려가지 못하고 서클룸에서 자면서 단편영화를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창준은 또한 "1987년 채플린영화제를 개최했고, 당시 5.18 광주민중항쟁 비디오 상영과 시위 현장에 나가 데모하는 모습을 찍기도 했다"고 오래전 활동을 회고했다.
 
'소나기'의 장윤현과 공수창은 이후 영화운동의 역량이 강화됐던 장산곶매에 합류해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았고, 김소연은 여성영상공동체 바리터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이화여대 '누에', 16mm 영화 <시발>
 
 2014년 9월에 열린 이대 '누에' 창립 30주년 총동문회. 윗줄 왼쪽에서 첫번째 강원숙(전 영진위원), 여섯번째 김수진(비단길 대표), 여덟번째 황혜란, 다음줄 왼쪽에서 두번째 조윤정(프로듀서)

2014년 9월에 열린 이대 '누에' 창립 30주년 총동문회. 윗줄 왼쪽에서 첫번째 강원숙(전 영진위원), 여섯번째 김수진(비단길 대표), 여덟번째 황혜란, 다음줄 왼쪽에서 두번째 조윤정(프로듀서) ⓒ 누에 제공

 
이화여대 '누에'가 만들어진 것은 1985년 1월 작은영화워크숍이 바탕이었다. 당시 이대 사회학과 황혜란(82학번)과 강수정(당시 이름 김수정)이 참여했다. 우연히 작은영화워크숍을 통해 만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개강과 함께 이대 영화서클의 출발인 '누에'를 만든다.
 
'누에'라는 이름은 초기 스크린이 '비단'을 이용했었다는 의미와 함께 여성의 변화와 지각을 촉구하는 그 과정이 누에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는 과정과 일맥상통한다는 뜻에서 따왔다. 특징적인 것은 이들은 16mm 영화 <시발>을 제작했다는 점이다. <시발>은 직장 가진 주부가 겪는 사회적 불평등을 다룬 상징적인 영화였다. 8mm가 아닌 16mm영화로 제작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효인은 <뉴웨이브와 작은역사>에서 8mm와 16mm의 차이에 대해 "당시 대학생 영화인들은 주로 8mm로 영화를 찍었다"며 "16mm로 영화를 만들면 준 프로급으로 인정받던 시절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16mm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아리플렉스(Ariflex)나 하다못해 보렉스 (Bolex), 그도 안되면 벨엔하웰(Bell & Houwell) 카메라를 조달할 수 있다는 얘기였고, 16mm 필름에 어울리는 조명을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며 "반면 8mm는 종로 3가에 나가 카트리지 형태로 된 필름을 사서 조그만 8밀리 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으면 되는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황혜란은 "첫 작품 <시발>을 함께 만든 고 강수정, 이현주, 김현주, 김영주, 김미현, 정진숙, 장진경 등과, 이후 누에에 들어온 김수진(영화제작자, 비단길 대표), 한지혜, 원은영, 하영아 등이 초창기 회원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황혜란은 16mm 영화 제작에 대해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촬영장비와 조명 등을 대여하고 사용법을 배웠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누에 출신 대표적 영화인들은 <추격자> <늑대소년> 등을 제작한 김수진,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김숙, 영진위원을 역임한 강원숙(전 타임와이즈 수석 심사)와 고 이유진(프로듀서), 조윤정(프로듀서. 블루문파크 대표) 등이 있다. 이 외에도 다수가 영화계에서 활동 중이다.
 
1985년 작은영화워크숍의 조교였던 낭희섭도 "여대에서 대학 서클의 창립영화로 8mm가 아닌 16mm를 지항해 완성한 과정이 궁금했을 정도였다"며 "이대 누에가 사회학적 관점에서 여성영화를 처음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낭희섭은 또한 "누에가 1985년 9월에 첫 영화제인 '작은영화의 함성'을 시작할 때 16mm필름과 영사기를 무료로 지원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강대 '서강영화공동체', 커뮤니케이션 센터와 커스튼 신부
 
 서강대 서강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함께했던 박찬욱 감독과 회원으로 활동했던 최동훈 감독

서강대 서강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질 때 함께했던 박찬욱 감독과 회원으로 활동했던 최동훈 감독 ⓒ 유성호, 쇼박스

 
서강대는 1985년 서강영화공동체가 정식으로 출범했으나 바탕이 달랐다. 1983년부터 신문방송학과를 중심으로 교내 커뮤니케이션 센터에서 외국영화를 비디오로 감상하는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커뮤니케이션 센터에서는 미국인 교수인 케빈 커스튼 신부가 미국과 유럽의 예술영화를 비롯 3세계 국가와 소비에트(현 러시아) 영화를 수급해 왔고, 부정기적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 외에 해외영화를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기 때문에 연극영화과가 있는 대학의 학생들도 상영회에 몰려들 만큼 인기가 좋았다.
 
이를 담당했던 게 82학번 배병호(감독), 고 김용태(감독)이었다. 이들은 영화에 대한 소개나 비평을 정리해 자료로 관람객에게 나눠줬고 학생 조교로서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배병호는 "영화감상회에 꾸준히 오던 학생들이 10명 정도가 돼서 선배였던 김동원(감독,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교수), 김소영(감독,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원 교수),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조재홍(감독, 〈노래로 태양을 쏘다〉) 등과 상의해 서강영화공동체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82학번이었던 박찬욱(감독)도 초기 회원이었다.
 
