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TV <북간도의 십자가> 포스터.

CBSTV <북간도의 십자가> 포스터. ⓒ CBS

 
다큐멘터리는 사실에 근거한 영화 예술형식이다. 더러 사실을 극화하는 방식의 영화가 사실에 기대기도 하지만 그때에 초점은 사실이 아니라 극화에 맞춰진다. 다큐멘터리의 본령은 사실을 천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가리어진 지점이 생겼을 때 상상력과 구성력으로 돌파할 수 있는 '사실 기반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가 (사실을 덮는 방식의) 상상력의 동원을 불허하고 시종일관 팩트파인딩(fact-finding)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제작될 수 있느냐는 팩트파인딩이 가능하냐의 문제로 환원된다. 다큐멘터리의 핵심이 두 말할 필요 없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영화적 형식에 담아내는 데 성공해야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사용되는 영화적 형식은 극영화와는 다른 것으로, 다른 차원의 영화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요약하면, 다큐멘터리는 사실 자체의 매력,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느냐 하는 팩트파인딩, 그리고 영화적 완성도를 모두 필요로 한다.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감독 반태경, 2019)는 소재가 된 사실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기 때문에 나머지 두 개의 요소에 영화의 성패가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영화적 완성도는 제작진에 달린 문제이기에 역량과 노력으로 판가름된다. 팩트파인딩은, 100년 전 사건이라 일견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영화에 담아낼 정도의 사료는 충분해 예상보다 용이했다. 나라를 잃은 조선인들이 두만강 건너 만주벌판에서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이고, 후손을 키우면서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북간도의 스토리는 다큐멘터리 소재로는 (나아가 극영화 소재로도) 더 없이 매력적인 것이기에 사실 이 다큐멘터리는 실패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북간도와 윤동주
 
 북간도의 마지막 생존 인사인 문동환(99) 목사는 병환 중에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북간도의 마지막 생존 인사인 문동환(99) 목사는 병환 중에도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 CBS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는 재삼 강조하거니와 다큐멘터리이다. 100년 전 북간도를 조명하여 우리 역사의 좌절과 슬픔, 희망과 긍지를 찾아본다. 결론부터 말하면 북간도 근현대사의 키워드는 기독교와 민족주의다. 그런데 이야기를 더 전개하기 전에 혹시 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은 없을까. 북간도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근현대사에 밝지 않은 사람에게 영화 제목에 들어 있는 북간도는 언젠가 들어본 듯 하지만 불명료한 말이겠지만 '시인 윤동주의 고향'이란 단서를 붙이면 쉽게 "아!" 하는 반응이 나올 법하다. 그러곤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그의 시 '별 헤는 밤'을 떠올리게 되고 이어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를 읊조리게 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한데 윤동주의 어머니는 왜 '멀리' 북간도에 있었을까. 이런 팩트파인딩은 시가 표출하는 절절한 사모(思母)의 정에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었을까. 시(詩) 속의 "소학교(小學校) 때 책상(冊床)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 가운데 문익환이 있음까진 미처 상상하지 못할 것 같다.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異國) 소녀(少女)들의 이름"이란 구절은 윤동주 일가가 북간도에서 이국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보여준다.

그건 그렇다 치고, 앞서의 질문으로 돌아가 윤동주가 그리워한 그의 고향 북간도(北間島)는 도대체 어디쯤 위치하는가. 20세기가 시작할 무렵의 우리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어쩌면 북간도에 들어 있는 '島'자에 주목하여 함경도의 어느 외진 섬으로 추측할까. 그러나 '島'자에도 불구하고 북간도는 두만강 위쪽에 위치하는 내륙이다. 한반도와 인접한 광활한 지역으로 구한말 일제의 억압을 피해 많은 한인이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일제강점이 가시화하기 전에도 조선 사람들이 강을 건너가서 살았다고 한다. 얘기가 산만해질 우려가 있어 상술하지는 않지만 간도가 원래 조선 영토라는 견해가 있다. 남북한을 포괄한 우리의 공식적인 북쪽 영토경계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이기에, 지금 그때의 북간도 지역이 중국 영토 안의 조선족 집단 거주지이듯, 그때도 조선 영토 밖의 조선인 거주지였다.

북간도란 명칭은, 간도를 다녀온 조선인들이 도강(渡江)에 따른 처벌을 피하려는 목적에서 "강 건너 편에 다녀온 것이 아니라 강 사이의 섬, 즉 하중도(河中島)에 다녀왔다"고 둘러대면서 생겼다고 전해진다. 행위 개념이 지역 개념으로 의미변화를 일으켜 지명이 된 셈이다. 지명의 유래에서나 실제 북간도 조선인의 삶에서 주변인의 설움과 한은 불가피한 것으로 추정된다.

