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열린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발표회

1984년 열린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발표회 ⓒ 낭희섭 제공


1980년대 초반에 시작된 한국영화운동이 추구했던 방향 중 하나는 영화법 개정이었다. 검열로 인해 창작의 자유가 제한된 시기였고, 영화사들도 허가제로 제한된 현실에서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8mm와 16mm 영화였으나 이마저도 제약이 만만치 않았다.
 
민중 영화를 지향했던 서울영화집단의 송능한은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성 영화가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줄기로 보고 나면 그뿐인 소비형 상업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고, 홍기선은 "누구나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현행 영화법이 개정되어야 한다"며 "영화 제작을 독점하고 있는 제작자나 작가의식이 결여된 일부 감독들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1970년대 이후 영화계의 침체의 근본 원인으로 영화법을 지목했다.
 
영화를 통해 사회변혁을 추구했던 것이 영화운동의 가진 기본 성격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대중과의 만남도 수월할 수 있는 환경이 중요했다. 허가된 영화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고 그마저도 영화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시나리오부터 검열이 이뤄지는 환경은 1980년대 영화운동의 가장 중요한 개혁 목표기도 했다.
 
1980년대 초반의 영화운동 역량이 결집돼 '작은영화제'로 불렸던 1984년 7월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도 영화법 개정에 대한 요구를 표출한 행사였다. 다만 1980년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 철권 통치가 진행되는 시대적 환경상 직접적이 아닌 우회적으로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해방 후 저질화 된 것은 국회와 한국영화
 
'작은영화를 자키고 싶습니다' 발표회 자료집에 실린 취지문에는 당시 한국영화를 보는 청년영화인들의 비판적인 관점이 드러나 있다. '단편영화동인' 이름으로 실린, '단편영화발표회에 붙여'라는 제목을 단 글의 첫 문장은 다소 도발적인 문제 제기로 시작하고 있다.
 
"해방 후 저질화된 것은 국회와 국산 영화뿐이었다. 이 발언 속에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지점은 어느 곳인지 보셨습니까?"
 
이들은 "우리 영화는 정부에 의해 사망 진단을 받았습니다. 영화는 객관적으로 숨쉬지 않고 있습니다"라며 "대중예술이라는 포장 아래 죽어가는 영화의 부풀림은 이제 대중에게조차 외면 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질타했다.
 
또한 "관객 대신 구경꾼들이 자리를 메꾸고 신문 지상에는 영화를 알지 못하는 이들이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책임없는 글을 발표하고 잡지에는 영화배우의 큼직한 사진과 스캔들도 이제는 예술란에서 쫓겨난 연예란으로 빛 좋은 개살구 꼴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영화가 사회에서 제대로의 기능을 하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이상"이라며, 사회에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시대는 아마도 영화인에게 가장 비참한 시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영화가 정상적인 기능을 통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은 영화관 외에는 있을 수 없다"며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열려진 대화를 하고자 하는 것이고, 영화의 가능성을 16mm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시작하고자 한다"고 행사의 의미를 강조했다.
 
취지문은 "더 이상의 변명이 있을 수 있는 여백은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영화를 하는 그 전부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패를 해도 멈추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로 마무리된다. 기존 한국영화 대한 불신과 함께 8mm/16mm 작은영화를 한국영화 회복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작은 영화제를 보도한 한국일보 1984년 7월 5일자 기사에서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은 "영화법의 제약, 흥행사들의 장삿속에 좌우되고 있는 한국영화는 눈물을 양산해 내내 관객의 외면을 받고 있다"고 지적하고 "영화 예술 발전의 밑거름으로써 소형영화가 활성화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우리는 관객에게 공감을 얻고 또 꼭 보여주어야 할 우리 모두의 영화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관객과 소형 영화가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나가는 것이 1차 목표"라고 덧붙였다.
 
 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발표회에 참여한 사람들

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발표회에 참여한 사람들 ⓒ 독립영화협의회

 
당시 김의석은 작은영화제의 대표 역할을 맡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집행위원장 격이다. 김의석은 "33인이 함께 준비했는데, 다들 사양해서 결국 내가 맡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등과 함께 문화공보부와 공연윤리위원회(공륜)으로 가서 상영 영화에 대한 검열과 포스터 심의를 받았다.
 
