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기억의 전쟁>을 보았다. 좋은 영화였다. 착잡해진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먼저 이 영화를 만든 이길보라 감독의 얘기부터 꺼내보고 싶다. 이길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건(일면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좀 오래 전이다. 책 영화 모임에서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를 보면서부터다.

당시 모임 멤버들이 모두 아이 키우는 엄마였던지라, 교육은 피하기 힘든 화두였고, 그 갈래로 대안적 교육을 다루다 누군가의 제안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로드스쿨러>를 만든 이가 바로 <기억의 전쟁>을 만든 이길보라 감독이었다. 당시는 아주 앳된 모습의 이길보라를 이렇게 알게 되었다.
 
그가 '대체 공부는 왜 하는 건가' 고민과 회의를 오가다, 길에서 인생을 배우겠다고 잘 다니던 학교를 때려치운 건 고 1 때였다. 그리고 정말 길을 나섰다. 어렵게 구한 돈을 가지고 그것도 홀로, 홀연히 떠났다. 그 나이의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에, 또 내 딸이 그런다면 기함할 일이었기에, 나는 그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였다. 그를 좋아하게 된 건.
 
그렇게 맹랑하던 그가 이어 다른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를 만들고, 대담한 생각을 일간지에 게재하는 것을 보고 반갑고 기뻤다.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고도 맹랑함을 잃지 않은 그가 좋았다. 이제는 그의 맹랑함을 도전심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농인인 부모와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농인의 자식을 일컫는 말)인 자신과 동생의 삶을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소리>에 담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농(聾)에 대해서도, 수어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가 코다라는 사실도 몰랐다. 이 영화는 내가 농인을 한참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지난해 코다 네 여성이 써낸 <우리는 코다입니다>는 그 오해를 보다 선명하게 깨우치게 해주었다. 이길보라도 이 책의 한 꼭지를 썼다. 그가 쓴 꼭지인 <침묵의 세계를 읽어내는>을 읽고서야 나는, 영화에서 미처 다 알아채지 못한 그의 아픔도 조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제 서른을 바라보는 변곡점에서 그는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는데, 바로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기억의 전쟁> 때문이었다. 그가 적지 않은 인내와 용기를 내서 이 영화를 만들었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베트남인의 기억 속 한국 군인

한국인에게 베트남전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묻는다면, 여러 층위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연배가 좀 있는 분들이라면, 박영한의 소설 <머나먼 쏭바강>이나 안정효의 소설 <하얀 전쟁> 정도가 떠오르지 않을까.

위 책들이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경도된 애국적 차원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남성 군인의 렌즈로 베트남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 아래 진행된 참전의 당위에 대해 회의적 질문이 제시되기는 했다. 그렇다고 베트남인의 입장이 전면 조명된 것은 아니어서, 베트남인이 자국의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는 논외일 수밖에 없었다.
 
이 지점이 <기억의 전쟁>이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 연유일 것이다. 한국인의 기억이 아니라 베트남인의 기억을 전면적으로 끌어들여 베트남인이 목격한 한국 군인의 베트남전쟁 수행을 증언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베트남전 파병 당시 어린아이였던 나도 위에 언급한 소설 정도가 베트남전에 대한 소회였다. 그러다 2000년쯤 베트남전 양민 학살을 다룬 한겨레 보도를 접하고 나서야 한국이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를 알게 되었다.
 
<한겨레 21>은 호치민국가대학 역사학부에서 수학하던 통신원 구수정씨의 입을 빌어 퐁니 퐁넛 마을과 하미 마을에 수 백 명의 민간인 학살 피해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를 알지 못했던 독자들에게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누구를 구하러 간 전쟁이었던 건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많은 살상을 해야만 했던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한국군과 정부가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길 감독의 영화 역시 이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서 있다. 진실은 무엇일까?
 
<기억의 전쟁>은 세 명의 베트남인이 증언하는 학살 현장을 맞대며 이어진다. 이들은 한국군에 의해 가족 모두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응우옌 티 탄은 내장이 밖으로 나올 지경의 총상을 입고 겨우 살아남았다. 왼쪽 배에 위에서 아래로 길게 그어진 흉터가 당시의 참혹한 피해를 말해 준다. 다른 증언자 응우옌 럽은 눈을 잃었고, 응우옌 껌은 말을 잃었다.
 
가족을 잃은 사람은 이들만이 아님을 하미 마을의 위령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이 전하고 있다. 증오비라 불리는 위령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을 고통 없이 바라보기는 어렵다. 세월호 분향소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들과 얼굴을 볼 때의 참담함이 훅 끼쳐왔다. 1967년이나 1968년이라고 새겨진 피해자들의 비명에 눈길이 머물렀다. 당시 아기였을 그들이, 나와 같은 67년생의 그들이 가슴을 저민다.
 