시인 윤동주는 북간도에서 1917년에 태어났다.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다루는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 출생이다. 시의 배경이 된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은진(恩眞)중학교 등을 거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에 진학한다.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하다가 귀향을 앞둔 시점에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년 7월) 복역 중 1945년 2월에 옥사한다. 그의 유해는 고향 북간도의 용정(龍井)에 묻혔다.

윤동주의 짧은 인생은 북간도에서 시작해 북간도에서 끝난다.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 포스터에 문익환과 함께 윤동주 사진이 들어간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가 다 아는 민족시인 윤동주가 한반도 밖에서 태어나고 이역 땅에 묻혔다는 사실은 다큐 <북간도의 십자가>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문득 독일인이 자랑하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떠오른다. 칸트가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쾨니히스베르크는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 지명이다. 오늘날엔 칼리닌그라드로 불리며, 지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영토에 속한다.

윤동주와 임마누엘 칸트의 처지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윤동주는 조국에서 밀려난 당대 수난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칸트는 당대와 무관한 후대의 역사와 관련된다. 당대의 인물이 느낀 감정이 판이했을 것이다. 사무친 그리움과 민족적 비원을 내포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北間島)에 계십니다"는 시구는 윤동주의 입을 통해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100년 전 그곳에는
 
 북간도 명동촌 주택 막새 기와에는 기독교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태극과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북간도 명동촌 주택 막새 기와에는 기독교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태극과 무궁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 CBS

 
2019년 10월 17일 개봉된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는 일종의 기념사업의 성과물이다. 2019년은 3ㆍ1운동 100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에 해당하는 해이다. <북간도의 십자가>는 대통령 직속 3ㆍ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식 후원작품으로 제작되었다.

가장 먼저 드는 궁금증은 3ㆍ1운동 100주년에 왜 <북간도의 십자가>가 제작되었을까이다. 3ㆍ1운동을 조명하는 영화에서 왜 지역으론 북간도를, 주제로는 기독교를 택했을까. 국가적 행사의 공식 후원사업으론 특정종교에 편향됐다는 오해를 받지는 않았을까.

이러한 궁금증은 몇 가지 숫자를 확인하는 것으로 곧 해소될 수 있다. 알다시피 3ㆍ1운동에는 33인의 민족대표가 있는데, 그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에 조선인 중 기독교인이 약 2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1.5% 내외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6'이란 숫자는 매우 놀랍다. 일제치하에서 3ㆍ1운동을 일으키고 민족대표로 선봉에 선다는 것이, 영광의 길을 걸음이 아니라 수난의 자리로 끌려감이라 할 때 당시 기독교인은 민족의 귀감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학자 이만열에 따르면 실제로 당시 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기독교인의 비율은 약 22%였다. 1.5% 대 22%. 조선민족에게 기독교의 존재감은 컸다.

3ㆍ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러한 연유에서 기독교('십자가')에 주목했다고 치고, 그렇다면 왜 그 많은 십자가 중에서 북간도의 십자가에 영화 제작진은 주목하였을까. 물론 윤동주를 떠올릴 수 있지만 윤동주와 3ㆍ1운동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지점은 없다. 1917년생인 윤동주는 3ㆍ1운동 시점에 고작 두 살이었다.

누군가 역사에서 3ㆍ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해외 만세 운동이 펼쳐진 곳을 찾아본다면,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란 지명을 보게 될 것이다. 국내에서 3ㆍ1운동을 준비하는 동안 북간도의 민족지사들도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고, 3ㆍ1운동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13일 용정 서전평야에서 3만여 명의 조선인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그 자리에서 북간도 일대의 민족지도자 17명이 '독립선언포고문'을 발표했는데, 17명 중 10명 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들은 독립을 '선언'하는 데 머물지 않고 독립을 '포고(布告)'하여 더욱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여기에는 북간도에서 축적된 조선인들의 국권회복 염원이 반영되었다. 3ㆍ1운동과 3ㆍ13 시위에 앞서 2월에 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선언서'(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이어서 '무오독립선언'이라고도 한다)를 발표하는데, 이 선언은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선언서에는 '북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등 북간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름을 올렸다.