그는 "극영화가 아니다보니 단편영화에 대한 검열 규정이 없었다"며 "당시 내가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보니 젊은 대학생들이 뭔가를 해보고 싶어하는 것으로 판단한 탓인지 따지려고 들다가 잘 넘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포스터 심의에 대해서도 "박불똥 화백의 그림을 전시회에서 보고 이거다 싶어서 선택한 그림이었다"며 "공륜에 가서 이미 전시된 그림이고 교과서에 나온 사진이라고 하니 더 이상 언급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대중 및 민중의 영화를 위해 숨통을 열어라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발표회 자료집에 영화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도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가로막고 있던 다시 영화법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정재형(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이 쓴 글 '관객 우위의 영화법 개정의 의의'는, 진행되고 있던 영화법 개정 논의의 방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정재형은 이 글에서 "현 영화법 개정의 가장 큰 실책은 영화제작의 개방 및 자유화 항목에 있다. 상당한 자유가 보장된 듯 싶으나 큰 차이점이 없다"며 "독립 프로덕션의 제작 자유화와 개방화가 가능하려면 검열 및 표현의 자유가 수정돼야 하는데, 대폭완화 내지는 대폭 수정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16mm 필름의 제작 및 수입 자유, 검열의 완화를 강조하며 제작 자유화 역시 검열 및 표현의 자유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학생으로서 학생 영화를 진흥해 달라는 것이 아닌 대중 및 민중의 영화를 위해 숨통을 열어 달라는 것"이라고 개인적인 소망을 밝혔다.
 
이어 "한국영화의 개척자 나운규가 만일 지금 있었다면 <아리랑> 제작을 위해서 제일선에서 이런 내용을 주장했을 것이 분명하다며 우린 지금 <아리랑>만큼의 리얼리즘조차도 실현 못하는 법을 지니고 있다"고 한탄했다.
 
198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방향은 민중영화를 추구하는 서울영화집단과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던 문화원 세대 및 영화마당우리 등으로 나눠졌지만 창작의 자유와 검열 등 시대적 제약에 대한 반감이 만만치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는 "당시 영화법 개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는데, 전두환 군사독재가 무섭다 보니 다들 앞에 나서기를 부담스러워 했고, 그래서 영화제 형식을 빌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예대 조교였던 권영락(제작자, 씨네락픽쳐스 대표)는 "당시 제작 허가제로 인해 특정 제작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다 보니 제작 자율화에 대한 요구가 있었고, 도제식 시스템 아래서 연출을 하려면 밑바닥부터 10년을 기다려야 했다"며 "영화법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의석은 "영화법에 대한 문제제기로 작은영화제를 열었다는 것은 솔직히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며 "기존 한국영화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8mm/16mm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를 대중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없어 개최했던 것이고, 이런 행사가 처음이다 보니 반응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2011년 단편영화 촬영 현장에서 안성기 배우와 함께 한 이세민 감독

2011년 단편영화 촬영 현장에서 안성기 배우와 함께 한 이세민 감독 ⓒ 이세민 제공

 
1975년 '영상시대'의 연출 지망생으로 영화계 들어와 문화원에서 영화공부를 했고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 당시 충무로 현역 감독으로 참여한 이세민은 당시 영화운동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영화를 공부하던 청년들은 군사독재 5공화국의 정치,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 의식과 함께 한국영화가 안고 있는 불합리한 도제 제도와 검열 등에 관한 문제 의식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 다만 그 방향성에서 서울영화집단이 민중영화를 강조한 것이고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다들 대동소이했다."
 
상대적으로 서울영화집단이 강성이었고, 이외 다른 영화연구모임 등은 다소 온건한 성향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화원 세대로 '영상시대' 참여
 
여기서 이세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 후반의 영화운동에서 눈에 띄는 역할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2학번이었던 이세민은 고교 재학 중 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 < Z >에 매료되어 정치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고, 1973년부터 프랑스문화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1975년 중학교 동기였던 배용균(<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 감독)의 권유에 따라 당시 하길종, 이장호, 김호선, 홍파, 이원세 감독과 변인식 평론가 등이 중심이 돼 만들어진 '영상시대'가 연출부와 연기 지망생을 공모할 때 견습생으로 선발된 것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였다. 
 
이세민에 따르면 '영상시대'의 시험은 한옥희(영화평론가, 당시 여성실험영화 그룹 '카이두' 리더)의 실험영화 <구멍>을 보고 감상문을 써내는 것과 '영상시대'의 사무실이 있던 남산 드라마센터 옆 한양녹음실 옥상에 준비된 소품들을 자의로 배치하여 찍은 스틸 사진에 대한 평가 등이었다.
 
