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17> 한 장면

영화 <1917>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형식적으로 단 하나의 쇼트를 가지고 있는 영화 < 1917 >은 말하자면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단일 연극 무대 위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정된 시간 동안 끊김 없이, 두 시간짜리 시나리오를 소화해낸 것이다. 그것도 고정된 무대가 아닌 온갖 지형지물과 폭발, 군중 신까지 포함한 채 말이다.

그걸 구현하기 위해 얼마나 치밀한 계산과 계획이 따랐을지는 짐작조차하기 어렵다. 트럭 탑승 장면이나 주인공이 주변을 둘러보는 360도 숏과 같이 영리하게 컷을 나누어 '원 컨티뉴어스 숏'을 구현했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자연광의 연속성 아래서 매우 한정된 시간 안에 정확하게 촬영을 끝내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영화 제작자들은 경기를 일으킬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짜 이 영화를 빛내주는 건 기술의 영역이 아니라, 그런 기술을 사용한 '이유'에 있다.
 
 영화 <1917> 한 장면

영화 <1917>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일반적인 영화는 운동하는 이미지를 마구 분할하고 조립해 쇼트와 신을 만들어낸다. 퍼즐 조각을 맞춰 하나의 거대한 그림을 완성하듯 영화의 몽타주적 성질 또한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하기에 편리하다. 그러나 그런 영화적 속성은 분명 개별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영화가 하나의 의미있는 이야기를 위해 삶의 세부적인 요소를 소모하면 영화 속에는 보다 대단한 이야기들, 거대한 담론만 남게 된다. 국가 간의 대결, 조직과 조직의 전략적 사투, 이런 이야기들의 반복 속에서는 그 이하의 규모로 벌어지는 일들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된다. 내일 지구에 운석이 떨어진다고 한다면, 오늘 직장에서 꾸지람을 받은 일이 대수일까? 아니면 한 달, 일 년 단위로 삽시간에 지나가버리는 점프 컷 사이에 있는 모든 사건의 과정들은 정녕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대중 영화에 익숙해지면서 간과하게 되지만 이런 요소도 영화가 우리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때로는 개인의 일을 잊거나 그 반대로 일상 밖의 거시적인 것을 주목하기 위해 뭔가 대단한 일이나 환상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영화의 근본적인 임무 중 하나는 우리의 현실을 복제하고 삶을 자각하는 데 있다.

영화의 배경인 제 1차 세계 대전은 신과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탈피하고 자유를 획득한 인간이 다시 이데올로기에 종속되어 몰개성의 전체주의로 회귀하는 불운한 첫 시작이었다. 큰 그림만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강권한 결과 우리의 인생은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되고, 그 결과 정작 개인에게는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삶들은 주목할 가치조차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포위당한 독일군들은 전세가 기울어 상부의 후퇴명령만을 기다렸지만 전쟁의 중요한 변곡점이자 양 진영의 자존심이 걸린 지역(스탈린그라드는 스탈린의 이름을 따 지은 도시로 소련 자체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곳이기도 했다)에서 끝내 자살이나 다름없는 사수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군인에게 그런 사수 명령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당장 죽어 없어진 후의 그 모든 사상과 신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나에게 큰 근심이 있음은 나의 몸이 있기 때문이니 내 몸이 없으면 내게 어찌 근심이 있겠는가? 내 몸을 소중히 여기듯이 천하를 소중히 여긴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고 내 몸을 사랑하듯이 천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부탁할 수 있다."
- 노자, <도덕경> 13장 중에서.


자신의 몸이 있어야 기쁨도 슬픔도 있고 나아가 이념도 국가도 있다. 그러므로 거대한 담론으로 인간을 빨아들이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일쯤은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여기지만 실은 그 같은 일들은 개개인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 인간일 뿐인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당장 몸 앞에 펼쳐지는 일들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이라는 거대 집단의 갈등 속에서 개인의 이미지만을 집중적으로 포착한 < 1917 >의 연출은 거대한 담론에 개인의 삶을 소모시키는 현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과연 지금의 우리 세계는 '위대한 국가', '위대한 단체'를 위해 개인에게 희생을 종용하는 일이 없는가? 집단의 과욕과 탐욕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일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의무를 다하는 것과는 별개로, 사회적으로 용인된 개인의 제약을 넘어서는 일들은 분명히 많다.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위계에 의한 강압', '갑질' 같은 일들도 모두 그러한 예다.
 
 영화 <1917> 한 장면

영화 <1917> 한 장면 ⓒ CJ엔터테인먼트

 
< 1917 >은 전쟁 속의 한 개인을 주목하는 차원을 넘어 우리가 은연 중에 '대단한 것'이나 '특별한 것'만을 추구하게끔 하는 세상의 표현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집단이 유지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의 우월성과 존엄성을 내세워 우선 순위를 부여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바라본다면 심심할 정도로 평범한 일상이 삶의 기록에서는 꽤나 가치있는 것일 수 있다. 

극중 연대의 공격작전은 큰 전쟁에서 본다면 무수히 발생하는 한 작전에 불과하지만 블레이크(딘 찰스 채프먼)에게는 형의 죽음이 걸린 문제, 나아가 인생의 행복과 직결되는 가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다. 같은 이치로 스코필드(조지 맥케이)가 목숨을 걸고 전장을 누비는 이유도 상부의 명령을 넘어 소중한 벗의 소망과 의지를 전달하려는 데 있다.

사실 스코필드와 블레이크가 움직이는 이유는 너무도 뻔하고 진부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게 바로 우리의 인생이다. 그런 일상적인 이유가 별 것 아닌 것 같아보여도 우리 스스로에겐 중요한 일이며, 대단하지 않다는 이유로 결코 폄훼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과 우리의 인생 모두는 작은 순간 하나까지 가치있게 되는 것이며, < 1917 >은 대단한 것만이 대우받는 집단의 요구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별 것 아닌 사소함이 무가치하지 않음을 증명해준다.

'국가'와 같은 한 편의 영화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5천만 분의 1도 되지 않는 지극히 짧은 한 프레임에 불과하겠지만, 그 프레임 하나를 얻는데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이 걸린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원 컨티뉴어스 숏'으로 상영되고 있는 우리 자신일 따름이다. 거대한 장편 서사시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책망할 이유는 없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일상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쇼트와 신들이다. 그러니 때로 세계가 당신이 무가치하다며 책망할지라도 분명 우리 모두는 가치있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 사실 하나 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해당 기사는 황경민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게재되었습니다.
1917 아카데미 기생충 조지 맥케이 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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