윤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은 1899년에 자신의 식솔과 김하규ㆍ문병규ㆍ남도전을 포함한 네 가문의 가족 142명을 이끌고 고향 함경도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 지린(吉林)성 허룽(和龍)현으로 이주했다. 북간도이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도 1년 뒤 그곳에 자리를 잡았고, 이들은 '동방을 밝힌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명동촌'(明東村)'이라고 지었다. 여기서 '동'은 조선을 뜻한다. 다섯 가문은 혼인을 통해 자연스럽게 인척 관계로 발전했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은 윤하현의 아들 윤영석과 결혼해 윤동주를 낳았다. 김하규의 딸 김신묵과 문병규의 손자 문재린 사이에서 문익환과 문동환이 태어났다.

명동촌이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들이 단지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만주로 구명도생한 것이 아니었다. 망국의 한을 풀기 위한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하였다. 후손의 교육을 위해 과감히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민족주의로 무장하였다. 명동촌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 두 가지. 이들은 이주지에서 땅을 경작하여 수확물을 거두면 3분의1은 먹고사는 데 쓰고, 3분의1은 후손 교육에 썼으며(學田), 나머지 3분의1은 군사력을 키우는 데(軍田)에 썼다. 또 하나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으로, 주거하는 집에 얹은 기와 끝의 수막새에는 태극기와 십자가 문양이 같이 들어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조선의 국권 회복. 이것이 북간도의 정신이었다.

3ㆍ13 만세 시위는 우발적으로 터져 나온 게 아니라 이 같은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분출한 것이었고 이후 무장투쟁으로 연결은 필연적이었다. 이듬해 이어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전장 또한 북간도였으며, 북간도의 기독교인들은 독립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북간도 지역의 조선독립운동을 이처럼 기독교 세력이 주도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북간도 민족주의 기독교 세력이 십자가와 총을 함께 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다큐멘터리 영화 <북간도의 십자가>는 이러한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간다.

역사 앞에서
 
 고 문동환 목사를 다룬 다큐 <북간도의 십자가> 장면 중 일부.

고 문동환 목사를 다룬 다큐 <북간도의 십자가> 장면 중 일부. ⓒ CBS

 
제작을 맡은 CBS는 2017년 가을부터 3ㆍ1운동 100주년에 공개할 특집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지 관련 단체ㆍ학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거듭했다. 제작진은 "민족을 위해 모든 걸 바친 기독교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알려낸다면, 사회적 신뢰를 잃고 있는 한국 기독교의 위대한 전통을 되살려내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으리라는 바람에서 <북간도의 십자가>를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명동촌 등 북간도 기독교 공동체에서 지도자로 활동한 규암 김약연 목사는 당대 역사에서나 이 영화에서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는 이번 다큐멘터리의 역사적 고증과 새로운 사료 발굴에 크게 기여하였다. '(사)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가 오랜 북간도 취재ㆍ연구를 통해 입수한 다양한 유적ㆍ사료가 <북간도의 십자가>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여기에 이만열(前국사편찬위원장), 윤경로(前한성대 총장), 서굉일(한신대 명예교수), 이덕주(前감신대 교수) 등 교계와 역사학계의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이들은 자문에 그치지 않고 직접 영화에도 출현하여 역사를 증언했다.

제작진은 영화 구성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꾀했다. 두 명의 내레이터를 통해 시간과 공간을 교차시키면서 100년 전 북간도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함께 보여주는 방식을 취했다. 1921년생으로 촬영(2018년) 당시 생존해 있던 북간도 출신 마지막 인사인 문동환(2019년 3월 9일 소천)과 젊은 역사물저술가 심용환이 대화하듯 주고받으며 북간도 항일 운동의 역사를 추적했다. 문동환의 장례식 장면이 포함되어 북간도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듯했다.

영화의 내레이션은 심용환과 문익환의 아들이자 문동환의 조카인 배우 문성근이 맡았다. 문성근은 문동환의 일부 육성 장면을 제외하고는 병상의 작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대신했다. 소설가인 김어흥이 내레이션을 집필했다.

개인적으로는 소위 '버디 무비' 형식이 옥에 티였다는 생각이다. 굳이 이른 바 '아이돌' 역사물 작가를 출연시켜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어색함을 배가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판단이다. 모두에 밝혔듯, 영화의 소재 자체가 흥미진진한 만큼 북간도의 역사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유려한 방식을 취했으면 더 좋았으리라. 산만하고 불편하며 작의적인 진행 콘셉트가 다큐멘터리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래도 '북간도의 십자가'란 사건의 감동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그 정도의 옥에 티는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김약연과 문동환의 말은 이 영화의 주제를 압축한 듯하다. 김약연의 유언은 "나의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이다. 영화 말미에서 문동환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진지하게 살면 역사와 통하게 되고 예수님하고 교류하게 되는 경험을 가질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제가 영웅적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역사가 저를 그렇게 끌고 왔습니다. 우리를 만들어 주는 건 역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세계와 선교>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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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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