증언자 응우옌 껌은 당시의 상황을 매우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농인인 그는 말하지 못하는 대신 모든 기억을 노트에 그려가며 전달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상세했다. 그는 전쟁의 참화 속에 목격한 세 나라의 국기, 성조기, 태극기, 베트남기를 그려 보이며 현장의 상황을 설명했는데, 그가 태극기의 태극과 사괘를 그려 넣을 때,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실낱같은 미혹조차 거두는 그림이었다. 그는 줄곧 수어로 말했다.
"내가 봤어."
 
 
그는 한국군의 학살 현장뿐 아니라 한국군이 저지른 또 다른 가해를 얘기했다. 당시 한국군이 지폐 다발을 들고 다니며 그 돈으로 무엇을 샀는지를.

"다낭에서 여자를 샀어. 어린 베트남 여자를."
 

이들은 미성년의 어린 여자를 돈으로 사들여 일회적으로 즐기기도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그들이 떠나며 버려진 여자들은 아이를 혼자 낳아 키웠다. 이른바 '라이따이한'의 실체인 것이다.

영화 <김복동>의 한 장면에는, 베트남 전시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해 나비기금을 전달하려 베트남을 방문한 김복동 할머니의 모습이 나온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라는 동질감이 노구를 이끌고 먼 길을 떠나게 했을 것이다. 이들의 연대는 참으로 눈물겨운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착잡한 마음 또한 감출 수 없었다. 일본에게 어떤 공식 사과도 받지 못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것도 이제 세상 떠날 날을 목전에 둔 노쇠한 몸을 이끌고서라도 기어이, 마찬가지로 가해 당사국인 한국으로부터 피해에 대한 어떤 조치도 받고 있지 못하는 베트남 피해 여성들을 찾아 위로해야 하는 이 일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인 정치는 대체 무슨 효용이 있는 것인가, 밭은 한숨이 토해졌다.

201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운동가는 베트남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20년 넘게 싸워오고 있지만 한국 군인들에게 우리와 같은 피해를 당한 베트남 여성들께 한국 국민으로서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이 전언은 필시 베트남 피해 여성들의 깊은 상흔을 감싼 연대의 '붕대 감기'였으리라. 하지만 가해에 책임이 있는 당사국 정부가 모른 채 하는 현실은 이들의 고통을 더욱 소외시킬 것이다.
 
영화는 베트남 학살 현장의 생존자의 증언 틈틈이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모습을 혼란스럽게 오간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월남전 참전의 용사들을 국가는 왜 예우하지 않는가 토로하는 월남전 전몰장병 합동 위령제 장면.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조국의 교전 수칙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전쟁을 수행했다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격앙된 모습. 절대 민간인을 죽인 적이 없다는 군복 입은 노병의 항변.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와 민간인을 죽인 일이 없다는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극적인 대비는, 누구의 기억이 진실인가라는 기억 투쟁을 제기한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었지만 베트남전에 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둔 이길 감독의 위치성 또한 이 전쟁 '기억'의 진실 찾기에 길항적으로 관여하고 있을 터다.
 
사과를 원했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영화는 혼돈을 피하지 않으면서 2018년 4월에 있었던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 법정>이 열리는 장면을 비춘다. 이곳에 증언자로 참석한 응우옌 티 탄은 긴장감이 역력한 채 증언대에 섰다. 그리고 말했다. 이곳에 베트남 민간인을 죽인 참전 군인이 있다면 사과해 달라고. 장내가 술렁였다. 참전 군인임을 감추지 않는 군복 입은 노인들이 적지 않았지만, 나서는 이는 없었다.
 
응우옌 티 탄이 시민 법정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모습은 2000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격적으로 다루었던 도쿄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겹치게 한다. 일본 우익의 거친 반발에도 불구하고 치러진 이 법정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천황을 비롯한 일본군 책임자들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물론 이 판결은 법적 구속력은 없다. 그렇지만 온 세계의 여성 인권에 기하는 상식과 지성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선포한 이 시민 법정에서, 피해자들이며 생존자들인 '여성'들의 '아이 캔 스피크'는 주류의 전쟁론에 대항 담론을 제시하며 기억 투쟁의 새 장을 열었다.
 
응우옌 티 탄이 가족을 모두 죽인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법정에 홀로 서서 "내가 증거"라며 울부짖는 모습은 영화 <허스토리>의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절규를 틈입시킨다. 전쟁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법정에서 할머니들도 자신이 곧 증거임을 외치지 않았던가. 응우옌 티 탄의 전쟁범죄 인정 요구 앞에,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라는 한국의 끈질긴 요구는 어쩔 수 없이 무력해진다. 과연 일본과 한국은 어떻게 다를 수 있을까.
 
한국의 시민법정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해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 한국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응우옌 티 탄은 이에 머물지 않고 좀 더 나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대한민국을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그의 소송에 어떻게 응해야 하는가. 한국이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 등 전쟁범죄에 대해 지속적인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우리가 선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우리는 역사 앞에 진정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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