당시 같이 선발된 7명 중에는 1970년대 서강대 영상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이황림(감독)도 있었다. 전위적 실험영화를 추구했던 '카이두'의 리더 한옥희(영화평론가)는 1971년 이황림의 '서강영상연구회' 발표회를 통해 영화를 시작했는데, 몇 년 지나 한옥희의 영화가 이황림이 지원했던 '영상시대'의 견습생 선발 시험문제로 활용됐다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1975년 '영상시대' 회원들. 왼쪽부터 이장호 감독, 홍의봉 감독, 김호선 감독, 하길종 감독, 변인식 평론가

1975년 '영상시대' 회원들. 왼쪽부터 이장호 감독, 홍의봉 감독, 김호선 감독, 하길종 감독, 변인식 평론가 ⓒ 김호선 감독 제공

 
이세민은 '영상시대'에 대해 "정신은 하길종 감독이었고 명목 상의 리더는 가장 연장자였던 변인식 평론가였다"며 "창작자로서의 치열함이 느껴지는 사람은 김호선 감독이었고, 격의 없고 자신만만한 패기는 이장호 감독이 으뜸이었다"고 회상했다.
 
또 "국내파들이 세계영화 흐름을 인식하기는 무리가 있었고, 공부할 책도 없다 보니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에서 세계 영화를 실제로 보고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하길종 감독의 역할이 컸다"면서 "16mm 단편영화 제작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제일 먼저 주창했던 영화인도 하길종 감독이었다고 말했다.

아울러 "하길종 감독이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 쓰는 영화평론은 영화를 지향하던 청년들의 피를 끓게 했으며 우리 세대는 모두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일제의 유산인 도제식 체계 아래 스크립터부터 시작해서 퍼스트, 조감독까지 연출부 생활 10년 정도를 해야 감독 입봉(데뷔)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영상시대'는 견습 연출부 2편을 하면 퍼스트 조감독으로 채용하겠다는 당시로는 파격적인 약속을 하고 연출부를 뽑았다. 하지만 이후 현실의 벽에 부딪쳐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그 후 이장호 감독과 변인식 평론가가 잡지 <영상시대>를 2회 발간하는 데 그치게 된다.
 
한국영화운동이 본격 태동하기 전 기초 역할을 했던 '영상시대'의 영향을 받았던 이세민은 이후 1976년 군에 입대해 1979년 제대 후 김창화(영상시대 연출부, 교수), 신승수(감독), 장길수(감독), 등과 함께 '청년영상'을 만들어 16mm 영화를 2편 제작했다.
 
여기서 만든 작품이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에 출품됐던 장길수 연출의 <강의 남쪽>이었다. 이 작품은 프랑스문화원에서 주최하던 단편영화 발표회인 '토요단편'에서 1982년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됐다.
 
<애마부인>의 실제 시나리오 작가
 
그의 경력에서 색다른 부분은 1983년 대표적 흥행영화였던 <애마부인>의 시나리오를 쓰고 조감독을 했다는 점이다. 전두환 정권의 우민화 정책의 대표적인 3S(스포츠, 스크린, 섹스)에 발을 걸쳤다는 것은 특이하다. 1980년 이후 '영상시대' 견습생 동기였던 이황림이 기획실장으로 있던 현진영화사 기획실에 들어가서 일하다가, 정인엽 감독의 요청에 따라 충무로 현장으로 나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애마부인>의 작가는 공식적으로는 다른 2명의 다른 작가로 되어 있다. '영상시대' 동인이었던 김호선 감독은 "이세민이 <애마부인> 시나리오에 참여한 것은 맞는 이야기"라며 "시나리오를 공동으로 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세민은 "시나리오는 나 혼자 썼고, 당시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회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작사에서 작가로 이름을 올리기 어렵다고 해서 실제적 기획자인 다른 시나리오 작가 이름으로 나갔고, 조연출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며 "그런 일들이 종종 있었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그는 <애마부인>에 대해 "3S 영화로 간주되곤 하나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 이장호 감독의 <어우동>, 김의석 감독의 <그 여자 그 남자>와 함께 한국인의 성 의식을 그린 영화로서 주목해야 할 영화이며 웰메이드 영화라는 점을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세민은 그 이전의 충무로 세대와 달리 문화원 세대 출신으로, 새로운 영화운동을 실행하고, 충무로 현장을 경험한 이들 중 가장 먼저 1983년 <장미와 도박사>로 감독 데뷔를 했으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1984년 대학로에 있던 카페 8½ 시사실 안에서 모인 영화청년들. 왼쪽이 박종원 감독, 한 사람 건너 김의석 감독