주로 신문방송학과가 중심이었던 이 모임은 1985년 서강영화공동체가 만들어지면서 폭이 넓어진다. 배병호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신문방송학과가 하던 커뮤니케이션 센터 학생 조교를 영화서클에서 맡도록 하자고 제안했고, 이후로 서강영상공동체가 이를 담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1990년대 서강영화공동체에서 활동했던 박진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커뮤니케이션 센터에는 스튜디오, 장비, 비디오 등이 잘 구비돼 있어 관심있는 대학생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게 많았다"고 말했다.
 
배병호는 "서강영화공동체는 1983년부터 시작한 셈이라며 1985년 대학영화서클이 잇따라 만들어지고 영화제를 개최할 때 비디오 지원과 비평 및 영화소개 자료 등을 적극적으로 제공해 다른 대학 영화서클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에이젠쉬타인의 <전함 포텐킨>도 당시에는 서강대를 통해서만 볼 수 있던 영화였다
 
서강영화공동체를 거쳐간 영화인으로는 배병호(감독) 외에 박찬욱(감독)과 최동훈(감독, <암살>), 이정향(감독, <집으로>), 윤태용 (감독, <베니싱 트윈>), 최성식(감독, <겨울 꿈은 날지 않는다>), 임경수 (감독, <6월의 일기>), 고 김용태(감독, <미지왕>), 전계수(감독, <삼거리 극장>) , 이권(감독, <도어락>) 등이 있다.

성균관대 '영상촌', 전양준과 정성일
 
 성균관대 '영상촌'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 장준환(감독), 임유철(감독)

성균관대 '영상촌'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 장준환(감독), 임유철(감독) ⓒ 오마이뉴스, CJ, 임유철

 
성균관대 영상동아리 영상촌 역시 1977~1978년에 만들어진 영화 소모임과 1985년 만들어진 영화동아리가 결합해 만들어졌다 성균관대는 동서영화연구회를 이끌던 전양준(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감독, 영화평론가), 한상준(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70년대부터 눈에 띄는 활동을 펴왔다.
 
문화원 세대였던 전양준과 정성일은 동서영화연구회, 서울영화집단과 교류하며 활동했고, 1984년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를 함께 준비했다. 1980년 <프레임> 1985년 <열린영화>를 발행하며 비평 쪽에서 두드러졌다. 서울대 '얄라셩'과 함께 초기 영화운동의 형성 과정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전양준은 "영화 서클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1990년대 한국 주류상업영화의 중심이었던 강우석 감독도 1990년대 충무로의 중심으로 남북영화교류 등 주요한 사업들의 적극적인 후원자 역할을 해 특기할 만하다"고 말했다.
 
영상촌은 이후 장준환(감독, < 1987 >), 임유철(감독, <비상>)으로 이어진다. 90년대 입학한 임유철 감독은 "재학 시절 영상촌에서 활동하면서 각종 시위 현장을 비디오카메라에 담으러 다녔다"고 회상했다.
 
영화 감상 넘어 제작으로
 
 86년 이화여대 대학영화제 자료집에 실린 당시 대학서클 및 영화운동단체들

86년 이화여대 대학영화제 자료집에 실린 당시 대학서클 및 영화운동단체들 ⓒ 성하훈

 
이들 학교 외에도 명지대 '필름아트', 한성대 '활사패', 상명여대 '얼레' 인천대 영화연구회 등이 있었는데, 1980년대 대학영화 서클들의 공통점은 작은영화제와 단편영화 제작 등이었다. 시위 현장 촬영도 이들에게 맡겨진 기본적인 역할이었다.
 
1985년 5월 14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대학가에서 생겨나고 있던 영화 서클들을 주목하면서 "영화이론 및 감상 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대부분 제작모임으로서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며 이렇게 보도했다.
 
"지금까지 영화제작서클로는 서울대 얄라셩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고, 중대 동국대 한양대 등의 연극영화과를 통한 영화 제작이나 대학별로 개인적 활동에 그쳤을 뿐 대학가의 문화운동에서는 특정한 소수에 불과했다.
 
그런데 서강대가 신방과 학생을 주축으로 이끌어온 영화연구모임을 올해 들어 전 대학을 상대로 회원의 범위를 넓혀서 출범하는 것을 필두로 고려대 돌빛, 외국어대 울림을 비롯, 연세대 경희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숙명여대에서도 영화연구회가 본격적으로 구성돼 이번 학기 서클 연합회에 등록했거나 등록을 준비 중이다."

 
동아일보는 또한 '대학 영화서클들이 개최하는 작은영화제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도 크다'며 '외대의 경우 3일 동안 열린 1회 작은영화제의 마지막 날이 토요일이라 수업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270석을 좌석을 꽉메우고 서서 보는 학생들까지 있을 정도로 연일 폭발적 호응과 열리 속에 진행됐다'고 전했다.
 
기사에는 당시 경희대 '그림자놀이' 안동규와 외대 '울림'의 주경중이 등장한다. 안동규는 작은영화제의 의의에 대해 "짧은 연륜을 극복할 체제를 가다듬고 다수의 학생들이 새로운 형태와 내용의 영화에 대해 낯설지 않은 태도로 대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보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경중은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두려움이 많았으나 학생들이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는데 큰 용기를 얻었다"며 사회성이 부각된면서 예술성도 가미된 신선한 감각의 새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갈증을 해소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1985년 작은영화워크숍에서 조교를 맡았고, 현재 독립영화워크숍을 운영하고 있는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은 "작은영화워크숍을 수료하고 학교로 복귀한 학생들이 작은 영화제를 활용해 영화서클을 결성하고 자체 역량으로 8mm/16mm 작품을 제작하는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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