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현지시간) 열린 프랑스 최대 영화상 세자르 영화상의 선택에 대한 비판 여론이 뜨겁다. '프랑스의 아카데미'라고 불릴 정도로 권위와 역사를 자랑하는 세자르 영화상은 올해 45회 행사를 앞두고 다수의 아동 성범죄 전력이 있는 로만 폴란스키의 <장교와 스파이>(영문명 <나는 고발한다>)를 작품상, 감독상 등 최다 부문 수상 후보작에 올리며 논란을 증폭시켰다.

  
시위대와 맞닥뜨린 폴란스키 감독 2017년 10월 3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시네마테크 건물에 폴란드계 프랑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도착하자 시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폴란스키는 이날 자신의 회고전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폴란스키는 1977년 당시 미성년자였던 사만다 게이머를 성폭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이후 유럽으로 도망쳐 도피 생활을 해왔다. 게이머는 최근 법원에 사건 종결을 탄원한 것으로 알려졌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1977년 당시 미성년자였던 사만다 게이머를 성폭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 EPA/연합뉴스

 
폴란스키 영화가 세자르 영화상 최다 노미네이트 된 사실이 알려진 후,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폴란스키의 영화와 이번 세자르상 시상식을 보이콧하자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하지만 세자르 영화상을 주관하는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의 알랭 테르지앙 회장이 후보작을 선정할 때 윤리적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폴란스키 영화 최다 노미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폴란스키 최다 노미로 들끓은 여론은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의 근본적인 개혁을 성토하는 분위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지난 12일 200여명의 프랑스 영화인들이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들의 후보 선정과 관련한 해명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그 결과 테르지앙 회장을 비롯한 세자르상을 주관하는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의 영화진흥위원회(APC) 소속 21명의 위원진이 총 사퇴를 선언하였다.

프랑스 영화인, 여성단체들이 세자르 영화상의 폴란스키 최다 노미를 두고 격분한 것은 유독 폴란스키에 관대한 프랑스 주류 영화계의 모순 때문이다. 다수의 성범죄 이력을 가지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13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한 혐의로 기소 되었으며, 범죄인정 조건부 감형협상(플리바게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외국으로 도피했다.

이후 스위스에서도 또 다른 성폭행 혐의로 시도되었다가 공소시효 만료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폴란스키의 다수의 미성년자 성범죄 이력으로 미국 오스카상(아카데미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는 2018년 폴란스키를 영구제명하였다. 폴란스키 영화를 최다 노미시키는 프랑스 영화예술아카데미와 대비되는 결정이었다.

이렇게 다수의 미성년자 성범죄로 얼룩진 폴란스키 영화 최다 노미에 반발하는 영화인의 공개 서한 발표에, 세자르상 운영진이 총 사퇴하고, 폴란스키 또한 여론을 의식한 듯 세자르상 불참을 선언했다. 그리고 세자르상이 열린 프랑스 파리 살 플레옐 극장 앞에서는 여성 단체, 활동가들이 예고한대로 폴란스키와 폴란스키를 최다 노미시킨 세자르에 항의하는 대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또한 시상식이 열리기 몇 시간 전에는 프랑크 리스터 문화부 장관까지 나서 "폴란스키가 수상하면 (프랑스 사회에) 나쁜 메시지를 주게될 것."이라면서 이례적으로 폴란스키 수상을 반대하는 메시지를 방송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시상식 사회를 맡은 코미디언 플로랑스 포시티 또한 폴란스키 영화가 12개분 후보에 오른 것을 두고 "우리에겐 12개의 근심거리가 있죠. (폴란스키를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극장 밖의 상황이) 조용해지려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하면서 뼈있는 농담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폴란스키를 향한 프랑스 시민사회와 영화계의 강력한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세자르 영화상은 끝내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안겨주며 폴란스키를 반대하는 여론을 더 폭발시켰다. 폴란스키의 <장교와 스파이>는 감독상 외에 각색상, 의상상을 수상하며 3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지난 24일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를 통해 폴란스키와 폴란스키를 옹호하고, 백인 남성 중심적 성차별이 만연한 프랑스 주류 영화계를 비판한 배우 아델 에넬은 폴란스키가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상식을 퇴장해 버렸다. 이어 아델 에넬의 출연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 아델 에넬과 함께 공동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노에미 메를랑 등 제작진 또한 시상식을 연이어 나갔다.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신인여우상 다수 부문에 후보에 오르며 수상 결과가 주목되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올해 세자르 영화상에서 촬영상에 그쳤다. 

2019년 3월, 13세 때 크리토프 뤼지아 감독에게 당한 성추행을 폭로하며 프랑스 영화계에서 미투(#MeToo) 운동을 재점화시키는데 일조한 아델 에넬은 이번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미투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프랑스 사회를 꼬집는 동시에, 폴란스키 영화가 세자르상 최다 노미에 오른 것을 두고 "피해자 여성의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라면서 강도높은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미투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프랑스 사회의 적극적인 대응을 촉구한 아델 에넬의 인터뷰 이후, 아델 에넬과 미투를 응원하는 플래카드와 움직임이 파리 곳곳에 확산되는 추세이다.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영화인으로 프랑스 영화계의 성평등 촉구 운동에 앞장서는 셀린 시아마 감독 역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인터뷰에서 프랑스 영화계 성차별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며 화제가 된 바 있다. 

한편 폴란스키의 세자르 영화상 감독상 수상 이후, 이번 수상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의 규모와 목소리가 더 거세지는 등 폴란스키 후폭풍은 앞으로도 쉽게 진정되지 않을 전망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반대와 항의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미성년자 성범죄로 물의를 빚은 성범죄 가해자에게 감독상을 수여하는 프랑스 주류 영화계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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