1984년 대학로에 있던 카페 8½ 시사실 안에서 모인 영화청년들. 왼쪽이 박종원 감독, 한 사람 건너 김의석 감독 ⓒ 이세민 제공

 
그러나 이후의 활동이 영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84년 2월, 그는 사업을 하는 대학 후배와 동업으로 대학로에 50평 정도 되는 '8½'이라는 카페를 차린다. 카페 내에 4평 정도의 사무실과 암실이 있었고, 카페 내 시사실에서 8mm, 16mm 영화상영과 세미나 등이 진행됐다. 영화를 공부하던 청년들이 모이는 아지트 역할을 하면서, 매주 1편 하루 3회씩 한국 단편영화와 프랑스 단편영화를 상영했다.
 
한국 단편으로는 이정국(감독, 교수), 최사규(전 교수), 서명수(감독), 홍기선(감독), 황규덕(감독, 교수), 장윤현(감독) 등의 작품들이 상영됐다. 단편영화를 만들었음에도 일반 대중에게 발표할 공간이 없었던 당시에 상시적으로 상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김의석이 주도하여 성사된 '작은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 발표회'의 작품 심사도 이 카페에서 30명 가까운 주요 관계자들이 모여 밤을 새서 진행되었고, 서울대 얄라셩과 이화여대 '누예', 고려대 '돌빛', 외국어대 '울림' 등의 대학 영화 서클들을 스폰서로 지원하기도 했다.
 
열린영화
 
전양준 등이 중심이 된 '열린영화모임'이 발간했던 계간지 <열린영화>도 8½ 카페의 수익으로 제작됐다. 열린영화모임은 1984년 작은영화제 이후 형성된 연대감을 지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졌고,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생들과 정성일, 전양준, 강한섭, 안동규 등 동서영화연구회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다. '영화의 실천과 집단성을 강화하면서 영화계의 이론 부족을 통감하고 현실의 입장에서 결코 공허하지 않은 이론과 무장'을 목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1985년 열린영화모임에서 발간했던 계간지 <열린영화>

1985년 열린영화모임에서 발간했던 계간지 <열린영화> ⓒ 정성헌 제공.

 
<열린영화>는 이세민과 카페를 동업했던 후배가 공동 발행인이었고,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초대 편집장이었다. 전양준이 영국으로 유학을 간 이후에는 정성일(평론가, 감독), 안동규(제작자)가 공동 편집장으로 뒤를 이었다,
 
필자로 참여하거나 뜻을 같이했던 이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 이용배(계원예술대학교 교수), 장주식(전 기획자), 황규덕, 유지나(교수), 김소영(교수)와 서울영화집단의 홍기선(감독), 김인수(전 시네마서비스 대표), 경희대 출신 이효인(평론가, 교수), 동국대 출신 최사규(전 교수), 서울예대 출신 양윤모(전 평론가협회장), 권영락(제작자, 제협 이사), 서명수 (감독) 등이었다. 이세민은 "연세대 휴학 중이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한양대 재학 중이던 구성주(감독, 작고)가 막내뻘이었다"고 밝혔다.
 
이세민은 당시를 회고하며 "1984년과 1985년은 한국 영화사상 특이한 해로 기억된다. 새로운 영화를 꿈꾸던 베이비 붐 세대들이 집결하기 시작했고,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창설되고, 대학 영화 써클들과 영화 모임들이 조직됐다"고 말했다.

이어 "<열린영화>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대정신을 자각한 깨어있는 영화 청년들이 참여하면서, 원고료도 제대로 안 받으며 글을 쓰고, 사무실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밤을 지새던 순수한 열정의 소산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간지 <열린영화>는 4호 발간을 끝으로 멈추게 된다. 월 1만 원을 내고 구독을 신청한 300명 정도의 회원들에게 발송됐던 인기있는 계간지가 멈추게 된 이유를 이세민은 이렇게 설명했다.
 
"<열린영화>가 창간하고 3호까지는 전양준이 편집 책임을 맡았다. 전양준은 책이 나가기 전에 이런 내용의 글이 나간다고 알려줬다. 그렇다고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4호부터는 안동규(제작자, 두타연 대표)와 정성일(영화평론가)이 편집 책임을 담당했는데, 영화법 개정에 대한 글을 실으면서 내게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다.
 
그런데, 300명의 회원에게 보내지다 보니 정부 쪽 인사들의 손에도 들어가게 된 것 같다. 영화법 개정을 표제로 한 4호가 발간된 지 며칠 후 공연윤리위원회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열린영화>를 봤는데 등록이 안 돼 있는 잡지니 조심해야 한다고, 불온서적으로 찍히면 관계자들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에는 문화공보부 영화과에서 전화가 와서 종로경찰서에 불온서적으로 수사를 의뢰하겠다는 거다. 주위분들의 도움으로 급한 불은 껐으나 계속 발행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접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래서 안동규와 정성일에게는 화를 냈고, 더 이상 발간 비용을 지원하지 않게 되면서 4호로 끝나게 됐다. 회원들에게는 잔여 회비 150만 원 정도를 모두 되돌려줬다."


군사독재 시절이었던 당시의 영화법 개정에 대한 문제제기가 에둘러 들어온 당국의 압박에 결국 영화계간지의 폐간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카페 8½은 1988년까지 운영된다.
 
영화언어
 
1980년대 영화운동은 1984년 작은영화제를 기점으로 비평 중심의 이론과 제작 중심의 실천으로 심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비평 쪽에서 해외 영화에 대해 공부하는 학구파의 대표는 전양준, 강한섭 등 동서영화연구회 출신들이었고, 촬영과 제작을 추구한 쪽은 서울영화집단과 영화마당우리 등이었다.
 
이세민은 "비평에서는 전양준의 역할이 매우 컸고, 서울영화집단은 박광수가 중심인물이었으며, 영화마당우리는 김기종이 모임을 직접 만들고 운영하는 데 돈도 많이 쓰고 적극적인 역할을 폈다"고 말했다.
 
 1980년 전양준, 강한섭, 홍기선, 정성일 등이 만든 프레임 1/24

1980년 전양준, 강한섭, 홍기선, 정성일 등이 만든 프레임 1/24 ⓒ 전양준 제공

 
이론과 비평에 중심을 뒀던 이들은 이전부터 잡지나 책을 지속적으로 만든다. 1980년 전양준, 강한섭, 홍기선, 정성일 등에 의해 만들어진 <프레임 1/24>도 대표적이다. 전양준은 <열린영화>에 쓴 글 '작은 영화는 지금'에서 "<프레임 1/24>는 그 유치한 악마 사냥식 논리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에 대해 집중된 관심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또한 '서울영화집단이 만든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는 출판시 진통을 겪었지만 영화청년들에 이뤄진 최고의 성과'라고 호평했다. 다만 '제3세계 영화의 소개와 미국영화의 기능과 구조에 대한 비판은 유난히 돋보이나 번역에 의존했던 것이 흠'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걸어 다니는 영화사전으로도 불렸던 전양준은 1980년 <프레임 1/24>에 이어, 1984년 <열린영화>,  영국 유학을 마치고 온 후인 1989년 <영화언어>의 발행과 편집을 맡아 비평에서의 보폭을 꾸준히 넓혀갔다. 전양준이 발행과 편집을 맡은 <영화언어>는 부산의 김지석(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까지 합류하며 '1995년까지 한국 영화평론의 한 축을 담당했다.
 
김지석은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당시 <영화언어> 출간 비용의 대부분은 경성대에 재직 중이었던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충당했다며 대학교수라는 고정직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국영화운동에서 비평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이들은 <영화언어>가 기반이 돼 향후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작하게 된다.
 
 1989년 창간된 <영화언어>

1989년 창간된 <영화언어> ⓒ 김형구, 전양준 제공

 
전양준은 "영화공간1895를 만들었고 2009년 타계한 이언경이 <영화언어> 초기 편집기자로 활동했고 나중에 편집인으로 일했다"면서 "고 김지석(부산영화제 부위원장)은 1990년 가을호(5호) 부터 편집위원으로 활동을 시작해서 1991년 봄호(7호)에서 편집인으로 <영화언어> 총괄 책임자의 위치에 올랐다"고 말했다.
 
당시 편집진을 보면 김영진(영화평론가, 전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부편집인을 맡았고, 편집위원으로 이용관, 김지석을 비롯해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 김소영 교수를 비롯해, 신강호(대진대 교수), 이충직(전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성일(영화평론가) 등이 참여했다.

영화사를 연구하고 있는 문관규 교수(부산대)는 "<열린영화>에 씨네필 중심의 다양한 필자가 참여했다면, <영화언어>에는 이용관 교수를 중심으로 신진 영화학자들이  참여하여 아카데믹한 성격이 강했다"면서, "이론지를 발간했다는 점에서 해방 이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의 영화운동과 다른 차이를 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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